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048자) · 지환 · 3월 12일
승인자
결재선에 없는 사람 · 윤재하
3월 12일 목요일 밤 아홉 시, 세운정밀 최종 조서가 결재선에 올라왔다. 감사보고서 공시 기한까지 스물일곱 시간이 남아 있었다. 이십팔 층은 시즌 마지막 주라 파티션마다 빈 커피 컵이 탑처럼 쌓여 있었고, 복합기 세 대가 쉬지 않고 돌아서 층 전체에 따뜻한 토너 냄새가 떠 있었다. 3호기는 목요일이라 얌전했다.
지환은 결재 화면을 띄워 놓고 한참 봤다. 작성자에 오채린, 검토자에 서지환과 남건우, 최종에 차미숙. 그 사이 승인자 칸만 비어 있었고, 칸 안에서 커서가 깜박이고 있었다. 승인자는 최종 파트너가 지정한다. 오 년 동안 그 칸에는 늘 다른 사람 이름이 들어갔다. 지환은 그 칸 앞에서 한 번도 멈춰 본 적이 없었다. 멈출 일이 없었으니까.
미숙이 자리로 왔다. 시즌이 끝나면 파트너를 내려놓는다는 공지는 지난주에 났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코트도 가방도 없이 빈손으로 왔다. 지환의 모니터 옆에 서서 화면을 봤다. 비어 있는 칸과 깜박이는 커서를.
“서 매니저, 승인자 칸에 누구 넣을까.”
지환은 대답하지 못했다. 오 년 동안 이 질문을 받은 적이 없었다. 받은 적이 없으니 대답을 준비한 적도 없었다. 목구멍 안쪽이 조였다가 풀렸다. 그런데 말이 먼저 나왔다.
“제 이름 넣어 주십시오.”
미숙이 지환을 내려다봤다.
“그거 넣으면 자네가 책임지는 거야. 한정 의견 나가고 회사가 소송 걸면 자네 이름부터 불려 가. 오 년 전이랑 똑같아져.”
“이번엔 안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뭐가 다른데?”
지환은 옆을 봤다. 건우가 모니터 너머로 이쪽을 보고 있었고, 채린은 형광펜을 든 채 숨을 참고 있었다.
“그때는 저 혼자였습니다.”
미숙은 허리를 숙여 지환의 키보드에 손을 얹었다. 최종 파트너 권한으로 칸을 열고, 한 글자씩 쳤다. 서, 지, 환. 비어 있던 칸에 글자가 채워지고, 커서가 이름 끝에서 깜박였다. 그녀가 엔터를 눌렀다. 승인자 칸의 서지환이 파란 링크로 바뀌었다.
미숙은 허리를 펴고 한 마디만 했다.
“오 년 늦었네.”
그녀는 돌아서서 파트너실 쪽으로 걸어갔다. 사십 초 걸리는 길이었다. 그 사십 초 동안 파티션 위로 머리들이 올라왔다가, 이번에는 내려가지 않았다.
지환은 승인 버튼 위에 커서를 올렸다. 손가락이 마우스 위에서 떨렸다. 떨림이 멎을 때까지 기다렸는데 멎지 않았다. 그래서 떨리는 채로 눌렀다. 딸깍 소리와 함께 상태 창에 한 줄이 떴다. 승인 완료, 21시 14분. 옆자리에서 건우가 참던 숨을 내쉬었고, 채린은 노랑 형광펜 뚜껑을 닫다가 떨어뜨렸다. 형광펜은 바닥을 굴러 지환의 구두 끝에서 멈췄다.
*
채린의 전환 심사 결과는 지난주 금요일에 통과로 났다. 조건이 하나 붙어 있었다. 향후 육 개월간 심화 교육 이수. 그리고 올해 처음 생긴 사유 칸에 한 줄이 들어가 있었다. 감사 조서 작성 및 이의 제기 과정에서의 직무 수행.
그날 채린은 결과 메일을 모니터에 띄워 놓고 지환에게 물었다.
“이거 붙은 겁니까, 아닙니까? 왜 저만 교육이 붙어요?”
“붙은 겁니다. 교육이 붙은 건 시끄러웠으니까요.”
“저 그거 너무 억울합니다.”
“억울한 게 맞습니다.”
“위로 안 해 주십니까?”
지환은 커피 두 잔을 따라 하나를 밀어 줬다.
“오 수습 이름이 사유 칸에 남았습니다. 그 칸은 올해 생겼습니다.”
“그게 무슨 위로입니까?”
“저한테는 오 년 걸린 위로입니다.”
채린은 커피를 받아 들고 사유 칸을 한 번 더 읽었다. 그러고는 모니터에 붙여 둔 노란 메모들을 하나씩 뗐다. 「심사 D-6」과 「확인 15/19」는 휴지통에 넣었고, 「대답할 것」이라고 적은 마지막 한 장은 떼지 않고 수첩 맨 앞장에 옮겨 붙였다.
*
3월 13일 금요일 오후 다섯 시, 세운정밀 감사보고서가 한정 의견으로 공시됐다. 특수관계자 거래와 매출채권의 실재성을 확인할 수 없다는 문단이 들어갔고, 그 문단 뒤에 조서 번호가 붙었다. 월요일 아침 세운정밀 주가는 장이 열리자마자 하한가로 갔다. 금융감독원 감리 착수 공시가 뒤따랐고, 사흘 뒤 경찰이 세운정밀 본사와 대표 자택을 압수 수색했다는 기사가 났다. 유정란은 참고인으로 먼저 불려 갔다고 했다. 휴대폰 메신저를 통째로 제출했다고.
지환은 그 기사들을 읽다가 하나에서 멈췄다. 지역 신문 기사였다. 시화산단 협력사 대표 인터뷰. 세운정밀 은행 한도가 묶이면 다음 달 납품 대금이 늦어질 거라고, 그러면 우리 공장 스무 명 월급이 늦어진다고. 사진 속 공장 앞에 작업복 입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가슴에 파란 톱니바퀴는 없었지만 같은 산단 바람 속에 서 있었다.
지환은 휴대폰을 엎었는데, 손바닥이 차가웠다. 이긴 자리에서 누가 곤란해지는지 알고 한 일이었다. 알고 한 일이라서 덜 차가운 건 아니었다. 그는 엎어 둔 휴대폰을 다시 뒤집어 그 기사를 조서철 참고 자료 폴더에 저장했다. 이긴 쪽 서류 맨 뒤에 진 쪽 사람들 얼굴이 한 장 붙어 있어야 한다고, 누가 가르쳐 준 적은 없지만 그렇게 했다.
건우가 모니터 너머로 어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고 말했다. 형이 변호사를 통해 상속 얘기를 꺼냈다고. 집은 아직 괜찮다고. 그리고 요양병원에서 간병인이 문자를 보냈는데, 아버지가 오늘 창밖을 오래 보셨다고.
그 주 목요일에는 채린의 휴대폰으로 문자가 왔다. 문옥순이었다. 확인서를 쓸 때 채린이 명함을 두고 왔었다. 「아가씨, 오늘 경찰 아저씨들이 김치통 가지러 왔어요. 그냥 주면 안 될 것 같아서 받아 가는 사람 이름 쓰고 가라고 했어요. 세 사람이 다 썼어요. 잘했지요?」 채린은 그 문자를 소리 내어 읽었다. 건우가 먼저 웃었고, 지환이 따라 웃었다. 채린은 답장을 한참 고르다가 「네, 제일 잘하셨어요」라고 보냈다. 그러고는 방동식 어르신한테도 누가 연락을 드려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삼십만 원이 끊겼을 텐데 전기장판은 어떻게 켜시느냐고. 지환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긴 자리에는 이런 질문이 남았다. 그날 저녁 채린은 퇴근길에 정왕동에 들렀다가, 쪽방 6호 문고리에 귤 한 봉지를 걸어 두고 왔다고 다음 날 말했다. 이름은 안 썼다고. 그 이름은 어르신이 이미 아신다고.
*
3월 30일 월요일, 시즌이 끝난 지 보름이 넘었는데 둘은 새벽 두 시까지 남아 있었다. 할 일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건우의 부산 복귀 발령일이 내일이었다.
두 시에 공조기가 꺼졌다. 시즌이 끝난 층은 파티션 열두 줄이 거의 비어 있어서, 송풍구가 멎자 조용함이 한꺼번에 내려앉았다. 종이 냄새가 났다. 시즌 내내 쌓였던 조서 더미는 다 치워졌는데도 냄새만은 남아 있었다. 오 년 전에도 이 냄새가 났다.
건우의 책상은 반쯤 비어 있었다. 모니터 옆에 접힌 상자 두 개가 세워져 있었고, 서랍에서 나온 볼펜과 명함과 부산 지점 출입증이 책상 위에 한 줄로 누워 있었다. 지환은 그 옆에 파일 하나를 내려놓았다. 세운정밀 조서철에서 뽑아 온 사본이었다. 1월 첫 주 매출채권 명세서, 3쪽. 오른쪽 위에 노란 접착 메모가 붙어 있었다. 「3쪽 합계 안 맞습니다. 제 실수입니다. 내일 아침까지 고치겠습니다.」 받침 ㅁ이 동그랗게 굴러간 글씨였다.
“이거 원본은 조서철에 들어갔습니다. 십 년 보관입니다.”
건우가 메모를 내려다보다가 이마를 짚었다.
“제 실수가 십 년 남는 겁니까?”
“고친 것도 같이 남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고치셨으니까요.”
건우는 한참 웃다가 메모를 손끝으로 한 번 눌렀다. 끈적임이 다 빠져서 모서리가 조금 들떠 있었다.
품질관리실 유리문 안쪽은 불이 꺼져 있었다. 권도형은 자리를 지켰다. 사과도 해명도 없었다. 다만 지침 제14조 개정안이 경영위원회에 올라갔다는 말이 이십팔 층에 돌았고, 개정안 첫 줄이 반송 사유서 검토자 칸에 성명을 적는다는 내용이라는 말도 같이 돌았다. 누가 올렸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채린은 그 말을 듣고 모른 척하는 데 또 서툴렀다.
“연장 요청서, 결재 올라온 거 보셨습니까?”
건우가 파티션 너머에서 물었다. 지환은 모니터를 봤다. 인사 결재함에 서류 한 장이 와 있었다. 부산 지점 남건우, 서울 감사본부 전보 요청서. 작성자 칸에 남건우. 검토자 칸에 서지환. 지환이 검토자로 지정된 건 이 층에서 두 번째였다.
“이거 언제 올리셨습니까?”
“세운정밀 공시 난 날 밤에요. 매니저님한테 안 물어보고요.”
“왜 안 물어보셨습니까?”
“물어보면 매니저님이 내일 아침에 말씀드리겠다고 할 것 같아서요.”
지환은 소리 내어 웃었다. 오 년 동안 이 층에서 두 시에 소리 내어 웃은 적이 없었다. 그는 검토 완료 버튼 위에 커서를 올렸다. 이번에는 손가락이 떨리지 않아서 바로 눌렀다. 딸깍 소리가 빈 층을 가로질러 창에 부딪혔다.
“사유 칸에 뭐라고 쓰셨습니까?”
“감사 대상 법인 감리 대응에 해당 인력의 연속성이 필요함.”
“거짓말은 아니네요.”
“네, 그게 전부도 아니고요.”
엘리베이터 앞에서 층 표시가 28에서 움직였다. 오 년 전 3월에도 이 자리에서 이 숫자를 봤다. 그때는 거울 속에 한 사람뿐이었고, 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둘이 탔는데, 아무도 층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는 이십팔 층에 선 채로 가만히 있었다.
“건우 씨.”
“네.”
“이번엔 안 내려가셨으면 좋겠습니다.”
“부산 말입니까, 아니면.”
“둘 다요.”
건우가 1층 버튼을 눌렀다. 지환도 같은 버튼을 눌렀다. 두 손가락이 버튼 위에서 한 번 겹쳤고, 둘 다 먼저 떼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숫자가 하나씩 줄었다. 거울 속에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었다.
“오 년 전에 물어보신 거요. 이름 같이 올릴 거냐고.”
“그건 이미 검토자 칸에 대답하셨습니다.”
“그거 말고 하나 더 있었잖아요. 그날 밤에 매니저님이 물어보려다 안 물어보신 거.”
지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목 뒤가 뜨거워졌다. 오 년 전 3월 2일 밤, 그는 두 개를 물으려다 하나만 물었다. 나머지 하나는 그 뒤로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십오 층을 지났다.
“그 대답은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내일 아침에 하셔도 되고요.”
건우가 거울 속에서 지환을 봤다. 그리고 거울 말고 진짜 얼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매는 내려져 있었고, 단추는 채워져 있었고, 버튼 위에서 겹친 손가락은 아직 그대로였다.
“내일 아침에 말고, 지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