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296자)

황제가 비를 든 날

황궁의 늙은 내관이 천하제일 고수였다 · 마필제

고충겸은 대답하기 전에 한 번 웃었다⁠. 소리 없는 웃음이었다⁠.

“⁠신의 말이 앞뒤가 엉켰사옵니다⁠. 어젯밤 신이 태후 마마께 아뢴 것은 태의가 약방을 비우고 어디론가 나갔다는 것이었사옵니다⁠. 새벽에 우물에서 찾았다는 말은 오늘 아침에 다시 아뢰었고⁠.⁠” 고충겸이 허리를 숙였다⁠. “⁠늙으면 말이 먼저 나가옵니다⁠. 폐하께서 바로잡아 주시니 황공하옵니다⁠.⁠”

“⁠그래⁠. 늙으면 그렇지⁠.⁠” 연성이 섬돌 위에서 말했다⁠. “⁠그런데 제독은 쉰여덟이잖아⁠. 정원 할아범은 일흔인데 말이 안 엉켜⁠.⁠”

마당 가장자리의 동창 졸개 하나가 고개를 숙였다⁠. 새봄은 황제 뒤에서 눈을 내리깔았다⁠. 고충겸은 대답하지 않고 물러났다⁠. 지나간 섬돌 아래 눈 위에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 판구는 마당 귀퉁이에서 이것을 보았다⁠.

*

조회까지 사흘이었다⁠.

첫날 새벽⁠, 판구는 수인전 마당에서 황제의 손에 비를 쥐여 주었다⁠. 연성은 이제 비를 창처럼 쥐지 않았다⁠. 손이 쥐는 자리는 이제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쓸 때마다 어깨가 올라갔다⁠.

“⁠조회에서 비질을 하시는 게 아니옵니다⁠. 서 계시는 것이옵니다⁠.⁠” 판구가 황제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눌러 내렸다⁠. “⁠비는 무게가 아래에 있사옵니다⁠. 싸리 쪽이 무겁고 자루 끝이 가볍지요⁠. 사람도 같사옵니다⁠. 무게를 발바닥에 두시면 어깨가 내려가옵니다⁠.⁠”

“⁠발바닥에 어떻게 둬⁠?⁠”

“⁠눈 위에 서 계시면 아시옵니다⁠.⁠” 판구가 마당 한가운데 눈이 쌓인 자리를 가리켰다⁠. “⁠저기 서 보시옵소서⁠. 발이 눈에 빠지는 깊이가 양쪽이 같으면 무게가 바로 선 것이옵니다⁠.⁠”

연성이 눈 위에 섰다⁠. 그리고 한참 뒤에 발을 들어 보았다⁠. 왼쪽 발자국이 오른쪽보다 반 치 깊었다⁠. 이 사람이 다시 섰다⁠. 이번엔 오른쪽이 깊었다⁠. 세 번째에 두 발자국의 깊이가 같았다⁠. 황제가 이것을 내려다보며 입을 벌렸다⁠.

“⁠됐다⁠! 할아범⁠, 됐어⁠!⁠”

“⁠말씀이 빨라지셨사옵니다⁠.⁠”

“⁠아⁠.⁠” 연성이 입을 다물었다⁠. “⁠말이 빨라지면 어떻게 해⁠?⁠”

“⁠숨을 한쪽으로만 내쉬시옵소서⁠. 비 소리처럼⁠. 들이쉴 때는 소리를 내지 마시고⁠, 내쉴 때만 길게⁠.⁠” 판구가 비를 받아 들고 한 번 쓸었다⁠. 싸리가 눈을 긁는 소리가 사락⁠, 길게 한쪽으로 났다⁠. “⁠이 소리 길이만큼 내쉬시면 그다음 말은 천천히 나오옵니다⁠.⁠”

새봄이 처마 밑에서 웃음을 참았다⁠. 황제가 눈 위에 서서 사락⁠, 소리를 입으로 흉내 내며 숨을 내쉬고 있었다⁠.

*

두 번째 날 오후⁠, 영왕이 수인전에 문안을 왔다⁠. 털옷을 세 겹 껴입고⁠, 손에는 화로를 들었다⁠. 황제 앞에 엎드렸다가 일어나면서 등불 열 개를 둘러보고 혀를 찼다⁠.

“⁠폐하⁠, 기름 값이 많이 드시겠사옵니다⁠.⁠”

“⁠숙부님도 오늘 밤 여기서 주무세요⁠.⁠”

“⁠예⁠?⁠”

“⁠섭정을 맡으실 거잖아요⁠. 섭정은 짐 곁에 있어야 하니까⁠, 오늘부터 수인전에서 지내시는 게 맞죠⁠.⁠” 연성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말이 빠르지 않았다⁠. “⁠그리고 미리 알아 두셔야 할 게 있어요⁠. 이 침전 지붕으로 밤마다 누가 와요⁠. 칼 든 사람이요⁠. 지난달부터 셋이 떨어져 죽었어요⁠. 연못에 하나⁠, 마당에 하나⁠. 하나는 동쪽 처마 밑에⁠.⁠”

영왕의 손에서 화로가 기울었다⁠. 숯 하나가 굴러 나왔다⁠. 새봄이 이것을 부젓가락으로 집어 넣었다⁠.

“⁠그⁠, 그건 폐하를 노리는⁠…⁠…⁠.⁠”

“⁠짐을 노리는 거죠⁠. 지금은요⁠.⁠” 연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섭정이 되시면 숙부님을 노리겠죠⁠. 조정을 쥔 사람이 숙부님이 되니까요⁠. 아⁠, 그런데 여기 정원 할아범이 매일 새벽에 마당을 쓸어 줘요⁠. 밤에는 안 쓸고⁠. 그러니까 밤에 잎 소리가 나면 숙부님이 직접 일어나셔야 해요⁠.⁠”

영왕은 이 밤 수인전 곁방에 들었다⁠. 이경까지는 화로를 끌어안고 앉아 있었다⁠. 삼경 무렵 정원 쪽에서 바람이 불어 잎이 사락거렸다⁠. 곁방에서 비명이 났다⁠. 판구가 마당에서 이 비명을 들었다⁠. 비를 들고 곁방 앞을 지나가며 크게 기침을 했다⁠. 비명이 그쳤다⁠. 사경이 되기 전에 영왕은 가마를 불러 제 처소로 돌아갔다⁠. 털옷 한 겹을 곁방에 두고 갔다⁠.

*

세 번째 날⁠, 어선방은 조용했다⁠. 부뚜막 불은 붙어 있었고 찜통에서 김도 올랐는데⁠, 사람 목소리가 나지 않았다⁠. 판구가 뒷문으로 들어서자 해솜이 반죽을 치대다 말고 고개로 부뚜막 끝을 가리켰다⁠.

복길이 거기 앉아 있었다⁠. 만두피를 밀고 있었다⁠. 밀대가 한 번 굴러가면 피가 얇아졌고⁠, 이 피를 들어 불빛에 비춰 보고는 도로 뭉쳤다⁠. 그렇게 뭉친 반죽이 복길의 무릎 곁에 열 덩이 넘게 쌓여 있었다⁠.

“⁠사흘째 저래요⁠.⁠” 해솜이 낮게 말했다⁠. “⁠만두를 하나도 안 빚으세요⁠. 말도 안 하세요⁠. 어선방 사람들이 무서워해요⁠. 왕 내관님이 말을 안 하면 무슨 큰일이 난 거라고⁠.⁠”

판구가 복길 곁에 쪼그려 앉았다⁠. 복길은 판구를 보지 않고 밀대를 굴렸다⁠.

“⁠우물 물을 못 쓰겠소⁠.⁠” 복길이 말했다⁠. 사흘 만의 말이었다⁠. “⁠두레박을 내리면 그 손이 생각나서⁠. 그래서 눈을 녹여서 쓰는데⁠, 눈 녹인 물로는 피가 안 붙어요⁠. 자꾸 터져⁠. 이십 년 동안 그 우물 물로 빚었는데⁠.⁠”

판구는 대답하지 않았다⁠. 복길의 무릎 곁에 쌓인 반죽 덩이 하나를 집어 들고⁠, 손바닥 사이에 넣어 천천히 굴렸다⁠. 반죽이 둥글어졌다⁠. 이것을 복길의 도마 위에 놓았다⁠.

“⁠어선방 동쪽 담 밑에 샘이 하나 있소⁠. 마흔 해 전엔 그 물로 차를 끓였소⁠. 지금은 덮어 놨을 거요⁠.⁠”

복길이 밀대를 멈췄다⁠. 처음으로 판구를 보았다⁠.

“⁠형님은 그런 걸 어떻게 아오⁠?⁠”

“⁠정원 내관은 궁 안 물길을 다 아오⁠. 나무에 물을 줘야 하니까⁠.⁠”

복길이 한참 판구를 보다가 일어났다⁠. 물동이를 들고 뒷문으로 나갔다⁠. 해솜이 이 뒷모습을 보고 판구를 돌아보았다⁠. 판구는 반죽 덩이를 하나 더 굴리고 있었다⁠.

반 시간 뒤 어선방 동쪽 담 밑에서 복길의 목소리가 났다⁠. 처음엔 작게⁠, 다음엔 크게⁠.

“⁠해솜 아가씨⁠! 여기 샘이 있소⁠! 덮개 돌이 이렇게 무거운데 형님이 어떻게 알았지⁠? 아가씨⁠, 이리 와서 같이 들어요⁠. 아니⁠, 치지 말고 드는 거요⁠, 들어⁠!⁠”

*

조회 날 아침⁠, 판구는 정극전 섬돌 아래 눈을 쓸었다⁠. 정원 내관이 조회에 낄 자리는 없었다⁠. 그러나 조회 전에 섬돌과 뜰의 눈을 쓰는 일은 내관들이 맡았고⁠, 판구는 이 일을 맡겠다고 새봄을 통해 청했다⁠.

백관이 두 줄로 섰다⁠. 정극전 안 맨 위 용상에 연성이 앉았고⁠, 이 오른쪽 아래에 영왕이⁠, 왼쪽 발 내린 장막 뒤에 태후가 앉았다⁠. 고충겸은 백관의 맨 앞에서 반 걸음 나와 섰다⁠. 새봄은 용상 뒤 기둥 곁에 서 있었다⁠.

무관 줄 끝에 유가휘가 섰다⁠. 유가휘의 왼손은 흰 무명으로 손목까지 감겨 있었다⁠. 조회에 들어서며 고충겸이 이 손을 한 번 보았고⁠, 유가휘는 이 눈길에 붕대 감은 손을 들어 정중하게 읍했다⁠. 손바닥이 아직 부어 있어서 손가락이 다 펴지지 않았다⁠. 고충겸은 읍을 받지 않고 앞으로 나갔다⁠. 유가휘 곁의 무관들이 이 둘 사이에서 눈을 어디 둘지 몰라 바닥만 보았다⁠.

고충겸이 섭정을 아뢰었다⁠. 고충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고르게 정극전 안을 채웠다⁠. 즉위 석 달 만에 침전 지붕까지 도적이 든 일⁠, 연희 날 광대의 칼⁠, 태의가 우물에 빠진 일⁠. 폐하의 맥이 허하다는 태의의 말⁠. 말을 마치자 백관 가운데 열다섯이 엎드렸다⁠. 지난번보다 다섯이 많았다⁠.

“⁠영왕 전하께서 사직을 위해 이 짐을 받으시겠사옵니까⁠?⁠”

영왕이 일어났다⁠.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닫았다⁠. 다시 열었다⁠.

“⁠나는⁠…⁠… 나는 아직 그 짐을 질 몸이⁠…⁠…⁠. 그⁠, 침전 지붕 말이오⁠. 거기 정말 밤마다⁠…⁠…⁠.⁠” 영왕의 눈이 용상 위의 조카를 보았다⁠. 연성이 영왕을 마주 보며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 영왕이 털옷 깃을 쥐었다⁠. “⁠조⁠, 좀 더 생각해 보겠소⁠.⁠”

백관 사이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고충겸이 영왕을 돌아보지 않았다⁠. 앞을 본 채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겸양하시니⁠, 신이 태후 마마께 여쭈어⁠…⁠…⁠.⁠”

“⁠제독⁠.⁠”

용상에서 목소리가 났다⁠. 크지 않았다⁠. 고충겸의 말이 거기서 끊겼다⁠. 정극전 안의 백관이 고개를 들었다⁠. 즉위 이래 황제가 조회에서 동창 제독의 말을 끊은 일은 없었다⁠.

연성은 용상에 앉은 채 숨을 내쉬었다⁠. 들이쉴 때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정극전 문밖⁠, 섬돌 아래에서 비 소리가 들렸다⁠. 사락⁠. 길게⁠, 한쪽으로⁠. 연성이 이 소리를 따라 숨을 다 내쉬었다⁠. 그러고 나서 말했다⁠.

“⁠짐의 맥이 허하다고 한 태의는 짐에게 백 일 동안 누워 있으라 했다⁠. 그 태의는 이틀 뒤 어선방 우물에서 건져졌다⁠.⁠” 황제의 목소리가 정극전 기둥 사이를 천천히 지나갔다⁠. “⁠짐이 백 일 동안 누우면⁠, 백 일째 되는 날 짐도 우물에서 건져지느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엎드린 열다섯 가운데 둘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가 다시 엎드렸다⁠. 고충겸은 용상을 올려다보았다⁠. 고충겸의 얼굴은 변하지 않았는데⁠, 장갑 낀 손의 손가락 하나가 아주 조금 굽었다⁠.

“⁠폐하⁠. 태의의 일은 불행한 사고이옵니다⁠. 그것을 폐하의 옥체와 엮으시면⁠…⁠…⁠.⁠”

“⁠짐은 엮지 않았다⁠. 짐은 물었다⁠.⁠” 연성이 말했다⁠. 그리고 다시 숨을 내쉬었다⁠. 비 소리가 문밖에서 한 번 더 났다⁠. “⁠제독이 대답하지 않으니 짐이 대답하지⁠. 짐은 눕지 않는다⁠. 조회에 나오고⁠, 밥을 먹고⁠, 마당을 쓴다⁠.⁠”

장막 뒤에서 옷깃 스치는 소리가 났다⁠. 태후의 목소리였다⁠. 늙고 가늘었는데⁠, 정극전 맨 끝까지 들렸다⁠.

“⁠황제의 말이 옳소⁠. 몸이 상한 사람은 조회에서 저리 말하지 못하오⁠.⁠” 태후가 잠시 쉬었다⁠. “⁠섭정은 정월 대보름 아침으로 미루시오⁠. 그때까지 황제가 조회를 몸소 지키고 몸을 상하지 않으면 섭정은 없던 일로 하오⁠. 그사이 황제가 쓰러지면⁠, 그날 아침 영왕을 세우겠소⁠.⁠”

백관이 일제히 엎드렸다⁠. 태후의 말이었다⁠. 고충겸도 엎드렸다⁠. 고충겸이 엎드린 채로 말했다⁠.

“⁠태후 마마의 뜻을 받들겠사옵니다⁠.⁠”

연성이 용상에서 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소리가 조금 났다⁠. 새봄이 기둥 곁에서 두 손을 모아 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얬다⁠.

고충겸이 고개를 들었다⁠. 엎드린 자세 그대로 상체만 일으켰다⁠. 고충겸의 목소리가 다시 부드러워졌다⁠.

“⁠다만 한 가지⁠, 마마께 아뢸 일이 있사옵니다⁠. 폐하의 옥체를 상하지 않게 하려면 폐하 곁부터 깨끗해야 하옵니다⁠. 태의가 세상을 떠나기 전 동창에 남긴 말이 있사옵니다⁠. 폐하의 탕약에 무언가가 섞였다는 것이옵니다⁠.⁠”

백관이 웅성거렸다⁠. 연성의 손이 용상 팔걸이를 쥐었다⁠.

“⁠그리고 수인전 궁녀 하나가⁠, 며칠 전 수인전 부엌에서 손가락만 한 조롱박 병을 품에 넣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하였사옵니다⁠. 동창 호위 둘도 그 자리에 있었사옵니다⁠.⁠” 고충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용상 뒤 기둥 곁에 선 궁녀에게로⁠. “⁠그 궁녀가 지금 폐하 곁에 서 있사옵니다⁠. 수인전 궁녀 새봄이옵니다⁠.⁠”

정극전 안의 모든 눈이 기둥 곁으로 갔다⁠. 새봄은 움직이지 않았다⁠. 문밖의 비 소리가 멈췄다⁠.

동창 졸개 둘이 백관 줄 끝에서 나와 용상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9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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