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470자)

연희패의 칼

황궁의 늙은 내관이 천하제일 고수였다 · 마필제

연희 날 아침⁠, 어선방 부뚜막 앞에서 세탁방 궁녀 해솜이 밀가루 반죽을 치고 있었다⁠. 반죽이 도마에 떨어질 때마다 부뚜막 위의 솥뚜껑들이 들썩였다⁠. 왕복길이 이 곁에서 두 손을 모아 쥐고 서 있었다⁠.

“⁠아가씨⁠, 반죽은 치는 게 아니고 치대는 거요⁠. 빨래 방망이질이 아니고⁠.⁠”

“⁠세탁방에서는 다 치는데요⁠.⁠”

“⁠여긴 어선방이오⁠. 폐하 입에 들어가는 거요⁠. 폐하 입이 빨래요⁠?⁠”

해솜이 반죽을 들어 다시 내리쳤다⁠. 솥뚜껑 하나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복길은 이 뚜껑을 주워 들고 판구 쪽을 돌아보았다⁠. 판구는 부뚜막 끝에서 구리 주전자에 찻물을 받고 있었다⁠. 지난밤 해솜을 세탁방에서 데려와 복길에게 맡겼다⁠. 동창이 세탁방 계집을 찾으면⁠, 어선방에 새로 들어온 만두 빚는 궁녀를 찾는 것보다 시간이 걸릴 것이었다⁠.

“⁠형님⁠, 이 아가씨 나 줬다가 내 어선방 다 부서지겠소⁠.⁠”

“⁠사흘만 맡아 주시오⁠.⁠”

“⁠사흘이면 솥이 다 남아나지 않소⁠.⁠” 복길이 투덜거리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근데 형님⁠, 오늘 연희 차 시중을 수인전이 든다면서요⁠? 동창이 그렇게 정했다면서요⁠? 광대 놀음에 차 시중 따로 두는 거 봤소⁠? 나는 오늘 차 주전자 나르라는 명을 받았는데⁠, 이상하게 다리가 떨려요⁠.⁠”

판구는 구리 주전자 뚜껑을 닫았다⁠. 선황의 흙빛 주전자는 청음정 마루 밑에 두고 왔다⁠. 이 곁에는 기름 먹인 천에 싼 속옷 한 벌이 함께 있었다⁠.

*

정극전 뜰은 넓었다⁠. 조회 때 문무백관이 늘어서는 돌바닥이 눈을 쓸어 내 회색으로 드러났고⁠, 이 둘레로 붉은 장막이 쳐졌다⁠. 정극전 섬돌 맨 위에 황제의 자리가 놓였다⁠. 연성은 거기 앉아 있었다⁠. 이 오른쪽 한 단 아래에 선황의 아우 영왕이 앉았다⁠. 마흔 남짓에 배가 둥글고⁠, 추위를 많이 타서 털옷을 세 겹 껴입었다⁠. 왼쪽 발 내린 장막 뒤에는 태후가 있었다⁠. 사람들은 장막에 비친 그림자로만 태후를 보았다⁠.

고충겸은 섬돌 중간에 섰다⁠. 문무백관이 이 아래 두 줄로 늘어섰고⁠, 금의위 지휘사 유가휘는 뜰 가장자리 기둥 곁에 서 있었다⁠. 오늘 뜰의 호위는 동창이었다⁠. 금의위는 문밖이었다⁠.

수인전 사람들이 섬돌 위 황제 곁에 섰다⁠. 새봄이 찻잔을 받쳤고⁠, 보늬가 다과를 들었고⁠, 판구는 구리 주전자를 들고 황제 뒤 한 걸음 떨어져 섰다⁠. 섬돌 아래에서 복길이 숯 화로를 지키며 주전자가 식으면 바꿔 올렸다⁠.

북이 울리고 연희패가 들어왔다⁠. 불 먹는 사내가 횃불을 입에 넣었다 빼자 백관이 웃었다⁠. 줄 타는 사내가 정극전 처마 끝에서 처마 끝까지 맨 줄 위를 걸어갔다⁠. 판구는 이 발을 보았다⁠. 줄이 출렁이지 않았다⁠. 몸이 가볍다는 것이 아니라⁠, 무게를 줄에 싣지 않고 다른 데 싣는 걸음이었다⁠. 연희패 열둘에서 연못과 세탁방에서 빠진 셋을 덜면 아홉이었고⁠, 뜰에 나온 아홉이 다 그런 걸음이었다⁠.

마지막으로 칼잡이가 나왔다⁠. 키가 작고 어깨가 넓은 사내였다⁠. 이 사람은 판자 앞에 사람을 세우고 이 머리 위 사과를 칼로 맞혔다⁠. 판자 앞에 선 동창 졸개의 다리가 후들거리자 백관이 또 웃었다⁠.

이때 고충겸이 섬돌 위로 한 단 올라섰다⁠.

“⁠폐하⁠. 선황 폐하께서 즉위하시던 해에도 이 연희가 있었사옵니다⁠. 그때 선황께서는 친히 손바닥에 감 하나를 올리시고 칼잡이의 칼을 받으셨지요⁠. 백관이 그것을 보고 새 임금의 담을 알았사옵니다⁠.⁠” 고충겸이 허리를 숙였다⁠. “⁠폐하께서도 그리하시면 백관이 오늘 일을 오래 기억하겠사옵니다⁠.⁠”

뜰이 조용해졌다⁠. 연성의 손이 의자 팔걸이를 쥐었다⁠. 장막 뒤 태후의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영왕이 털옷 깃 속에서 목을 빼고 연성을 보았다⁠. 이 얼굴은 황제가 거절하기를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거절하면 겁쟁이 임금이었다⁠.

“⁠그래⁠.⁠” 연성이 일어섰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감 줘⁠.⁠”

새봄이 다과 접시에서 붉은 감 하나를 집어 황제의 오른손 바닥에 올렸다⁠. 새봄의 손가락이 황제의 손목을 한 번 꽉 쥐었다 놓았다⁠. 연성은 섬돌 맨 위 칸에 서서 팔을 앞으로 뻗었다⁠. 감이 손바닥 위에서 아주 작게 흔들렸다⁠.

칼잡이가 뜰 한가운데에서 섬돌을 올려다보았다⁠. 스무 걸음⁠. 연성이 오른발을 뒤로 빼고 디딤발인 왼발을 돌바닥에 굳게 박았다⁠. 칼을 쥔 손이 어깨 뒤로 넘어갔다⁠. 판구는 이 칼날의 각도를 보았다⁠. 감이 아니었다⁠. 손목 한 뼘 위⁠, 황제의 목이었다⁠.

판구가 주전자를 들고 한 걸음 내려섰다⁠. 그리고 섬돌 모서리에서 발을 헛디뎠다⁠.

늙은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구리 주전자가 손을 떠나 허공에서 한 바퀴 돌았고⁠, 끓는 찻물이 섬돌 아래로 길게 쏟아졌다⁠. 찻물은 계단을 타고 흘러내려 뜰 돌바닥에 부채꼴로 퍼졌다⁠. 이 끝이 칼잡이의 왼발 밑까지 닿았다⁠. 언 돌바닥 위에 쏟아진 뜨거운 물은 한순간 김을 뿜고⁠, 다음 순간 미끄러운 살얼음 막을 깔았다⁠.

칼잡이의 손이 앞으로 나오는 바로 이때 왼발이 미끄러졌다⁠. 몸이 반 뼘 기울었다⁠.

칼이 날았다⁠. 황제의 목이 아니라 이 위로⁠, 한 자 위로 지나가 정극전 붉은 기둥에 꽂혔다⁠. 칼자루가 부르르 떨면서 낮게 울었다⁠. 감은 연성의 손바닥에서 굴러떨어져 섬돌을 타고 통통 튀어 내려갔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백관이 웅성거렸다⁠. 연성은 손을 뻗은 그대로 굳어 있었다⁠. 손바닥이 텅 빈 채였다⁠.

섬돌 중간에 엎어진 판구가 목청을 높였다⁠.

“⁠아이고⁠, 늙은이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요⁠! 발이⁠, 발이 저 혼자 미끄러져서⁠…⁠… 폐하⁠, 이 늙은이 다리를 잘라 주십시오⁠!⁠”

새봄이 황제의 팔을 내려 주었다⁠. 황제의 손이 차갑게 젖어 있었다⁠. 유가휘가 기둥 곁에서 판구의 엎어진 모양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유가휘의 입가가 한 번 움찔했다⁠.

*

고충겸이 섬돌을 내려가 칼잡이 앞에 섰다⁠. 칼잡이는 무릎을 꿇었다⁠. 고충겸은 이 사람을 내려다보지도 않고 동창 졸개들에게 말했다⁠.

“⁠폐하 앞에서 손을 놓친 자다⁠. 곤장 서른을 쳐서 궁 밖으로 내라⁠.⁠”

졸개들이 칼잡이를 끌어냈다⁠. 칼잡이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고충겸은 돌아서서 섬돌 위의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문무백관 쪽으로 몸을 틀었다⁠.

“⁠백관은 보셨을 것이오⁠. 즉위 두 달 만에 폐하의 곁이 이토록 위태롭소⁠. 지난밤엔 담 넘은 도둑이 침전 담 밑까지 왔고⁠, 오늘은 광대의 칼이 폐하 머리 위로 지나갔소⁠.⁠” 고충겸의 목소리가 뜰 끝까지 고르게 퍼졌다⁠. “⁠하여 신은 청하오⁠. 영왕 전하께서 섭정을 맡으시어 조정을 살피시고⁠, 폐하께서는 옥체를 보전하시어 침전에서 한동안 쉬시는 것이 사직을 위한 길이라 여기오⁠.⁠”

백관 가운데 다섯이 먼저 엎드렸다⁠. 다음 열이 따라 엎드렸다⁠. 영왕이 털옷 깃을 여미며 일어났다⁠.

“⁠나⁠, 나는 그런 무거운 짐을 원하지 않으나⁠…⁠… 사직이 원한다면⁠…⁠… 형님께서 가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영왕이 말을 하다 말고 기둥에 꽂힌 칼을 보았다⁠. 영왕은 다시 앉았다⁠. “⁠그런데 섭정은 어디서 지내오⁠? 수인전 근처면 나는 좀⁠…⁠…⁠.⁠”

몇몇 대신이 엎드린 채로 어깨를 떨었다⁠. 웃음을 참는 어깨였다⁠.

연성이 섬돌 끝으로 걸어 나왔다⁠. 무릎이 떨리는 것이 판구 자리에서 보였다⁠. 판구는 엎어진 그대로 고개를 조금 들었다⁠. 황제가 아래를 보았고⁠, 늙은 내관과 눈이 마주쳤다⁠. 판구는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숨을 한 번 길게 내쉬었을 뿐이었다⁠. 연성이 이 숨을 따라 내쉬었다⁠.

“⁠짐은 침전에 들어앉지 않겠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았다⁠. “⁠칼은 짐의 머리 위로 지나갔고⁠, 짐은 여기 서 있다⁠. 섭정은 없다⁠.⁠”

뜰이 다시 조용해졌다⁠. 장막 뒤 태후의 그림자가 처음으로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고충겸은 한동안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아주 천천히 엎드렸다⁠.

“⁠폐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신은 따르겠사옵니다⁠. 다만 오늘 같은 광대가 다시는 궁에 들지 못하도록 궁문 열쇠를 동창이 맡겠사옵니다⁠. 들고 나는 자를 신이 직접 살피겠사옵니다⁠.⁠” 고충겸이 고개를 들지 않고 말했다⁠. “⁠폐하께서 침전에서 쉬지 않으시겠다면⁠, 궁문이라도 닫아 두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연성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한 번 거절한 자리에서 두 번 거절하면⁠, 고충겸이 엎드린 채로 백관 앞에 황제를 고집 센 아이로 세울 것이었다⁠. 연성은 이것을 알았다⁠.

“⁠…⁠…그렇게 해⁠.⁠”

궁문지기 상궁이 섬돌 아래에서 열쇠 꾸러미를 받쳐 들고 올라왔다⁠. 구리 열쇠 여덟 개가 한 고리에 꿰여 있었다⁠. 이것이 고충겸의 손에 넘어가는 소리가 뜰에 짤랑 울렸다⁠. 고충겸이 열쇠를 쥐자 구리 고리 겉에 하얀 김이 서렸다가 사라졌다⁠.

*

백관이 섬돌 아래로 물러나는 동안 유가휘가 정극전 기둥으로 걸어갔다⁠. 기둥에 박힌 칼을 뽑았다⁠. 칼날이 나무에서 빠지며 끼익 울었다⁠. 이 사람은 칼날을 햇빛에 비춰 보고⁠, 날 끝이 한쪽으로만 갈려 있는 것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감을 맞히려는 칼은 그렇게 갈지 않았다⁠. 사람의 목을 긋고 지나가려는 칼이 그랬다⁠.

유가휘는 칼을 동창 졸개에게 건네고 섬돌 쪽으로 걸었다⁠. 판구가 계단 중간에서 빈 주전자를 주워 들고 있었다⁠. 유가휘가 이 곁을 지나며 걸음을 늦췄다⁠.

“⁠열두 걸음 다음은 스무 걸음이구려⁠.⁠” 유가휘가 앞을 본 채 말했다⁠. “⁠칼잡이 디딤발 밑까지 찻물이 닿으려면 주전자를 어느 높이에서 어느 쪽으로 쏟아야 하는지⁠, 나는 모르겠소⁠. 영감은 아시오⁠?⁠”

“⁠늙은이는 넘어질 줄만 압니다요⁠.⁠”

“⁠그렇지⁠. 넘어지는 데도 재주가 있지⁠.⁠” 유가휘가 짧게 웃었다⁠. “⁠빚에 이자가 붙었소⁠. 그리고 하나 알아 두시오⁠. 궁문 열쇠가 동창으로 갔으니⁠, 이제 금의위는 밤마다 문밖에서 영감 넘어지는 소리만 듣게 되오⁠. 문 안에서 무슨 일이 나든 나는 열쇠가 없어 못 들어가오⁠. 그러니 다음부터는 덜 크게 넘어지시오⁠.⁠”

유가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섬돌을 내려갔다⁠. 붉은 비단옷 등에 눈송이가 하나 앉았다가 녹았다⁠.

섬돌 맨 위에서는 연성이 다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연성의 오른손이 팔걸이 밑으로 내려가 있었는데⁠, 새봄의 손이 이 손을 소매 그늘에서 쥐고 있었다⁠. 황제의 손은 아직 젖어 있었다⁠. 새봄이 손을 놓지 않았다⁠.

*

연희가 파하고 백관이 흩어질 때⁠, 동창 당두가 섬돌 아래 화로 곁으로 갔다⁠. 복길이 숯을 정리하고 있었다⁠.

“⁠어선방 왕복길⁠. 오늘 차는 네가 날랐지⁠?⁠”

“⁠예⁠, 예⁠. 제가 날랐지요⁠. 차는 제가 날랐지만 쏟은 건⁠…⁠…⁠.⁠”

“⁠궁의 큰 의식에서 끓는 차를 쏟아 폐하의 옥체를 위태롭게 하고 연희를 그르쳤다⁠.⁠” 당두가 졸개 둘에게 턱짓했다⁠. “⁠동창으로 데려가⁠.⁠”

졸개들이 복길의 양팔을 잡았다⁠. 숯 집게가 돌바닥에 떨어졌다⁠. 복길이 버둥거리지도 않고 당두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섬돌 위를 한 번 보았다⁠. 판구가 섬돌 중간에 빈 구리 주전자를 든 채 서 있었다⁠.

복길이 목소리를 높였다⁠.

“⁠예⁠, 맞소⁠! 내가 쏟았소⁠! 주전자 바꿔 올리다가 내가 손을 놓쳤소⁠. 저 늙은이는 아무것도 몰라요⁠. 귀도 어둡고 다리도 후들거려서⁠, 내가 주전자를 건네다가 같이 휘청한 거요⁠. 내가 쏟은 거요⁠!⁠”

당두가 판구 쪽을 돌아보았다⁠. 고충겸도 섬돌 위에서 돌아보았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충겸은 판구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복길이 판구에게 고개를 저었다⁠. 아주 작게⁠, 두 번⁠.

판구가 섬돌을 내려왔다⁠. 한 칸씩⁠, 늙은이 걸음으로⁠. 빈 주전자를 든 채 당두와 복길 사이에 섰다⁠.

“⁠그 차는 제가 쏟았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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