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399자)

새봄

황궁의 늙은 내관이 천하제일 고수였다 · 마필제

동창 졸개 둘이 용상 세 칸 아래까지 왔을 때 연성이 일어났다⁠.

“⁠멈춰⁠.⁠”

졸개들이 멈췄다⁠. 황제를 넘어 궁녀에게 손을 뻗을 수는 없었다⁠. 이들은 고충겸을 돌아보았다⁠. 고충겸은 엎드린 채로 장막 쪽을 보았다⁠.

장막 뒤에서 태후의 목소리가 다시 났다⁠.

“⁠조회 자리에서 궁녀를 끌어내는 법은 없소⁠. 황제의 체면이 있지 않소⁠?⁠” 태후가 잠시 쉬었다⁠. “⁠동창은 내일 아침에 수인전으로 가서 그 궁녀를 데려가 물으시오⁠. 오늘 밤은 수인전에 두시오⁠. 달아날 데도 없지 않소⁠? 궁문 열쇠는 동창에 있으니⁠.⁠”

고충겸이 엎드렸다⁠.

“⁠마마의 뜻대로 하겠사옵니다⁠.⁠”

새봄은 기둥 곁에 서 있었다⁠. 한 번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태후의 장막을 보았고⁠, 엎드린 고충겸의 등을 보았고⁠, 마지막으로 용상의 황제를 보았다⁠. 황제는 서 있었다⁠. 황제의 두 발이 용상 앞 단 위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

해가 기울 무렵 새봄은 청류원에 갔다⁠. 판구는 청음정에서 비를 무릎에 눕혀 놓고 싸리를 새로 묶고 있었다⁠. 마른 싸리 가지를 한 줌씩 대 보고 길이를 맞춰 끈으로 감았다⁠.

“⁠할아버지⁠. 하나만 가르쳐 주세요⁠.⁠”

판구가 끈을 감던 손을 멈췄다⁠.

“⁠동창 지하 옥에 가면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요⁠. 할아버지는 거기서 위에 지나가는 발소리를 세셨다면서요⁠. 왕 내관님이 그러셨어요⁠. 형님이 천장만 보고 있었다고⁠.⁠” 새봄이 청음정 마루 끝에 앉았다⁠. “⁠그거요⁠. 발소리 세는 거⁠. 저도 거기 가서 무언가는 하고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아니면 무서워서 못 견딜 것 같아요⁠.⁠”

판구는 대답 대신 비를 내려놓았다⁠. 일어나 청음정 바닥 널 위를 걸었다⁠. 한 번은 발뒤꿈치부터⁠, 한 번은 발끝부터⁠, 한 번은 발바닥 전체로⁠. 널이 울었다⁠. 세 번 다 소리가 달랐다⁠.

“⁠눈을 감으시오⁠.⁠”

새봄이 눈을 감았다⁠. 판구가 다시 걸었다⁠. 이번에는 걸음마다 무게를 바꿨다⁠.

“⁠무거운 사람은 뒤꿈치가 먼저 울고⁠, 소리가 아래로 가오⁠. 가벼운 척하는 사람은 발끝이 먼저 울고 소리가 짧소⁠. 칼을 찬 사람은 왼쪽이 조금 무겁고⁠, 무언가 감추는 사람은 걸음 사이가 고르지 않소⁠. 서두르면서 안 서두르는 척하는 사람은 걸음 사이가 지나치게 고르오⁠.⁠” 판구가 멈췄다⁠. “⁠지금 내가 몇 걸음 걸었소⁠?⁠”

“⁠일곱이요⁠.⁠”

“⁠아홉이오⁠.⁠”

“⁠두 개는 어디 갔어요⁠?⁠”

“⁠발끝으로 걸었소⁠. 그건 소리가 아니라 널이 숨을 쉬는 것 같은 소리요⁠.⁠” 판구가 다시 걸었다⁠. “⁠다시⁠.⁠”

해가 질 때까지 새봄은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판구는 청음정 바닥을 오갔다⁠. 마지막에 아홉을 맞혔다⁠. 판구가 뒤로 걸음을 하나 더 디뎠는데⁠, 새봄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열⁠. 마지막 건 할아버지가 일부러 소리를 내신 거예요⁠.⁠”

판구가 비를 집어 들었다⁠.

“⁠그 열째 걸음이 고충겸이오⁠. 그 사람은 일부러 내지 않으면 소리가 안 나오⁠.⁠”

*

같은 시각 연성은 태후전에 있었다⁠. 태후전은 정극전 북쪽⁠, 연못 하나를 사이에 둔 낮은 전각이었다⁠. 방 안에 침향 냄새가 짙었다⁠. 태후는 발을 걷고 앉아 있었다⁠. 예순을 넘긴 마른 얼굴이었고⁠, 손에 염주를 쥐고 있었다⁠. 황제가 이 얼굴을 발 없이 본 것은 즉위식 이후 처음이었다⁠.

연성은 영왕이 수인전 곁방에 두고 간 털옷을 걸치고 있었다⁠. 태후의 눈이 이 옷에 머물렀다⁠.

“⁠그건 영왕 옷 아니오⁠?⁠”

“⁠숙부님이 섭정 대신 두고 가셨어요⁠.⁠”

태후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러나 곧 굳었다⁠.

“⁠새봄 때문에 왔겠지⁠.⁠”

“⁠마마께서 새봄을 저한테 보내셨잖아요⁠. 그러니까 마마께서 데려가 주세요⁠. 태후전 궁녀로 도로 부르시면 동창도 함부로⁠…⁠…⁠.⁠”

“⁠함부로 할 거요⁠.⁠” 태후가 염주 알 하나를 넘겼다⁠. “⁠황제⁠. 내 전각을 지키는 사람이 누군지 아오⁠? 동창이오⁠. 선황이 가신 다음 날부터⁠. 궁문 열쇠도⁠, 내 가마꾼도⁠, 내 수라를 나르는 내관도 다 동창이 고른 사람이오⁠. 오늘 조회에서 내가 한 말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요⁠. 대보름까지 시간을 번 것⁠.⁠” 태후가 황제를 보았다⁠. “⁠내가 오늘 밤 새봄을 부르면⁠, 고충겸은 내일 아침 태후가 독 넣은 궁녀를 감쌌다고 할 거요⁠. 그다음은 내 차례지⁠.⁠”

연성이 입술을 깨물었다⁠. 말이 빨라지려 했다⁠. 숨을 한쪽으로 내쉬었다⁠.

“⁠그럼 저는 뭘 해요⁠?⁠”

“⁠그 아이를 보낸 건 나지만⁠, 그 아이가 누구 곁에 서기로 했는지는 그 아이가 정했소⁠.⁠” 태후가 염주를 내려놓았다⁠. “⁠황제가 할 일은 내일 아침에 서 있는 거요⁠. 쓰러지지 말고⁠. 대보름까지⁠.⁠”

연성은 일어나 절을 했다⁠. 털옷 소매가 바닥에 끌렸다⁠. 문을 나서는 연성의 등 뒤에서 태후가 말했다⁠.

“⁠그 옷은 영왕에게 돌려주지 마시오⁠. 그 사람은 겨울을 수인전에서 날 사람이 아니오⁠.⁠”

*

수인전 곁방 문 앞에 왕복길이 대바구니 두 개를 내려놓았다⁠. 바구니마다 김이 났다⁠. 해솜이 뒤에서 하나를 더 들고 왔다⁠. 세 바구니였다⁠.

“⁠동창 옥밥은 사람 먹을 게 못 되오⁠. 내가 먹어 봐서 알아요⁠. 콩비지에 소금만 쳐서 줘⁠. 그래서 고기만두 마흔 개⁠, 채소만두 마흔 개⁠, 그리고 이건 해솜 아가씨가 빚은 건데⁠…⁠…⁠.⁠” 복길이 세 번째 바구니 덮개를 걷었다⁠. 만두들이 터져 속이 다 비어져 나와 있었다⁠. “⁠이건 내가 먹겠소⁠.⁠”

“⁠왕 내관님⁠, 저 내일 아침에 가요⁠. 오늘은 여기 있어요⁠.⁠”

“⁠알지⁠. 그러니까 오늘 밤에 다 먹고 가요⁠. 배에 넣어 가면 동창이 못 뺏어⁠.⁠” 복길이 고기만두 하나를 집어 새봄의 손에 쥐여 주었다⁠. 복길의 손이 조금 떨렸다⁠. 우물에서 태의를 건진 손이었다⁠. “⁠아가씨⁠. 가서 아무 말도 하지 마요⁠. 동창은 사람이 하는 말을 다 엮어⁠. 만두피처럼⁠. 말을 안 하면 엮을 피가 없어⁠.⁠”

새봄은 만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뜨거워서 입을 벌리고 후후 불었다⁠. 복길이 이것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

이 밤 수인전 침전에는 등불 열 개가 켜져 있었다⁠. 연성은 이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서쪽 쪽문이 있어⁠. 어선방 짐 수레가 드나드는 문⁠. 유가휘가 그 문으로 찜통 지고 들어왔다고 했잖아⁠. 그 수레에 너를 태우면⁠…⁠…⁠.⁠”

“⁠그 문 열쇠도 동창에 있어요⁠.⁠”

“⁠그럼 담을 넘어⁠. 할아범한테 부탁하면⁠…⁠…⁠.⁠”

“⁠폐하⁠.⁠” 새봄이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었다⁠. “⁠제가 오늘 밤 달아나면⁠, 내일 아침 고충겸은 백관 앞에서 이렇게 말할 거예요⁠. 폐하께서 탕약에 손댄 궁녀를 빼돌리셨다고⁠. 폐하가 자기 몸에 독을 넣은 사람을 감싸셨으니⁠, 폐하의 판단이 성치 않으시다고⁠. 그러면 대보름까지 갈 것도 없어요⁠. 저는 안 가요⁠. 저는 남아서 내일 아침에 걸어서 나갈 거예요⁠.⁠”

연성은 새봄을 내려다보았다⁠.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몸을 돌려 가장 가까운 등불로 걸어갔다⁠. 이 불을 입김으로 껐다⁠.

새봄이 연성을 보았다⁠.

황제가 다음 등불로 갔다⁠. 껐다⁠. 다음⁠. 다음⁠. 침전 안이 한 칸씩 어두워졌다⁠. 그을음 냄새가 천장으로 올라갔다⁠. 아홉 개가 꺼지자 침상 곁에 등불 하나만 남았다⁠. 연성이 이 앞에 섰다⁠. 불빛이 연성의 얼굴 한쪽만 비췄다⁠.

“⁠즉위하고 처음이야⁠. 하나만 켜는 거⁠.⁠” 연성이 말했다⁠. 말이 빠르지 않았다⁠. “⁠무섭지 않을 것 같아서⁠.⁠”

새봄이 일어났다⁠. 무릎이 조금 저렸다⁠. 황제 앞까지 걸어가 섰다⁠. 황제의 손을 잡았다⁠. 찼다⁠. 이 손을 제 뺨에 댔다⁠. 사흘 전 부어올랐던 자리였다⁠. 이제 부기는 다 빠지고 따뜻했다⁠. 황제의 손이 이 온기에 천천히 데워졌다⁠.

다음은 숨소리였다⁠. 등불 심지가 타는 소리⁠, 비단 옷깃이 서로 스치는 소리⁠, 허리끈 매듭이 풀리며 내는 작은 소리⁠. 새봄은 눈을 감았다⁠. 낮에 배운 대로 소리를 셌다⁠. 황제의 숨⁠, 제 숨⁠, 침상 널이 한 번 우는 소리⁠. 바깥 정원에서 바람이 잎을 굴리는 소리⁠. 셀 수 없게 되었을 때 세기를 그만두었다⁠.

등불 하나가 밤새 꺼지지 않았다⁠. 삼경 딱따기가 울렸을 때 새봄은 황제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황제가 잠들어 있었다⁠. 깊이 자는 숨소리를 새봄은 처음 들었다⁠.

*

아침에 동창이 왔다⁠. 당두와 졸개 여섯⁠, 그리고 보늬였다⁠. 고충겸은 뒤이어 천천히 걸어 들어와 섬돌 아래 섰다⁠.

새봄은 이미 마당에 나와 있었다⁠. 옷을 단정히 입고 머리를 빗어 올렸다⁠. 연성이 섬돌 위에 섰다⁠. 판구는 마당 귀퉁이에서 새벽 비질을 마치고 비를 든 채 서 있었다⁠.

보늬가 새봄 앞에 섰다⁠. 갸름한 얼굴에 부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언니가 며칠 전 부엌에서 조롱박 병을 품에 넣는 걸 제가 봤습니다⁠. 제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제 뺨을 쳤습니다⁠.⁠”

“⁠병은 네 소매에서 나왔어⁠.⁠” 새봄이 보늬를 똑바로 보았다⁠. “⁠네가 그걸 폐하 사발에 기울이고 있었고⁠.⁠”

“⁠그럼 그 병 어디 있어요⁠? 보여 주세요⁠.⁠”

새봄은 대답하지 않았다⁠. 병은 유가휘에게 있었다⁠. 이것을 말하면 금의위가 엮였다⁠. 이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복길이 했던 말이었다⁠.

고충겸이 섬돌 아래에서 말했다⁠.

“⁠병이 없다는군⁠. 그럼 동창에서 천천히 물어보겠네⁠.⁠” 고충겸이 당두에게 고개를 까딱했다⁠. “⁠모셔 가게⁠.⁠”

졸개 둘이 새봄의 양쪽에 섰다⁠. 이때 연성이 섬돌을 내려왔다⁠. 한 칸⁠, 두 칸⁠. 마당에 내려서서 고충겸 앞에 섰다⁠. 연성의 무릎이 굽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제독⁠. 짐이⁠…⁠… 짐이 부탁⁠…⁠…⁠.⁠”

“⁠폐하⁠.⁠”

새봄의 목소리였다⁠. 크지 않았다⁠. 졸개들 사이에서 새봄이 황제를 보고 있었다⁠.

“⁠서 계세요⁠. 발바닥에요⁠.⁠”

연성의 무릎이 멈췄다⁠. 반쯤 굽은 채로⁠. 연성은 이 사람을 보았다⁠. 그러고는 무릎을 폈다⁠. 두 발이 눈 위에 나란히 섰다⁠. 발자국의 깊이가 같았다⁠. 고충겸이 이 발을 내려다보았다⁠.

새봄이 졸개들 사이에서 걸어 나갔다⁠. 끌려가지 않았다⁠. 졸개들이 새봄을 따라 걸었다⁠. 보늬가 맨 뒤에서 따랐다⁠. 새봄은 월동문을 지날 때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고충겸이 마지막으로 나갔다⁠.

월동문 밖 회랑에서 복길의 목소리가 났다⁠. 고충겸은 대바구니를 안고 회랑 모퉁이에서 졸개 하나를 붙잡고 있었다⁠.

“⁠이거 옥에 넣어 주시오⁠. 고기만두요⁠. 저 아가씨 몫이오⁠. 당신 몫이 아니고⁠.⁠”

“⁠동창 옥에 음식 반입은⁠…⁠…⁠.⁠”

“⁠그러니까 반입 말고 그냥 들고 가요⁠. 들고 가다가 옥 앞에 놓고 와요⁠. 놓고 오는 건 반입이 아니잖소⁠?⁠” 복길이 바구니 덮개를 걷어 만두 하나를 졸개 입에 밀어 넣었다⁠. “⁠이건 당신 몫이오⁠. 하나뿐이오⁠. 나머지 하나라도 손대면 내가 다 세어 놨으니까 알아⁠.⁠”

졸개가 만두를 입에 문 채 바구니를 받아 들고 회랑 끝으로 사라졌다⁠. 복길은 빈손으로 회랑에 서 있다가 돌아서서 마당 쪽을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선방 쪽으로 걸어갔다⁠.

마당에 황제와 판구만 남았다⁠. 연성은 새봄이 나간 문을 보고 서 있었다⁠. 연성의 주먹이 소매 속에서 떨렸다⁠.

판구가 다가왔다⁠. 손에 든 싸리비를 황제의 발치 눈 위에 가로로 내려놓았다⁠. 새로 묶은 싸리였다⁠.

“⁠오늘 밤은 폐하께서 이 마당을 쓰시옵소서⁠. 잎이 깔려 있어야 하옵니다⁠. 소리가 나야 하옵니다⁠.⁠”

“⁠할아범은⁠?⁠”

판구가 허리를 폈다⁠. 굽어 있던 허리가 반쯤 펴졌다⁠. 연성은 늙은 내관이 그렇게 꼿꼿하게 선 것을 처음 보았다⁠.

“⁠소인은 오늘 밤 동창 지하로 내려가겠사옵니다⁠.⁠”

10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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