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314자)

차장 심사

육아휴직 S급 헌터 · 문채겸

오전 아홉 시 사십 분⁠, 혜결의 전화는 숨소리부터 들어왔다⁠. 지하철 계단을 뛰어오른 숨이었다⁠.

“⁠USB⁠.⁠”

“⁠USB⁠?⁠”

“⁠대피 가방⁠. 맨 위⁠. 열한 시에 본부장 앞에서 리허설이야⁠.⁠”

신발장 위의 배낭을 열었다⁠. 기저귀와 분유 위에 작은 USB가 얌전히 누워 있었다⁠. 집이 균열에 먹혀도 살려야 한다던 USB는 집에 그대로 있었다⁠.

“⁠분유는 편의점에도 있다며⁠.⁠”

“⁠지금 그 말 할 때야⁠?⁠”

“⁠아니⁠. 간다⁠.⁠”

7월 28일 수요일이었다⁠. 손주가 셋인 기사님이 단지 정문에 와 있었다⁠. 오늘은 여의도로 가자고 하자 기사님이 미터기를 켜며 예봄이에게 말했다⁠. “⁠오늘은 엄마 회사 출근이구나⁠.⁠” 예봄이가 경례를 했다⁠.

택시 라디오에서 국회 토론회 소식이 나왔다⁠. 「⁠헌터도 노동자인가⁠. 오늘 국회에서 헌터 처우 토론회가 열립니다⁠. 이른바 아기 띠 헌터 논란 이후⁠…⁠…⁠」 기사님이 볼륨을 올렸다가 나를 백미러로 보고 다시 내렸다⁠. 내리고 나서 한 번 더 백미러를 보았다⁠.

“⁠손님⁠, 혹시⁠…⁠…⁠”

“⁠아닙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

솔빛식품 본사 로비는 에어컨이 지나치게 셌다⁠. 대리석 바닥에 구두 소리가 날카롭게 튀었고⁠, 회전문이 돌 때마다 바깥의 매미 소리가 한 덩어리씩 밀려 들어왔다 잘렸다⁠. 안내 데스크 직원이 내 아기 띠를 보고⁠, 내 얼굴을 보고⁠, 휴대전화를 보았다⁠. 휴대전화 화면에 빈 아기 띠를 멘 내가 있었다⁠.

“⁠마케팅팀 한혜결 과장한테 이것 좀 전해 주세요⁠.⁠”

“⁠혹시⁠…⁠… 그분이세요⁠?⁠”

로비가 술렁였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직원 몇이 휴대전화를 들었다⁠. 예봄이가 카메라를 향해 경례를 했다⁠. 셔터 소리가 한꺼번에 터졌다⁠. 내 귀에는 셔터 소리 하나하나가 따로 들렸다⁠. 열한 번⁠.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남자 하나가 내렸다⁠. 마흔 후반⁠, 머리를 짧게 올려 깎았고⁠, 정장 바지 밑에 형광 끈을 단 한정판 운동화를 신었다⁠. 운동화는 걸음마다 뽀득 소리를 냈다⁠. 새 운동화였다⁠.

“⁠아이고⁠, 오셨네⁠. 한 과장 남편분⁠.⁠” 남자가 두 손을 내밀었다⁠. “⁠본부장입니다⁠. 한 과장 위에 있어요⁠. 영상 봤어요⁠, 영상⁠. 우리 애가 헌터 카드 모으는데 S급 7위 카드는 반짝이로 나와요⁠. 반짝이⁠.⁠”

“⁠그렇군요⁠.⁠”

“⁠사진 한 장만⁠. 애기도 같이⁠.⁠” 본부장이 휴대전화를 뒤집어 우리 셋을 화면에 넣었다⁠. 본부장의 손가락이 브이를 그렸다⁠. 예봄이는 경례를 했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찍힌 사진에서 셋 중 하나만 웃고 있었다⁠.

본부장이 사진을 확인하고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목소리가 반 톤 내려갔다⁠.

“⁠그런데 이참에 하나만 여쭤볼게요⁠. 남편분이 육아를 다 하시잖아요⁠.⁠”

“⁠제가 다 하지 않습니다⁠.⁠”

“⁠아유⁠, 영상 보면 다 하시던데⁠. 그래서 말인데요⁠, 한 과장이 요새 여섯 시 땡 하면 나가요⁠. 팀 저녁 회의를 한 번도 못 들어왔어요⁠. 차장 심사가 코앞인데 말이 좀 나와요⁠. 집에 S급 남편이 계시면 한 과장이 일주일에 두어 번은 늦게까지 있어도 되지 않나 싶어서⁠.⁠”

“⁠안 됩니다⁠.⁠”

본부장이 눈을 깜박였다⁠. 운동화가 한 번 뽀득거렸다⁠.

“⁠아내는 여섯 시에 나가서 여덟 시 십 분에 집에 옵니다⁠. 여덟 시 반에 저한테서 아이를 받습니다⁠. 저는 그 시각에 균열에 들어갑니다⁠. 아내가 저녁 회의에 남으면 저는 마포 균열에 못 들어갑니다⁠.⁠”

“⁠아⁠…⁠… 그럼 한 과장이 마포를 지키는 거네요⁠. 하하⁠.⁠”

“⁠네⁠. 그렇습니다⁠.⁠”

본부장의 웃음이 반쯤에서 멈췄다⁠. 농담에 맞장구가 아니라 대답이 돌아오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니⁠, 제 말은요⁠. 심사는 실적으로 봐요⁠. 실적은 저녁 회의에서 나오고요⁠. 남편분 일은 남편분 일이고⁠, 회사 일은 회사 일이니까⁠.⁠”

“⁠압니다⁠. 그래서 제 일은 여덟 시 반에 시작하고 아내 일은 여섯 시에 끝나는 겁니다⁠.⁠”

로비가 조용해졌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직원들이 휴대전화를 슬그머니 내렸다⁠. 본부장이 내 어깨를 두 번 두드렸다⁠. 정 많은 사람처럼 두드렸지만 손바닥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애기 아빠가 아주 단호하시네⁠. 한 과장 좋겠다⁠.⁠”

본부장의 운동화 소리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졌다⁠. 로비 텔레비전에서는 오사카 균열 소식이 나오고 있었다⁠. 「⁠오사카 균열 보름째⁠. 한국 S급 서열 2위⁠, 오늘 오사카 현지 투입⁠.⁠」 2위가 나갔다⁠. 국내 S급 아홉 가운데 셋이 밖에 있었다⁠.

*

혜결은 회사 지하 카페에서 USB를 받았다⁠. 받자마자 손바닥에 꼭 쥐었다⁠. 그러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로비에서 본부장 만났다며⁠. 팀 단톡방에 벌써 올라왔어⁠.⁠” 혜결이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사내 메신저 팀방이었다⁠. 「⁠속보⁠) 한 과장님 남편분 본부장님한테 안 됩니다 시전⁠」 「⁠본부장님 표정 봤어⁠?⁠」 「⁠반짝이 카드 받으셨대⁠」

“⁠내가 뭐라고 했는지도 올라왔어⁠?⁠”

“⁠안 됩니다⁠, 두 번⁠.⁠” 혜결이 커피 빨대를 깨물었다⁠. “⁠왜 회사까지 와서 내 일을 키워⁠.⁠”

“⁠키운 게 아니라 막은 거야⁠.⁠”

“⁠막은 거⁠? 당신이 나를 막아 줬어⁠?⁠”

“⁠말이 그렇다는 거지⁠.⁠”

“⁠또 말이 그렇대⁠. 당신은 균열 앞에서도 그렇게 말해⁠?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고 칼 뽑아⁠?⁠”

예봄이가 혜결의 커피잔으로 손을 뻗었다⁠. 혜결이 잔을 밀어 놓고 예봄이에게 떡뻥을 쥐여 주었다⁠. 자동으로 나오는 손이었다⁠. 싸우는 중에도 손은 엄마였다⁠.

“⁠본부장이 나한테 대놓고 말 못 하던 걸 당신한테 했어⁠. 이제 당신이 대답을 했으니까 본부장은 나한테 대답 들은 걸로 칠 거야⁠.⁠” 혜결이 USB를 내려다보았다⁠. “⁠차장 심사가 한 달 남았는데 오늘부터 나는 본부장한테 안 됩니다 두 번 한 사람이야⁠.⁠”

“⁠그럼 저녁 회의 들어가⁠. 일주일에 두 번⁠.⁠”

“⁠그럼 당신은⁠?⁠”

“⁠주완 부장한테 아홉 시 반으로 바꿔 달라고 할게⁠.⁠”

“⁠바꿔 줄 사람이야⁠?⁠”

아니었다⁠. 열 시 반을 넘기면 끝이라는 사람이 아홉 시 반으로 미뤄 줄 리 없었다⁠. 혜결도 알았다⁠. 혜결이 빨대를 뽑아 컵 뚜껑 위에 올려놓았다⁠. 생각할 때 하는 버릇이었다⁠.

“⁠저녁 회의 안 들어가⁠.⁠” 혜결이 말했다⁠. “⁠실적으로 이길 거야⁠. 발표로 이길 거야⁠. 본부장이 저녁 회의에서 나오는 실적 운운하면⁠, 낮에 나온 실적을 들이밀 거야⁠.⁠”

“⁠이길 수 있어⁠?⁠”

“⁠물어보지 마⁠. 지금 그 질문이 제일 싫어⁠.⁠” 혜결이 일어나 예봄이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내 이마에도 맞췄다⁠. 카페 직원이 보았다⁠. 혜결은 신경 쓰지 않았다⁠. “⁠열 시 반에 와⁠. 그리고 다음엔 USB만 주고 가⁠. 대답은 하지 말고⁠.⁠”

“⁠안 됩니다는⁠?⁠”

“⁠그건 잘했어⁠.⁠” 혜결이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다 돌아보았다⁠. “⁠두 번째는 좀 많았어⁠.⁠”

*

오후 세 시⁠, 서교동 보급 천막은 일주일 전과 다른 곳이 되어 있었다⁠. 생수 상자는 문 방향 입구에 허리 높이로 쌓였고⁠, 붕대와 소독약은 색 테이프를 붙인 바구니에 나뉘었다⁠. 바구니마다 결희의 글씨로 「⁠찢김⁠」 「⁠물림⁠」 「⁠데임⁠」이라고 적혀 있었다⁠. 헌터들이 들어오면 상처를 보고 바구니를 고르면 되었다⁠. 보급반장 할아버지는 바구니 이름을 보고 한참 웃다가⁠, 「⁠물림⁠」 바구니에 붕대를 더 채웠다⁠.

천막 가운데에 하솜이 있었다⁠. 단톡방 공지에 손을 들지 않았던 하솜이 운비를 돗자리에 앉혀 놓고 B급 헌터의 팔뚝을 붙잡고 있었다⁠. 괴수 발톱에 찢긴 팔이었다⁠. 하솜의 손바닥이 상처를 덮었다가 떨어지자 찢긴 자리가 분홍 줄 하나로 남았다⁠. 엄마들이 미숫가루를 타다 말고 박수를 쳤다⁠. B급이 귀까지 빨개졌다⁠.

“⁠운비 엄마⁠, 보급은 안 하신다면서요⁠.⁠”

“⁠보급 안 해요⁠. 이건 보급 아니에요⁠.⁠” 하솜이 손을 물티슈로 닦았다⁠. 내 옆으로 와서 목소리를 낮췄다⁠. “⁠부장님이 오늘 또 전화했어요⁠. 선생님 오늘 어디 가셨냐고요⁠.⁠”

“⁠뭐라고 했습니까⁠?⁠”

“⁠여의도 가셨다고요⁠. 아내분 USB 갖다주러⁠.⁠” 하솜이 돗자리의 운비를 보았다⁠. “⁠부장님이 한참 아무 말 안 하다가⁠, 그런 일로 S급이 여의도까지 가느냐고 하셨어요⁠.⁠”

“⁠운비 엄마 생각은 어떻습니까⁠?⁠”

“⁠저는 USB 때문에 강남까지 가 본 적 있어요⁠. 운비 아빠 거⁠.⁠” 하솜이 웃었다⁠.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부장님한테는 그 말 안 했어요⁠.⁠”

*

밤 여덟 시 반⁠, 문을 넘었다⁠. 재련이 왼손에 검을 쥐고 뒤를 따랐다⁠. 삼각건은 풀었고 오른팔은 아직 덜 올라갔다⁠. 재련은 문 앞에서 내 시계를 손가락으로 톡 쳤다⁠. “⁠오늘도 열 시 반⁠?⁠” 비꼬는 말이었는데 지난주보다 가시가 하나 빠져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서쪽으로 걸었다⁠. 박동을 찾았다⁠. 쿵⁠. 날숨 끝에 한 번⁠.

이상했다⁠. 지난주에 핵이 떠오른 고가도로 밑에서 소리가 오지 않았다⁠. 박동은 거기서 이백 미터를 더 간 데서 왔다⁠. 서쪽으로⁠, 그리고 조금 북쪽으로⁠.

“⁠왜요⁠?⁠” 재련이 물었다⁠. 내가 멈춘 것을 알아챘다⁠.

“⁠핵이 움직였습니다⁠.⁠”

“⁠핵이 움직여요⁠? 그런 거 처음 들어요⁠.⁠”

“⁠저도 처음 듣습니다⁠.⁠”

박동 밑에 다른 소리가 깔려 있었다⁠. 아주 낮고 길게 흐르는 소리⁠. 바깥의 소리가 균열 벽을 타고 스며드는 소리였다⁠. 나는 낮게 깔린 소리에 귀를 맞췄다⁠. 물이었다⁠. 넓고 깊은 물이 쉬지 않고 밀려가는 소리⁠. 한강이었다⁠.

핵은 물소리를 향해 가고 있었다⁠.

한 시간 반 동안 괴수를 베며 박동을 따라갔다⁠. 따라갈수록 박동은 조금씩 물러났다⁠. 재련이 걸으면서 물었다⁠. “⁠애기 경례는 누가 가르쳤어요⁠?⁠” “⁠전진기지 B급들이요⁠.⁠” “⁠우리 기지 B급들 경례 각도 엉망인데⁠.⁠” “⁠그래서 예봄이 경례도 엉망입니다⁠.⁠” 재련이 웃음을 참느라 옆구리를 붙잡았다⁠.

재련은 오른팔이 안 올라가는 채로 왼손으로 두 마리를 베었고⁠, 베고 나서 콧노래를 불렀다⁠. 아파서 부르는 것인지 화가 나서 부르는 것인지 이제는 구분이 갔다⁠. 오늘은 아파서였다⁠.

열 시 오 분에 발길을 돌렸다⁠. 재련은 막지 않았다⁠. 다만 걸으면서 한 번 물었다⁠.

“⁠핵이 움직이면⁠, 어디로 가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

열 시 이십팔 분⁠, 문을 빠져나왔다⁠. 주완이 문 앞 의자에서 일어났다⁠. 시계를 보았다⁠. 아무 말 없이 다시 앉으려는 주완에게 다가갔다⁠.

“⁠지도 좀 보여 주십시오⁠.⁠”

작전 천막의 지도 위에 손가락을 짚었다⁠. 지난주 핵이 떠오른 자리⁠. 오늘 박동이 울린 자리⁠. 두 점을 잇고 그대로 손가락을 밀었다⁠. 손가락은 망원동을 가로질러 한강 둔치에서 멈췄다⁠.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 한가운데에 물빛마을 3단지가 있었다⁠.

“⁠핵이 한강 물소리를 따라 움직입니다⁠.⁠” 내가 말했다⁠. “⁠하루에 이백 미터씩⁠.⁠”

주완이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오래 보았다⁠. 주완이 손가락으로 3단지를 짚었다⁠. 공손한 목소리였다⁠.

“⁠그럼 권 헌터 집이 다음 경계선입니다⁠.⁠”

천막 밖에서 발전기가 덜컹 소리를 냈다⁠. 주완이 무전기를 들어 마포구청 상황실을 불렀다⁠. 나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혜결에게 보낼 말을 썼다가 지웠다⁠. 놀이터 단톡방을 열었다⁠. 결희의 마지막 공지가 떠 있었다⁠. 「⁠내일 아침 보급 아홉 시 집합⁠. 미숫가루 당번 2조⁠.⁠」 공지 아래로 엄마들의 엄지가 줄줄이 달려 있었다⁠.

5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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