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109자) · 채린 · 2월 5일
명의자
결재선에 없는 사람 · 윤재하
오채린은 날짜를 세는 데 선수였다. 삼 년 동안 책상 앞 벽에 시험까지 남은 날을 붙여 놓고 살았다. 두 번 떨어졌을 때도 다음 날 아침에 새 숫자를 붙였다. 2월 5일 목요일 아침, 그녀는 모니터 테두리에 노란 접착 메모에 「심사 D-6」이라고 적어 붙였다. 그 옆에 「확인 15/19」라고 적은 한 장을 더 붙였다. 두 숫자가 나란히 붙어 있으니 어느 쪽이 먼저 줄고 어느 쪽이 먼저 차는지 경주를 하는 것 같았다.
배곧 공유오피스는 신도시 상가 삼 층에 있었다. 유리벽 라운지, 원목 긴 테이블, 커피 머신 두 대, 벽에 영어로 적힌 문구. 창밖으로 서해 갯벌이 넓게 펼쳐져 있었고 썰물이라 물길만 은빛으로 가늘게 남아 있었다. 라운지 전체에 원두 볶은 냄새가 배어 있었는데,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는 사람은 둘뿐이었다. 채린은 이런 데서 일하는 회사가 제일 멋있어 보였던 적이 있었다. 지금은 여기 적힌 주소가 제일 무서웠다. 지환은 라운지 입구에 붙은 층별 안내판을 사진으로 찍었고, 채린은 커피 머신 옆 우편함 벽을 셌다. 번호 붙은 작은 철문이 일흔두 칸이었는데 이름표가 붙은 칸은 열한 칸뿐이었다.
매니저는 스물여덟쯤 된 남자였다. 비상주 회원 명단을 보여 줄 수는 없다고 하다가, 지환이 법원 제출용이 될 수도 있다고 조용히 말하자 명단 대신 결제 내역 한 장을 출력해 왔다. 비상주 요금 월 삼만 삼천 원, 세 회사분. 우편 스캔 서비스 포함. 결제 카드 명의자 유정란.
“이 회사 대표님들은 한 번도 안 오셨어요. 우편 오면 스캔해서 메일로 보내 드리는 게 다예요. 요즘엔 그런 회사 많아요.”
채린은 결제 내역을 받아 들고 명의자 칸의 세 글자를 오래 봤다. 종이를 쥔 손끝부터 차가워졌다. 정왕동 분식집 사장이 말한 베이지색 코트가 머릿속에서 결제 카드를 내밀었다.
*
방동식의 집은 정왕동 산단 뒤쪽 쪽방 골목이었다. 2월 9일 월요일 오후, 지환과 채린은 골목 입구에서 번지수를 두 번 확인했다. 한 건물에 문이 여덟 개였고 문마다 이름 대신 번호가 붙어 있었다. 6호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라디오 소리가 줄어들었다.
방은 한 평 반이었다. 전기장판이 깔려 있었고, 그 위에 이불이 반으로 접혀 있었다. 벽에 걸린 옷걸이에 겨울 점퍼 하나와 작업복 바지 하나. 창문에는 뽁뽁이가 붙어 있어서 바깥 빛이 뿌옇게 들어왔다. 방 안 공기는 전기장판 열기와 파스 냄새와 라면 수프 냄새가 한데 엉겨 있었다. 방동식은 일흔하나라고 했고, 산단 공장에서 삼십 년 프레스를 탔다고 했다. 손가락이 하나 반 없었다.
채린이 등기부 세 통을 꺼내 보여 주자 그는 돋보기를 찾느라 한참 걸렸다. 찾아 쓰고서야 종이 위 제 이름을 찾았다.
“유 팀장이라는 여자가 와서 도장을 하나 만들어 갔어. 매달 삼십만 원 넣어 준다고. 이름만 빌려주면 된다고 하면서 나를 사장님이라고 부르더라고. 내가 사장님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어야지. 그래서 좋다고 했어.”
“어르신, 이 이름으로 세 회사가 있습니다.”
“회사가 세 개나 돼? 그럼 나 사장님이 세 번이야?”
방동식이 소리 내어 웃었다. 이가 여러 개 빠진 웃음이었다. 채린은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그는 등기부를 무릎에 올려놓고 손가락 하나 반 없는 손으로 제 이름을 문질렀다.
“아가씨, 내 이름이 거기 몇 번 나와요?”
채린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조서에 붙여 둔 숫자가 머릿속에서 저절로 떠올랐다.
“대표이사로 세 번이요. 세금계산서에는 이백열두 번 나옵니다.”
“이백열두 번이라.”
방동식은 그 숫자를 따라 하고 한참 가만히 있었다. 전기장판 온도 조절기의 빨간 불이 깜박였다. 라디오에서는 누군가 흘러간 노래를 틀어 주고 있었다.
“삼십 년 공장에서 일할 때는 내 이름이 한 번도 안 나왔는데. 월급 봉투에만 나왔지. 사장님 소리 한 번 들어 봤으면 했는데, 종이로 들었네.”
채린은 등을 곧게 펴고 앉아 있었다. 코끝이 시큰해서 숨을 입으로 쉬었다. 지환이 확인서를 꺼내자 방동식은 그걸 보고 처음으로 겁먹은 얼굴이 됐다. 이거 쓰면 삼십만 원이 끊기냐고 물었다. 끊길 거라고 지환이 말했다. 경찰이 올 수도 있냐고 물었다. 올 수도 있다고 지환이 말했다. 방동식은 볼펜을 쥐고 오래 앉아 있다가, 그 여자도 애가 둘이라더라고 혼잣말을 했다. 그러고 나서 이름을 썼다. 삐뚤빼뚤한 세 글자가 확인서 서명란을 넘어 옆 칸까지 삐져나갔다.
“사장님 도장은 내가 안 찍었어. 이건 내가 쓴 거야.”
확인한 거래처가 열여덟이 됐다. 골목을 나오면서 채린은 모니터에 붙일 숫자를 바꿀 생각을 했는데, 막상 손이 떨려서 휴대폰 메모에 숫자 하나 적는 데 세 번을 틀렸다.
*
2월 10일 화요일, 채린은 혼자 시흥에 갔다. 원장 요청 공문의 회신 시한이 그날이었다. 세운정밀 재무팀 자료실은 여전히 창이 없었고 제습기가 여전히 웅웅거렸다. 유정란은 선반 사이에 서 있었다.
“오 수습님, 원장은 검토 중입니다. 서면으로 다시 회신드릴게요.”
“회신 시한이 오늘입니다, 팀장님. 오늘 안 주시면 감사 범위 제한으로 적겠습니다.”
유정란이 입가만 움직여 웃었다.
“수습님, 심사가 내일 수요일이시죠? 날짜 당겨진 거 저도 들었어요. 오늘 여기서 이러실 때가 아니실 텐데.”
채린의 등줄기로 찬 것이 한 줄 흘러내렸다. 제습기 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팀장님, 제 심사 날짜를 어떻게 아십니까? 그건 법인 인사팀 메일로만 나간 건데요.”
유정란의 입가가 멈췄다. 한 박자 늦게 대답이 나왔다.
“회계사님들 사이에 도는 얘기겠죠.”
“저희 팀 셋 말고는 아무도 모릅니다.”
채린은 가방에서 방동식의 확인서 사본을 꺼내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삐뚤빼뚤한 서명이 칸을 넘어가 있었다.
“어제 방동식 어르신을 뵀습니다. 팀장님 이름을 말씀하셨어요. 매달 삼십만 원이요. 배곧 공유오피스 결제 카드에도 팀장님 이름이 있었고요.”
유정란은 확인서를 내려다봤다. 손이 선반 모서리를 짚었고 손마디가 하얗게 떴다.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수습님, 제가 안 하면 누가 합니까? 대표님이 시키는 걸 제가 안 하면 다음 사람이 해요. 그 사람은 어르신한테 삼십만 원도 안 넣어 드릴걸요. 저 중학생 아들이 둘이에요.”
“그래서 팀장님 이름은 어디에도 안 쓰셨군요. 어르신 이름만 쓰시고요.”
유정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선반에서 바인더 두 권을 뽑아 채린 앞에 내려놓았는데, 매출처 원장이었다. 그러고는 등을 돌렸다. 베이지색 코트 어깨가 한 번 들썩였다. 채린은 바인더를 안고 계단을 내려왔는데, 한 층을 다 내려가서야 제가 숨을 참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
그날 밤 채린은 집에 가라는 말을 두 번 듣고도 안 갔다. 두 시에 공조기가 꺼졌을 때 층에 셋이 남아 있었다. 지환은 원장 바인더를 넘기고 있었고, 건우는 편의점에서 김밥 세 줄을 사 와서 한 줄씩 책상에 놓았다. 참치, 참치, 그리고 채린 자리에만 계란말이 김밥. 채린은 그게 제일 비싼 거라는 걸 알았다.
“남 회계사님, 전환 심사 전날 밤에 뭐 하셨어요?”
건우는 김밥 포장을 벗기다가 손을 멈췄다. 송풍구가 멎은 층에 비닐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한참 났다.
“저는 전날 밤에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다음 날 위원님들이 뭘 물어도 대답을 잘 안 했고요. 네, 아니요, 잘 모르겠습니다. 붙었습니다. 대답을 안 하면 틀릴 일이 없으니까요. 그 버릇으로 오 년 전에 중요한 대답도 안 했습니다.”
채린은 계란말이 하나를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달았다. 파티션 너머에서 지환이 바인더 넘기는 소리가 멈췄다.
“그러니까 오 수습님은 대답하세요. 무슨 대답이든요. 틀려도 대답한 사람 이름은 남으니까요.”
“그거 매니저님이 하신 말씀이죠?”
“아니요, 제가 오 년 걸려서 만든 말입니다.”
파티션 너머에서 짧게 웃는 소리가 났다. 채린은 김밥 한 줄을 다 먹고 모니터 메모를 새로 붙였다. 심사 D-1. 확인 18/19. 그 아래 한 장을 더 붙였다. 대답할 것.
*
심사는 2월 11일 수요일 오후 세 시였다. 이십구 층 소회의실 세 개를 터서 책상을 앞에 놓았고, 위원은 넷이었다. 인사 담당 파트너, 감사본부 파트너 둘, 그리고 품질관리실장 권도형 상무. 채린은 그 이름을 심사장 문 앞 명단에서 처음 봤다. 무릎이 먼저 알아서 한 번 풀렸다.
복도에서 지환이 커피를 뽑아다 줬다. 채린은 받았다가 도로 내밀었다. 지금 마시면 더 떨린다고. 지환은 자기도 지금 마시면 떨린다고 했다. 채린은 그 말에 웃고 들어갔다.
위원들은 십 분 동안 학교와 시험 이야기를 했다. 삼 년 준비한 이야기, 두 번 떨어진 이야기, 부모님이 무슨 일을 하시느냐는 질문. 마지막에 권도형이 돋보기를 벗고 한 박자 쉬었다.
“오 수습은 이의 제기나 신고 같은 걸 좋아하나?”
“좋아하지 않습니다, 상무님. 저는 그런 게 무섭습니다.”
“그럼 회계사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 뭐라고 생각하지?”
채린은 잠깐 생각했다. 방동식의 삐뚤빼뚤한 세 글자가 떠올랐다.
“적는 겁니다, 본 걸 적는 거요.”
“그건 업무지 덕목이 아니지.”
“그러면 본 걸 안 적는 건 뭡니까?”
심사장 안이 조용해졌다. 채린은 두 손을 무릎 위에서 맞잡았는데 손바닥이 흥건했다.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제 세운정밀 재무팀장이 제 심사 날짜를 알고 있었습니다. 날짜가 당겨진 것까지요. 법인 인사팀 메일로만 나간 날짜입니다. 이 사실을 오늘 심사 기록에 적어 주십시오. 제가 떨어지든 붙든 그건 적혀 있어야 합니다.”
권도형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맨 끝의 인사 담당 파트너가 볼펜을 들고 무언가를 적었다. 채린은 일어나 인사하고 나왔다.
*
복도에서 지환을 보자마자 채린이 말했다.
“매니저님, 저 떨어졌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권 상무님이 계셨어요. 그리고 제가 마지막에 쓸데없는 말을 했어요. 위원 한 분이 볼펜을 드셨고요.”
“볼펜을 드셨으면 떨어진 게 아닙니다. 적고 있다는 겁니다.”
채린은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무릎에 이마를 대고 한참 숨을 골랐다. 지환이 그 옆 벽에 등을 대고 섰다. 식은 커피 두 잔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리고 대화방 「세운정밀 실사 조율(업무용·유료)」에 건우가 한 줄을 올렸다.
「물왕동은 제가 가겠습니다. 설에 집에 갑니다.」
채린은 휴대폰을 들어 모니터에 붙여 둔 숫자를 떠올렸다. 열아홉 가운데 열여덟, 남은 하나에 붙은 이름이 남정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