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049자) · 지환 · 2월 2일

검토자

결재선에 없는 사람 · 윤재하

품질관리실은 이십팔 층 복도 끝 유리문 안쪽에 있다. 같은 층인데 공기가 다르다. 감사본부 쪽은 복합기 열기와 사람 냄새로 늘 조금 텁텁한데,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면 가습기가 뿜는 차가운 수증기와 새 종이 냄새가 먼저 코에 닿는다. 책상이 여덟 개뿐이고 전화벨이 거의 안 울린다. 블라인드는 사계절 반쯤 내려져 있어서 창밖 여의도가 가로줄 사이로만 보인다. 감사를 나가지 않는 사람들이 나갔다 온 사람들의 서류를 보는 방이다.

2월 2일 월요일 오전 열 시, 지환은 반송 사유서를 들고 실장실 문을 두드렸다. 권도형 상무는 돋보기를 코끝에 걸친 채 서류를 보고 있다가, 들어오라는 말 대신 손바닥으로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쉰여섯, 머리가 하얗게 셌고, 말을 시작하기 전에 늘 한 박자 쉬는 사람이었다. 오 년 전에는 감사본부 수석 파트너였다. 책상 위에는 서류 대신 도장 받침대 하나와 만년필 한 자루가 반듯하게 놓여 있었고, 뒤쪽 벽에 법인 창립 이십 주년 단체 사진이 걸려 있었다. 사진 속 앞줄 가운데 권도형이 있었고, 맨 뒷줄 오른쪽 끝에 스물여섯 살의 지환이 반쯤 가려져 서 있었다. 지환은 그 사진을 오늘 처음 봤다.

“서 매니저, 오랜만이야. 거기 앉게.”

“상무님, 세운정밀 반송 건으로 왔습니다. 사유서 검토자 칸에 이름이 없습니다. 보완 방향을 협의하려면 누가 검토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지침 제14조에 따라 반송 사유서에는 검토자 성명을 적지 않는다. 검토 절차의 독립성 보호.”

“그 지침 제정일이 언제입니까?”

권도형이 돋보기를 벗었다. 한 박자 쉬었다.

“2021년 4월이었지.”

“제가 세운정밀 별도 보고서를 낸 게 2021년 3월 3일입니다. 한 달 뒤군요.”

“그래, 딱 한 달 뒤지.”

권도형은 숨기지 않았다. 그게 지환을 더 차갑게 만들었다. 의자 팔걸이를 쥔 손바닥이 땀으로 미끄러웠다.

“서 매니저, 오 년 전 세운정밀 담당 파트너가 나였네. 자네 보고서는 내 책상에서 멈췄어. 그건 숨길 생각 없어. 그해 3월에 우리 법인이 상장사 열한 곳 계약 갱신을 앞두고 있었지. 감사인이 회사랑 싸운다는 소문이 산단에 돌면 열한 곳이 한꺼번에 다른 법인으로 가. 그러면 이십팔 층에서 서른 명이 나가. 나는 그 서른 명을 골랐고, 자네 한 사람을 안 골랐어.”

“그래서 제 이름을 빼셨습니까?”

“이름은 차 파트너가 뺐지. 나는 품질관리실로 왔고, 다시는 매니저 한 사람이 법인을 흔들지 못하게 14조를 썼어. 반송하는 사람 이름이 남으면 회사가 그 사람을 찾아가거든. 나는 내 사람들 지킨 거야.”

“그 사람들 이름은 지키시고, 제 이름은 가져가셨습니다.”

권도형은 대답하지 않고 반송 사유서를 손끝으로 지환 쪽으로 밀었다.

“이번 조서 얘기를 하지. 근거 불충분은 진짜 불충분이라서 쓴 거야. 멈춘 계량기와 남의 집 김치통 우편물은 정황이지 증거가 아니야. 대표이사가 가짜라는 걸 보여 줘. 명의를 빌려준 사람이 제 입으로 말하게 하든지. 그러면 내가 통과시키지. 그게 내 일이니까.”

“그 말씀을 상무님 이름으로 사유서에 적어 주시겠습니까?”

권도형이 오래된 사람처럼 웃었다.

“서 매니저, 자네는 오 년 동안 그거 하나 못 배웠구나.”

*

비상계단 문을 닫자 복도 소리가 뚝 끊겼다. 지환은 난간을 잡고 서서 제 손을 내려다봤다. 손가락이 차가운 쇠 난간 위에서 저 혼자 떨리고 있었다. 떨림을 멈추려고 난간을 세게 쥘수록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올라왔다. 아래층 어딘가에서 문이 열렸다 닫혔고, 그 소리가 계단을 타고 올라와 콘크리트 벽에 몇 번 부딪히다 사라졌다. 오 년 동안 찾던 이름을 방금 들었는데, 그 이름의 주인은 사과도 변명도 하지 않고 다음 숙제를 내줬다. 지환은 계단에 앉지 않았다. 앉으면 한참 못 일어날 것 같았다.

*

화요일 아침, 채린이 명의 대표 목록을 뽑아 왔다. 열아홉 곳 대표이사 이름이 열한 개였다. 방동식이라는 이름이 세 번 나왔고, 남정호라는 이름이 한 번 나왔다. 채린은 남정호 옆에 연필로 물음표를 달았다가 건우 쪽을 한 번 보고 지웠다. 건우는 그 목록을 받아 들고 한참 그 한 줄에 눈을 두었다. 물왕동 단독주택, 2022년 6월 설립, 대표이사 남정호. 아버지가 쓰러진 지 일 년 삼 개월 뒤였다.

파라솔 이후로 두 사람은 일 얘기만 했다. 건우가 목록을 넘기면 지환이 받았고, 지환이 일정을 말하면 건우가 받아 적었다. 종이는 오갔고 말은 오가지 않았다. 첫 주로 돌아간 것 같았는데, 첫 주와 다른 게 하나 있었다. 둘 다 서로가 말을 안 한다는 걸 알았다.

가운데 앉은 채린이 먼저 못 견뎠다. 점심 무렵 메신저에 새 대화방이 생겼다. 방 이름은 「세운정밀 실사 조율(업무용)」, 참여자는 셋. 채린이 첫 줄을 올렸다. 「매니저님이 남 회계사님께 목요일 배곧 가능하신지 여쭤보라고 하십니다.」 지환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건우가 답했다. 「가능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채린이 다시 올렸다. 「매니저님, 가능하시답니다.」 세 사람은 파티션 하나 사이로 등을 맞대고 앉아 있었고, 대화방은 그 오후에만 마흔한 줄이 됐다. 네 시쯤 채린이 올렸다. 「두 분 이거 제가 계속 해야 합니까? 저 심사 공부도 해야 되는데요.」 아무도 답하지 않았는데, 건우 자리에서 참다가 새는 웃음소리가 한 번 났고 지환 자리에서도 비슷한 소리가 났다. 채린은 그 두 소리를 듣고 대화방 이름을 「세운정밀 실사 조율(업무용·유료)」로 바꿨다.

*

밤 열 시, 미숙이 지환을 파트너실로 불렀다. 통유리 너머 층에는 불이 반쯤 꺼져 있었다. 미숙은 책상 위에 아무것도 올려놓지 않았다. 손을 모으고 있었다.

“권 상무 만났다며. 그 사람이 그렇게 순순히 말하던가?”

“숨길 생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숨길 필요가 없으니까. 그 보고서는 어디에도 없어. 전산에서 지웠고 출력본은 파쇄했지. 자네 서랍에 있는 거 하나 빼고.”

지환의 등이 의자에서 떨어졌다. 미숙은 그걸 보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오 년 전에 자네 자리 정리하던 사람이 봤어. 나한테 말했고, 나는 모른 척했지. 반출 사본이니까 규정 위반이고. 품질관리실이 알면 자네 징계 사유고, 그 종이가 밖으로 나오면 나도 권 상무도 끝이야.”

“그래서 뭘 원하십니까?”

“그러니까 거래하자. 재상신 결재선 내가 다시 짤게. 검토자 칸에 서지환. 오 년 만이지. 그리고 권 상무 반송은 내가 한 번은 막아 볼게. 대신 그 서랍 맨 아래 있는 거, 나한테 줘. 오 년 전 일은 오 년 전에 두자. 지금 것만 해.”

지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창 너머로 여의도 불빛이 번져 있었다. 그 종이를 넘기면 권도형이 멈춘 것과 미숙이 뺀 것은 영영 기록에 없는 일이 된다. 열람자 이력처럼 삼십 일이 아니라 끝까지. 대신 지금 조서는 산다. 열아홉 곳과 방동식과 김치통과, 건우 아버지의 이름이 박힌 한 줄이 산다.

“오 년 전 그 종이에는 제 이름밖에 없습니다.”

“알아, 그래서 달라는 거야. 자네 이름 하나 주고 검토자 칸 하나 받는 거지.”

“내일 아침에 드리겠습니다.”

미숙이 처음으로 손을 풀었다.

“내일 아침이라, 자네도 그 말을 하네.”

파트너실을 나서는데 문손잡이가 손바닥에 차갑게 달라붙었다. 지환은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엘리베이터 앞까지 걸었다가 다시 돌아왔다. 옆자리 건우의 모니터는 꺼져 있었고 의자 등받이에 코트가 걸려 있었다. 비상계단 쪽 문틈으로 가느다란 불빛이 새어 나왔다. 지환은 그 문을 열지 않았다. 오늘 밤에 건우 얼굴을 보면 내일 아침에 할 일을 못 할 것 같았다.

*

새벽 두 시, 공조기가 꺼진 층에서 지환은 서랍 맨 아래 칸을 열었다. 레일이 한 번 걸렸다가 빠졌다. 누렇게 뜬 클리어 파일을 꺼내 책상 위에 펼쳤다. A4 열한 장. 오 년 전 토너가 종이 결을 따라 조금 번져 있었고, 스테이플러 심은 녹이 슬어 주변이 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종이를 넘길 때마다 서랍 속 나무 냄새와 오래된 잉크 냄새가 섞여 올라왔다. 그는 첫 장부터 끝 장까지 다 읽었다. 서른한 살 봄의 문장이었다. 매니저를 단 지 두 달째였고, 자기가 쓴 문장이 법인을 흔들 수 있다는 걸 아직 몰랐던 사람의 문장이었다. 쉼표가 많았고, 확신이 없는 자리마다 「것으로 판단됨」이 붙어 있었다. 마지막 장 결재란에 인쇄된 네 칸 가운데 첫 칸에만 서지환이라는 글자가 있었다.

그는 그 세 글자에 엄지를 얹었다. 종이는 차가웠고 글자는 만져지지 않았다. 오 년 동안 이 이름을 가지고 있던 건 이 종이 한 장뿐이었다. 지환은 엄지를 오래 떼지 않았다. 목 안에서 무언가가 올라왔다가 삼켜졌고, 한 번 더 올라왔다. 그는 두 번째는 삼키지 않았다. 빈 층에서 숨이 한 번 크게 흔들리는 소리가 났고, 들은 사람은 없었다.

아침 여덟 시, 그는 파트너실 문을 두드리고 파일을 책상에 놓았다. 미숙은 열어 보지 않았다. 파일 모서리를 한 번 쓸고 제 서랍에 넣은 뒤 열쇠를 돌렸다. 딸깍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생각보다 작아서, 지환은 오 년이 잠기는 소리가 이 정도라는 걸 그 자리에 선 채로 알았다.

*

오후 세 시, 재상신 결재선이 새로 떴다. 작성자에 오채린, 검토자에 서지환과 남건우. 승인자 칸은 비어 있었고 최종에 차미숙. 지환은 검토자 칸에 박힌 제 이름을 봤다. 파란 링크였지만 눌러 보지는 않았다.

건우가 제 자리에서 일어나 지환 책상 옆에 섰다.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그는 지환의 서랍 맨 아래 칸을 봤다. 반쯤 열린 채였고 비어 있었다.

“그 파일 어디 갔습니까?”

“팔았습니다, 검토자 칸이랑 바꿨습니다.”

건우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가 한꺼번에 돌아왔다.

“그게 매니저님 이름이 있는 유일한 종이였잖아요. 권 상무가 멈춘 것도, 파트너님이 뺀 것도 그걸로만 증명이 되는데요.”

“압니다, 그걸 알고 팔았습니다.”

“그런데 왜요?”

지환은 모니터의 검토자 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제 여기 있으니까요. 그리고 남정호라는 이름이 이 조서에 있습니다. 오 년 전 종이를 지키느라 그 이름을 놓칠 수는 없었습니다.”

건우는 그 자리에서 한참 서 있었다. 소매를 걷으려던 손이 중간에서 멈췄다가 내려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제 자리로 돌아가 앉았고, 십 분 뒤 메신저로 한 줄이 왔다. 「그 파일 가져간 사람 이름은 제가 기억하겠습니다.」

6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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