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343자)

청음정의 찻잔

황궁의 늙은 내관이 천하제일 고수였다 · 마필제

판구는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화로의 숯이 두 번 무너졌다⁠. 이불을 걷고 일어나 앉았다⁠. 감싼 발이 바닥에 닿자 얼굴 한쪽이 조금 일그러졌다가 펴졌다⁠.

“⁠폐하⁠. 정원으로 가시겠사옵니까⁠?⁠”

“⁠지금⁠? 밤인데⁠?⁠”

“⁠밤이라야 하옵니다⁠. 그 일은 밤에 있었사옵니다⁠.⁠”

연성이 일어났다⁠. 새봄이 문밖에서 등불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셋은 회랑을 지나 월동문을 넘었다⁠. 정원에는 잎이 깔려 있었고⁠, 황제의 발밑에서 잎이 사락사락 울었다⁠. 새봄의 발밑에서도 울었다⁠. 맨발에 천을 감은 늙은 내관의 발밑에서만 울지 않았다⁠.

청음정 화로에는 불이 없었다⁠. 판구는 마루 한쪽 널을 들어냈다⁠. 이 밑에서 기름 먹인 천 꾸러미 둘과 흙빛 찻주전자⁠, 그리고 작은 백자 찻잔 하나를 꺼냈다⁠. 찻잔 바닥에 마른 찻물 자국이 갈색 고리로 남아 있었다⁠.

“⁠선황 폐하께서 마지막으로 드신 잔이옵니다⁠. 씻지 않았사옵니다⁠.⁠”

연성이 찻잔을 받았다⁠. 두 손으로 받쳤다⁠. 잔은 가벼웠다⁠. 이 갈색 고리를 손가락 끝으로 한 번 쓸었다⁠.

“⁠구월 그믐 밤이었사옵니다⁠. 선황 폐하께서 등불도 없이 혼자 오셨사옵니다⁠. 기침을 오래 하셨고⁠, 차를 반 잔 드셨사옵니다⁠.⁠” 판구가 화로 앞에 꿇어앉았다⁠. “⁠그러시고는 이리 말씀하셨사옵니다⁠. ‘⁠동창이 정원 잎을 쓸자고 하더군⁠. 짐이 잠을 깬다고⁠. 짐이 못 쓸게 했네⁠.⁠’⁠”

연성의 손가락이 잔 위에서 멈췄다⁠.

“⁠그다음에 하나 더 물으셨사옵니다⁠. ‘⁠판구⁠, 자네 귀로도 못 듣는 발이 있나⁠?⁠’ 소인은 없다고 아뢰었사옵니다⁠. 폐하께서 웃으셨사옵니다⁠. 그리고 겨울만 넘기게 해 달라고⁠, 폐하를 맡기셨사옵니다⁠.⁠”

“⁠차에⁠…⁠… 무엇이 들었던 거야⁠?⁠”

“⁠아니옵니다⁠. 이튿날 아침 소인이 이 잔에 남은 찻물을 마셨사옵니다⁠. 소인은 지금 살아 있사옵니다⁠.⁠”

판구가 두 번째 꾸러미를 풀었다⁠. 흰 비단 속옷이 등불 아래 펼쳐졌다⁠. 가슴 왼쪽의 희푸른 손바닥 자국이 불빛을 받아 더 희게 보였다⁠. 새봄이 숨을 들이켰다⁠. 연성은 들이켜지 않았다⁠. 찻잔을 쥔 채 이 자국을 내려다보았다⁠. 아주 오래⁠.

“⁠가슴 병이 아니옵니다⁠. 손바닥에 맞으셨사옵니다⁠. 찬 손이옵니다⁠.⁠”

연성이 찻잔을 가슴에 대고 쪼그려 앉았다⁠. 소리는 내지 않았다⁠. 어깨가 떨렸고⁠, 떨림이 멈추자 잔을 판구에게 돌려주었다⁠. 손바닥에 찻잔 굽 자국이 둥글게 찍혀 있었다⁠.

“⁠할아범이 이거 계속 갖고 있어⁠. 나는 들고 있으면 깨뜨릴 것 같아⁠.⁠”

*

이튿날 아침 궁의 의원들 가운데 우두머리인 수석 태의가 수인전에 들었다⁠. 예순이 넘은 늙은 의원이었고⁠, 손등에 검버섯이 앉았다⁠. 뒤이어 고충겸이 따라 들어왔다⁠. 보늬가 검은 탕약 사발을 쟁반에 받쳐 들고 이 둘 사이에 섰다⁠.

태의가 황제의 손목을 짚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한참 맥을 짚다가 놓고⁠, 바닥에 엎드렸다⁠.

“⁠폐하의 맥이 허하고 가늘사옵니다⁠. 즉위 이래 밤잠을 못 이루시어 심화가 위로 오르고 기운이 아래에서 마르셨사옵니다⁠. 선황 폐하께서도 이와 같은 맥으로 시작하시어⁠…⁠…⁠.⁠” 태의의 목소리가 거기서 한 번 끊겼다⁠. “⁠백 일 동안 침전에 드시어 바깥바람을 쐬지 마시고⁠, 조회도 쉬시고⁠, 이 탕약을 하루 세 번 드시어야 하옵니다⁠.⁠”

“⁠백 일⁠?⁠” 연성이 되물었다⁠. “⁠백 일이면 대보름 지나고 봄이야⁠.⁠”

“⁠봄에 일어나시면 옥체가 단단해지실 것이옵니다⁠.⁠” 고충겸이 부드럽게 받았다⁠. “⁠그동안 조정은 신과 영왕 전하께서 살피겠사옵니다⁠. 폐하께서는 아무 걱정 마시고 누워 계시기만 하면 되옵니다⁠.⁠”

보늬가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탕약 사발을 받쳐 올렸다⁠. 김이 황제의 얼굴에 닿았다⁠. 쓴 냄새가 침전 안에 퍼졌다⁠. 판구는 문턱 밖 마당에서 비를 든 채 이 냄새를 맡았다⁠. 세탁방 가는 날 보늬에게서 나던 냄새와 같았다⁠. 이 밑에 하나가 더 있었다⁠. 달고 비린 냄새였다⁠.

연성이 사발을 받았다⁠. 받아서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손목을 뒤집었다⁠. 검은 탕약이 바닥에 쏟아져 보늬의 무릎 앞까지 번졌다⁠. 보늬가 얼굴을 숙인 채 굳었다⁠.

“⁠짐은 백 일 동안 안 누워⁠.⁠”

태의가 이마를 바닥에 찧었다⁠. 엎드린 채로 탕약이 번진 자리를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이 떨렸다⁠. 판구는 문턱 밖에서 이것을 보았다⁠. 의원이 약 엎은 자리를 보지 못하는 일은 없었다⁠. 이 약이 무엇인지 아는 의원만 그랬다⁠. 고충겸은 엎드리지 않았다⁠. 바닥에 번진 탕약을 보다가 황제를 보았다⁠.

“⁠폐하⁠. 약을 엎으시면 몸이 상하시옵니다⁠.⁠”

“⁠그럼 몸 안 상하게 비질이나 할게⁠.⁠”

연성이 일어나 문턱 밖으로 나갔다⁠. 판구 손에서 싸리비를 받아 들고⁠, 섬돌 위에서부터 쓸기 시작했다⁠. 허리로 쓸었다⁠. 팔은 따라만 갔다⁠. 싸리가 섬돌 위의 눈과 젖은 잎을 쓸어 내렸고⁠, 이것들이 한쪽으로 고르게 모여 섬돌 아래 서 있던 고충겸의 신발 위로 쏟아졌다⁠. 검은 비단 신이 눈과 잎에 덮였다⁠.

“⁠아⁠, 미안⁠. 소리가 한쪽으로만 나게 쓸었더니 그쪽이네⁠.⁠”

새봄이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떨렸다⁠. 태의는 바닥에 엎드린 채 그대로였다⁠. 고충겸은 신발 위의 잎을 털지 않았다⁠. 황제가 비를 쥔 손의 위치를 보았다⁠. 왼손이 위⁠, 오른손이 한 뼘 아래⁠. 이 손을 보다가 문턱 밖에 서 있는 늙은 내관을 보았다⁠. 판구는 허리를 굽힌 채 눈을 들지 않았다⁠.

“⁠폐하께서 비질을 다 배우셨사옵니다⁠.⁠” 고충겸이 말했다⁠. “⁠스승이 좋은가 보옵니다⁠.⁠”

*

이 밤은 구름이 달을 덮었다⁠. 수인전 지붕의 푸른 기와 위로 눈이 얇게 얼어 있었다⁠.

판구는 이경이 지나자 수인전 곁방을 나섰다⁠. 발에 감은 천을 풀고 짚신을 신었다⁠. 발가락 끝은 아직 쑤셨다⁠. 처마 끝 낙숫물 홈을 짚고 올라가 용마루 뒤쪽 그늘에 앉았다⁠. 손에는 싸리비 하나를 쥐었다⁠. 지붕 위에서 아래 마당의 잎 소리를 들었고⁠, 동시에 사방 지붕의 기와 소리를 들었다⁠.

삼경 무렵 북쪽 처마에서 기와가 울었다⁠. 아주 가볍게⁠, 두 번⁠. 줄 타는 사내의 걸음이었다⁠. 무게를 기와에 싣지 않고 기와와 기와 사이 이음매에 싣는 걸음⁠. 뒤로 조금 무거운 걸음이 따라왔다⁠. 불 먹는 사내였다⁠. 이 사람의 몸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

둘이 용마루를 넘어 침전 바로 위로 내려오려 할 때⁠, 판구가 용마루 그늘에서 일어났다⁠. 줄 타는 사내가 먼저 판구를 보았다⁠. 늙은 내관이 비를 들고 지붕 위에 서 있었다⁠. 사내가 소리 없이 칼을 뽑았다⁠.

판구는 비를 휘두르지 않았다⁠. 비 끝으로 사내 발밑의 얼어붙은 기와 한 장을 툭 건드렸을 뿐이었다⁠. 이음매가 이미 얼어 있던 기와가 이 한 번에 빠져 미끄러졌다⁠. 기와에 무게를 싣지 않는 걸음은 기와가 사라지면 디딜 데가 없었다⁠. 줄 타는 사내가 한쪽 무릎부터 꺾이며 경사진 지붕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처마 끝에서 손을 뻗었으나 얼음에 덮인 기와는 손을 받지 않았다⁠. 몸이 처마 밖 허공으로 빠졌다⁠. 아래 마당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눈과 잎이 이 몸을 받았다⁠.

불 먹는 사내가 뒤에서 덤볐다⁠. 판구는 입에 무언가를 머금고 있었다⁠. 판구는 비 자루를 반 바퀴 돌려 사내의 턱 밑을 쳤다⁠. 사내의 입에서 머금은 기름이 터져 나와 제 얼굴과 가슴을 적셨다⁠. 숨을 막고 컥컥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판구가 한 걸음 다가서자 기름 젖은 얼굴로 돌아서서 지붕 너머로 달아났다⁠. 북쪽 처마⁠, 그리고 담⁠, 그리고 소리가 멀어졌다⁠.

판구가 비를 내렸다⁠. 이때 마당에서 등불 하나가 흔들렸다⁠.

새봄이었다⁠. 새봄은 잠옷 위에 겉옷만 걸치고 등불을 들고 있었다⁠. 등불이 떨어진 사내를 비췄고⁠, 다음 위로 올라가 지붕 끝을 비췄다⁠. 비를 든 늙은 내관이 용마루 곁에 서 있었다⁠. 맨손으로 처마를 짚고 올라간 자리였다⁠.

새봄은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등불을 든 손이 한 번 크게 흔들렸다가 멈췄다⁠. 등불을 땅에 내려놓고⁠, 떨어진 사내 곁으로 걸어갔다⁠. 사내는 목이 이상한 각도로 꺾여 있었다⁠. 이 사람은 이 얼굴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판구가 지붕에서 내려올 때까지 기다렸다⁠.

판구가 처마 홈을 짚고 내려와 마당에 섰다⁠. 짚신이 눈을 밟았다⁠. 이번에는 소리가 났다⁠.

“⁠할아버지⁠.⁠” 새봄이 아주 작게 말했다⁠. “⁠폐하는 주무세요⁠. 오늘은 등불을 여섯 개만 켜고 주무셨어요⁠.⁠”

“⁠그럼 이건 여섯 개 몫이오⁠.⁠” 판구가 사내의 발목을 쥐었다⁠. “⁠동창이 찾으러 오기 전에 정원 연못으로 옮기겠소⁠. 궁녀님은 등불을 끄고 들어가시오⁠. 아무것도 못 봤소⁠.⁠”

“⁠봤어요⁠.⁠” 새봄이 등불을 집어 들고 입김으로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 새봄의 목소리만 남았다⁠. “⁠봤으니까⁠, 이제 제가 할아버지 몫까지 거짓말할게요⁠.⁠”

판구는 사내를 어깨에 메고 월동문 쪽으로 걸었다⁠. 백이십 근이 넘는 몸이 늙은 어깨 위에서 흔들리지 않았다⁠. 회랑 모퉁이에서 한 번 돌아보았다⁠. 불 꺼진 등불을 든 새봄이 아직 이 자리에 서 있었다⁠.

*

사경 북이 울릴 때 동창 아문 안채 마루에 불 먹는 사내가 엎드려 있었다⁠. 얼굴과 가슴이 기름에 젖어 번들거렸고⁠, 턱 밑이 퍼렇게 부어올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사람은 말을 할 때마다 침과 기름을 함께 흘렸다⁠.

“⁠지붕에⁠…⁠… 늙은이가 있었습니다⁠. 비를 들고⁠. 비를 휘두르지도 않았는데 형님이 미끄러져 떨어졌습니다⁠. 기와가 저 혼자 빠졌습니다⁠.⁠”

“⁠그 늙은이가 어떻게 지붕에 올라와 있었나⁠?⁠”

“⁠모르겠습니다⁠. 올라오는 소리를 못 들었습니다⁠.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고충겸은 화로 없는 방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사내의 퍼렇게 부은 턱을 장갑 낀 손가락으로 들어 올려 보았다⁠. 비 자루 끝이 남긴 자국이 동전만 하게 둥글었다⁠. 이 사람은 손을 놓았다⁠.

“⁠이제 그 늙은이를 치러 가지 말게⁠. 다섯이 남았나⁠? 다섯이 다 가도 지붕에서 하나씩 떨어질 거야⁠.⁠” 고충겸이 창밖 어둠을 보았다⁠. 수인전 쪽 하늘은 검었다⁠. “⁠늙은이를 치지 말고⁠, 늙은이가 지키는 것을 치게⁠. 비 한 자루로 지붕 하나는 지키지⁠. 지붕이 둘이면⁠? 셋이면⁠?⁠”

당두가 문턱에서 고개를 들었다⁠.

“⁠어디부터 치오리까⁠?⁠”

“⁠어제 내 앞에서 손이 떨리던 사람부터⁠.⁠” 고충겸이 말했다⁠. “⁠태의 집이 도성 어디에 있는지 알아 두게⁠. 식구가 몇인지도⁠.⁠”

*

새벽에 판구는 청류원 돌길에 서 있었다⁠. 연못 얼음이 다시 한 번 깨졌다가 얼어붙은 자리 위로 잎이 덮여 있었다⁠. 비는 쥐었지만 쓸지는 않았다⁠.

월동문 쪽에서 발소리가 났다⁠. 늙고 느린 걸음이었다⁠. 한 걸음마다 멈추고⁠, 뒤를 돌아보고⁠, 다시 걸었다⁠. 등불 없이 오는 사람이었다⁠.

수석 태의였다⁠. 태의는 털옷 깃을 턱까지 올리고 있었다⁠. 판구 앞에 와서 태의는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검버섯 앉은 손이 소매 밖에서 떨렸다⁠. 어제 황제의 손목을 짚을 때와 같은 떨림이었다⁠.

“⁠정원 내관⁠. 자네가 폐하께 비질을 가르친다지⁠.⁠” 태의가 입김을 뱉었다⁠. “⁠어제 폐하 신발에 잎을 쏟을 때⁠, 고충겸이 자네를 보았어⁠. 나는 그 눈을 알아⁠. 두 달 전에도 그 눈을 봤으니까⁠.⁠”

판구는 비를 쥔 채 서 있었다⁠.

“⁠나는 선황 폐하의 가슴을 보았네⁠.⁠” 태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돌아가신 그날 아침⁠, 옷을 벗겨 드렸을 때 말일세⁠.⁠”

6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