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377자)

핵

육아휴직 S급 헌터 · 문채겸

문 안쪽 열 걸음에 분필 화살표가 있었다⁠. 첫 조가 그린 화살표 위에 다른 색 분필이 겹쳐 있었다⁠. 노랑⁠, 분홍⁠, 파랑⁠. 조마다 다른 색이었다⁠. 누가 정했는지 몰랐다⁠. 색을 나눈 솜씨가 결희의 당번표를 닮아 있었다⁠. 화살표 다섯 겹이 북쪽으로⁠, 아래로⁠, 둔치 밑으로 이어졌다⁠.

여섯 번째 조는 셋이었다⁠. 나와 주완⁠, 그리고 첫 조를 했던 B급 엄마 헌터⁠. 두 시간 쉬고 다시 들어왔다⁠. 조끼 주머니에 젖병이 그대로 꽂혀 있었다⁠.

주완은 걸을 때 왼쪽 무릎을 끌었다⁠. 균열 바닥이 말랑해서 끄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대신 숨소리가 났다⁠. 무릎이 바닥을 디딜 때마다 주완의 숨이 한 번씩 짧게 끊겼다⁠. 재련이 아플 때 내던 숨과 같았다⁠. 부녀가 아픈 것을 덮는 방식만 달랐다⁠. 재련은 콧노래를 불렀고 주완은 말을 했다⁠.

“⁠권 헌터⁠, 오른쪽 부탁드립니다⁠.⁠”

괴수가 오른쪽 벽에서 튀어나왔다⁠. 들숨에 맞춰 뛰는 놈이었다⁠. 나는 들숨 한가운데서 베었다⁠. 주완이 방패로 두 번째 놈을 받아 냈다⁠. 방패에 이빨 자국이 하나 더 생겼다⁠. 다섯 해 만의 이빨 자국이었다⁠. 주완은 방패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한 번 쓸어 보고 다시 걸었다⁠.

여섯 시 오 분⁠, 다섯 번째 조를 만났다⁠. 다섯 번째 조가 길을 넘겼다⁠.

“⁠여기서부터 하나예요⁠. 밑으로⁠. 들숨 이십구 초⁠. 멈춤 이십일 초⁠. 멈춤 한가운데 박동⁠. 핵 빛 보여요⁠. 사과 퓌레 금지⁠.⁠”

마지막 말에 주완이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설명하지 않았다⁠. 주완도 묻지 않았다⁠. 다섯 번째 조가 분필 화살표를 따라 위로 올라갔다⁠.

*

길은 아래로 감겼다⁠. 나선형 계단 같은 골목이 둔치 밑으로 파고들었다⁠. 내려갈수록 물소리가 커졌다⁠. 한강이 머리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벽에서 물기가 배어 나왔다⁠. 균열 안에서 처음 맡는 냄새였다⁠. 강물 냄새⁠, 진흙 냄새⁠, 그리고 젖은 쇠 냄새⁠.

“⁠열 해 전⁠, 인천 4등급이었습니다⁠.⁠” 주완이 말했다⁠. 걷는 박자에 맞춰 말했다⁠. 묻지 않았는데 말했다⁠. “⁠그때 S급 하나가 휴가 중이었습니다⁠. 가족 여행⁠. 제주도⁠. 작전부는 S급 없이 들어가자고 했습니다⁠. 4등급이니까⁠. 저는 방패였고⁠, 제 짝은 A급 검사였습니다⁠. 열네 해를 같이 들어간 사람이었습니다⁠. 둘째가 백일이었습니다⁠.⁠”

주완의 숨이 무릎 때문이 아니게 끊겼다⁠.

“⁠핵 앞에서 들숨이 바뀌었습니다⁠. 아무도 못 들었습니다⁠. 그 S급이 있었으면 들었을 겁니다⁠. 귀가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권 헌터 전에는 그 사람이 들었습니다⁠.⁠” 주완이 방패를 고쳐 쥐었다⁠. “⁠장례식에 그 S급이 왔습니다⁠. 제주도에서 바로⁠. 반바지에 검은 셔츠를 사 입고⁠. 저는 그 사람 얼굴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쉬는 사람을 미워하셨습니까⁠?⁠”

“⁠미워했습니다⁠. 쉬지 못한 저를 미워하는 것보다 쉬웠으니까요⁠.⁠” 주완이 처음으로 웃었다⁠. 웃음은 공손하지 않았다⁠. “⁠그 전에도 휴가를 내 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 뒤로는 휴가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도 않았습니다⁠. 재련이 졸업식도⁠, 이혼 서류 도장 찍는 날도⁠. 제가 쉬면 누가 들숨을 놓칠까 봐⁠. 저는 귀도 안 좋은데⁠.⁠”

B급 엄마 헌터가 뒤에서 젖병이 꽂힌 주머니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여섯 시 사십 분⁠, 골목이 끝났다⁠. 둥근 방이 나왔다⁠. 천장이 높았고⁠, 천장 너머로 물소리가 지나갔다⁠. 방 한가운데에 핵이 있었다⁠. 아기 침대만 한 붉은 돌이었다⁠. 표면에 실핏줄 같은 금이 얽혀 있었고⁠, 금 사이로 빛이 숨을 쉬었다⁠. 들숨에 어두워지고 날숨에 밝아졌다⁠. 멈춤 한가운데서 한 번⁠, 쿵⁠. 여름 내내 내 귀를 울린 박동이 눈앞에서 뛰었다⁠.

핵 앞에 괴수 하나가 웅크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본 놈들의 세 배였다⁠. 다리가 여덟이었다⁠. 들숨이 시작되자 놈이 몸을 일으켰다⁠. 이십구 초짜리 들숨이 놈의 등을 밀었다⁠.

“⁠제가 받겠습니다⁠.⁠” 주완이 방패를 앞으로 내밀었다⁠. “⁠들숨 동안은 제가⁠. 멈춤 동안은 권 헌터가⁠. 핵만 치십시오⁠.⁠”

“⁠부장님 무릎으로 이십구 초를 받으실 수 있습니까⁠?⁠”

“⁠다섯 해 동안 작전 천막 의자에서 무릎을 아꼈습니다⁠. 오늘 쓰려고 아낀 줄은 몰랐습니다⁠.⁠”

괴수가 뛰었다⁠. 주완이 받았다⁠. 방패와 이빨이 부딪치는 소리가 둥근 방을 울렸다⁠. 주완의 무릎이 한 번 꺾였다가 버텼다⁠. B급 엄마 헌터가 주완의 등을 어깨로 받쳤다⁠. 이십구 초⁠. 멈춤⁠.

나는 뛰었다⁠. 이십일 초⁠. 핵 앞까지 열 걸음⁠, 칼을 올리는 데 한 박자⁠, 핵에 은빛 장검을 박는 데 한 박자⁠. 핵 표면의 금이 하나 더 갈라졌다⁠. 빛이 새어 나왔다⁠. 날숨이 시작되기 전에 물러났다⁠.

한 번의 멈춤에 한 번⁠. 그것이 전부였다⁠. 5등급 핵은 한 번에 깨지지 않는다⁠. 나는 금을 셌다⁠. 금이 갈라지는 소리를 셌다⁠. 소리가 맑아질수록 핵은 얇아진다⁠.

여섯 시 오십 분⁠, 다섯 번⁠. 괴수가 방패를 들이받을 때 B급 엄마 헌터의 조끼에서 젖병이 튕겨 나갔다⁠. 젖병이 말랑한 바닥을 굴러 핵 앞에서 멈췄다⁠. 붉은 빛이 젖병 눈금을 비췄다⁠. 「⁠120ml⁠」 나는 멈춤 동안 핵에 칼을 박고⁠, 물러나는 길에 젖병을 주워 B급 엄마 헌터에게 던졌다⁠. B급 엄마 헌터가 한 손으로 받아 조끼에 꽂았다⁠. 주완이 방패 너머로 날아가는 젖병을 보았다⁠. 눈썹이 한 번 올라갔다⁠. 사과 퓌레 때와 같은 각도였다⁠.

일곱 시⁠, 여덟 번⁠. 주완의 방패 가장자리가 휘었다⁠. 주완의 숨이 길어지지 못했다⁠. B급 엄마 헌터의 팔에서 피가 흘렀다⁠. 아무도 멈추자고 하지 않았다⁠.

일곱 시 십 분⁠, 열한 번째로 칼을 박았다⁠. 금이 갈라지는 소리가 맑았다⁠. 거의 다 왔다⁠. 한 번 더⁠. 그런데 다음 멈춤까지는 들숨 이십구 초와 날숨 십일 초가 남아 있었다⁠. 사십 초⁠. 그리고 나가는 데 이십 분⁠, 강당까지 뛰는 데 칠 분⁠.

일곱 시 반⁠. 혜결과 서로에게 세 번씩 말한 시각⁠.

칼을 든 채 핵 앞에서 물러났다⁠. 들숨이 시작되었다⁠. 괴수가 다시 뛰었고⁠, 주완이 다시 받았다⁠. 방패가 비명 같은 소리를 냈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보고 말았다⁠. 주완이 방패 너머에서 나를 보았다⁠.

“⁠권 헌터⁠.⁠”

“⁠압니다⁠.⁠”

“⁠핵이 안 깨졌는데 시계를 보시면⁠, 제가 놓아 드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주완의 목소리가 방패에 부딪혀 둔하게 울렸다⁠. 괴수의 이빨이 방패 가장자리를 물고 흔들었다⁠. 주완은 버텼다⁠. 그러고는 말했다⁠. 공손하게⁠.

“⁠아내분 발표는 아홉 시입니다⁠. 아직 한 시간 오십 분 남았습니다⁠.⁠”

한 시간 오십 분⁠. 7월 16일에 내가 주완 앞에서 한 말이었다⁠. 두 시간이면 된다고⁠. 귀는 두 시간만 써도 귀라고⁠.

들숨이 끝났다⁠. 멈춤⁠.

나는 뛰었다⁠. 열 걸음⁠, 한 박자⁠, 한 박자⁠. 은빛 장검이 핵 한가운데 박혔다⁠. 칼날에서 소리가 났다⁠. 핵의 금이 아니라 칼날의 금이었다⁠. 은빛 장검에 금이 갔다⁠. 그리고 핵이 갈라졌다⁠. 붉은 돌이 한가운데서 두 쪽으로 벌어지고⁠, 빛이 한꺼번에 쏟아졌다가⁠, 꺼졌다⁠.

박동이 멈췄다⁠.

마흔닷새 동안 쉬지 않고 귀에 들어오던 소리가 멈췄다⁠. 귀 안이 비었다⁠. 빈 귀로 물소리만 들어왔다⁠. 한강이 머리 위를 지나가는 소리⁠.

괴수가 무너졌다⁠. 균열이 날숨만 쉬기 시작했다⁠. 들이쉬지 않고⁠, 내쉬기만⁠. 닫히는 숨이었다⁠.

B급 엄마 헌터가 휴대전화를 꺼냈다⁠. 균열이 닫히기 시작하자 화면이 다시 움직였다⁠. 돌봄방 생중계였다⁠. 이불 밑 발바닥 열일곱 개가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아침이었다⁠. B급 엄마 헌터가 엄지발가락이 긴 발 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짚은 채 오래 있었다⁠.

*

주완의 무릎이 꺾였다⁠. 방패를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버티던 것을 놓자 무릎이 먼저 알았다⁠. 주완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B급 엄마 헌터가 주완의 팔을 잡았다⁠. 일어나지 못했다⁠.

나는 등을 돌리고 쪼그려 앉았다⁠.

“⁠뭐 하십니까⁠?⁠”

“⁠업히세요⁠.⁠”

“⁠작전부장을 업는 S급이 어디 있습니까⁠?⁠”

“⁠따님도 두 번 업었습니다⁠. 이 집안은 다 업혀 봐야 압니다⁠.⁠”

주완이 한참 내 등을 보았다⁠. 그러고는 내 목에 팔을 둘렀다⁠. 무거웠다⁠. 재련보다 무겁고⁠, 아기 띠보다 무거웠다⁠. 주완의 숨이 내 목덜미에 닿았다⁠. 들이쉬는 데 칠 초⁠, 내쉬는 데 십일 초⁠. 7월 13일 오후 세 시에 홍대 앞에서 들려온 숨과 박자가 같았다⁠.

“⁠무겁지 않습니까⁠?⁠” 주완이 물었다⁠.

“⁠무겁습니다⁠.⁠”

“⁠내려놓으십시오⁠.⁠”

“⁠아뇨⁠.⁠”

닫히는 균열은 날숨으로 우리를 밀어냈다⁠. 분필 화살표 다섯 겹이 위로⁠, 위로⁠, 문으로 이어졌다⁠. 나는 화살표를 따라 뛰었다⁠. 등에 주완을 업고⁠, 오른손에 금 간 은빛 장검을 쥐고⁠.

*

문을 빠져나온 것은 일곱 시 삼십일 분이었다⁠.

일 분 늦었다⁠. 문 앞에서 하솜과 재련이 일어났다⁠. 상임이사가 일어났다⁠. 주완을 들것에 내려놓자마자 나는 뛰었다⁠. 칼도 내려놓지 않고⁠. 서교동 골목을 뛰었다⁠. 새벽 출근길의 사람들이 칼을 든 남자를 보고 길을 비켰다⁠. 주민센터까지 일 킬로미터⁠. S급의 다리로 사 분⁠.

일곱 시 삼십오 분⁠, 주민센터 강당 입구에 혜결이 서 있었다⁠. 예봄이를 안고⁠, 대피 가방을 메고⁠, USB를 손에 쥐고⁠. 정장 차림이었다⁠. 혜결 뒤에서 결희가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다⁠. 단톡방 공지가 막 올라갔다⁠. 「⁠예봄이 아빠 도착⁠. 오 분 늦음⁠. 봐줌⁠.⁠」

혜결이 예봄이를 내밀었다⁠. 나는 칼을 결희에게 넘기고 예봄이를 받았다⁠. 결희가 은빛 장검을 두 손으로 받아 들고 휘청했다⁠. 생수 상자보다 무겁다고 중얼거렸다⁠.

“⁠깼어⁠?⁠” 혜결이 물었다⁠.

“⁠깼어⁠.⁠”

“⁠다친 데는⁠?⁠”

“⁠없어⁠. 부장님이 무릎⁠.⁠”

혜결이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예봄이 이마에도 맞췄다⁠. 강당 앞에 택시가 서 있었다⁠. 손주가 셋이라는 기사님이었다⁠. 결희가 새벽에 불러 두었다⁠. 기사님이 창문을 내리고 예봄이에게 경례를 했다⁠. 예봄이가 내 품에서 경례로 받았다⁠.

“⁠여의도⁠.⁠” 혜결이 택시에 올라타며 말했다⁠.

“⁠출근이구나⁠.⁠” 기사님이 말했다⁠.

“⁠출근이에요⁠.⁠”

택시가 떠났다⁠. 나는 아기 띠를 메고 예봄이를 넣었다⁠. 버클이 한 번에 맞물렸다⁠.

*

여덟 시 이십 분⁠, 예봄이를 안고 문 앞으로 돌아왔다⁠. 균열의 문이 사람 키만큼 줄어들어 있었다⁠. 날숨만 내쉬며 조금씩 오므라들었다⁠. 문 너머로 아침 햇빛이 비쳤다⁠. 홍대 앞의 진짜 하늘이었다⁠.

주완은 들것 위에 앉아 있었다⁠. 하솜이 무릎에 손바닥을 대고 있었고⁠, 재련이 목발을 짚고 옆에 서 있었다⁠. 두 사람이 같은 들것 옆에 서 있는 것을 처음 보았다⁠. 재련이 주완의 작전복 웃옷을 들고 있었다⁠. 자정에 주완이 재련 무릎에 덮어 준 웃옷이었다⁠.

주완이 나를 보고⁠, 아기 띠를 보고⁠, 예봄이를 보았다⁠. 예봄이가 주완에게 경례를 했다⁠. 주완이 들것 위에서 경례를 받았다⁠. 각도가 엉망이었다⁠.

주완이 작전복 바지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누렇고 구겨지고⁠, 한쪽 귀퉁이가 침에 젖었다 마른 자국으로 쭈글쭈글했다⁠. 「⁠복귀 명령서⁠」 7월 13일 오후 다섯 시⁠, 등나무 벤치 위에 두고 간 봉투였다⁠.

“⁠첫날 놀이터에 두고 가신 겁니다⁠. 방장이라는 분이 주워서 협회로 보냈습니다⁠. 착불로요⁠.⁠” 주완이 명령서를 내밀었다⁠. “⁠이제 이걸 어떻게 할지⁠, 권 헌터가 정하십시오⁠. 저는 더 이상 대신 정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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