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055자) · 지환 · 2월 26일
회의실
결재선에 없는 사람 · 윤재하
이십구 층 대회의실은 이십팔 층보다 천장이 한 뼘 높다. 그 한 뼘 때문에 목소리가 조금씩 울린다. 긴 호두나무 테이블에 의자가 열여섯 개 놓여 있었고, 삼면이 통유리라 2월 26일 목요일 오후 네 시의 여의도가 테이블 위까지 들어와 있었다. 한강 쪽으로 기운 해가 유리에 반사돼 테이블 상판에 길게 누웠고, 그 빛 속에서 누군가 먼저 놓아 둔 생수병들이 작은 무지개를 하나씩 만들고 있었다. 회의실 공조기는 이십팔 층 것보다 조용했다. 조용해서 오히려 계속 신경이 쓰였다.
지환은 테이블 왼쪽 끝에 앉았다. 옆에 건우, 그 옆에 채린. 맞은편에 세운정밀 대표 남건혁과 재무팀장 유정란, 그리고 세운정밀 감사위원장인 사외이사 김 변호사. 상석에 도담회계법인 대표 한석진, 그 오른쪽에 품질관리실장 권도형, 왼쪽에 차미숙. 회의 제목은 세운정밀 기말감사 관련 협의였다. 사흘 전 세운정밀이 감사인 교체 협의를 정식으로 요청했고, 법인은 의견을 확정하기 전에 한 자리에 앉기로 했다.
전날 밤, 품질관리실에서 결재 알림이 왔다. 재상신 조서 통과. 반송 사유서 대신 한 줄짜리 검토 의견이 붙어 있었고, 검토자 칸에는 여전히 부서명만 있었다. 채린은 그 알림을 보고 두 손을 번쩍 들었다가 층에 남은 사람이 셋뿐이라는 걸 알고 천천히 내렸다. 건우가 박수를 두 번 쳤다. 지환은 박수를 치지 않았다. 권도형은 조서를 통과시킨다고 했지 의견을 통과시킨다고 하지 않았다. 두 시에 공조기가 꺼졌을 때 지환은 창에 비친 제 얼굴을 봤다. 옆에 건우의 얼굴이 겹쳐 있었다. 둘 다 내일 입을 셔츠를 사물함에 걸어 두고 있었다.
지환은 무릎 위에서 두 손을 맞잡고 있었다. 엄지가 다른 쪽 손등을 계속 문질렀다. 채린에게서 옮은 버릇이었다. 테이블 아래에서 건우의 구두 끝이 지환의 구두 옆에 와 닿았다가 조금 떨어졌다. 둘 다 발을 거두지 않았다.
남건혁이 먼저 매끄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대표님, 저희는 감사를 거부하는 게 아닙니다. 공정한 감사를 요청하는 겁니다. 이번 감사팀에 제 이복동생이 들어와 있습니다. 가족 사이에 섭섭한 일이 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제 아버지 병원 기록을 가지고 나왔어요. 편찮으신 분 기록을요. 그리고 담당 매니저분은 오 년 전에도 저희 회사와 마찰이 있으셨고요. 그때 공문도 보냈었죠.”
유정란이 서류를 한 장씩 돌렸다. 2021년 3월 공문 사본이었다. 담당자의 업무 태도에 대하여도 유감을 표합니다. 한석진이 그 줄을 읽고 안경을 벗었다.
“서 매니저, 할 말 있나?”
지환이 입을 열기 전에 남건혁이 한 마디를 더 얹었다. 테이블 너머로 지환을 보며, 킥오프 날과 같은 얼굴로.
“서 매니저님, 오 년 동안 계셨으면 이제 좀 쉬셔도 되지 않나요? 이름도 없이 일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을 텐데.”
회의실 누구도 웃지 않았다. 지환은 그 말이 제 가슴 한가운데로 들어와 박히는 것을 느꼈다. 오 년 동안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은 말을 이 사람이 제일 먼저, 제일 가볍게 했다.
지환이 일어서자 무릎이 한 번 떨렸다. 그는 바인더를 열었다.
“세운정밀 매출채권 거래처 열아홉 곳, 사업장 주소 넷에 대한 실사 결과입니다. 정왕동 상가 이 층 열한 곳, 전기 계량기 세 개 전부 정지. 고잔동 오피스텔 1407호 네 곳, 세입자 문옥순 씨 확인서와 우편물 쉰여섯 통. 배곧 공유오피스 세 곳, 비상주 요금 결제 카드 명의자 유정란, 명의 대표 방동식 씨 확인서. 물왕동 단독주택 한 곳, 대표이사 남정호. 설립일 2022년 6월 14일. 같은 시기 요양병원 진단서에 의사 표현과 서명 불가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는 한 장씩 테이블 가운데에 놓았다. 삐뚤빼뚤한 방동식의 서명, 받침에서 찢어진 문옥순의 서명, 멈춘 계량기 사진, 진단서.
“열아홉 곳 가운데 열아홉 곳이고, 한정 사유입니다.”
남건혁이 웃었는데, 웃음이 조금 길었다.
“막내야, 아버지 기록을 이런 데 쓰니까 좋니? 네 엄마가 그렇게 가르쳤니?”
건우가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소매는 내려져 있었고 단추도 채워져 있었다.
“어머니가 배우자 동의로 서명하셨습니다, 대표님. 그리고 아버지 이름을 먼저 쓴 건 제가 아니라 대표님입니다. 저는 그걸 조서에 옮겨 적었을 뿐입니다.”
회의실 안이 조용해졌다. 공조기 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남건혁은 건우를 보지 않고 유정란을 봤다.
“대표님, 이 부분은 재무팀장이 실무를 하면서 생긴 일입니다. 저는 보고받은 적이 없어요. 유 팀장, 그렇지?”
유정란의 얼굴에서 핏기가 한꺼번에 빠졌다. 그녀는 서류를 쥔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테이블 아래에서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오 초쯤 아무도 숨을 쉬지 않았다.
“제 이름으로 한 건 공유오피스 결제 카드 하나뿐입니다.”
유정란의 목소리가 떨렸다. 떨리면서도 빨랐다. 늘 빠르던 목소리가 이번에는 누구보다 먼저 제 말을 끝내려고 달렸다.
“나머지는 전부 대표님 결재가 있고, 메신저로 받았습니다. 제 휴대폰에 다 있어요. 저 아들이 둘입니다, 대표님. 저 혼자 한 걸로는 못 합니다.”
남건혁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판교 서재에서 건우가 봤다는 그 빈 얼굴이었다. 김 변호사가 수첩을 펴고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권도형이 한 박자 쉬고 입을 열었다.
“대표님, 조서는 제가 통과시켰습니다. 명의자 진술과 진단서가 붙었으니 근거는 충분합니다. 그건 제 일이니까요. 다만 의견은 다른 문제입니다. 한정을 내면 세운정밀은 은행 한도가 묶이고 산단 직원 육백사십 명이 다음 분기에 흔들립니다. 우리 법인은 이 회사와 다투는 법인이라는 소문을 산단 전체에 달게 되고요. 적정 의견에 강조사항 문단을 다는 게 맞다고 봅니다. 그리고 독립성 우려가 제기됐으니 담당 매니저와 파견 회계사는 이번 건에서 교체하는 게 깔끔합니다. 조서는 그대로 두고요.”
지환은 그 말을 들었다. 조서는 그대로 두고, 이름만 뺀다. 오 년 전과 같은 문장이었다. 다른 사람 입에서, 같은 모양으로. 목덜미에 식은땀이 한 줄 흘렀다. 채린이 테이블 아래에서 제 허벅지를 꽉 쥐는 것이 곁눈에 보였다. 한석진은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권도형 쪽으로 몸을 조금 기울였다.
그때 차미숙이 서류 봉투 하나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모서리가 갈라진, 누렇게 뜬 클리어 파일이었다. 지환은 그 파일을 알아봤다. 이십이 일 전 아침에 제 손으로 저 사람 책상에 놓고 나온 파일이었다.
“대표님, 이건 2021년 3월 3일에 서 매니저가 쓴 세운정밀 별도 보고서입니다. 법인 전산에서는 지웠고 출력본도 파쇄했으니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게 남은 한 부입니다.”
권도형이 미숙을 봤다. 처음으로 한 박자를 쉬지 않았다.
“차 파트너, 지금 뭐 하는 건가?”
“이 보고서를 멈춘 건 당시 담당 파트너였던 권 상무님이고, 이 사람 이름을 결재선에서 뺀 건 저입니다. 그리고 그해 저는 파트너가 됐습니다. 오늘 권 상무님이 말씀하신 방식, 조서는 두고 이름만 빼는 방식은 오 년 전에 제가 쓴 방식입니다. 효과는 확실합니다. 오 년 동안 아무도 몰랐으니까요.”
미숙은 파일에서 마지막 장을 꺼냈다. 결재란 네 칸 가운데 첫 칸에만 서지환이라는 글자가 있었다. 그녀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냈다. 뚜껑을 여는 소리가 회의실에 또렷하게 울렸다. 그리고 비어 있던 두 번째 칸, 검토자 칸에 차미숙이라고 제 이름을 쓰고, 그 옆에 2026년 2월 26일이라고 날짜도 썼다. 오 년 늦은 날짜였다.
“이번 건에서 담당을 바꾸시려면 업무집행 파트너인 저부터 바꾸십시오. 저는 이 보고서를 오늘부터 이번 조서철에 넣겠습니다. 한정 의견은 제가 최종에 서명합니다.”
한석진이 안경을 도로 썼다. 회의실 유리에 해가 조금 더 기울었다. 그는 테이블 가운데 놓인 서류들, 계량기 사진과 삐뚤빼뚤한 서명과 진단서와 누런 보고서를 차례로 봤다.
“의견은 한정으로 가고, 담당은 그대로 둔다.”
남건혁이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섰다. 감사인 교체를 정식으로 요청하겠다고 했다. 김 변호사가 수첩을 덮으며 말했다. 세운정밀은 증권선물위원회 지정 감사 대상이라 회사 마음대로 감사인을 바꿀 수 없다고, 그리고 방금 들은 이야기는 감사위원회에 보고하겠다고. 남건혁은 대답하지 않고 나갔다. 회의실 문이 천천히 닫혔다. 문이 다 닫히기 전 손가락 두 개만 한 틈으로 복도 불빛이 잠깐 새어 들었다가 사라졌다. 유정란은 한참 앉아 있다가 고개를 숙이고 뒤따라 나갔다.
권도형은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어나서 서류를 챙기고, 미숙 앞을 지나가다 멈추지 않고 나갔다. 서류를 끼운 그의 팔꿈치가 문틀에 한 번 부딪혔다. 오 년 동안 한 박자씩 쉬며 말하던 사람이 그날은 문을 나서는 박자를 놓쳤다. 문이 닫히고, 테이블 위에 그가 앉았던 자리의 생수병만 뚜껑이 닫힌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한석진은 그 병을 한 번 보고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
회의실에 셋과 미숙만 남았다. 미숙은 만년필 뚜껑을 닫고 파일을 지환 쪽으로 밀었다.
“서 매니저, 원본은 자네가 조서철에 넣어. 이번에는 파일로만 남지 않게.”
지환은 파일을 받았다. 손끝이 종이 모서리에 닿는 순간 오 년 전 서랍 속 나무 냄새가 올라왔다. 결재란 두 번째 칸에 아직 마르지 않은 잉크가 조금 번져 있었다.
“파트너님, 이거 내주시면.”
“알아, 이번 시즌 끝나면 파트너 내려놓을 거야. 상근 고문이라고들 부르겠지, 예우라면서.”
미숙은 창 쪽으로 걸어가 여의도를 봤다. 유리에 그녀의 얼굴이 옅게 비쳤다.
“오 년 전에 자네 이름을 뺄 때, 나는 자네를 지킨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자네가 안 나가더라. 매일 와서 매일 일하고 매일 안 남더라. 그걸 오 년 동안 봤어. 뺀 사람이 계속 보게 되더군.”
“그래서 안 나갔습니다.”
미숙이 돌아봤다. 짧게 웃는 그 얼굴을 지환은 오 년 만에 처음 봤다.
“알아, 그래서 내가 졌지.”
그녀가 나가고 나서도 셋은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채린이 먼저 테이블에 이마를 댔다. 쿵 소리가 났다. 아프다고 작게 말하고도 이마를 떼지 않았다. 건우는 소매를 걷으려고 손을 올렸다가, 이번에도 걷지 않고 지환의 파일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누런 비닐 위로 두 사람의 손이 한 뼘 떨어져 있었다. 지환은 제 손을 그쪽으로 한 뼘 옮겼다. 회의실 공조기는 아직 돌고 있었다. 두 시까지는 한참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