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405자)

찬 손

황궁의 늙은 내관이 천하제일 고수였다 · 마필제

판구는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어선방 바닥의 밀가루가 판구의 무릎 밑에서 굳어 가고 있었다⁠. 찜통 김이 사그라들었다⁠.

“⁠그 밤에 나는 정원에 없었소⁠.⁠” 판구가 말했다⁠. “⁠선황께서 청음정에서 일어나 가시면서 연성이를 맡기셨소⁠. 겨울만 넘기게 해 달라고⁠. 나는 그 말을 들은 그대로 따랐소⁠. 태자가 사는 동궁 지붕에 올라가 날이 샐 때까지 앉아 있었소⁠. 그때 폐하는 아직 동궁에 사셨으니까⁠.⁠”

복길이 감긴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판구를 보았다⁠.

“⁠그럼 선황 폐하는⁠…⁠…⁠.⁠”

“⁠수인전에 혼자 가셨소⁠. 나를 아들한테 보내 놓고⁠.⁠” 판구가 바닥의 밀가루를 손바닥으로 한 번 쓸었다⁠. 하얀 바닥에 손자국이 남았다⁠. “⁠나는 그 밤 동궁 지붕에서 아무 소리도 못 들었소⁠. 너무 멀었소⁠. 그리고 그 사람은 원래 소리가 안 나오⁠. 가까이 있었어도 못 들었을 거요⁠. 선황께서 그걸 물으셨소⁠. 자네 귀로도 못 듣는 발이 있느냐고⁠.⁠”

복길은 입을 열지 않았다⁠. 해솜이 부뚜막 곁에서 찬물 바가지를 든 채 서 있었다⁠. 엎드린 당두가 바닥에서 고개를 들려다 판구의 무릎이 다시 등을 누르자 신음을 냈다⁠.

판구가 일어났다⁠. 당두의 뒷덜미를 쥐어 일으켜 세웠다⁠. 당두의 팔꿈치가 아직 펴지지 않았다⁠.

“⁠이 사람은 염초 골목에서 기름을 뿌린 사람이오⁠. 금의위 지휘사가 그 밤 골목에서 이 사람 소매를 갈랐소⁠. 소매 갈린 자리가 아직 꿰매지지 않았소⁠.⁠” 판구가 당두의 찢어진 소매를 들어 보였다⁠. “⁠왕 내관⁠. 날이 밝으면 어선방 짐 수레가 시장에 나가지요⁠?⁠”

“⁠나가지요⁠. 돼지고기 받으러⁠.⁠”

“⁠이번엔 돼지 한 마리를 더 싣고 나가시오⁠. 금의위 옥사 앞에 내려놓고⁠.⁠”

복길이 당두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감긴 손으로 당두의 어깨를 툭 쳤다⁠. 이 손이 아팠는지 얼굴을 찡그렸다⁠.

“⁠이 돼지는 기름기가 많아서 국밥감이오⁠. 만두에는 안 맞소⁠.⁠”

*

정월 초하루까지 스무 날 남짓이 지나갔다⁠.

그동안 동창은 조용했다⁠. 당두가 금의위 옥사에 갇혔다는 소문이 궁 안을 한 바퀴 돌았지만⁠, 고충겸은 이 일로 조회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새봄은 금의위 옥사 맨 안쪽 칸에서 지냈다⁠. 유가휘가 사흘에 한 번 황제에게 밥을 다 먹었다고 전했다⁠. 연성은 하루도 빼지 않고 조회에 나갔고⁠, 새벽마다 판구와 마당을 쓸었다⁠. 지붕은 조용했다⁠. 판구는 이 조용함을 날마다 셌다⁠.

조용하지 않은 자리가 하나 있었다⁠. 섣달 열흘⁠, 조회가 파한 뒤 정극전 동쪽 회랑에서 고충겸이 유가휘를 불러 세웠다⁠. 회랑 기둥 사이로 찬바람이 지나갔다⁠. 유가휘의 왼손에는 아직 무명이 감겨 있었다⁠.

“⁠지휘사⁠. 동창 당두를 금의위 옥사에 가둔 지 열흘일세⁠. 내 사람이야⁠. 돌려주게⁠.⁠”

“⁠염초 골목 방화범이오⁠. 금의위가 골목에서 직접 소매를 갈랐고⁠, 그 소매가 아직 그대로요⁠. 방화범은 금의위 옥사에 두는 것이 법이오⁠.⁠” 유가휘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제독 마마께서 법을 바꾸고 싶으시면 폐하께 아뢰시지요⁠. 폐하께서 요즘 조회를 하루도 안 빠지시니 아뢸 날은 많소⁠.⁠”

고충겸이 웃었다⁠. 소리 없는 웃음이었다⁠. 회랑 난간 너머 도성 쪽 하늘을 보았다⁠.

“⁠지휘사의 부인은 무명 짜는 솜씨가 좋다지⁠. 아들은 열네 살이고⁠. 도성 남쪽⁠, 염초 골목에서 두 골목 건너 대장간 뒷집이던가⁠?⁠”

유가휘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지지 않았다⁠. 다만 붕대 감은 왼손이 조금 오므려졌다⁠. 손바닥 덴 자리가 당겨 아팠다⁠.

“⁠동창은 모르는 게 없구려⁠.⁠”

“⁠동창은 아는 것만 말하네⁠. 모르는 건 묻지⁠.⁠” 고충겸이 난간에서 손을 뗐다⁠. 손이 닿았던 난간 나무에 얇은 서리가 앉았다⁠. “⁠당두는 대보름까지 거기 두게⁠. 그날이 지나면 내가 직접 데리러 가겠네⁠. 그날 조정이 누구 손에 있는지 보고 나서⁠.⁠”

고충겸은 회랑 끝으로 걸어갔다⁠.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유가휘는 이 자리에 오래 서 있었다⁠. 이날 밤 금의위 무관 넷을 평복으로 갈아입혀 대장간 뒷집으로 보냈다⁠. 그리고 판구에게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 셈이 끝나지 않았다⁠.

*

정월 초하루 새벽⁠, 수인전 마당에서 연성이 비질을 멈추고 판구를 돌아보았다⁠. 마당에 밤새 눈이 한 치 쌓였다⁠. 황제가 쓴 자리만 길게 검은 돌이 드러나 있었다⁠.

“⁠오늘 태후전 다회 말이야⁠. 할아범이 차 따라 줘⁠.⁠”

“⁠소인은 정원 내관이옵니다⁠. 태후전 다회에는⁠…⁠…⁠.⁠”

“⁠아바마마한테 차 따르던 사람이 할아범뿐이잖아⁠. 태후 마마도 그 차를 아실 거야⁠.⁠” 연성이 비 자루를 고쳐 쥐었다⁠. 손이 판구가 잡아 준 자리로 저절로 갔다⁠. “⁠그리고 고충겸도 올 거야⁠. 나는 고충겸이 할아범 차를 마시는 걸 보고 싶어⁠.⁠”

판구는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연성은 마당을 마저 쓸기 시작했다⁠. 싸리가 눈을 긁는 소리가 한쪽으로 길게 났다⁠.

*

정월 초하루⁠, 태후전에서 세배 다회가 열렸다⁠. 태후가 새해 첫날 황실 사람들과 차를 마시는 자리였다⁠. 태후전 대청 바닥에 털방석이 깔렸고⁠, 화로 넷이 놓였다⁠. 태후가 윗자리에 앉았고⁠, 연성이 이 오른쪽⁠, 영왕이 왼쪽에 앉았다⁠. 고충겸은 태후의 뜻으로 영왕 곁 끝자리에 앉았다⁠.

차 시중은 판구가 들었다⁠. 황제가 청한 일이었다⁠. 선황께 차를 올리던 정원 내관이 새해 첫 차를 올리게 해 달라고⁠. 태후가 허락했다⁠.

영왕은 털옷 두 겹을 입고 들어와 앉자마자 황제를 보았다⁠.

“⁠폐하⁠. 그 털옷 말이옵니다⁠. 신이 수인전 곁방에 두고 온 것 말이옵니다⁠. 그게 신이 제일 아끼는⁠…⁠…⁠.⁠”

“⁠태후 마마께서 숙부님께 돌려드리지 말라고 하셨어요⁠.⁠”

영왕이 태후를 보았다⁠. 태후는 찻잔을 보고 있었다⁠.

“⁠영왕은 이미 두 벌 입었지 않소⁠? 세 벌 입으면 다회에 못 앉소⁠. 굴러다니지⁠.⁠”

영왕이 입을 다물었다⁠. 판구는 화로 곁에서 찻물을 따르며 고개를 숙였다⁠. 고충겸은 웃지 않았다⁠.

판구는 차를 천천히 냈다⁠. 화로 위 구리 주전자의 물이 처음 끓어오를 때 내리지 않고⁠, 물방울이 주전자 바닥에서 게 눈만 하게 올라오다가 물고기 눈만 해지는 소리를 기다렸다⁠. 이 소리가 나면 주전자를 화로 가장자리로 밀고 반 각 식혔다⁠. 찻잎은 백자 다관에 먼저 넣고⁠, 식힌 물을 한 번 붓고 바로 따라 버렸다⁠. 잎이 깨어나는 냄새가 대청에 퍼졌다⁠. 다음에야 다시 부어 우렸다⁠. 태후가 이 냄새를 맡고 눈을 감았다⁠.

“⁠선황께서 이 냄새를 좋아하셨소⁠.⁠” 태후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정원에서 차를 드시고 오시면 옷에 이 냄새가 배어 있었지⁠.⁠”

판구는 대답하지 않고 첫 잔을 태후 앞에 놓았다⁠.

차가 한 바퀴 돌았다⁠. 연성이 찻잔을 내려놓고 태후 쪽으로 몸을 틀었다⁠.

“⁠마마⁠. 새해 첫날이니 하나 청할게요⁠. 섭정 이야기를 대보름까지 기다리지 말고 오늘 거두어 주세요⁠. 짐은 한 달 동안 조회를 하루도 안 빠졌어요⁠. 쓰러지지도 않았어요⁠.⁠” 연성이 숨을 한쪽으로 내쉬었다⁠. “⁠대보름 아침까지 기다리는 동안 누가 또 우물에 빠질지 몰라요⁠.⁠”

태후가 찻잔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대답하기 전에 고충겸이 입을 열었다⁠.

“⁠폐하의 말씀이 지당하옵니다⁠. 다만 섭정을 거두시기 전에 마마께 아뢸 일이 하나 있사옵니다⁠.⁠” 고충겸의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선황 폐하께서 돌아가시던 밤⁠, 마지막으로 차를 올린 사람이 누군지 아시옵니까⁠?⁠”

대청이 조용해졌다⁠. 화로의 숯이 탁 튀었다⁠.

“⁠청류원 청음정에서 선황 폐하께 마지막 차를 올린 자가⁠, 바로 지금 마마께 차를 따르고 있는 저 정원 내관이옵니다⁠.⁠” 고충겸이 판구 쪽으로 손바닥을 펴 보였다⁠. “⁠그리고 그 찻잔을 씻지 않고 어딘가에 감추어 두었다는 말이 동창에 들어왔사옵니다⁠. 감출 까닭이 없는 잔을 감추었다면⁠…⁠…⁠.⁠”

연성이 일어나려 했다⁠. 판구가 화로 곁에서 고개를 들지 않은 채 황제 쪽으로 아주 조금 손을 내렸다⁠. 연성이 다시 앉았다⁠. 그러나 입은 다물지 않았다⁠.

“⁠그 잔에 남은 차를 할아범이 이튿날 아침에 마셨어⁠. 그래서 살아 있어⁠.⁠”

“⁠폐하⁠. 독은 사람마다 다르게 듭니다⁠. 늙은 몸은 견디고 지친 몸은 못 견디기도 하지요⁠.⁠” 고충겸이 연성을 보지 않고 태후를 보았다⁠. “⁠신은 저 내관을 벌하자는 것이 아니옵니다⁠. 다만 선황 폐하의 마지막 밤을 알아야 하옵니다⁠. 섭정을 거두실지는 그다음에 정하셔도 늦지 않사옵니다⁠.⁠”

태후가 판구를 보았다⁠. 처음으로 늙은 내관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았다⁠.

판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로에서 주전자를 들어 새 찻잔에 차를 따랐다⁠. 막 끓은 물이었다⁠. 김이 잔 위로 곧게 올랐다⁠. 잔을 쟁반에 올리고 무릎걸음으로 대청을 건너가 고충겸 앞에 내밀었다⁠.

“⁠제독 마마⁠. 차가 식었사옵니다⁠. 새로 올리옵니다⁠.⁠”

고충겸이 늙은 내관을 내려다보았다⁠. 잠깐이었다⁠. 장갑을 벗었다⁠. 다회에서 장갑을 낀 채 잔을 받는 법은 없었다⁠. 희고 긴 손가락이 찻잔을 감쌌다⁠.

판구는 쟁반을 내리지 않고 이 손을 보았다⁠.

막 끓은 물을 담은 백자 잔이었다⁠. 김이 올라가고 있었다⁠. 고충겸의 손가락이 닿은 자리에서부터 잔 겉에 하얀 것이 번졌다⁠. 서리였다⁠. 손가락 다섯 개가 닿은 자리마다 하얗게 얼어붙은 자국이 생겼고⁠, 이 자국이 잔 둘레를 따라 천천히 퍼졌다⁠. 잔 안의 차에서는 여전히 김이 올랐다⁠. 겉만 얼었다⁠.

엄지는 비스듬히 벌어져 있었다⁠. 선황의 속옷 가슴께에 남은 손바닥 자국의 엄지와 같은 각도였다⁠.

고충겸은 잔을 입으로 가져가지 않았다⁠. 판구의 눈을 보았다⁠. 판구는 쟁반을 든 채 이 손가락 자국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고충겸은 늙은 내관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보았다⁠.

둘 사이에 한 자 거리가 있었다⁠. 대청 안의 누구도 이 한 자 사이를 보지 않았다⁠. 영왕은 털옷 깃을 여미고 있었고⁠, 태후는 황제를 보고 있었다⁠. 연성만 판구의 등을 보고 있었다⁠. 늙은 내관의 등이 아주 조금 굳어 있었다⁠.

고충겸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손을 뗀 자리의 서리가 금방 녹아 물방울이 되어 흘렀다⁠. 장갑을 다시 끼었다⁠.

“⁠차가 뜨겁군⁠.⁠” 고충겸이 말했다⁠. “⁠늙은 손이 잘도 들고 오네⁠.⁠”

“⁠늙은이 손은 뜨거운 걸 모릅니다요⁠.⁠”

“⁠그렇지⁠. 나도 그렇다네⁠.⁠”

판구가 쟁반을 거두어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화로 곁에 다시 앉았다⁠. 판구의 손이 주전자 손잡이를 쥐었다⁠. 손잡이가 뜨거웠다⁠. 이 뜨거움을 쥐고 놓지 않았다⁠.

고충겸이 태후 쪽으로 몸을 돌렸다⁠. 고충겸의 목소리가 더 부드러워졌다⁠.

“⁠마마⁠. 새해 첫날이니 신도 하나 청하겠사옵니다⁠. 저 정원 내관을 동창에 맡겨 주시옵소서⁠. 선황 폐하의 마지막 밤에 무엇이 있었는지⁠, 신이 직접 묻겠사옵니다⁠. 대보름 전까지 다 밝혀 마마께 아뢰겠사옵니다⁠.⁠”

연성이 일어섰다⁠. 이번에는 판구가 손을 내리기 전이었다⁠.

“⁠안 돼⁠.⁠”

“⁠폐하⁠. 이것은 선황 폐하의 일이옵니다⁠. 폐하의 아버님 일이옵니다⁠.⁠” 고충겸이 고개를 들어 황제의 얼굴을 보았다⁠. “⁠아버님이 어찌 돌아가셨는지 알고 싶지 않으시옵니까⁠?⁠”

연성의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대청 안에 아무 소리도 없었다⁠. 영왕이 털옷 깃 속으로 목을 움츠렸다⁠. 화로에서 물이 끓는 소리만 났다⁠.

태후가 염주를 쥔 손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황제를 보고⁠, 고충겸을 보고⁠, 마지막으로 화로 곁에서 주전자 손잡이를 쥐고 앉은 늙은 내관을 보았다⁠. 오래 보았다⁠.

“⁠제독의 청은⁠…⁠…⁠.⁠”

태후가 입을 열었다⁠.

13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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