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052자) · 건우 · 2월 15일

아버지

결재선에 없는 사람 · 윤재하

물왕동 집은 저수지 뒤편 비탈에 있었다. 2월 15일 일요일 오후, 건우는 버스에서 내려 이십 분을 걸어 올라갔다. 길가 밭은 겨울이라 비어 있었고, 비닐하우스 찢어진 자락이 바람에 펄럭이며 일정하게 탁탁 소리를 냈다. 저수지 쪽에서 올라오는 바람은 물비린내와 마른 갈대 냄새를 섞어 실어 왔다. 대문은 녹이 슬어 페인트가 비늘처럼 들떠 있었고, 문기둥에 붙은 문패에 한자로 남정호라고 적혀 있었다. 아버지가 공장을 차리기 전에 산 첫 집이었다. 형은 여기서 컸다. 건우는 이 집에 한 번도 살아 본 적이 없었다.

대문 옆 우편함에 등기 안내문이 두 장 꽂혀 있었다. 정호산업 대표이사 남정호 귀하. 법인 등기부에는 2022년 6월 14일 설립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버지가 쓰러지고 일 년 삼 개월 뒤였다.

건우는 담 옆 계량기함을 열었다. 원판이 멈춰 있었다. 숫자 창에 먼지가 앉아 끝자리가 잘 보이지 않았다. 계량기부터 봐라, 그 말을 부산에서 오 년 동안 후배들에게 했는데, 제 아버지 이름이 붙은 계량기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사진을 찍는 동안 휴대폰 화면에 지환의 메시지가 떴다. 「혼자 가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건우는 「가족 일이라서요」라고 답했다가 지우고, 「계량기 멈췄습니다」라고 다시 보냈다. 답은 금방 왔다. 「사진 두 장 더 찍으십시오.」 건우는 그 말대로 두 장을 더 찍고 나서 마당 감나무 아래 잠깐 서 있었다. 가지 끝에 까치밥으로 남긴 감 두 개가 말라서 검게 쪼그라들어 있었다.

*

안산 요양병원 오 층은 창이 남쪽이라 겨울 오후 햇볕이 병실 바닥 깊숙이 들어왔다. 소독약 냄새 사이로 누군가의 죽 냄새가 섞여 있었다. 아버지는 창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오 년 전 서재에서 쓰러진 뒤로 말을 못 했다. 오른손만 조금 움직였다. 눈은 사람을 알아보는 날도 있고 못 알아보는 날도 있다고 간병인이 말했다.

어머니가 귤을 까고 있었다. 건우를 보고 반가워하다가 얼굴을 보고는 귤 까던 손을 멈췄다.

“무슨 일 있니?”

건우는 원무과에서 받아 온 서류를 침대 옆 탁자에 놓았다. 의무기록 사본 발급 신청서. 환자 본인이 의사를 표시할 수 없을 때는 배우자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원무과 직원이 말했다. 2021년 3월부터 지금까지의 진단 기록. 아버지가 그동안 서명을 할 수 있었는지, 도장을 찍을 수 있었는지가 거기 적혀 있을 터였다.

“엄마, 아버지 이름으로 회사가 하나 있는데 2022년에 생겼어요. 아버지가 여기 누워 계실 때요.”

어머니는 서류를 오래 봤다. 서류 위로 햇빛이 네모나게 떨어져 있었다.

“형이 한 거니?”

“아마 형일 거예요.”

“이거 내가 쓰면 형이 가만있겠니?”

건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서류를 반으로 접어 가방에 넣었다. 내일 차례 지내고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그 말투가 거절인지 아닌지 건우는 알 수 없었다. 어머니는 대신 아버지 쪽으로 몸을 돌려,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모를 남편에게 오늘 날씨가 풀렸다고 말했다. 창밖 주차장에 눈이 녹아 물웅덩이가 생겼고, 거기 하늘이 비친다고. 아버지의 눈이 아주 천천히 창 쪽으로 움직였다. 어머니는 그걸 보고 거봐, 다 들으신다니까, 하고 웃었다.

*

설날 아침, 판교 형의 집에서 차례를 지냈다. 아버지 자리는 비어 있었고, 형이 제주 노릇을 했다. 형수가 전을 부치는 기름 냄새가 거실 가득했고, 조카 둘은 소파에서 태블릿으로 게임을 했다. 형은 절을 할 때마다 두 손을 이마에 오래 대고 있었다. 누가 보면 효자였다. 어머니는 부엌 쪽 식탁에 앉아 있었다. 형수와 어머니 사이에 전 접시 하나만큼의 거리가 있었고, 그 거리는 이십 년째 같았다.

차례가 끝나자 형이 건우를 서재로 불렀다. 통유리 창 너머로 판교 빌딩들이 설 연휴라 반쯤 불이 꺼져 있었다. 형은 책상에 걸터앉아 위스키를 두 잔 따랐다. 건우는 잔을 받지 않았다.

“막내야, 물왕동 다녀왔다며. 거기 감나무 아직 있지?”

“정호산업, 아버지 이름 쓴 거 형이죠. 2022년 6월이면 아버지 숟가락도 못 드실 때예요.”

형은 잔을 한 바퀴 돌렸다. 얼음이 유리에 부딪히는 소리가 맑게 울렸다.

“아버지 도장은 장남인 내가 관리해. 아버지가 하시던 걸 내가 이어서 하는 거고.”

“아버지는 가짜 회사를 만든 적이 없어요.”

“그건 네가 모르지. 너는 스무 살에 처음 온 집안이야, 우리가.”

그 말이 명치에 박혔다. 건우는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내쉬는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형은 그걸 보고 웃었다.

“재무이사 자리, 이번 주까지만 비워 둔다. 그리고 네 엄마 사시는 집 말이야. 등기부에 아직 아버지 이름만 있는 거 알지? 상속 때 네 엄마 몫이 얼마인지 계산해 봤니? 나는 해 봤다.”

“엄마 얘기는 하지 마세요.”

“그럼 네가 빠지면 되잖아. 오 년 전처럼. 넌 또 대답 안 하겠지.”

건우는 소매를 걷으려고 손을 올렸다가 멈췄다. 오늘은 걷지 않기로 했다. 대신 형 앞에 놓인 두 번째 잔을 들어 책상 위에 도로 내려놓았다. 잔 바닥이 나무 상판에 닿는 소리가 크게 났다.

“이번엔 대답합니다, 형. 저는 싫습니다. 재무이사도 싫고, 빠지는 것도 싫습니다. 아버지 이름을 조서에 쓰겠습니다. 형이 먼저 썼으니까요.”

형의 얼굴에서 웃음이 처음으로 사라졌다. 사라진 자리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표정이 없는 형의 얼굴을 건우는 처음 만난 지 열세 해 만에 처음 봤다.

서재 문을 열고 나오자 거실에서 조카 둘이 게임을 멈추고 삼촌을 올려다봤다. 큰애가 삼촌 왜 얼굴이 빨개요, 하고 물었다. 형수가 부엌에서 조카 이름을 불렀다. 건우는 조카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현관으로 갔다. 신발을 신는데 손이 떨려서 끈이 한 번에 안 묶였다. 부엌 식탁에 앉아 있던 어머니가 말없이 일어나 코트를 챙겼다.

*

돌아오는 차에서 어머니는 말이 없었다. 안산 집 앞에 도착해서야 가방에서 접힌 서류를 꺼냈다. 부엌 식탁에 서류를 펴고 볼펜 뚜껑을 이로 물어 열었다. 가스레인지 위 주전자에서 보리차가 끓어 넘칠 듯 달그락거렸다.

“엄마, 이거 쓰면 형이 집 가지고.”

“알아, 나도 계산할 줄 안다.”

어머니는 배우자 서명란에 제 이름을 썼다. 천천히, 받침까지 또박또박. 쓰고 나서 볼펜을 내려놓고 식탁 위 서류를 손바닥으로 한 번 쓸었다. 종이가 식탁 비닐 위에서 사각 소리를 냈다.

“이 집은 네 아버지 집이다. 네 아버지 이름으로 남 속이는 데 쓰이는 거, 나는 그게 더 싫다. 네 아버지가 공장에서 작업복 입고 찍은 사진 있잖니, 그 이름이야.”

건우는 어머니의 손등을 봤다. 주름 사이로 오래된 화상 자국이 있었다. 아버지 공장 구내식당에서 일하던 시절에 생긴 자국이라고 들었다. 그 손이 서류를 건우 쪽으로 밀었다.

그날 밤 건우는 어머니 집 작은방에서 잤다. 대학 때까지 쓰던 방이라 책장에 회계원리 교재와 고등학교 졸업 앨범이 그대로 꽂혀 있었다. 이불에서 오래된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잠이 안 와서 앨범 사이에 끼워 둔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세운정밀 공장 운동회 날, 작업복 차림의 아버지가 여덟 살짜리 건우를 목말 태우고 있었다. 킥오프 날 회의실 벽에 걸려 있던 사진과 같은 작업복이었다. 가슴에 파란 톱니바퀴가 붙어 있었다. 아버지는 카메라를 안 보고 목 위의 아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대화방 「세운정밀 실사 조율(업무용·유료)」에 채린이 설 인사를 올려 두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확인 18/19, 심사 결과 D-10, 떡국 두 그릇 먹었습니다. 나이도 두 살 먹은 기분입니다.」 그 아래 지환의 답이 있었다. 「한 그릇만 드셔도 나이는 한 살입니다.」 건우는 누워서 소리 없이 웃다가, 두 사람에게 한 줄을 올렸다. 「내일 병원에서 서류 나옵니다.」 지환에게서 답이 오기까지 사십 초가 걸렸다. 「기다리겠습니다」 한 줄이었다. 건우는 그 네 글자를 한참 보다가 휴대폰을 가슴 위에 엎어 놓고 잠들었다.

*

2월 18일 수요일, 원무과에서 진단서와 의무기록 사본이 나왔다. 2021년 3월 3일 뇌출혈, 좌측 편마비, 실어증, 의사 표현 및 서명 불가. 2022년 6월 기록에도 같은 문장이 있었다. 열아홉 번째 회사가 생긴 달에 아버지는 숟가락을 들지 못했다.

건우는 서류를 들고 병실로 갔다. 아버지는 깨어 있었다. 창밖을 보다가 건우가 침대 옆 의자에 앉자 눈을 천천히 돌렸다. 알아보는 날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 아버지 이름이 열아홉 번째에 있어요. 아버지가 안 만든 회사예요. 그거 제가 조서에 쓸게요. 형이 쓴 걸 제가 지우는 거예요.”

아버지의 오른손이 이불 위에서 움직였다. 건우는 그 손을 잡았다.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이 건우의 손을 한 번 쥐었다. 힘이 없어서 쥐었다기보다 닿았다는 쪽에 가까웠다. 잠시 뒤 한 번 더 쥐었다. 이번에는 조금 셌다.

건우는 그 손을 놓지 못했다. 이마를 침대 난간에 댔다. 눈물이 난간을 타고 흘러내려 이불깃에 동그랗게 번졌다. 간병인이 커튼을 조용히 쳐 줬다. 커튼 레일이 천장에서 드르륵 미끄러지는 소리가 났고, 그 소리가 멎자 병실 안에는 아버지의 느린 숨소리와 산소 가습기의 보글거리는 소리만 남았다.

*

새벽 한 시 오십 분, 건우는 병원 주차장 차 안에서 지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한 번 가고 받았다. 뒤쪽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십팔 층, 곧 두 시였다.

“열아홉입니다, 매니저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안산 요양병원 주차장입니다.”

“거기 그대로 계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건우는 히터를 켜고 기다렸다. 차 앞 유리에 서리가 가늘게 끼었다가 히터 바람에 가장자리부터 물러났다. 세 시 십 분에 헤드라이트 하나가 주차장으로 들어왔는데, 법인 차였다. 지환은 조수석 문을 열고 들어와 앉았다. 코트에 여의도 새벽 공기가 묻어 있었다. 둘 사이에 기어 레버 하나가 있었다. 지환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건우도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무릎 위의 진단서를 지환 쪽으로 밀었다. 지환이 그걸 받았다. 종이 끝이 두 사람의 손 사이에서 잠깐 휘었다가 펴졌다. 첫 주에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는 둘 다 먼저 놓지 않았다. 히터 바람이 두 사람 무릎 사이로 따뜻하게 흘렀고, 앞 유리의 서리는 가장자리부터 다 물러나 병원 오 층 창 하나에 켜진 불빛이 또렷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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