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088자) · 건우 · 1월 23일

1407호

결재선에 없는 사람 · 윤재하

안산 고잔동 오피스텔은 스물두 층짜리였고 1407호는 복도 맨 끝이었다. 1월 23일 금요일 오후 세 시, 복도 창으로 들어오는 겨울 해가 바닥 타일 위에 길쭉한 네모를 네 개 그려 놓았고, 건우는 그 네모를 하나씩 밟으며 걸었다. 복도에서 된장 끓는 냄새가 났다. 누군가 이른 저녁을 짓는 모양이었다. 등기부에 따르면 이 호수에 회사 네 곳이 들어 있었다. 한울유통, 한울에이치, 제이앤케이, 태성물산. 문 옆 벨 위에는 회사 이름 대신 손글씨 종이가 붙어 있었다. 「택배는 경비실에」.

벨을 누르자 한참 만에 문이 반쯤 열렸다. 안경을 코끝에 걸친 예순 넘은 여자가 체인을 건 채로 셋을 올려다봤다.

“무슨 회사요? 여기 회사 없어요. 나 혼자 살아요, 이 년째.”

지환이 신분증과 실사 공문을 보여 주고 사정을 짧게 말했다. 여자는 공문을 끝까지 읽고 나서 체인을 풀었다. 이름은 문옥순이라고 했다. 학교 급식실에서 이십육 년 일하고 작년에 그만뒀다고.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건우의 팔을 봤다.

“총각, 한겨울에 팔을 왜 걷고 다녀, 그러다 감기 걸려.”

건우는 그제야 제 소매가 팔꿈치까지 올라가 있는 걸 알았다. 긴장하면 걷는 버릇이 있는데, 오늘은 언제 걷었는지도 몰랐다. 소매를 내리는 동안 채린이 등 뒤에서 소리 없이 웃었다.

문옥순은 셋을 거실에 앉히고 베란다에서 김치통을 하나 들고 나왔다. 뚜껑에 매직으로 「우편」이라고 적혀 있었다. 뚜껑을 열자 봉투가 빽빽하게 서 있었다. 이사 온 첫 달부터 남의 이름으로 된 우편물이 오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경비실에 맡겼는데 경비실에서 자꾸 도로 올려 보냈다고 했다. 버리려니 죄 받을 것 같았다고.

“남의 이름을 버리는 거잖아. 내가 급식실에서 이름표 붙은 식판은 한 번도 안 버렸어. 애들이 안 찾아가도.”

채린이 장갑을 끼고 봉투를 하나씩 꺼내 날짜순으로 늘어놓았다. 세금계산서, 카드 명세, 4대 보험 고지서, 은행 거래 안내. 받는 사람은 네 회사였고 네 회사 대표이사 이름은 전부 달랐다. 그런데 보낸 쪽에 세운정밀 로고가 찍힌 봉투가 스무 통이 넘었다. 건우는 그 로고를 봤다. 어릴 때 아버지 공장 작업복 가슴에 붙어 있던 것과 같은 파란 톱니바퀴였다. 목 안쪽이 식은 쇠를 삼킨 것처럼 서늘했다.

“이제 열다섯입니다.”

채린이 수첩에 숫자를 고쳐 적으며 말했다. 열아홉 곳 가운데 열다섯 곳의 실체가 없다는 뜻이었다.

지환이 확인서 양식을 꺼내 문옥순 앞에 놓았다. 이 주소에 해당 법인이 실제로 있지 않았고, 우편물만 도착했다는 내용이었다. 서명은 강제가 아니라고 지환이 말하기도 전에 문옥순은 볼펜을 들었다.

“이름 쓰는 거지? 내 이름은 내가 쓰지.”

또박또박 세 글자를 썼다. 문, 옥, 순. 마지막 받침에서 힘을 너무 줘서 종이가 조금 찢어졌다. 그녀는 미안하다고 하면서 귤을 네 개 꺼내 셋에게 하나씩, 그리고 건우에게는 두 개를 쥐여 줬다. 팔 걷은 총각은 비타민을 더 먹어야 한다고.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데 문옥순이 건우를 불러 세웠다. 이 편지들 주인은 이제 찾아오냐고 물었다. 건우는 모르겠다고 했다. 주인이 없는 이름일 수도 있다고. 문옥순은 그 말을 한참 생각하는 얼굴이 되더니, 그럼 김치통은 그냥 두겠다고 했다. 이름이 있으면 언젠가 누가 찾으러 온다고, 급식실에서 이십육 년 동안 그랬다고.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건우는 손에 쥔 귤 두 개를 번갈아 만졌다. 껍질에서 새콤한 냄새가 올라왔다.

*

월요일 아침, 차미숙이 공문 한 장을 지환에게 전달했다. 본문은 없고 「봐」 한 글자뿐이었다.

세운정밀이 도담회계법인 대표에게 보낸 공문이었다. 감사인 선임 관련 검토 요청의 건. 금번 감사 과정에서 감사인의 업무 범위 초과와 자료 요구의 적정성에 의문이 있어 감사인 교체를 포함한 제반 사항을 검토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문단이 하나 더 붙어 있었다. 아울러 당사 대표이사의 특수관계인이 감사에 참여하고 있는 점에 대하여 독립성 훼손 우려를 표합니다.

건우는 제 자리에서 그 문단을 읽었다. 제 이름 대신 특수관계인이라는 그 네 글자가 들어가 있었다. 옆에서 지환이 서랍 맨 아래 칸을 열었다. 레일이 한 번 걸렸다가 빠졌다. 누런 클리어 파일 뒤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2021년 3월 자, 같은 회사, 같은 제목의 공문이었다. 본문은 거의 같았다. 다른 데가 한 군데 있었다. 오 년 전 것의 마지막 문단은 이랬다. 아울러 귀 법인 소속 담당자의 업무 태도에 대하여도 유감을 표합니다.

“오 년 전엔 매니저님이었네요.”

“이번에는 남 회계사입니다. 저는 이제 적을 이름도 없으니까요.”

지환은 두 장을 나란히 놓고 한참 봤다. 그러다 두 장을 같이 스캔해 조서철에 넣었다. 오 년 전 것도 같이.

*

화요일에 건우는 혼자 시흥에 갔다. 원장을 받으러 간다는 명목이었지만, 공문에 제 이름 대신 들어간 네 글자를 제 발로 확인하러 간 셈이었다. 세운정밀 본사 삼 층 재무팀 자료실은 창이 없는 방이었다. 철제 앵글 선반에 연도별 바인더가 빽빽했고, 제습기가 한쪽 구석에서 규칙적으로 물을 빨아들이며 웅웅거렸다. 종이가 눅지 않게 하려고 방 전체를 건조하게 말려서 들어서자마자 입술이 당겼다.

유정란은 선반 사이에 서서 건우를 맞았다. 베이지색 코트를 의자 등받이에 걸어 두고 있었다. 정왕동 분식집 사장이 말한 그 코트였다.

“남 회계사님, 공문 보셨죠? 저희 쪽에서는 특수관계인이 자료를 받아 가시는 게 곤란해서요. 대표님 지시도 있고요.”

“감사인이 요청한 자료를 회사가 안 주면 그게 감사 범위 제한입니다, 팀장님. 그것도 한정 사유고요.”

“그건 막내님 말고 서 매니저님이 판단하시겠죠.”

유정란은 그 말을 하며 웃었다. 입가만 움직이는 웃음이었다. 건우는 그 웃음 앞에서 소매를 걷으려다가 멈췄다. 대신 코트 걸린 의자를 봤다.

“팀장님, 정왕동 상가 분식집 떡볶이 맛있더라고요. 한 달에 한 번 가시죠?”

제습기 소리만 한동안 들렸다. 유정란의 손이 선반 모서리를 짚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떴다.

“원장은 서면으로 요청해 주시면 검토해서 회신드리겠습니다.”

건우는 빈손으로 나왔다.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제 심장이 귀 바로 뒤에서 뛰는 소리를 들었다. 형한테 처음 안 빠진다고 말한 날보다 오늘이 더 무서웠다. 형은 가족이지만 유정란은 남이었고, 남이 이렇게 겁먹은 얼굴을 한 것을 그는 처음 봤다.

*

목요일은 재상신 자료를 묶느라 둘 다 두 시를 넘겼다. 채린은 열한 시에 원장 요청 공문 초안을 올려 두고 갔는데, 제목 끝에 느낌표를 붙였다가 지운 흔적이 수정 이력에 남아 있었다. 공조기가 꺼지고 층이 조용해지자 두 사람의 키보드 소리가 서로 박자를 맞추듯 번갈아 울렸다. 누가 먼저 멈추면 다른 쪽도 멈췄다. 두 시 이십 분에 지환이 먼저 모니터를 껐다.

두 시 반에 로비 앞 편의점 파라솔에 둘이 앉았다. 여의도에서 그 시간에 불을 켜 둔 데는 거기뿐이었다. 파라솔 기둥에 매달린 난로가 빨갛게 달아 있었지만 등 쪽은 여전히 추웠다. 탁자 위에 캔맥주 두 개. 건우는 캔을 따지 않고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차가운 알루미늄이 손바닥 온기를 천천히 빨아들였다.

“매니저님,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오 년 전 그 일 있고 나서 왜 저한테 연락 안 하셨습니까?”

지환이 캔을 땄다. 칙, 하는 소리가 빈 거리에 크게 퍼졌다.

“아니요, 연락했습니다.”

건우는 고개를 들었다.

“세 번 걸었습니다. 3월 3일 오후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밤에 한 번. 세 번 다 안 받으셔서 문자를 남겼습니다. 답이 없어서 그만뒀습니다.”

“저는 전화 온 기록이 없는데요.”

“병원에 계셨으니까 못 보셨을 수도 있죠. 그런데 문자는 보셨습니까?”

건우의 손이 캔에서 미끄러졌다. 캔이 탁자 위에서 반 바퀴 돌았다.

“문자는 봤습니다.”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봤는데 안 열었습니다. 알림 창에 첫 줄만 떠 있었어요. 봐야 할 게 있습니다. 거기까지만 보이고 뒤는 안 보였습니다. 열면 봐야 하니까 안 열었습니다. 오 년 동안 지우지도 않고 열지도 않고 뒀는데, 휴대폰을 바꾸면서 없어졌습니다. 없어지니까 더 생각났습니다.”

지환의 손에 든 캔이 우그러지는 소리가 났다. 아주 천천히, 손가락 자국을 따라 알루미늄이 안으로 접혔다. 건우는 그 소리를 듣고서야 지환이 화가 났다는 걸 알았다. 오 년 전에도, 이번 시즌에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소리였다. 화를 안 내는 것을 성격이라고 부르던 사람의 손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 문자 뒷줄에 뭐라고 썼는지 아십니까?”

“모릅니다, 첫 줄밖에 못 봤으니까요.”

“봐야 할 게 있습니다. 한 번만 와 주십시오. 그 두 줄이 다였습니다. 보고서를 보라는 게 아니었습니다. 제가 거기 혼자 서 있는 걸 한 번만 봐 달라는 거였습니다.”

난로가 탁, 하고 한 번 튀었다. 건우는 대답을 찾지 못했다. 입을 열면 미안하다는 말이 나올 것 같았고, 그 말이 지금 이 사람에게 아무 쓸모가 없다는 걸 알았다.

“죄송합니다, 라고 하시려면 하지 마십시오. 오 년 전에 들었어야 할 말입니다.”

“그럼 지금은 뭘 하면 됩니까?”

지환은 우그러진 캔을 탁자에 내려놓고 일어섰다. 코트 깃을 세우는 손이 조금 떨렸다.

“오늘은 먼저 가십시오. 저는 올라가서 조금 더 있겠습니다.”

건우는 따지 않은 캔을 들고 한참 파라솔 아래 앉아 있었다. 로비 회전문이 지환을 삼키고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여의도 대로에는 택시 두 대가 빈 차 불을 켜고 서 있었다. 건우는 두 대를 다 보냈다.

*

금요일 오후, 조서가 품질관리실 반송으로 돌아왔다. 사유는 한 줄이었다. 근거 불충분, 보완 후 재상신 요망. 계량기 사진 열두 장과 김치통 봉투 사진 쉰여섯 장과 확인서 한 장을 붙인 조서였다.

채린이 그 반송 사유서를 출력했는데, 금요일이라 3호기가 반을 씹었다. 채린은 복합기 옆구리를 열고 구겨진 종이를 빼냈다. 반쯤 찢긴 종이 아래쪽에 검토자 칸이 있었고, 그 칸에는 이름 대신 품질관리실이라는 부서명만 인쇄돼 있었다.

“반송할 때는 이름을 안 쓰네요.”

건우가 찢긴 종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찢긴 사유서를 받아 들고 한 번 접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 끝 유리문 쪽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건우는 끝까지 봤다. 어젯밤 우그러진 캔을 쥐던 손이 이번에는 종이를 쥐고 있었다.

5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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