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334자)
열나흘 밤
황궁의 늙은 내관이 천하제일 고수였다 · 마필제
태후의 손끝에서 염주 알 하나가 넘어갔다.
“제독의 청은 대보름 아침에 듣겠소. 섭정과 함께.” 태후가 고충겸을 보았다. “선황의 마지막 밤은 선황의 아들이 앉은 자리에서 묻는 것이 맞소. 그날 아침 정극전에서 황제도 듣고 백관도 듣고 나도 듣겠소. 그때까지 저 정원 내관은 아무 데도 가지 않소. 정원에 있소.”
고충겸이 허리를 숙였다. 아주 천천히.
“마마의 뜻이 그러하시면.”
판구는 화로 곁에서 주전자 손잡이를 놓았다. 손바닥이 붉게 데어 있었다.
*
정월 열나흘 오후, 서쪽 쪽문으로 어선방 짐 수레 세 대가 들어왔다. 대보름 오곡밥에 쓸 찹쌀과 팥, 묵은 나물을 실은 수레였다. 짐꾼이 일곱이었다. 모두 앞치마를 둘렀고, 머리에 수건을 썼다. 쪽문을 지키던 동창 문지기가 짐꾼 하나를 붙잡았다.
“어선방 짐꾼이 이렇게 어깨가 넓었나?”
“찹쌀 가마니를 지다 보면 넓어지오.” 맨 앞 수레를 끌던 왕복길이 붕대 감은 손을 흔들었다. “문지기 양반, 대보름에 오곡밥 드시오? 이 찹쌀이 그 찹쌀이오. 지금 막으면 내일 아침 동창 밥에 찹쌀 없소.”
문지기가 손을 놓았다. 수레가 들어갔다.
어선방 뒤뜰에서 짐꾼들이 수건을 벗었다. 금의위 무관 여섯과 유가휘였다. 유가휘가 앞치마를 풀며 세 번째 수레의 팥 가마니를 들어냈다. 이 밑에서 새봄이 일어났다. 한 달 만에 궁 안 공기를 마신 볼이 조금 홀쭉해져 있었다.
“금의위 옥사도 이제 안전하지 않소. 동창이 대장간 뒷집까지 알고 있었소. 옥사 위치야 말할 것도 없지.” 유가휘가 판구에게 말했다. 판구는 어선방 뒷문 곁에 서 있었다. “그리고 오늘 밤이오. 대보름 아침에 황제가 서 있지 못하게 하려면 오늘 밤밖에 없소. 나도 셈을 할 줄 아오.”
“지휘사 나리는 오늘 밤 이길 쪽이 어디라고 셈하셨소?”
유가휘가 앞치마를 판구에게 던졌다. 판구가 이것을 받았다.
“셈이 안 끝났소. 그래서 직접 보러 왔소. 지는 쪽에 서면 내 손으로 지는 거고, 이기는 쪽에 서면 내 손으로 이기는 거지. 남의 손에 지기는 싫소.”
새봄은 이미 회랑 쪽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
초경. 수인전 마당에 잎이 깔렸다. 판구가 낮에 정원에서 마대 세 자루를 날라 와 마당 전체에 고르게 폈다. 침전 지붕 밑 처마 둘레에는 두 겹으로 깔았다.
침전 안에서 연성이 새봄을 안고 있었다. 오래, 아무 말 없이. 새봄이 먼저 몸을 뗐다.
“폐하. 오늘 밤엔 등불을 몇 개 켜실 거예요?”
“하나.”
“그럼 그 하나는 제가 들고 있을게요.” 새봄이 침전 안쪽 벽장 문을 열었다. 이불 넣어 두는 깊은 벽장이었다. “무슨 소리가 나면 폐하는 여기 들어가세요.”
“안 들어가.” 연성이 침상 머리맡에 세워 둔 싸리비를 쥐었다. 판구가 새로 묶어 준 비였다. “할아범이 그랬어. 서 계시라고. 짐은 서 있을 거야. 내일 아침까지.”
새봄은 벽장 문을 닫지 않았다. 등불 하나를 들고 황제 곁에 섰다.
*
이경. 수인전 문을 지키던 동창 졸개 넷이 한꺼번에 자리를 떴다. 교대가 아니었다. 아무도 이 자리에 오지 않았다. 넷의 발소리가 월동문을 지나 동쪽 회랑으로 멀어졌다.
판구는 침전 섬돌 맨 아래 칸에 앉아 이 소리를 들었다. 손에는 싸리비가 있었다. 침전 문 안쪽에 유가휘가 칼을 무릎에 놓고 앉았고, 금의위 무관 여섯이 문 양쪽 기둥 그늘에 섰다.
“문을 비웠소.” 판구가 말했다. “들어오라는 거요.”
“들어오라면 들어가 줘야지. 손님인데.” 유가휘가 칼을 쥐었다. “영감, 오늘 밤에도 넘어질 생각이오?”
판구가 일어났다. 허리를 폈다. 굽어 있던 허리가 끝까지 펴졌다. 마당 한가운데로 걸어 나가 섰다. 잎 위였다. 발밑에서 잎이 울지 않았다.
“오늘은 안 넘어지오.”
*
삼경. 딱따기가 세 번 울리고 그쳤다. 이 끝에 바로 기와가 울었다. 동쪽, 서쪽, 북쪽 처마. 세 군데에서 한꺼번에. 그리고 월동문 쪽에서 발소리가 쏟아졌다. 무게 있는 걸음이었다. 스물. 동창 졸개들이 칼을 빼 들고 마당으로 몰려 들어왔다. 잎이 이들 발밑에서 한꺼번에 울었다. 와르르, 하고 마른 파도 같은 소리가 마당을 덮었다.
침전 안에서 새봄이 이 소리를 셌다. 셀 수가 없었다. 등불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연성이 이 곁에서 비를 쥐었다. 판구가 처음 마당에서 잡아 준 이 자리였다.
판구는 마당 한가운데서 움직이지 않았다. 졸개 스물이 판구를 둘러쌌다. 맨 앞의 졸개가 늙은 내관을 보고 비웃었다.
“늙은이 혼자냐?”
판구가 비를 들었다.
다음은 소리였다. 침전 안의 연성과 새봄은 문틈으로 이 소리만 들었다. 싸리가 공기를 긁는 소리. 사락, 하고 한쪽으로 길게. 이 소리가 한 번 날 때마다 무언가 무거운 것이 잎 위로 쓰러지는 소리가 따라왔다. 사락, 털썩. 사락, 털썩. 칼이 언 땅에 떨어지는 쇳소리. 비명은 드물었다. 대부분 숨이 끊기듯 짧은 소리였다. 판구는 칼을 쥐지 않았다. 비 자루와 싸리 끝이 정강이를, 팔꿈치 안쪽을, 목덜미 옆을 지나갔다.
졸개 여섯이 쓰러졌을 때 나머지가 물러섰다. 이들은 늙은 내관을 둘러싼 원을 넓혔다.
이때 북쪽 처마에서 그림자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얼굴이 하얬다. 백면이었다. 오른 팔목에 부목을 대고 천으로 감았다. 이 사람은 왼손에만 갈고리를 쥐었다. 동쪽과 서쪽 처마에서 둘이 더 내려섰다. 다리를 끄는 사내와, 어선방에서 명치를 찔린 사내였다.
“영감. 팔이 붙었네. 반쯤.” 백면이 갈고리를 돌렸다. “오늘은 여자를 안 업었군.”
셋이 한꺼번에 왔다. 판구는 비를 낮게 깔아 첫 번째, 다리 끄는 사내의 성한 다리를 쓸었다. 사내가 잎 위에 나뒹굴었다. 두 번째 사내의 칼이 판구의 왼쪽 어깨에 박혔다. 판구는 피하지 않았다. 칼이 박힌 채로 몸을 틀어 사내에게 붙었고, 비 자루 끝으로 사내의 관자놀이를 쳤다. 첫눈 오던 밤 찻주전자 뚜껑이 친 자리였다. 사내가 쓰러졌다.
백면의 갈고리가 판구의 목을 향해 들어왔다. 판구는 어깨에 박힌 칼을 뽑지 않은 채 비를 세워 이 갈고리를 받았다. 싸리 다발이 갈고리에 걸려 찢어졌다. 판구가 비를 놓았다. 갈고리가 비와 함께 아래로 처졌다. 판구의 손바닥이 백면의 부목 감은 오른 팔목에 얹혔다. 가볍게. 백면의 얼굴이 하얀 분 밑에서 일그러졌다.
“또 그쪽으로 보내 주랴?”
백면이 왼손 갈고리를 놓고 뒤로 물러나려 했다. 판구의 무릎이 판구의 허벅지를 받쳤고, 손바닥이 가슴을 짧게 밀었다. 백면의 몸이 날아가 침전 섬돌 모서리에 등을 박았다. 판구는 섬돌 위에 걸쳐진 채 일어나지 않았다. 하얀 얼굴이 하늘을 보았다. 새봄이 문틈으로 이 얼굴을 보았다. 땀에 녹은 분이 귀밑으로 흘러내렸고, 이 밑으로 마흔 남짓한 평범한 사내의 얼굴이 드러나 있었다. 시장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얼굴이었다.
*
월동문 쪽에서 졸개들이 다시 몰려 들어오려 했다. 동창에서 더 온 자들이었다. 열이 넘었다.
이때 월동문 곁 담장 위에서 목소리가 났다.
“비켜! 뜨겁소! 오곡밥 물이오!”
왕복길이었다. 복길은 담장에 걸친 사다리 위에 서 있었고, 해솜이 이 아래에서 사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복길의 붕대 감은 두 손이 큰 무쇠 솥 손잡이를 쥐고 있었다. 솥에서 김이 솟았다. 대보름 오곡밥을 지으려고 끓여 둔 물이었다. 복길이 솥을 기울였다. 끓는 물이 월동문 아래로 쏟아졌다. 몰려 들어오던 졸개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언 돌바닥에 쏟아진 물이 김을 뿜다가 금세 얼어붙었다. 뒤따라오던 졸개들이 이 얼음에 미끄러져 서로 엉켜 넘어졌다.
복길이 빈 솥을 사다리 위에서 들어 보이며 소리쳤다.
“형님! 오곡밥은 내일 아침에 다시 짓소! 찹쌀은 남았소!”
복길의 손 붕대에 피가 배어 나왔다. 솥 손잡이가 화상 자리를 다시 짓눌렀다. 복길은 웃고 있었다.
침전 문 앞에서 유가휘와 무관 여섯이 섬돌로 올라오려던 졸개 넷을 막고 있었다. 유가휘의 칼이 한 졸개의 칼을 쳐 내고, 다른 하나의 무릎을 그었다. 이 사람은 붕대 감은 왼손으로 문고리를 쥐고 서 있었다.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
사경. 마당이 조용해졌다.
잎 위에 졸개들이 쓰러져 있었다. 신음하는 자도 있었고 움직이지 않는 자도 있었다. 판구는 마당 한가운데 서 있었다. 왼쪽 어깨에 칼이 박혀 있었다. 이것을 뽑았다. 피가 내관복 소매를 타고 손끝까지 흘러내려 잎 위에 떨어졌다. 찢어진 비를 주워 들었다. 싸리가 반쯤 떨어져 나가 자루만 남은 자리가 많았다.
월동문 쪽에서 소리가 나지 않았다.
판구는 소리가 나지 않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충겸이 서 있었다. 월동문 안쪽, 잎이 깔린 마당 어귀에. 붉은 관복 위에 담비 털 망토. 서 있는 자리의 잎에 하얗게 서리가 앉아 있었다. 이 사람은 쓰러진 졸개들 사이를 걸어 들어왔다. 잎이 고충겸의 발밑에서 울지 않았다. 대신 밟은 잎마다 서리가 앉아 하얀 발자국이 하나씩 생겼다.
고충겸은 판구 앞 다섯 걸음에서 멈췄다. 장갑을 벗었다. 한 짝, 그리고 다른 한 짝. 장갑을 잎 위에 떨어뜨렸다. 첫눈 오던 아침처럼.
“주워 주겠나?”
판구는 줍지 않았다.
“그렇군. 오늘은 안 넘어지는군.” 고충겸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정원 내관. 마흔 해 동안 그 정원에서 무엇을 쓸었나?”
판구는 대답 대신 찢어진 비를 들어 올렸다.
고충겸이 먼저 왔다. 다섯 걸음이 한 걸음이 되었다. 소리가 없었다. 흰 손바닥이 판구의 가슴을 향해 곧게 밀려 왔다. 판구는 비 자루로 이 손목을 옆에서 쳤다. 자루가 손목에 닿는 순간 대나무 겉에 하얀 서리가 확 번졌다. 자루를 쥔 판구의 손가락이 저렸다. 자루를 놓지 않았다. 손바닥이 판구의 가슴 앞 한 치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관복 앞섶이 이 자리만 하얗게 얼어 바스러졌다.
판구가 비를 돌렸다. 처음으로 크게. 몸 전체가 비를 따라 한 바퀴 돌았다. 허리로 쓸고, 팔은 따라만 갔다. 남은 싸리가 공기를 긁었다.
사락.
길게, 한쪽으로. 마당의 잎이 한꺼번에 이 소리를 따라 일어났다. 바람이 없는데 잎이 일어나 한쪽으로 쓸려 갔다. 가을바람이 낙엽을 쓸어 가는 소리였다.
고충겸이 멈췄다. 뒤로 물러난 것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서 굳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던 매끈한 얼굴에서 처음으로 핏기가 빠져나갔다. 손바닥을 내민 채로 이 소리가 마당 끝까지 가서 사라지는 것을 들었다.
“그 소리.”
이 사람이 말했다. 목소리에 부드러움이 없었다.
“마흔 해 전 겨울, 북쪽 산 위에서. 나는 사형들 시신 밑에 엎드려 있었다. 눈을 감고 숨을 죽이고. 얼굴은 못 봤다. 이 소리만 들었다. 가을바람이 낙엽을 쓰는 소리. 그 소리가 날 때마다 사형이 하나씩 쓰러졌다.” 고충겸의 손이 떨렸다. 처음이었다. “그 소리가 내 머리 위를 지나갔다. 그리고 멈췄다. 한참. 내 숨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냥 지나갔다.”
판구는 비를 내리지 않았다.
“추풍.” 고충겸이 이 이름을 입에 올렸다. “네가 추풍객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