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47자)

동창 지하

황궁의 늙은 내관이 천하제일 고수였다 · 마필제

이 밤 수인전 마당에서 비 소리가 났다⁠. 초경부터 쉬지 않았다⁠.

비를 쥔 사람은 회색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에 낡은 털모자를 눌러썼다⁠. 등이 조금 굽었다⁠. 이 사람은 마당의 잎을 쓸어 담지 않았다⁠. 한쪽으로 쓸어 모았다가⁠, 다시 반대쪽으로 쓸어 흩었다⁠. 잎은 마당을 떠나지 않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사락사락 울었다⁠.

수인전 문을 지키는 동창 졸개 둘이 이 소리를 들었다⁠.

“⁠저 늙은이는 잠도 안 자나⁠?⁠”

“⁠황제가 밤에도 잎 소리를 들어야 잔다잖아⁠. 그래서 밤새 저러는 거지⁠. 늙은이가 불쌍하다⁠.⁠”

“⁠근데 오늘따라 비질이 좀 서툴지 않아⁠? 아까 제 발등을 쓸던데⁠.⁠”

“⁠늙으면 그래⁠.⁠”

회색 두루마기가 비질을 멈추고 허리를 펴며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소리가 젊었다⁠. 두루마기는 얼른 다시 허리를 굽혔다⁠. 털모자 밑으로 연성의 귀가 추위에 빨갛게 얼어 있었다⁠. 연성은 판구가 시킨 대로 숨을 한쪽으로 내쉬며 다시 쓸었다⁠. 영왕의 털옷을 두루마기 안에 껴입었더니 땀이 났다⁠.

이경이 지날 무렵 월동문 쪽에서 등불 하나가 들어왔다⁠. 동창 당두였다⁠. 당두는 수인전 마당 어귀에 서서 등불을 들어 올렸다⁠. 비질하는 회색 등이 불빛 끝에 걸렸다⁠.

“⁠정원 내관⁠. 이리 와 봐라⁠. 제독 마마께서 오늘 밤 네 얼굴을 한 번 보고 오라 하셨다⁠.⁠”

비 소리가 멈췄다⁠. 회색 두루마기가 천천히 돌아섰다⁠. 털모자 챙이 얼굴을 반쯤 가렸다⁠. 당두가 한 걸음 다가왔다⁠. 등불이 흔들렸다⁠.

회색 두루마기가 한 걸음 내딛다가 제 비 자루에 발이 걸렸다⁠. 몸이 앞으로 꺾였다⁠. 이 사람은 마당 한쪽에 쓸어 모아 둔 잎 더미에 얼굴부터 처박혔다⁠. 잎이 사방으로 튀었다⁠. 비가 당두의 등 위로 떨어져 한 번 퉁겼다⁠. 잎 더미 속에서 끙끙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이고오⁠…⁠… 늙으면⁠…⁠… 제 빗자루에도 걸립니다요⁠…⁠…⁠.⁠”

목소리가 갈라지고 쉬어 있었다⁠. 일부러 쉰 목이었다⁠. 문을 지키던 졸개 하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당두도 코웃음을 쳤다⁠.

“⁠저 꼴을 보고 오라고 하셨나⁠.⁠” 당두가 등불을 내렸다⁠. “⁠일어나지 마라⁠, 늙은이⁠. 일어나다 또 넘어진다⁠.⁠”

당두는 돌아서서 월동문 밖으로 나갔다⁠. 등불이 회랑을 따라 멀어졌다⁠. 잎 더미 속의 회색 두루마기는 한참 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 아주 작게⁠, 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할아범은 이걸 어떻게 매번 잎 더미에만 넘어지는 거야⁠. 나 지금 돌부리에 무릎 찧었는데⁠.⁠”

*

판구는 이 시각 동익문 쪽 지붕 위에 있었다⁠. 짚신은 벗어 허리에 찼고⁠, 버선발이었다⁠. 정원에서 수인전⁠, 수인전에서 정극전 처마⁠, 정극전에서 동쪽 회랑 지붕⁠. 한 번도 기와를 울리지 않았다⁠. 기와와 기와가 맞물린 자리가 아니라⁠, 기와 밑 서까래가 지나가는 자리만 디뎠다⁠. 마흔 해 동안 궁 안 모든 지붕의 서까래 자리를 정원에서 올려다보며 알았다⁠.

동창 아문 안채 지붕에 내려섰을 때 아래에서 사람 소리가 나지 않았다⁠. 고충겸의 방은 불이 꺼져 있었다⁠. 이 사람은 오늘 밤 궁문 열쇠를 들고 여덟 문을 직접 돈다고 했다⁠. 왕복길이 동창 부엌 사람에게서 들은 말이었다⁠.

판구는 처마 밑 환기창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방 안으로 내려서자 발바닥이 저렸다⁠. 바깥보다 찼다⁠. 화로가 없는 방이었다⁠. 탁자 하나⁠, 의자 하나⁠, 벽에 붙인 낮은 단 하나⁠. 단 위에 아무 글씨도 없는 나무 위패가 하나 서 있었고⁠, 이 앞에 쇠붙이 하나가 놓여 있었다⁠.

판구는 이것을 집지 않았다⁠. 손을 대지 않고 내려다보았다⁠.

쇠로 만든 매화 한 송이였다⁠. 손바닥 반만 한 크기⁠, 다섯 잎 가운데 하나가 깨져 나갔다⁠. 꽃잎 가장자리가 손때로 닳아 반들거렸다⁠. 마흔 해 전 북쪽 산 위에서 판구는 이것을 서른 몇 개 보았다⁠. 한음문 사람들은 입문하는 날 이 쇠매화를 받아 허리띠에 찼다⁠. 이 겨울 판구는 쇠매화를 찬 허리를 하나씩 지나갔다⁠. 산을 내려올 때 눈 위에 쇠매화 서른 몇 송이가 흩어져 있었다⁠.

여기 한 송이가 있었다⁠. 꽃잎 하나가 깨진 채로⁠.

판구는 이 쇠매화 앞에 한참 서 있었다⁠. 그러다 몸을 돌려 방문 쪽으로 걸었다⁠. 문틈으로 복도의 공기가 들어왔다⁠. 지하에서 올라오는 축축한 공기였다⁠.

*

옥졸 둘은 계단 아래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판구는 계단 서른두 칸을 내려가 이 둘 뒤에 섰다⁠. 손가락 두 개로 하나의 목덜미 옆을 눌렀다⁠. 옥졸이 소리 없이 의자에서 미끄러졌다⁠. 두 번째가 눈을 떴다⁠. 판구의 손바닥이 옥졸의 입을 덮었고⁠, 다른 손이 같은 자리를 눌렀다⁠. 두 번째도 미끄러졌다⁠. 둘 다 숨은 고르게 쉬었다⁠.

통로 왼쪽 일곱 번째 칸에서 쇠사슬 소리가 났다⁠. 아주 작게⁠.

“⁠할아버지⁠.⁠”

새봄이 창살 너머에 앉아 있었다⁠. 손목에 쇠고랑이 채워져 벽 고리에 사슬로 묶였다⁠. 머리가 풀어져 어깨에 늘어졌고⁠, 왼쪽 뺨이 다시 부어 있었다⁠. 입술이 갈라졌다⁠. 새봄 곁 바닥에 대바구니 하나가 놓여 있었다⁠. 복길의 바구니였다⁠. 덮개가 열려 있었고⁠, 만두가 반쯤 비어 있었다⁠.

“⁠발소리 듣고 알았어요⁠.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하나도 안 났는데 옥졸이 의자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났어요⁠. 그럼 할아버지예요⁠.⁠”

판구는 옥문 쇠고리를 쥐었다⁠.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쇠고리를 비틀지 않았다⁠. 창살 하나를 두 손으로 쥐고 천천히 위로 들었다⁠. 나무 창살이 위 들보에 박힌 자리에서 끼익 소리를 내며 한 치 들렸고⁠, 아래쪽이 바닥 홈에서 빠졌다⁠. 이 창살 하나를 옆으로 빼서 벽에 세웠다⁠. 사람 하나가 옆으로 빠져나갈 틈이 생겼다⁠.

“⁠다쳤소⁠?⁠”

“⁠뺨만요⁠. 보늬가 쳤어요⁠. 조롱박 병 어디 있느냐고⁠.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왕 내관님 말대로요⁠.⁠” 새봄이 쇠고랑 찬 손을 들었다⁠. “⁠할아버지⁠, 그보다 이거 먼저 들으세요⁠. 저 하루 종일 셌어요⁠.⁠”

판구가 쇠고랑을 살폈다⁠. 그러는 동안 새봄이 빠르게 말했다⁠.

“⁠천장 위로 지나가는 무게 없는 걸음이 셋이에요⁠. 하나는 오른쪽 다리를 조금 끌어요⁠. 해 지기 전에 셋이 다 위에서 모였다가 이경 무렵에 한꺼번에 아문 밖으로 나갔어요⁠. 아문을 비워 둔 거예요⁠. 옥졸 둘만 남기고요⁠. 나가면서 하나가 웃으면서 그랬어요⁠. 오늘 밤은 만두 냄새 나는 데서 기다리자고⁠.⁠” 새봄이 침을 삼켰다⁠. “⁠그리고 하나가 더 있어요⁠.⁠” 새봄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 사람은 걸음 소리가 하나도 없어요⁠. 말할 때만 알아요⁠. 낮에 한 번⁠, 옥졸한테 말하는 소리가 저 통로 끝에서 났어요⁠. 오늘 밤 늙은이가 오면 길을 열어 두라고⁠. 그다음엔 다시 아무 소리도 안 났어요⁠. 그런데 옥졸들이 저 통로 끝 쪽을 한 번도 안 봐요⁠. 무서워서 안 보는 것 같아요⁠.⁠”

만두 냄새 나는 데⁠. 판구의 손이 쇠고랑 위에서 한 번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여기서 어선방까지는 지붕으로 반각이었다⁠. 사람을 업고 가면 이 두 배였다⁠.

판구는 쇠고랑의 이음매를 엄지로 눌렀다⁠. 쇠가 손끝에서 조금 벌어졌다⁠. 새봄의 손목이 빠져나왔다⁠. 손목에 붉은 자국이 둥글게 남아 있었다⁠.

“⁠그 사람 말고⁠, 열째 걸음은 못 들었소⁠?⁠”

“⁠제독이요⁠? 오늘은 안 내려왔어요⁠.⁠”

판구가 이 사람을 일으켜 세웠다⁠. 새봄의 다리가 휘청했다⁠. 하루 종일 꿇어앉아 있던 다리였다⁠. 판구는 새봄을 등에 업었다⁠. 그러고는 통로 저쪽 끝을 보았다⁠. 계단이 아니라 반대편⁠, 아문 뒷문으로 이어지는 통로였다⁠. 불이 하나도 없었다⁠.

*

통로는 좁았다⁠. 두 사람이 엇갈리려면 하나가 벽에 등을 붙여야 했다⁠. 판구는 새봄을 업고 이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손에는 아까 빼낸 나무 창살 하나를 쥐었다⁠. 팔뚝 굵기⁠, 길이는 사람 키 반⁠. 칼이 아니었다⁠.

스무 걸음쯤 갔을 때 판구가 멈췄다⁠.

소리는 없었다⁠. 그러나 통로 앞쪽의 공기가 달랐다⁠. 사람 하나가 숨을 참고 서 있으면⁠, 이 사람 몸을 돌아 흐르는 바람이 아주 조금 꺾였다⁠. 냄새도 있었다⁠. 분 냄새⁠, 그리고 이 밑의 쇠 냄새⁠.

“⁠내려가 있으시오⁠. 벽에 붙어서⁠.⁠”

새봄이 등에서 내려 벽에 붙었다⁠. 새봄의 숨소리가 떨렸다⁠.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났다⁠. 가늘고 높은 목소리⁠, 연희 날 광대들을 부르던 목소리였다⁠.

“⁠제독 마마께서 늙은이가 올 거라 하셨지⁠. 정말 오는군⁠. 여자를 업고⁠.⁠” 목소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연희패에선 나를 백면이라 부르네⁠. 얼굴에 분을 하얗게 바르거든⁠. 광대 노릇을 오래 했더니 얼굴을 잊었어⁠. 영감은 얼굴이 있나⁠?⁠”

판구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무 창살을 몸 앞에 비스듬히 세웠다⁠.

쇳소리가 났다⁠. 아래에서 위로⁠. 갈고리였다⁠. 둘⁠. 판구는 창살로 첫째를 받았다⁠. 갈고리가 나무에 박히는 둔한 소리⁠. 두 번째가 곧장 따라왔다⁠. 이번엔 목 높이였다⁠. 판구가 몸을 낮췄다⁠. 갈고리가 머리 위 벽돌을 긁으며 불꽃을 튀겼다⁠. 이 불꽃이 한순간 통로를 밝혔다⁠. 하얀 얼굴 하나가 판구의 코앞에 있었다⁠. 분칠한 얼굴에 눈만 검었다⁠.

어둠이 다시 왔다⁠. 판구는 창살을 놓았다⁠. 갈고리에 박힌 창살이 백면의 손을 끌어내렸다⁠. 판구의 손바닥이 이 무게가 쏠린 팔목에 붙었다⁠. 비틀지 않았다⁠. 팔목이 이미 가던 쪽으로 조금 더 보냈다⁠. 뼈 꺾이는 소리가 좁은 통로에 울렸다⁠.

백면은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대신 다른 손의 갈고리가 낮게 돌아 들어왔다⁠. 판구는 몸을 틀었다⁠. 갈고리 끝이 판구의 등을 가로로 찍고 지나갔다⁠. 내관복이 찢어지고⁠, 등에 뜨거운 줄이 길게 그어졌다⁠. 판구의 숨이 처음으로 한 번 흐트러졌다⁠. 새봄이 벽에 붙은 채 숨을 들이켰다⁠.

판구는 흐트러진 숨을 다시 고르지 않았다⁠. 흐트러진 그대로 한 걸음 들어갔다⁠. 판구의 어깨가 백면의 가슴에 붙었고⁠, 거기서 짧게 한 번 밀었다⁠. 백면의 몸이 뒤로 날아가 통로 벽에 부딪쳤다⁠. 벽돌 가루가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무언가가 바닥을 기는 소리가 어둠 저편으로 멀어졌다⁠. 꺾인 팔을 끌어안고 기는 소리였다⁠.

이때 계단 쪽에서 비명이 났다⁠. 여자 목소리였다⁠.

“⁠옥졸이⁠, 옥졸이 쓰러졌어요⁠! 일곱째 칸이 비었어요⁠!⁠”

보늬였다⁠. 다음 종소리가 났다⁠. 동창 아문의 쇠종이 땡⁠, 땡⁠, 땡⁠, 쉬지 않고 울렸다⁠. 위층 마루를 달리는 발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판구는 새봄을 다시 업었다⁠. 등에 그어진 상처가 새봄의 무게에 벌어졌다⁠. 통로 끝으로 걸었다⁠. 뛰지 않았다⁠. 통로 끝 나무 문은 안쪽에서 빗장이 걸려 있었다⁠. 이 사람이 빗장을 들어 올렸다⁠. 문이 바깥으로 열렸다⁠.

찬바람이 들어왔다⁠. 그리고 빛이 들어왔다⁠. 횃불이었다⁠. 여럿⁠.

동익문 안쪽 빈터였다⁠. 눈이 깔린 빈터에 붉은 비단옷을 입은 금의위 무관 열둘이 횃불을 들고 반원으로 서 있었다⁠. 이 한가운데 유가휘가 서 있었다⁠. 왼손에는 흰 무명이 감겨 있었고⁠, 오른손은 칼자루 위에 있었다⁠. 유가휘의 곁에 포승에 묶인 사내 하나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얼굴에 그을음이 묻은 사내였다⁠.

유가휘가 횃불 빛 속에서 판구를 보았다⁠. 등에서 피를 흘리며 궁녀를 업은 늙은 내관을⁠. 유가휘의 얼굴에서 정중함이 사라졌다⁠.

뒤쪽 아문 안에서 종소리가 계속 울렸다⁠. 발소리가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영감⁠.⁠” 유가휘가 칼자루를 쥔 채 말했다⁠. “⁠업은 사람⁠, 내려놓으시오⁠.⁠”

1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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