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344자)

우물가의 새벽

황궁의 늙은 내관이 천하제일 고수였다 · 마필제

유가휘는 칼자루를 쥔 채 한참 서 있었다⁠. 화로 불빛이 유가휘의 손등 위에서 흔들렸다⁠. 판구는 비를 쥔 채 이 손을 보지 않았다⁠. 청음정 처마 끝에서 녹은 눈이 한 방울 떨어져 화로 가장자리에서 치익 소리를 냈다⁠.

유가휘가 손을 뗐다⁠.

“⁠값은 나중에 정하겠소⁠. 지금 정하면 내가 손해 보오⁠.⁠” 유가휘가 앞치마를 도로 둘렀다⁠. 손이 조금 서툴렀다⁠. “⁠오늘 밤은 염초 골목에 가겠소⁠. 영감 이름은 내 입 안에 넣어 두지⁠. 언제 뱉을지는 영감이 아니라 내가 정하오⁠.⁠”

유가휘는 구리 찜통을 다시 등에 졌다⁠. 찜통이 유가휘의 등 위에서 덜컹거렸다⁠. 판구가 등에 대고 말했다⁠.

“⁠찜통은 허리로 지시오⁠. 어깨로 지면 내일 못 일어나오⁠.⁠”

유가휘가 돌아보지 않고 한 손을 들어 보였다⁠.

*

도성 남쪽 염초 골목은 이름처럼 화약의 원료가 되는 염초를 굽던 동네였다⁠. 이제는 굽는 집이 없었지만 담벼락마다 하얀 염초 꽃이 피어 있었고⁠, 비가 오면 골목 전체에서 지린내가 올라왔다⁠. 골목은 좁아서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을 수 없었다⁠.

이경이 지날 무렵 유가휘는 금의위 무관 여섯을 데리고 골목 어귀 술집 처마 밑에 서 있었다⁠. 모두 평복이었다⁠. 태의의 집은 골목 안쪽 일곱 번째 대문이었다⁠. 이 집 창에 불이 하나 켜져 있었다⁠.

“⁠지휘사 나리⁠, 동창이 정말 옵니까⁠? 집 하나 태우자고 동창 당두가 직접⁠?⁠”

“⁠당두가 직접 오지⁠. 제독 마마의 말을 남에게 시키면 당두 자리가 남에게 가거든⁠.⁠” 유가휘가 입김을 불었다⁠.

“⁠그런데 나리⁠, 아까부터 나리 등에서 만두 냄새가 납니다⁠.⁠”

“⁠찜통을 졌으니까⁠.⁠”

“⁠지휘사 나리가 찜통을 지셨습니까⁠?⁠”

“⁠그 말을 금의위 밖에서 하면 너는 내일부터 염초 골목 순라야⁠. 평생⁠.⁠” 유가휘가 술집 처마 밑의 지린내를 맡고 얼굴을 찡그렸다⁠. “⁠너희 넷은 뒷담⁠. 둘은 나를 따라 대문⁠.⁠”

말이 끝나기 전에 골목 안쪽에서 냄새가 왔다⁠. 기름 냄새였다⁠. 다음 소리가 왔다⁠. 짚단이 한꺼번에 불붙는 소리⁠, 퍽 하고 공기가 빨려 드는 소리⁠. 일곱 번째 대문 위로 붉은빛이 솟았다⁠.

동창은 이미 들어와 있었다⁠. 기름은 해 지기 전에 뿌려 두었고⁠, 불만 지금 붙였다⁠.

유가휘가 뛰었다⁠. 골목 바닥의 언 흙이 신발 밑에서 미끄러졌다⁠. 일곱 번째 대문은 밖에서 빗장이 걸려 있었다⁠. 이 사람은 칼집째 빗장을 내려쳤다⁠. 두 번째에 빗장이 부러졌다⁠. 마당은 이미 불이었다⁠. 처마 끝 짚이 타며 떨어졌고⁠, 연기가 낮게 깔려 숨을 쉴 때마다 목이 찢어졌다⁠.

안채 문을 걷어차자 사람 셋이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늙은 여인 하나⁠, 중년 사내 하나⁠, 이 아내⁠. 사내가 아내와 어머니를 몸으로 덮고 있었다⁠. 유가휘가 늙은 여인을 들쳐 업었다⁠. 무관 둘이 사내와 이 아내를 끌었다⁠.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을 나서자 늙은 여인이 유가휘의 등에서 손을 뻗어 집 쪽을 가리켰다⁠.

“⁠손자⁠, 손자가 뒷방에⁠…⁠…⁠.⁠”

유가휘는 늙은 여인을 골목 바닥에 내려놓았다⁠. 돌아섰다⁠. 무관 하나가 유가휘의 팔을 잡았다⁠.

“⁠나리⁠, 지붕이 내려앉습니다⁠!⁠”

유가휘는 이 팔을 뿌리쳤다⁠. 셈을 하지 않았다⁠. 소매로 입을 막고 다시 불 속으로 들어갔다⁠. 안채를 지나 뒷방 문을 어깨로 밀었다⁠. 스무 살 남짓한 사내 하나가 방구석에 쓰러져 있었다⁠. 연기를 먹고 정신을 놓았다⁠. 유가휘가 이 사람을 어깨에 걸쳐 멨다⁠. 나오는 길에 불붙은 서까래 하나가 등 뒤로 떨어졌다⁠. 이것을 피하려고 짚은 왼손이 불붙은 문틀을 쥐었다⁠. 살이 타는 냄새가 났다⁠. 제 손이었다⁠.

골목으로 나와 젊은 사내를 내려놓았을 때 유가휘의 왼손 손바닥이 검붉게 일어나 있었다⁠. 이 사람은 이 손을 내려다보지 않았다⁠.

골목 끝에 그림자 다섯이 서 있었다⁠. 맨 앞에 선 사내가 등불을 들어 올렸다⁠. 동창 당두였다⁠.

“⁠금의위 지휘사 나리가 이 밤에 도성 골목에서 무얼 하시오⁠?⁠”

“⁠도성 불은 금의위 일이오⁠. 법이 그렇소⁠. 당두가 이번에도 법을 바꾸셨소⁠?⁠” 유가휘가 오른손으로 칼을 뽑았다⁠. 칼날이 불빛을 받았다⁠. “⁠기름은 언제 뿌리셨소⁠? 해 지기 전에⁠? 부지런하시구려⁠.⁠”

당두의 손이 칼자루로 갔다⁠. 뒤의 넷도 따라 손을 올렸다⁠. 유가휘의 뒤로 무관 여섯이 섰다⁠. 골목이 좁아서 양쪽이 한꺼번에 맞붙을 수 없었다⁠. 맨 앞의 두 사람만 칼을 맞댈 수 있었다⁠.

당두가 먼저 들어왔다⁠. 칼이 사선으로 내려왔다⁠. 유가휘는 이것을 받지 않고 흘렸다⁠. 칼날과 칼날이 미끄러지며 쇳소리를 길게 냈다⁠. 흘린 힘을 그대로 돌려 당두의 손목 쪽으로 칼등을 붙였다⁠. 당두가 손목을 빼며 뒤로 물러났다⁠. 소매가 갈라져 있었다⁠.

“⁠지휘사 나리⁠.⁠” 당두가 숨을 몰아쉬었다⁠. “⁠오늘 밤 일은 제독 마마께 그대로 아뢰겠소⁠. 금의위가 동창 앞을 막았다고⁠.⁠”

“⁠그대로 아뢰시오⁠. 하나도 빼지 말고⁠. 기름도⁠.⁠”

당두가 물러났다⁠. 그림자 다섯이 골목 어귀로 사라졌다⁠. 불길이 태의의 집 지붕을 다 삼키고 있었다⁠. 늙은 여인이 손자의 얼굴을 무릎에 안고 소리 없이 울었다⁠. 유가휘는 그제야 제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 살갗이 부풀어 있었다⁠.

이제 동창은 금의위가 어느 편에 섰는지 알았다⁠. 유가휘는 이것을 셈했다⁠. 셈이 끝나지 않았다⁠.

*

같은 시각⁠, 판구는 수인전 용마루 그늘에 앉아 있었다⁠.

삼경이 되기 전에 기와가 울었다⁠. 동쪽 처마와 서쪽 처마에서 동시에⁠. 다섯 남은 살수 가운데 둘이었다⁠. 둘은 한꺼번에 오지 않고⁠, 한 번에 한 기와씩 서로 박자를 어긋나게 걸었다⁠. 한쪽을 막으면 다른 쪽이 침전 위로 내려오게 짠 걸음이었다⁠.

이때 판구의 귀에 다른 소리가 들어왔다⁠. 지붕 위가 아니라 먼 동쪽 회랑이었다⁠. 발소리 셋⁠. 둘은 동창 졸개의 걸음이었고⁠, 이 사이에 늙고 느린 걸음 하나가 끼여 있었다⁠. 한 걸음마다 멈추고⁠, 다시 걸었다⁠. 새벽에 청류원 돌길에서 들었던 걸음이었다⁠. 이 걸음이 동익문 쪽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판구는 용마루 그늘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동쪽 처마의 기와가 한 번 더 울렸다⁠. 서쪽도 울렸다⁠. 판구의 발밑 서까래 아래에서 황제가 등불 여섯 개를 켜고 자고 있었다⁠.

동쪽 회랑의 발소리가 더 멀어졌다⁠. 문 하나가 열리고 닫히는 소리⁠. 다음은 들리지 않았다⁠.

판구가 일어났다⁠. 동쪽 처마 쪽으로 기와를 세 장 건너뛰었다⁠. 소리가 나지 않았다⁠. 동쪽 살수가 판구를 보기 전에 판구의 비 자루가 살수의 무릎 뒤를 쳤다⁠. 살수가 꺾이며 앞으로 쏠렸고⁠, 판구는 이 등을 비 끝으로 한 번 밀었다⁠. 살수가 처마 밖으로 떨어졌다⁠. 떨어지는 소리를 듣기 전에 돌아섰다⁠. 서쪽 살수가 이미 용마루를 넘어오고 있었다⁠. 칼이 수평으로 왔다⁠. 판구는 몸을 낮췄고⁠, 칼이 이 사람의 머리 위 한 치를 지나갔다⁠. 낮춘 몸에서 비 자루가 위로 솟아 살수의 턱을 받쳤다⁠. 이가 부딪는 소리가 났다⁠. 살수는 비틀거리며 물러나다가 처마 끝을 잡고 매달렸다⁠. 그러고는 그대로 손을 놓고 아래 어둠으로 뛰어내려 달아났다⁠.

판구는 지붕 위에 혼자 섰다⁠. 동쪽 하늘은 아직 검었다⁠. 동익문 쪽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새벽에 어선방 뒤뜰에서 왕복길이 소리를 질렀다⁠.

만두 반죽에 쓸 물을 길으려고 두레박을 내렸는데⁠, 두레박이 물에 닿지 않고 무언가에 걸렸다⁠. 복길이 우물 안을 들여다보았다⁠. 한참 아무 소리도 내지 않다가⁠, 두레박 줄을 놓고 뒤로 주저앉았다⁠. 그러고서야 소리가 나왔다⁠.

판구가 뒤뜰에 닿았을 때 복길은 우물 곁에 쪼그려 앉아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있었다⁠. 동창 졸개들이 갈고리로 우물 속을 더듬고 있었다⁠. 이윽고 이들이 무언가를 끌어 올렸다⁠. 늙은 사내였다⁠. 털옷이 물을 먹어 축 늘어졌고⁠, 검버섯 앉은 손등이 하얗게 불어 있었다⁠. 손톱 몇 개가 깨져 있었다⁠. 우물 벽 돌을 긁은 손이었다⁠.

“⁠태의 영감이⁠…⁠… 밤에 물을 마시러 나왔다가 발이 미끄러졌다고⁠…⁠…⁠.⁠” 복길이 판구를 보지 않고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떨렸다⁠. “⁠동창 사람이 그렇게 말했소⁠. 형님⁠. 어선방 우물이오⁠. 내가 이십 년 동안 만두 물을 길은 우물이오⁠.⁠”

판구는 시신 곁에 서지 않았다⁠. 한 걸음 떨어져서 태의의 손을 보았다⁠. 깨진 손톱⁠, 그리고 오른손 엄지와 검지 사이에 남은 자국⁠. 맥을 짚는 의원의 손가락 굳은살이었다⁠.

이 사람은 거기서 돌아서서 청류원으로 걸었다⁠. 월동문 안쪽 청음정 마루 끝에⁠, 판구가 새벽 비질을 하러 나가기 전에는 없던 물건 하나가 놓여 있었다⁠. 검은 칠을 한 작은 나무 상자⁠, 의원이 침을 넣어 다니는 침통이었다⁠. 태의가 동창에 불려 가는 길에 정원을 돌아 여기 두고 간 것이었다⁠.

판구가 침통을 열었다⁠. 은침 대신 기름종이 꾸러미 하나가 들어 있었다⁠. 꾸러미 안에는 검은 약 찌꺼기가 한 줌⁠, 그리고 달고 비린 냄새가 배어 있었다⁠. 보늬가 조롱박 병을 기울인 뒤의 탕약 찌꺼기였다⁠. 태의는 어제 낮 수인전 탕약을 평소처럼 지었고⁠, 수라간으로 돌아온 사발의 찌꺼기를 거두었다⁠.

판구는 침통을 닫아 품에 넣었다⁠.

*

해가 뜨자 고충겸이 어선방 뒤뜰에 왔다⁠. 우물가에 눕혀진 태의를 한 번 내려다보고 거적을 덮게 했다⁠. 그러고는 우물가에 서 있는 늙은 내관을 보았다⁠. 판구는 언제 돌아왔는지 다시 이 자리에 비를 들고 서 있었다⁠.

“⁠정원 내관이 어선방 우물가에서 무엇을 하나⁠?⁠”

“⁠왕만두가 소리를 질러서요⁠. 늙은이가 귀가 어두워도 그 소리는 들립니다요⁠.⁠”

“⁠그렇겠지⁠.⁠” 고충겸이 우물 테두리 돌을 장갑 낀 손으로 쓸었다⁠. 돌 위에 언 물기가 하얗게 서렸다⁠. “⁠늙은이들은 새벽 우물가를 조심해야 하네⁠. 발이 미끄러지거든⁠. 태의도 늙었고⁠, 자네도 늙었지⁠.⁠”

“⁠예⁠, 예⁠. 조심합지요⁠.⁠”

고충겸은 더 말하지 않고 수인전 쪽으로 걸어갔다⁠. 판구는 비를 들고 한참 뒤에서 따라갔다⁠. 왕복길은 우물가에 남아 거적 덮인 몸 곁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일어나지 않았다⁠. 복길의 앞치마 끝이 우물가 물기에 젖어 하얗게 얼어 가고 있었다⁠.

수인전 마당에 황제가 나와 있었다⁠. 새봄이 이 곁에 섰다⁠. 뺨의 부기는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고충겸이 섬돌 아래에서 허리를 숙였다⁠.

“⁠폐하⁠. 수석 태의가 간밤에 우물에 빠져 세상을 떠났사옵니다⁠. 폐하의 옥체를 돌보던 이를 잃었으니 신이 송구하옵니다⁠.⁠”

연성의 얼굴이 하얘졌다⁠. 연성은 섬돌 위에서 고충겸을 내려다보았다⁠. 판구는 마당 귀퉁이에서 비를 든 채 서 있었다⁠.

“⁠하여 신은 더 미룰 수 없다고 여기옵니다⁠.⁠” 고충겸이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가 고르게 낮았다⁠. “⁠사흘 뒤 정극전에서 조회를 열겠사옵니다⁠. 태후 마마께서 친히 나오시어⁠, 폐하의 옥체를 위해 영왕 전하를 섭정으로 세우시는 뜻을 백관 앞에 밝히실 것이옵니다⁠.⁠”

연성이 섬돌 끝으로 한 걸음 나섰다⁠. 연성의 손이 비 쥐는 자리처럼⁠, 왼손은 위⁠, 오른손은 한 뼘 아래로 소매 속에서 주먹을 쥐고 있었다⁠.

“⁠태후 마마께서 그러셨다고⁠?⁠”

“⁠어젯밤에 신이 직접 아뢰었사옵니다⁠. 태의가 우물에 빠진 것을 들으시고 몹시 놀라셨사옵니다⁠.⁠”

“⁠어젯밤⁠?⁠” 연성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태의가 우물에 빠진 건 새벽인데⁠, 어젯밤에 그 얘기를 태후 마마께 아뢰었다고⁠?⁠”

8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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