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383자)

잿물 항아리 속의 옷

황궁의 늙은 내관이 천하제일 고수였다 · 마필제

화로의 숯이 한 번 내려앉았다⁠. 판구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산에 있었소⁠.⁠”

“⁠무슨 산이오⁠?⁠”

“⁠눈이 많이 오는 산이오⁠.⁠” 판구가 부젓가락으로 숯을 뒤집었다⁠. “⁠지휘사 나리⁠. 그 조각을 동창에 주시면 내일 아침부터 이 늙은이는 정원을 못 쓰오⁠. 그러면 새벽에 폐하 마당에서 비 소리가 안 나오⁠. 비 소리가 안 나면 폐하가 못 주무시고⁠, 못 주무시면 동창이 폐하 병을 말하기 시작할 거요⁠. 그다음은 나리가 셈하시오⁠. 나는 셈을 못 하오⁠.⁠”

유가휘가 한참 판구를 보았다⁠. 그러고는 사기 조각을 손수건에 도로 쌌다⁠.

“⁠셈은 내가 하지⁠. 이건 빚으로 두겠소⁠. 이자는 내가 정하고⁠.⁠” 유가휘가 일어서다 말고 문턱에서 돌아섰다⁠. “⁠공짜로 하나 드리리다⁠. 동창이 이틀째 북쪽 세탁방을 들쑤시고 있소⁠. 선황 폐하께서 마지막 밤에 입으셨던 속옷을 누가 빨았느냐고⁠, 태웠느냐고⁠. 두 달 지난 빨래를 동창 제독이 왜 찾는지⁠, 영감은 아시오⁠?⁠”

판구는 대답하지 않았다⁠. 유가휘는 이 얼굴을 끝까지 보고 나서야 문을 닫았다⁠. 잎 밟는 소리가 정원을 건너 멀어졌다⁠. 일부러 크게 밟는 소리였다⁠.

*

새벽에 판구는 수인전 마당을 쓸었다⁠. 황제가 침전 문을 열고 나와 섬돌에 쪼그려 앉아 이 소리를 들었다⁠. 어제보다 눈 밑이 덜 거뭇했다⁠. 판구가 마당을 반쯤 쓸었을 때 연성이 빗자루를 하나 더 들고 내려왔다⁠. 어선방 부뚜막을 쓸던 작은 비였다⁠. 새봄이 구해 왔다고 했다⁠.

“⁠어제 그거⁠, 허리로 쓰는 거⁠. 다시 해 봐⁠.⁠”

황제는 판구 뒤를 따라 쓸었다⁠. 판구가 한 번 쓸면 연성도 한 번 쓸었다⁠. 판구가 멈추면 연성도 멈췄다⁠. 세 번째로 멈췄을 때 연성의 비가 판구의 발뒤꿈치를 쳤다⁠.

“⁠폐하⁠, 앞사람 발은 쓸지 마시옵소서⁠.⁠”

“⁠발도 마당에 있잖아⁠.⁠”

침전 처마 밑에서 보늬가 이 둘을 보고 있었다⁠. 손에 탕약 쟁반을 들고 있었는데 김이 다 식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판구가 이 앞을 지나며 허리를 숙였다⁠. 쓴 약재 냄새가 났다⁠. 어제보다 진했다⁠.

*

세탁방은 태극궁 북쪽 끝⁠, 어선방 뒷담 너머에 있었다⁠. 커다란 가마솥 여섯 개가 하루 종일 끓었고⁠, 안마당에는 잿물을 담근 항아리가 사람 키만 한 것으로 스무 개 줄지어 있었다⁠. 잿물은 짚과 나뭇재를 우려낸 물로⁠, 손을 오래 담그면 살갗이 벗겨졌다⁠. 세탁방 궁녀들의 손은 다 붉었다⁠.

왕복길이 만두 바구니를 앞세워 들어갔다⁠.

“⁠상궁 마마님⁠! 어선방 왕만두요⁠! 오늘 고기만두가 남았는데 갈 데가 없어서⁠, 세탁방 마님들 손이 고우시다는 말을 듣고⁠…⁠…⁠.⁠”

“⁠손이 고와⁠? 이 손이⁠?⁠” 세탁방을 다스리는 늙은 상궁이 붉게 튼 손을 펴 보였다⁠. “⁠눈이 삐었으면 만두나 두고 가⁠.⁠”

“⁠아이고⁠, 만두는 두고 가지⁠. 나만 두고 가면 안 되나⁠?⁠”

상궁이 웃음을 참으며 바구니를 받았다⁠. 복길은 이 틈에 상궁 옆에 붙어 앉아 수다를 시작했다⁠. 어선방 숯 값⁠, 태후전 수라에 들어간 송이버섯⁠, 동창 광대들이 밥을 세 그릇씩 먹는다는 이야기⁠. 상궁의 귀가 그쪽으로 다 갔다⁠.

“⁠그 광대들이 말이오⁠, 불 먹는 놈은 밥을 안 먹어요⁠. 불 먹었으니 배부르대⁠. 그래서 그놈 몫을 칼 던지는 놈이 먹어⁠. 칼 던지는 놈은 밥을 두 그릇 먹고 칼을 세 자루 먹⁠…⁠…아니⁠, 칼은 던지고⁠.⁠”

“⁠칼을 왜 먹어⁠?⁠”

“⁠그러니까 안 먹는다니까요⁠, 마님⁠. 내가 말이 헛나왔지⁠. 만두 먹다 보면 혀가 꼬여요⁠. 하나 더 드슈⁠.⁠”

상궁이 만두를 하나 더 집었다⁠. 복길은 판구 쪽을 곁눈으로 한 번 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태후전 상궁이 숨겨 둔 꿀단지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는 끝날 줄 몰랐다⁠.

판구는 그사이 안마당을 지나 맨 끝 가마솥 앞으로 갔다⁠. 스물두셋쯤 되는 궁녀 하나가 장대로 솥 안의 빨래를 뒤집고 있었다⁠. 팔뚝까지 걷어붙인 소매 아래 두 손이 유난히 붉었고⁠, 손등에 덴 자국이 여럿 있었다⁠. 해솜이었다⁠. 복길이 오는 길에 일러 준 이름이었다⁠.

“⁠정원 내관이 여기 왜 와요⁠?⁠”

“⁠만두 따라왔소⁠.⁠”

“⁠만두는 저쪽이에요⁠.⁠” 해솜이 장대를 솥 깊이 찔러 넣었다⁠. 김이 확 올라왔다⁠. “⁠동창이 보냈어요⁠? 아니면 금의위⁠? 이틀 동안 둘이 번갈아 왔어요⁠.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태우라는 건 다 태웠어요⁠.⁠”

판구는 솥 곁 빨래 바구니에서 홑옷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것을 펴지 않고⁠, 왼쪽 소매부터 안으로 접고 오른쪽 소매를 이 위에 얹은 다음 반으로 접었다⁠. 그러고는 바구니에 도로 넣었다⁠.

해솜의 장대가 멈췄다⁠.

“⁠선황 폐하께서는 벗은 옷을 그렇게 접어 내놓으셨지요⁠. 세탁방 사람이 펴기 쉽게⁠.⁠” 판구가 낮게 말했다⁠. “⁠청음정에서 차를 드시고 가실 때 겉옷을 그렇게 접어 두고 가신 적이 있소⁠. 내가 그 겉옷을 이리로 보냈지⁠.⁠”

해솜은 오래 말이 없었다⁠. 솥 안에서 빨래가 끓는 소리만 들렸다⁠. 장대를 솥에 걸쳐 놓고 소매로 얼굴의 김을 닦았다⁠.

“⁠일곱 해 동안 빨았어요⁠. 다른 전각 옷은 다 뭉쳐서 내려와요⁠. 그분 옷만 접혀서 왔어요⁠. 그런데 마지막 날 아침에 내려온 속옷은 접혀 있지 않았어요⁠. 동창 사람이 들고 와서 태우라고 했어요⁠.⁠” 해솜이 안마당 맨 끝 항아리를 턱으로 가리켰다⁠. “⁠안 태웠어요⁠. 접혀 있지 않은 걸 태울 수가 없었어요⁠. 그날 밤에 와요⁠. 낮에는 사람이 많아요⁠.⁠”

*

세탁방은 밤에도 가마솥 두 개를 끓였다⁠. 새벽에 각 전각으로 올라갈 빨래를 삶는 솥이었다⁠. 안마당은 김으로 가득 차서 세 걸음 앞이 보이지 않았다⁠. 빨랫줄마다 젖은 이불 홑청이 늘어져 있었다⁠.

판구는 빨랫줄 사이 그늘에 장대 하나를 쥐고 서 있었다⁠. 빨래를 널고 걷는 데 쓰는 긴 대나무 장대였다⁠. 칼이 아니었다⁠.

이경이 지났을 때 해솜이 등불 없이 맨 끝 항아리 앞으로 갔다⁠. 항아리 뚜껑을 밀었다⁠. 잿물 냄새가 김 속으로 퍼졌다⁠.

이때 세탁방 뒷문 쪽에서 소리가 났다⁠. 문빗장이 안쪽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누군가 이미 안에 들어와 있다가 다른 사람들을 들이는 소리⁠. 발소리 셋⁠. 하나는 무겁고 숨이 거칠었다⁠. 동창 당두였다⁠. 나머지 둘은 소리가 거의 없었다⁠. 판구는 이 둘을 알았다⁠. 지난밤 얼음 밑으로 빠진 자와 같은 걸음이었다⁠.

“⁠세탁방 해솜⁠.⁠” 당두의 목소리가 김 속에서 울렸다⁠. “⁠제독 마마께서 물을 것이 있으시다⁠. 나와라⁠. 순순히 나오면 아프지 않다⁠.⁠”

해솜이 항아리 곁에 웅크렸다⁠. 당두가 등불을 들고 다가왔다⁠. 이 양옆으로 검은 그림자 둘이 김을 가르며 벌어졌다⁠. 하나는 왼쪽 빨랫줄 밑으로⁠, 하나는 오른쪽 가마솥 뒤로⁠.

왼쪽 그림자가 첫 번째 홑청 밑을 지날 때 이 홑청이 줄에서 떨어졌다⁠. 물을 먹은 무거운 천이 그림자의 머리와 어깨를 통째로 덮었다⁠. 천 속에서 칼이 번뜩였지만 젖은 천은 쉽게 갈라지지 않았다⁠. 이 위로 장대 끝이 한 번 내려쳤다⁠. 천에 싸인 머리가 꺾였고⁠, 그림자는 그대로 잿물 함지에 처박혔다⁠. 잿물이 튀는 소리와 비명이 함께 났다⁠.

오른쪽 그림자가 소리 나는 쪽으로 날아들었다⁠. 김 속에서 칼날이 수평으로 그어졌다⁠. 판구는 장대를 세워 이 칼날을 받았다⁠. 대나무가 반쯤 갈라지며 칼을 물었다⁠. 이 짧은 틈에 칼날 끝이 판구의 왼팔을 스쳤다⁠. 소매가 갈라지고 뜨거운 것이 손목까지 흘렀다⁠. 판구는 장대를 놓았다⁠. 칼을 문 장대가 무게를 잃고 기울자 그림자의 손목도 따라 기울었다⁠. 판구의 오른손이 이 팔꿈치 안쪽을 짚고 끓는 가마솥 쪽으로 밀었다⁠. 힘은 많이 쓰지 않았다⁠. 그림자가 제 무게를 따라 솥 가장자리에 옆구리를 박았고⁠, 끓는 물이 넘쳐 판구의 다리에 쏟아졌다⁠.

당두가 등불을 높이 들었다⁠. 불빛은 김에 막혀 퍼지기만 했다⁠. 본 것은 넘어진 부하 둘과⁠, 김 속에서 흔들리는 빨래 홑청들뿐이었다⁠.

“⁠누구냐⁠! 동창의 일을 막는 놈이 누구야⁠!⁠”

대답 대신 빨랫줄 하나가 끊어졌다⁠. 젖은 홑청 여섯 장이 한꺼번에 당두의 등불 위로 쏟아졌다⁠. 불이 꺼졌다⁠. 어둠과 김 속에서 당두는 제 부하들의 신음 소리를 향해 더듬어 갔고⁠, 둘을 하나씩 끌고 뒷문으로 물러났다⁠. 문을 나서기 전에 소리쳤다⁠.

“⁠세탁방 계집⁠! 오늘은 귀신이 지켰지만 내일은 아니다⁠!⁠”

뒷문이 닫혔다⁠.

*

동창 아문 안채는 불을 많이 켜지 않았다⁠. 고충겸은 화로 하나 없는 방에서 앉아 있었고⁠, 이 방은 바깥보다 차가웠다⁠. 당두가 문턱에 무릎을 꿇었다⁠. 뒤쪽 마루에 살수 둘이 눕혀져 있었다⁠. 하나는 잿물에 얼굴을 덴 채 목이 돌아가지 않았고⁠, 하나는 끓는 물에 두 다리가 익어 이를 갈았다⁠.

“⁠귀신이었습니다⁠, 제독 마마⁠. 김 속에서 빨랫줄이 혼자 끊어지고 홑청이 혼자 떨어졌습니다⁠. 사람 그림자는 하나도 못 봤습니다⁠.⁠”

고충겸은 당두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일어나 다리를 덴 살수 곁에 쪼그려 앉았다⁠. 살수의 오른팔을 들어 소매를 걷었다⁠. 팔꿈치 안쪽에 엄지 하나만 한 멍이 푸르게 올라와 있었다⁠. 이 사람은 이 멍 위에 제 엄지를 대 보았다⁠. 크기가 거의 같았다⁠. 고충겸의 손이 닿자 살수가 몸을 떨었다⁠. 고충겸의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마다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귀신은 팔꿈치 안쪽을 짚지 않네⁠. 여기를 짚으면 칼 든 팔이 제 무게로 꺾여⁠. 힘을 안 쓰고 사람을 넘기는 손이지⁠.⁠” 고충겸이 손을 거두었다⁠. “⁠늙은 손이야⁠.⁠”

“⁠세탁방 계집은 다시 잡아 오겠습니다⁠.⁠”

“⁠두게⁠. 계집은 이제 아무 데도 못 가⁠.⁠” 고충겸이 창 쪽으로 걸어갔다⁠. 창밖으로 서쪽 하늘에 청류원 버드나무 끝이 보였다⁠. “⁠즉위 축하 연희를 앞당기게⁠. 모레 정극전 뜰이야⁠. 폐하께서 직접 보시게 하고⁠, 차 시중은 수인전 사람들이 들게 해⁠. 귀신이 낮에도 나오는지 보세⁠.⁠”

*

판구는 왼팔을 빨래 끈으로 묶었다⁠. 피가 끈에 배어 나왔다⁠. 해솜이 이것을 보았다⁠.

“⁠그 팔⁠, 내일 아침에 빨래로 내려오면 저는 뭐라고 해요⁠?⁠”

“⁠정원 내관이 장작 패다 찍었다고 하시오⁠.⁠”

“⁠정원에 장작이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늙은이가 헛손질을 한 거요⁠.⁠”

해솜은 더 묻지 않고 항아리 속으로 팔을 넣었다⁠. 해솜의 손이 잿물 바닥까지 내려갔다⁠. 붉은 팔이 어깨까지 잠겼다가 기름 먹인 천 꾸러미 하나를 끌어 올렸다⁠.

꾸러미를 풀자 흰 비단 속옷 한 벌이 나왔다⁠. 두 달 동안 잿물 속에 있었는데도 옷감은 흰빛을 잃지 않았다⁠. 다만 가슴 왼쪽 한 자리만 달랐다⁠.

손바닥 하나만 한 자리였다⁠. 다섯 손가락의 끝이 다른 데보다 깊게 박혀 있었고⁠, 이 자리의 비단이 희푸르게 바래서 손을 대면 바스러질 것처럼 삭아 있었다⁠. 판구가 손끝을 이 위에 올렸다⁠. 잿물에 담겨 있던 다른 자리는 미지근했는데⁠, 이 손바닥 자리만 겨울 쇠처럼 찼다⁠.

해솜이 판구의 손가락이 멈춘 것을 보았다⁠.

“⁠뭐예요⁠? 그 자국⁠.⁠”

판구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끝을 떼지도 않았다⁠. 이 다섯 손가락의 간격과⁠, 엄지가 비스듬히 벌어진 각도를 알았다⁠. 마흔 해 전 북쪽 산 위에서 이 손을 쓰는 문파의 사람들을 하나씩 찾아 끝냈다⁠. 찬 기운을 손바닥에 실어 사람을 얼려 죽이는 한음장⁠, 이것을 쓰는 한음문은 이 겨울에 산 위에서 없어졌다⁠.

이 산을 내려올 때 판구의 귀에 남은 것은 숨소리 하나였다⁠. 시신 더미 밑에서 누군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 판구는 이 소리를 듣고도 지나갔다⁠. 얼굴은 보지 않았다⁠.

3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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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벽세시2026.10.25· 3화

    잿물 항아리에 옷을 넣어 둔 게 피 묻은 옷을 빼려는 거예요?

    • 마필제작가2026.10.26

      잿물이 옛날 세제라서 그 짐작이 자연스러워요. 누구 옷인지가 더 중요합니다.

잿물 항아리 속의 옷 · 황궁의 늙은 내관이 천하제일 고수였다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