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650자)
궁문
황궁의 늙은 내관이 천하제일 고수였다 · 마필제
판구는 비를 든 손을 그대로 두었다. 찢어진 싸리 끝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그 숨소리를 나는 들었소.” 판구가 말했다. “열여덟쯤 된 숨이었소. 시신 더미 맨 아래에서. 숨을 참다가 두 번 새었소. 나는 그 위에서 오래 서 있었소. 그러고 지나갔소.”
“왜 지나갔나?”
“그 산에서 내가 찾던 사람들은 내 스승의 집에 불을 놓은 사람들이었소. 그 숨은 너무 어렸소.” 판구가 고충겸의 맨손을 보았다. “그 숨이 자라서 이 손이 될 줄은 몰랐소.”
고충겸이 웃었다. 이번에는 소리가 났다. 짧고 낮은 소리였다. 이 사람은 판구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마당에서 둘 사이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침전 문틈의 새봄과 섬돌 위의 유가휘뿐이었다. 그러나 다음 말은 이들에게 들리지 않았다. 고충겸은 판구의 귀에만 닿을 만큼 목소리를 낮췄다.
“구월 그믐 삼경. 선황은 수인전에 혼자 계셨지. 창을 조금 열어 두고. 그 밤 정원에는 잎이 깔려 있었는데, 나는 그 위를 걸어 지나갔네. 아무 소리도 안 났어. 그리고 정원 내관은 없었지. 선황이 자네를 아들한테 보냈으니까.” 고충겸이 판구의 얼굴을 보았다. “내 손으로 보냈네. 가슴 왼쪽. 선황은 마지막에 눈을 뜨고 나를 보시더군. 놀라지도 않으셨어. 알고 계셨던 거지.”
판구의 비 자루가 움직였다. 고충겸의 손바닥도 움직였다. 둘이 한 자리에서 부딪쳤다. 자루 끝이 고충겸의 왼쪽 갈비뼈 밑을 찔렀고, 고충겸의 손바닥이 판구의 왼팔 위를 쓸고 지나갔다. 둔한 소리 하나와 얼음 갈라지는 소리 하나가 겹쳤다.
둘이 동시에 물러났다. 판구의 왼팔 소매가 팔꿈치까지 하얗게 얼어 있었다. 손가락이 펴지지 않았다. 고충겸은 왼손으로 옆구리를 감싸 쥐었다. 숨을 쉴 때마다 이 손이 들썩였다.
“여기서 자네를 이길 수는 없겠군. 마흔 해를 쓸었으니.” 고충겸이 장갑을 주워 들었다. 허리를 굽히는 데 오래 걸렸다. “그럼 자네를 이길 사람들을 부르지. 강호에는 자네를 마흔 해 기다린 집이 많아.”
고충겸은 몸을 돌려 월동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번에는 발소리가 났다. 왼발이 조금 끌렸다.
*
침전 문이 열렸다. 연성이 비를 쥔 채 섬돌로 나왔고, 새봄이 등불을 들고 뒤따랐다. 새봄은 판구의 얼어붙은 왼팔을 보자 등불을 섬돌에 놓고 어선방 쪽으로 뛰었다. 잠시 뒤 더운물 대야를 안고 돌아왔다. 김이 났다.
판구는 섬돌 맨 아래 칸에 앉아 왼팔을 대야에 담갔다. 소매에 붙은 서리가 물에 닿자 치익 소리를 내며 녹았다. 손가락이 하나씩 펴졌다. 펴질 때마다 판구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고충겸이 마지막에 뭐라고 했어? 할아범 귀에다 대고.” 연성이 판구 곁에 쪼그려 앉았다. “나는 못 들었어.”
판구는 대야 속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선황 폐하를 제 손으로 보냈다 하였사옵니다. 가슴 왼쪽이라고.”
연성이 숨을 들이켰다. 한동안 숨을 내쉬지 못했다. 그러다 벌떡 일어났다.
“그럼 그걸 아침 조회에서…….”
“소인 귀에만 한 말이옵니다, 폐하. 소인 귀는 증인이 못 되옵니다. 마흔 해 동안 늙은이가 귀가 어둡다고 하고 다녔으니.” 판구가 대야에서 손을 꺼냈다. 손바닥이 붉었다. “그 사람은 그걸 알고 말했사옵니다.”
새벽녘 왕복길이 수인전 마당에 왔다. 손에 작은 소쿠리를 들었다. 호두와 밤과 땅콩이 담겨 있었다. 대보름 새벽에 단단한 열매를 깨물어 한 해 부스럼을 막는다는 부럼이었다.
“형님, 부럼 깨시오. 오늘은 꼭 깨야 하오. 부스럼 정도가 아니라 칼에 찔린 데가 세 군데요.”
판구가 호두 하나를 집어 어금니에 물었다. 오른손 손가락 둘로 호두를 받쳤다. 딱, 하고 호두가 두 쪽으로 갈라졌다. 어금니가 아니라 손가락이 깬 소리였다. 복길이 이것을 보고 소쿠리를 뒤로 감췄다.
“그 손으로 깨면 부럼이 아니라 반칙이오. 이빨로 깨시오.”
연성이 웃음을 터뜨렸다. 밤새 처음 나온 웃음이었다. 새봄도 웃었다. 판구는 반쪽 난 호두를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
대보름 아침, 정극전에 백관이 섰다. 눈이 그쳤고 하늘이 맑았다.
황제는 용상 앞에 서 있었다. 앉지 않았다. 밤을 새운 얼굴이었지만 두 발이 용상 앞 단 위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장막 뒤에서 태후가 이 발을 오래 보았다.
“황제가 서 있소. 섭정은 없던 일이오.”
백관이 엎드렸다. 영왕이 털옷 두 겹 속에서 크게 숨을 내쉬었다. 내쉬고 나서야 사람들이 자기를 보는 것을 알고 얼른 엎드렸다.
고충겸이 백관 맨 앞에서 엎드렸다가 일어났다. 왼손을 옆구리에 대고 있었다. 얼굴은 여느 때처럼 매끈했다.
“태후 마마의 뜻을 받들겠사옵니다. 다만 오늘 아침 신이 아뢰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있사옵니다.” 고충겸의 목소리가 정극전을 채웠다. “마흔 해 전 한겨울, 북쪽 산의 한 문파를 혼자 올라가 피로 씻은 자가 있었사옵니다. 강호는 그를 추풍객이라 불렀고, 모든 문파가 그를 쫓다가 놓쳤사옵니다. 그 자가 지난 마흔 해 동안 이 태극궁 청류원에서 낙엽을 쓸고 있었사옵니다.”
백관이 웅성거렸다. 무관 줄 끝에서 유가휘가 눈을 감았다.
“어젯밤 그 자가 수인전 마당에서 동창 사람 열여섯을 쓰러뜨렸사옵니다. 신은 밤사이 도성에 지부인 분타를 둔 강호 문파들에 이 일을 알렸사옵니다. 마흔 해 전 그 자에게 장문인과 제자를 잃은 문파들이옵니다.” 고충겸이 정극전 문밖을 가리켰다. “지금 궁문 밖 눈밭에 그들이 와 있사옵니다. 일곱 문파, 백이 넘사옵니다. 그 자를 내놓으라 하옵니다. 내놓지 않으면 궁문을 부수고 들어오겠다 하옵니다.”
“궁문 열쇠는 동창에 있잖아.” 연성이 말했다.
“그러하옵니다. 신은 문을 지킬 것이옵니다.” 고충겸이 허리를 숙였다. “다만 동창 사람 열여섯이 어젯밤 쓰러졌사옵니다. 남은 사람으로 백을 막을 수 있을지, 신은 장담하지 못하옵니다. 그리고 그 백이 궁 안에 들어오면, 그들은 추풍객 하나만 찾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그런 자를 마흔 해 곁에 두고, 그 손에 비질을 배운 황제의 판단을 백관이 어찌 볼지도.”
정극전이 조용해졌다. 연성이 용상 앞 단을 내려왔다. 한 칸, 두 칸. 고충겸 앞에 섰다.
“안 내줘.”
“폐하.”
“그 할아범은 짐을 마흔 해 동안…… 아니, 아바마마를 마흔 해, 짐을 석 달 지켰어. 안 내줘.” 연성은 숨을 길게 한쪽으로 뱉었다. “문을 부수겠다면 부수라고 해. 짐이 그 문 앞에 서 있을게.”
고충겸은 이 젊은 얼굴을 아래에서 쳐다보았다.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가 없는 얼굴이었다. 백관 가운데 몇이 슬그머니 정극전 문 쪽을 돌아보았다.
정극전 문밖 섬돌 아래에서 비 소리가 났다. 사락. 한 번. 그리고 그쳤다.
*
판구는 섬돌 아래 눈 위에 서 있었다. 왼팔은 무명으로 감아 목에 걸었다. 오른손에 싸리비 하나를 쥐었다. 새로 묶은 비였다. 지난밤 찢어진 비의 대나무 자루에 왕복길이 어선방 싸리를 새로 감아 주었다.
연성이 정극전 문을 나와 섬돌 위에 섰다. 판구가 고개를 들었다.
“폐하. 소인이 하나 아뢰지 않은 것이 있사옵니다.”
“뭔데?”
“선황 폐하 돌아가시던 밤, 소인은 정원에 없었사옵니다. 선황께서 폐하를 맡기셨기에, 그 길로 동궁 지붕에 올라가 날이 샐 때까지 폐하 침소를 지켰사옵니다. 선황께서는 소인을 폐하께 보내 놓고 수인전에 혼자 드셨사옵니다.” 판구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갈라졌다. “소인이 그 밤 선황 곁에 있었으면…….”
연성이 섬돌을 내려왔다. 늙은 내관 앞에 섰다. 오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판구의 오른손에서 비를 빼앗듯 받아 들었다.
“그럼 아바마마가 고르신 거야. 할아범이 아니라.” 연성의 목소리가 떨렸다. 연성은 떨림을 숨으로 눌렀다. “아바마마는 나를 고르셨어. 그러니까 할아범이 미안할 일이 아니야.”
“폐하. 소인도 오늘 고르겠사옵니다.” 판구가 허리를 폈다. “저들이 궁문을 부수고 들어오면 동창이 문을 연 것인지 저들이 부순 것인지 아무도 모르게 되옵니다. 그 혼란 속에서 다치실 분은 폐하이옵니다. 소인이 나가면 문은 닫혀 있사옵니다. 싸움은 궁 밖에서 하겠사옵니다.”
“할아범은 궁 밖에 한 번도 안 나갔잖아.”
“마흔 해 만이옵니다.”
연성은 비를 쥐고 서 있었다. 연성의 눈이 붉어졌다. 고개를 돌려 정극전 뜰에서 궁문 쪽을 보았다. 정극전에서 태극문까지는 넓은 돌길이었다. 밤사이 눈이 한 자 가까이 쌓여 있었다.
황제가 비를 고쳐 쥐었다. 왼손 위, 오른손 한 뼘 아래. 그리고 섬돌 아래 첫 돌부터 쓸기 시작했다.
사락. 사락. 허리로 쓸었다. 팔은 따라만 갔다. 눈이 한쪽으로 고르게 밀려나며 검은 돌이 드러났다. 황제는 고개를 들지 않고 쓸면서 나아갔다. 백관이 정극전 문 앞에 몰려나와 이것을 보았다.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영왕이 털옷 깃을 쥔 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새봄이 회랑 끝에서 뛰어왔다. 황제 곁에 서서 비질이 지나간 자리의 남은 눈을 손으로 쓸어 냈다. 어선방 쪽에서 왕복길이 대바구니를 안고 뛰어왔다. 붕대 감은 손이 바구니 손잡이에 끼여 있었다. 해솜이 뒤를 따랐다.
길은 길었다. 황제의 이마에 땀이 맺혔고, 입김이 하얗게 흩어졌다. 판구는 황제 뒤에서 이 길을 걸었다. 쓸린 돌 위였다. 발소리가 났다. 일부러 낸 소리였다.
태극문 앞에서 연성이 멈췄다. 숨이 찼다. 돌아서서 비를 판구에게 내밀었다.
“이거 가져가. 할아범 비야.”
판구가 비를 받았다. 왕복길이 대바구니를 판구의 오른팔에 걸었다. 김이 났다.
“고기만두 서른, 채소만두 서른. 형님 거는 안 식혔소. 이제 안 식혀도 되잖소.” 복길이 코를 훌쩍였다. “다 드시고 바구니는 갖고 오슈. 그거 어선방 거요.”
유가휘가 무관들과 함께 문 곁에 서 있었다. 판구에게 다가와 붕대 감은 왼손으로 읍했다. 정중하게.
“빚은 다 갚으셨소. 이자까지.” 유가휘가 낮게 말했다. “안쪽은 금의위가 맡겠소. 셈이 끝났소. 나는 오늘부터 이 문 안쪽이오.”
새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판구의 목에 걸린 무명 매듭을 다시 매 주었다. 그리고 황제 곁으로 돌아가 섰다.
태극문 문루 위에 고충겸이 서 있었다. 왼손으로 옆구리를 감싼 채. 아래를 향해 손을 들었다. 동창 졸개들이 빗장을 들었다. 문짝 두 개가 안쪽으로 천천히 열렸다. 경첩이 길게 울었다.
문밖은 눈밭이었다. 궁 해자 다리 건너 넓은 눈밭에 사람이 서 있었다. 백이 넘었다. 일곱 무리로 나뉘어 저마다 다른 빛깔의 옷을 입었고, 칼과 창과 지팡이를 들었다.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숨소리만 눈 위에 하얗게 피어올랐다.
판구가 문턱 앞에 섰다. 무릎 높이의 나무 문턱이었다. 마흔 해 전 들것에 실려 이 문턱을 넘어 들어왔다. 피투성이였고, 눈을 뜨지 못했다. 이때 판구를 받아 준 것은 스물다섯 살의 동궁, 구월 그믐 수인전에서 홀로 숨을 거둔 선황이었다.
이 사람은 비를 오른손에 쥐고, 만두 바구니를 오른팔에 건 채, 문턱을 넘었다.
신발이 문밖 눈을 밟았다. 뽀득.
눈밭 맨 앞에 늙은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 판구와 비슷한 나이였다. 흰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왔고, 왼쪽 소매가 비어 바람에 날렸다. 늙은 사내가 판구를 보았다. 비를 보고, 만두 바구니를 보고, 무명에 감긴 왼팔을 보았다.
“추풍객.” 늙은 사내가 말했다.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마흔 해 만이구려. 내 팔 하나를 가져간 그 겨울 이후로.”
이 사람이 허리에 찬 칼 한 자루를 끌러 판구의 발 앞 눈 위에 던졌다. 칼집째 눈에 박혔다.
“여기는 궁 밖이오. 빗자루 말고 칼을 드시오.”
판구는 발 앞의 칼을 내려다보았다. 등 뒤에서 궁문이 아직 닫히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