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031자) · 3670일차

이십일 센티미터

관측자 K의 일지 · 정이한

만 19세 이상 이용가

3669일차. 유월 일일 월요일. 오후.

13:00. 방. 상자 하나에 스물여덟 권. 뚜껑을 덮지 않은 채로 사흘 동안 두었던 상자다. 오늘 덮었다. 테이프는 붙이지 않았다. 다시 열 사람이 쉽게 열 수 있도록.

상자를 들었다. 무거웠다. 십 년이 무게로 들렸다. 한 권에 삼백 그램 남짓. 스물여덟 권이면 팔 킬로그램 조금 넘는다. 섬에서 풍향계를 고치러 철탑에 오를 때 짊어지던 공구 가방이 그 정도였다. 그때는 무겁지 않았다.

서른두 단. 상자를 안고 내려가면 발밑이 안 보인다. 나는 셌다. 세야 했다. 발밑이 안 보이니까. 하나. 둘. 서른둘. 공동 현관 앞에 한수연이 서 있었다. 택시를 잡아 두었다. 택시 기사가 상자를 트렁크에 넣자고 했다. 나는 무릎에 안고 탔다. 기사가 백미러로 나를 봤다. 이사 가세요, 하고 물었다. 아니요, 하고 대답했다. 십 년 동안 이 방에 있던 것이 이사를 가는 것이었다.

13:40. 솔뫼경찰서. 이 층 강력팀. 김태식 반장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셔츠 단추가 다 채워져 있었다. 아침과 달랐다. 그 사람은 상자를 받으려고 손을 내밀었다가 거두었다. 대신 책상을 비웠다. 서류를 옆으로 밀고, 커피 잔을 치우고, 책상을 휴지로 한 번 닦았다. 그러고는 그 위에 상자를 놓아 달라고 했다.

나는 상자를 놓았다. 뚜껑을 열었다. 1권을 꺼냈다. 표지를 넘겼다. 표지 안쪽 연필 한 줄. 이사. 맞은편 사 층 가운데 창에 빨간 꽃. 누가 물을 줌. 웃는다. 그다음 장. 1일차 02:10.

김태식 반장이 그 두 장을 오래 봤다. 그리고 뒤로 넘겼다. 2일차, 3일차. 3일차에서 멈췄다.

3일차 09:20. 일지 1일차 한 장 복사. 파출소 우편 발송. 무기명.

4일차에서 멈췄다.

4일차 23:40. 초인종. 남자 1. 문 앞에서 「아저씨 창이 참 좋네요」 하고 감.

반장은 그 줄에 손가락을 댔다. 오래.

“이 일지에 제 이름도 들어가겠네요.”

“들어갑니다. 3661일차에 이미 적었습니다. 반장님 본인 진술로.”

그 사람은 웃지 않았다.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압니다. 저 오늘 아침에 지방청 감찰에 전화했어요. 십 년 전 그 종이, 제가 오 사장 댁에 가서 보여 준 거. 제 입으로 말했습니다. 그래야 이 사건 수사에서 제가 빠지고, 빠져야 이 일지가 증거가 되니까요.”

“반장님이 빠지면 누가 합니까?”

“지방청 광역수사대가 옵니다. 내일 아침. 굴착도.”

그 사람은 1권을 덮었다. 두 손으로. 표지를 손바닥으로 한 번 쓸었다.

“선생님. 십 년 전에 이 종이 받았을 때 저는 파출소 순경이었어요. 늦게 들어와서 나이만 많은 순경. 오 사장님이 이 동네 파출소 명절 떡값을 대던 분이었고요. 저는 그 집에 가서 물어보는 게 확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확인이 아니라 알려 주는 거라는 걸, 저는 오늘 아침 그 화단에서 고개를 들고 나서야 알았어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사람도 대답을 바라지 않았다.

13:40~15:10. 솔뫼경찰서 강력팀. 일지 스물여덟 권 임의 제출. 김태식 반장, 지방청 감찰에 자진 신고. 본인 진술. 내일 06:00 굴착.

3670일차. 유월 이일 화요일. 흐림. 운량 팔.

A창: 05:30 열림 B창: 열림(밤새) C창: 닫힘(병원)

05:50. 나동 화단. 노란 줄이 쳐져 있었다. 폴리스 라인. 화단 네 귀퉁이에 말뚝. 그 바깥에 사람들이 서 있었다. 창이 아니라 골목에. 서른여덟 개의 창에서 내려온 사람들 가운데 절반쯤. 권 영감님과 경위. 할머니. 재민 씨와 아버지. 아래층 여자. 러닝셔츠 청년은 오늘 셔츠를 입고 왔다.

광역수사대 차가 넷. 그중 하나에서 탐지견이 내렸다. 검은 셰퍼드. 경위가 그 개를 보고 짖지 않았다. 꼬리를 흔들었다. 권 영감님이 목줄을 당기며 말했다. 인사해라, 선배님 오셨다. 누가 웃었다. 웃음은 금방 꺼졌다. 그래도 한 번은 났다. 파란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이 화단 안에 들어갔다. 회양목 여섯 그루를 뿌리째 들어냈다. 한 그루씩. 뿌리가 옆으로만 뻗어 있었다. 아래로 뻗을 데가 없었으니까. 흙을 걷어냈다. 한 뼘. 그 밑에 회색 판이 나왔다. 콘크리트. 6일차 14:10. 두께 약 20센티미터로 추정.

한 사람이 줄자를 댔다. 이십일 센티미터.

06:40. 화단 콘크리트 노출. 두께 21센티미터. 6일차 추정 20센티미터. 오차 1.

그 줄을 적는 손이 떨렸다. 십 년 전 창에서 추정한 두께가 일 센티미터 틀렸다. 섬에서라면 그 오차는 허용 범위다. 이 화단에서 그 일 센티미터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07:10. 착암기 소리. 골목 전체가 울렸다. 나동 벽에 걸린 현수막이 떨었다. 세로 이 미터의 웃는 얼굴이 착암기 소리에 맞춰 조금씩 떨었다. 누군가 그 현수막을 올려다보고 혀를 찼다. 박 통장이었다. 골목 끝에 혼자 서 있었다. 선거 띠를 두르지 않고. 그 사람은 한참 현수막을 보다가 골목을 나갔다.

09:30. 착암기가 멈췄다. 파란 작업복들이 무릎을 꿇었다. 손으로 흙을 걷었다. 붓을 꺼냈다. 한 사람이 일어나서 흰 천막을 가져오라고 했다. 천막이 화단 위에 쳐졌다. 우리는 안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보지 않았다. 볼 수 없어서가 아니라, 보지 않았다. 십 년 동안 나는 이 화단을 보는 사람이었다. 오늘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내가 볼 사람이 아니었다. 그 사람을 볼 사람은 따로 있었다.

한수연이 폴리스 라인 앞에 서 있었다. 천막을 향해. 나는 그 옆에 섰다. 조금 뒤에. 그 사람이 쓰러지면 받칠 수 있는 거리. 섬에서 풍속계 철탑 밑에 설 때 서던 거리.

09:30. 천막 설치. 내부 관측하지 않음.

11:20. 천막에서 파란 작업복 한 사람이 나왔다. 장갑 낀 손에 투명한 봉투를 들고. 폴리스 라인 앞으로 와서 한수연에게 물었다. 가족분이시냐고. 한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은 봉투를 들어 보였다.

봉투 안에 도자기 조각이 들어 있었다. 손바닥만 한 것. 주황색 토분. 가장자리에 흰 페인트로 그린 꽃무늬가 반쯤 남아 있었다. 그 조각 안쪽에, 흙과 함께 굳은 마른 줄기 하나.

“함께 나왔습니다. 확인해 주실 수 있으시면.”

한수연은 그 봉투를 오래 봤다. 손을 뻗지 않았다.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나는 그 입 모양을 알았다. 십 년 전 표지 안쪽에 내가 적어 놓고 잊은 말. 제라늄.

그 사람이 무릎을 꿇었다. 폴리스 라인 앞 보도블록 위에. 그리고 울었다. 소리 내어. 십 년 동안 가출이라는 말 앞에서 울지 않은 사람이, 골목 한가운데서, 서른여덟 개의 창에서 내려온 사람들 앞에서.

아무도 다가가지 않았다. 권 영감님이 개를 안은 채 고개를 숙였다. 할머니가 빨래집게를 쥔 손을 가슴에 댔다. 재민 씨 아버지가 앞치마로 눈을 닦았다. 나는 한수연 뒤에 서 있었다. 받칠 수 있는 거리에서. 그 사람은 쓰러지지 않았다. 무릎을 꿇은 채로 울었다. 한참.

11:20. 토분 조각 1. 흰 꽃무늬. 마른 줄기. 한수연 확인.

11:40. 광역수사대, 사람의 뼈 확인. 감정 의뢰.

나는 그 줄을 짧게 적었다. 짧게 적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을 몰랐다. 그 사람의 이름은 일지에 이미 있다. 표지 안쪽에, 이름 대신 웃는다는 말로.

19:10. 가동 방. 창. 나동 벽에서 현수막이 내려갔다. 마 씨가 사다리에 올라가 끈을 풀었다. 세로 이 미터의 얼굴이 접히면서 내려왔다. 마 씨는 그것을 둘둘 말아 어깨에 멨다. 길이 약 이 미터. 그 사람은 그것을 메고 골목 끝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 모양을 봤다. 1일차 02:14와 같은 모양이었다. 마 씨도 그걸 알았는지, 골목 끝에서 한 번 멈췄다가 걸었다.

19:10. 나동 벽 현수막 철거. 마 씨. 20:30. 뉴스. 솔뫼동 구의원 예비후보 오 모 씨, 살인 및 사체 유기 혐의로 긴급 체포.

그 뉴스는 창으로 보지 못했다. 창에는 뉴스가 없다. 아래층 여자가 올라와서 문을 두드리고 휴대폰 화면을 보여 주었다. 노크는 세 번, 조심스럽게. 내 아래층에 십 년 동안 이 노크가 살고 있었다.

3671일차. 유월 삼일 수요일. 지방선거. 맑음.

A창: 06:30 열림 B창: 06:40 열림 C창: 닫힘(병원)

08:00. 솔뫼초등학교 투표소. 십 년 만에 투표를 했다. 주민등록증 사진은 십 년 전 얼굴이었다. 참관인이 사진과 내 얼굴을 두 번 번갈아 봤다. 나는 그 사람이 확인을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 기표소 안에서 투표용지를 폈다. 기호 이 번 칸에 이름이 그대로 인쇄되어 있었다. 사퇴하지 않은 후보. 나는 그 칸을 오래 봤다. 그리고 다른 칸에 도장을 찍었다. 도장 자국이 동그랬다. 한수연의 수첩 동그라미보다 동그랬다.

10:30. 지방청 광역수사대. 진술. 네 시간. 1일차부터 3669일차까지 나는 날짜를 불렀고 수사관은 받아 적었다. 날짜를 부르는 동안 나는 일지를 보지 않았다. 외우고 있었다.

14:40. 복도. 진술을 마치고 나오는데 복도 끝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수사관 둘 사이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흰 셔츠. 소매는 접혀 있지 않았다. 두 손은 앞으로 모여 있었고 그 위에 점퍼가 덮여 있었다. 오태민이었다.

우리는 복도 양 끝에서 마주 봤다. 이십이 미터쯤. 창 하나 거리. 그 사람이 걸어왔다. 수사관 둘이 양옆에서. 내 앞에서 멈추지 않았다. 지나가면서 말했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

“창 하나였으면 아무 일 없었어요.”

“창 하나였을 때도 봤습니다.”

그 사람의 걸음이 반 박자 늦어졌다. 그러고는 다시 걸었다. 복도 끝 조사실 문이 열리고 닫혔다. 나는 그 문을 봤다. 문에 창이 없었다. 그 사람은 이제 창이 없는 방에서 오래 있을 것이다. 나는 창이 있는 방에서 십 년을 있었다. 같은 십 년이 아니었다.

14:40. 광역수사대 복도. 오태민 이송 중 마주침. 발언 1. 20:10. 개표. 솔뫼동 구의원 기호 이 번 낙선.

그날 밤 나는 창 앞에 앉았다. 나동 사 층. A창 불 꺼짐. B창 불 켜짐. 한수연이 빈방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바닥에 토분 사진을 놓고. C창 불 꺼짐. 병원. 벽에는 이제 현수막이 없었다. 사 층 창 아래가 스무 날 만에 비어 있었다. 흰 페인트 벽. 끈을 묶었던 못 자국 넷.

9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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