3화(5,083자)
주방용품
전역하고 취직한 곳이 해적 잡는 회사였다 · 윤재하
5월 16일 오후 세 시, 스리랑카 남쪽 바다는 물빛이 진한 남색이었고 너울이 길었다. 한바다호는 엔진을 낮추고 섰다. 회색 작업선 한 척이 옆구리로 붙더니 크레인으로 길쭉한 쇠 상자 넷을 갑판에 내려놓았다. 상자마다 흰 종이가 붙어 있었는데, 종이에 한글로 「주방용품」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거 내 거냐?”
조리장 엄달수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다가왔다. 노준후 팀장이 상자와 조리장 사이에 몸을 넣었다.
“아닙니다.”
“주방용품이라며.”
“서류가 잘못 왔습니다.”
“그럼 열어 보자. 칼이면 내가 쓰고.”
“조리장님, 이거 열면 저 감방 갑니다.”
조리장은 상자를 한참 내려다보다가 혀를 찼다. 그는 돌아서면서 마르코에게 들으라는 듯 말했다. 냄비가 왔으면 좋았을 텐데, 넷 다 바닥이 탔어.
상자는 선장실 옆 무기고로 들어갔다. 무기고 문에는 자물쇠가 둘이었다. 열쇠 하나는 박영진 선장의 목에, 하나는 노 팀장의 허리띠에 걸렸다. 두 사람이 같이 돌려야 문이 열렸다. 선장은 서류에 서명하면서 노 팀장을 보지 않고 말했다.
“내 배에서 총은 손님이오. 손님은 주인이 부를 때만 나오는 거고.”
“압니다.”
강현준은 무기고 문틈으로 상자가 열리는 것을 봤다. 기름 먹인 천에 싸인 쇳덩이가 나왔다. 해병대에서 두 해 동안 만진 것과 생김새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군대에서는 그 무게를 나라가 같이 들어 줬다. 여기서는 종이 한 장이 들었다. 그 종이에 보험 회사 이름이 찍혀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여덟 시, 선장실 책상 위 노트북 화면에 윤기석 본부장의 얼굴이 떴다. 서울 본사 회의실이었다. 뒤 벽에 「생명을 싣는 배」 현수막이 작게 다시 걸려 있었다. 이쪽에는 선장과 노 팀장과 변서아가 앉았고, 선교 출입 금지가 아직 안 풀린 현준은 선장실 문 앞에 서 있었다. 선장실은 선교가 아니라서 선장도 쫓아내지 않았다.
서아가 지도 화면을 공유했다. 깜빡이는 배 그림과 맨 아래 회색 동그라미 댓글까지.
“이거 내려 주십시오. 오늘.”
노 팀장의 말에 윤기석이 웃었다. 그 웃음은 출항 날 부두에서 본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
“팀장님, 그 지도가 이 계약입니다. 백신 기부한 쪽에서 운송 과정을 국민이 실시간으로 보게 해 달라는 조건을 걸었어요. 내리면 계약금 반환입니다. 십이억.”
“해적이 이걸 봅니다.”
“해적이 회사 홈페이지를 봅니까?”
“봅니다.”
노 팀장이 한 단어로 대답했다. 서아가 덧붙였다.
“본부장님. 저 회색 동그라미, 아이피 주소가 아덴만 건너편 나라에서 찍힙니다. 시간도 지도 새로 고치는 시간이랑 맞고요. 십 분마다 들어와요.”
윤기석의 손가락이 회의실 탁자를 세 번 두드렸다. 계산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지도는 안 내립니다. 대신 위치를 스물네 시간 늦게 보여 주는 걸로 바꾸겠습니다. 홍보 쪽에는 시스템 점검이라고 하고요. 그 대신 팀장님이 하나 해 주셔야 합니다.”
화면에 문서 한 장이 떴다. 제목은 「교전 발생 시 책임 귀속 확인서」였다. 보안팀이 경고 단계를 넘어 무기를 쓰면, 그 일로 생기는 보험 문제와 소송은 해든가드가 전부 진다는 내용이었다.
“이게 무슨 상관입니까?”
선장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윤기석은 선장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선장님, 지도 늦추면 저희가 홍보 효과를 잃습니다. 그 값을 누군가는 받아 줘야죠. 보안팀이 총을 안 쏘면 이 종이는 그냥 종이고요.”
노 팀장은 확인서를 오래 읽지 않았다. 그는 책상 위 볼펜을 집어 화면 옆 출력본에 이름을 적었다. 서아가 그 손을 붙잡으려다 그만뒀다. 현준은 문 앞에서 그 서명을 봤다. 노준후 세 글자가 반듯하게 적혔다. 출항 전 그 책상 위 엎어 놓은 종이가 등록금 고지서라는 걸 현준은 이제 알았다.
“지도, 오늘 낮 열두 시부터 늦춰 주십시오.”
“물론이죠. 수고하세요, 팀장님.”
화면이 꺼졌다. 서아가 볼펜을 노 팀장 쪽으로 밀며 존댓말로 말했다.
“팀장님 진짜 미친 거 아니세요?”
“어.”
*
5월 23일 저녁, 한바다호는 아덴만에 들어섰다. 아덴만은 아라비아반도 남쪽 끝과 아프리카 동쪽 끝의 뿔처럼 튀어나온 땅 사이에 끼인 바다다. 이 바다를 빠져나가면 홍해 들머리가 나오고, 거기서 수에즈 운하로 올라가면 유럽이었다. 배들이 몰려 지나가는 그 좁은 길목에서 남쪽 해안의 쾌속정들이 배를 기다렸다.
해 지기 전에 노 팀장이 선원 열아홉을 식당에 모았다. 선장만 선교에 남았다. 팀장은 손목시계를 풀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벨 울리면 안전실까지 몇 분 걸립니까?”
“말라카에서는 사 분 걸렸지.”
기관장이 팔짱을 끼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현준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날은 저 친구 덕에 연습을 잘했어. 속옷 바람으로.”
식당이 웃음으로 한 번 들썩였다. 현준은 웃지도 못하고 서 있었다. 노 팀장은 웃지 않고 시계의 단추를 눌렀다.
“이 분 안으로 줄입니다. 지금.”
선원들이 의자를 밀치고 뛰었다. 현준은 계단 중간에 서서 사람 수를 셌다. 갑판장 레이 카스트로가 슬리퍼 한 짝을 계단에 흘렸고, 하은이 그걸 주워 들고 뛰었다. 조리장 엄달수는 맨 마지막에 내려갔는데, 양손에 큰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하나에는 생수병이, 하나에는 김치 통이 들어 있었다.
“조리장님, 그걸 왜 갖고 가십니까?”
“해적 붙으면 안전실에서 사흘도 갇혀 있는다며. 사흘을 맨밥으로 버틸래?”
안전실 문이 닫혔다. 노 팀장이 시계를 봤다. 이 분 십 초. 문 안쪽에서 레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팀장님, 김치 냄새 때문에 안에서 숨을 못 쉬겠어요. 조리장이 그 말에 뭐라고 대꾸했는데, 강철 문이 두꺼워서 욕인지 노래인지 알 수 없었다.
그날 밤부터 배는 불을 껐다. 선실 창에는 검은 판을 덧댔고, 갑판 등은 하나도 안 켰다. 뒤 갑판 난간에는 출항 전 노 팀장이 자기 돈으로 사 온 철조망이 감겨 있었다. 회사가 철조망 예산을 깎아서 반만 감겼다. 현준은 그 반쪽 철조망 뒤에서 야간 투시경으로 세상을 봤다. 세상은 녹색 하나였다. 녹색 바다, 녹색 하늘, 녹색 별.
해적은 밤이 아니라 이튿날 아침 열 시에 왔다.
“뒤쪽, 오른쪽 백사십 도. 작은 거 둘. 빨라요.”
무전기에서 서아의 목소리가 나왔다. 현준은 뒤 갑판 망루에서 고개를 돌렸다. 햇빛이 바다에 깨져 눈이 아팠다. 그 빛 사이로 하얀 물보라 두 줄이 일직선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지난번 고깃배와는 소리가 달랐다. 바깥 엔진 두 개씩을 단 작은 모터보트였는데, 해적들은 그런 보트를 쾌속정이라고 불렀다. 그 엔진 소리가 모기 날갯소리를 백 배로 키운 것처럼 바다 위로 퍼졌다.
이번에는 선장이 직접 비상벨을 눌렀다. 선원들이 계단을 뛰어 안전실로 내려갔다. 조리장은 이번에도 국자를 쥐고 내려갔다. 배가 몸을 떨며 속도를 올렸다. 선장은 키를 좌우로 크게 꺾어서 배 꼬리를 흔들었다. 큰 배가 꼬리를 흔들면 뒤에 큰 물결이 일고, 작은 보트는 그 물결을 넘다가 속도를 잃는다. 하은이 선교에서 그 각도를 소리 내어 불렀다.
“이백 미터. 사다리 보여요. 한 척에 사다리, 한 척에 사람 다섯.”
“현준, 고개 숙여.”
마르코가 현준의 뒤통수를 눌렀다. 현준의 가슴에서 아버지의 호루라기가 철판 난간에 부딪혀 짧게 쨍 소리를 냈다.
그때 손에 쥔 휴대 무전기가 지지직거렸다. 배들이 다 같이 듣는 비상 채널, 16번이었다. 느리고 정확한 영어가 흘러나왔다.
“한바다, 한바다. 의사 배. 우리가 보고 있다.”
현준은 그 목소리를 듣고, 생각보다 먼저 송화 단추를 눌렀다.
“No. Go home.”
잠깐 침묵이 있었다. 그러고 나서 그 목소리가 웃었다. 소리 없이 숨만 웃는 웃음이었다. 마르코가 현준 귀에 대고 옮겨 줬다.
“여기가 자기 집이래.”
“뭐라고요?”
“여기가 내 집이다. 그리고 자기 이름은 오마르래.”
쾌속정 하나가 앞으로 나오면서 뱃전에서 짧게 불빛이 튀었다. 한 박자 늦게 탁탁 하는 소리가 왔다. 머리 위 선교 쪽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노 팀장의 목소리가 무전기에서 나왔다.
“경고. 지금.”
그다음 일은 현준의 기억 속에서 순서가 섞였다. 붉은 신호탄이 하늘에 걸렸고, 노 팀장과 마르코가 정해진 대로 바다 쪽 허공에 경고를 보냈다. 쇠 냄새와 화약 냄새가 바람에 실려 왔다. 현준은 자기 손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지 못했다. 쾌속정 둘이 물보라를 꺾으며 옆으로 비켜 섰다. 한바다호는 계속 꼬리를 흔들며 달렸다. 거리가 사백, 육백, 일 킬로미터로 벌어졌다.
무전기에서 다시 그 목소리가 나왔다. 이번에는 마르코가 옮기기 전에 현준도 알아들을 수 있는 짧은 영어였다.
“나중에 보자. 넷.”
“넷이래.”
마르코가 낮게 따라 했다. 현준은 그 숫자를 알아들었다. 그 숫자가 어디서 왔는지도.
*
쾌속정이 수평선 밖으로 사라지고 삼십 분이 지났다. 현준은 뒤 갑판에 앉아 생수병 뚜껑을 열려고 했다. 뚜껑이 안 돌았다. 손바닥이 미끄러워서 세 번을 헛돌렸다. 노 팀장이 옆에 쭈그려 앉아 병을 받아 뚜껑을 돌려 따고 다시 건네줬다.
“팀장님은 안 떨리십니까?”
노 팀장은 대답 대신 오른손을 현준 눈앞에 펴 보였다. 그 손이 떨리고 있었다. 아주 작게, 그러나 멈추지 않고.
“스물두 해째야.”
팀장은 손을 주머니에 넣고 일어섰다. 현준은 생수를 반 병 마셨다. 물이 미지근하고 비렸다. 그래도 목구멍이 그 물을 끝까지 받아 넘겼다.
선교 앞 유리창 한 장에 거미줄 같은 금이 가 있었다. 하은이 그 금 앞에 서서 손가락으로 금을 따라 그어 보고 있었다. 제가 아까 서 있던 자리 바로 앞이에요, 하고 하은이 말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2항사 문재혁이 넓은 테이프를 가져와 금 위에 엑스 자로 두 번 붙였다. 박영진 선장은 그 유리창을 보지 않고 무전기를 들었다. 이 해역을 도는 여러 나라 해군 연합의 순찰함이 부르고 있었다. 호출 부호는 워리어 셋이었다.
“한바다, 여기는 워리어 셋. 공격 보고 받았다. 내일 아침 여섯 시, 집결점에서 다른 상선 둘과 선단을 짜라. 우리 헬기가 위를 본다.”
선장이 대답을 하는 동안 그의 휴대전화에 문자 한 통이 들어왔다. 윤기석이었다. 「교전 기록 보내 주세요. 보험사가 묻습니다. 경고 몇 발이었는지 정확히.」
선장은 그 문자를 노 팀장에게 보여 주지 않고 주머니에 넣었다. 금 간 유리창 너머로 오후 해가 기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