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026자) · 3669일차

서른여덟

관측자 K의 일지 · 정이한

만 19세 이상 이용가

3669일차. 유월 일일 월요일. 맑음. 바람 남서 약함. 운량 일.

A창: 06:30 열림 B창: 열림(밤새) C창: 닫힘(병원)

07:50. 가동 앞. 병원에서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왔다. 버스 창은 가로로 길었다. 창밖이 옆으로 흘러갔다. 흘러가는 창밖은 적을 수가 없었다. 버스를 탄 것은 십 년 만이다. 교통카드가 없어서 현금을 냈다. 기사가 거스름돈을 세어 주었다. 나는 그 동전을 셌다. 맞았다.

나는 가동 공동 현관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골목을 건너 나동 화단으로 갔다. 스물아홉 걸음. 화단 턱에 한수연이 앉아 있었다. 밤새 앉아 있었던 얼굴이었다. 무릎에 담요. 옆에 보온병. 담요 위에 수첩. 동그라미 열.

“오셨네요.”

“여덟 시 전입니다.”

“일곱 시 오십 분이요. 셌어요.”

그 사람이 웃었다. 입술이 텄다. 밤바람이 찼을 것이다.

나는 그 옆에 앉았다. 화단 턱의 콘크리트가 아직 밤 온도였다. 한수연이 보온병 뚜껑에 보리차를 따라 주었다. 미지근했다.

“밤새 여기서 언니랑 얘기했어요. 혼자 떠든 거지만. 제라늄 이야기요. 그 화분 어디 갔을까? 방 비울 때 누가 버렸겠죠. 꽃 폈다고 했는데.”

그 사람은 보온병을 내려놓고 화단 흙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회양목 밑동을.

“새벽 네 시쯤에 아저씨 창을 봤어요. 불이 꺼져 있었어요. 십 년 만에 꺼진 거죠? 그게 이상하게 무섭지 않았어요. 아, 저 사람 지금 누구 옆에 있구나.”

08:25. 골목 입구에서 쇳소리가 났다. 트럭 한 대가 소형 굴착기를 싣고 들어왔다. 노란색. 팔이 접혀 있었다. 트럭 뒤로 마 씨가 걸어왔다. 안전모를 쓰고. 그 뒤에 박 통장. 선거 띠는 두르지 않았다. 그리고 넥타이를 맨 젊은 남자 하나. 서류 가방. 오태민 선거 사무소 사무장이라고 했다. 오태민 본인은 오지 않았다. 그 사람은 오늘 다른 동네에서 유세가 있다.

트럭이 화단 앞에 섰다. 굴착기가 비탈판을 타고 내려왔다. 궤도가 보도블록을 긁었다. 운전석에 앉은 사람은 이 동네 사람이 아니었다. 젊었다. 이어폰을 한쪽만 꽂고 있었다.

“비키세요.”

마 씨가 말했다. 한수연에게.

“공사합니다. 안내 붙였죠. 육월 일일부터 오일까지.”

한수연은 일어서지 않았다. 담요를 개어 화단 턱에 올려놓고, 수첩을 가슴에 대고 앉아 있었다.

“여기 파시면 안 돼요.”

“파는 게 아니라 정비예요. 흙 갈고 나무 새로 심는 거.”

“그 밑에 콘크리트는요.”

“그건 그대로 두죠. 멀쩡한 걸 왜 깨요.”

마 씨는 그 말을 하고 나서 입을 다물었다. 너무 빨리 대답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나는 그 얼굴을 십 년 동안 월요일 아침마다 봤다. 비질하는 얼굴. 그런데 오늘은 그 얼굴이 처음으로 화단을 안 봤다.

사무장이 서류 가방에서 종이를 꺼냈다. 공사 계약서, 구청 도로 점용 허가서. 박 통장이 그것을 받아서 한수연 눈앞에 흔들었다.

“아가씨, 이거 다 합법이에요. 계속 이러시면 업무 방해로 신고해요.”

“하세요.”

박 통장이 휴대폰을 꺼냈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누구에게 거는지 나는 알았다. 번호를 누르지 않고 단축키 하나였으니까.

08:40. 박 통장 통화. 단축번호. 약 삼십 초.

08:45. 굴착기가 팔을 폈다. 유압 소리가 났다. 쉭, 하고 쇠가 숨을 쉬는 소리. 바가지가 화단 위로 올라갔다. 회양목 여섯 그루 위에 그림자가 졌다. 운전하는 청년이 마 씨를 봤다. 마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이 레버를 당기려고 했다.

나는 화단 턱을 넘었다.

흙을 밟았다. 셋째 그루와 넷째 그루 사이. 종이비행기가 앉았던 자리. 발바닥 밑이 금방 딱딱했다. 한 뼘도 안 되는 흙. 그 밑 20센티미터. 나는 그 위에 섰다. 굴착기 바가지가 내 머리 위 이 미터에 멈췄다. 쇠 이빨 다섯 개. 거기서 흙이 한 줌 떨어져 내 어깨에 묻었다.

청년이 운전석 창을 열었다.

“아저씨, 비키세요! 위험해요!”

“압니다.”

“아시면 비키세요!”

“여기 사람이 묻혀 있습니다.”

청년의 손이 레버에서 떨어졌다. 한쪽 이어폰을 뺐다. 다른 쪽도 뺐다. 그러고는 운전석에서 몸을 반쯤 내밀었다.

“아저씨, 저 일당 받고 온 건데요. 그런 얘기는 안 들었는데요.”

“지금 들으셨습니다.”

청년은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여기 사람이, 아니 사람이 서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이 묻혀 있대요, 아니 저도 모르죠. 그 사람은 전화를 끊지 않은 채 운전석에서 내렸다. 굴착기 옆에 섰다. 레버에서 한 걸음 떨어진 자리에. 그 사람은 마 씨를 봤다. 마 씨는 청년을 보지 않았다. 박 통장이 화단 턱까지 와서 소리쳤다.

“저 양반 미쳤어! 십 년 동안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창밖만 보던 양반이야! 이 동네 사람 다 알아! 저런 사람 말을 믿어?”

그 말이 골목에 울렸다. 나동 벽에, 가동 벽에. 두 건물 사이 이십이 미터를 오가며.

그때 창이 열렸다.

나동 사 층 왼쪽. A창. 권 영감님. 창틀에 개를 올려놓고. 경위가 아래를 보고 짖었다. 두 번, 낮게.

나동 이 층 가운데. 할머니. 장바구니 대신 빨래집게를 든 채.

가동 이 층 오른쪽. 내 아래층. 사십 대 여자. 앞치마.

나동 일 층. 부부. 창이 아니라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창들이 계속 열렸다. 나동 삼 층 오른쪽, 한 번도 본 적 없는 창. 이십 대 남자가 러닝셔츠 바람으로 휴대폰을 들고. 나동 삼 층 왼쪽. 아이 둘이 창틀에 턱을 괴고. 가동 사 층 전부. 가동 일 층 통장 집 옆집. 골목 건너 세탁소 이 층 살림집 창. 편의점 창고 창에서 재민 씨 아버지. 편의점 유리문 앞에 재민 씨.

나는 셌다. 버릇이다. 화단 위에서, 굴착기 바가지 아래서, 몸을 천천히 돌려 가며 셌다. 가동 쪽을 셀 때 나는 가동 삼 층을 건너뛰었다. 가운데 창을. 그 창은 비어 있다. 거기 있어야 할 사람이 여기 서 있으니까.

서른여덟.

두 건물과 골목에 창이 쉰둘 있다. 십 년 동안 나는 그중 셋만 봤다. 오늘 서른여덟이 열려 있었다. 서른여덟 개의 창이 화단을 내려다봤다. 굴착기를. 안전모를 쓴 마 씨를. 휴대폰을 든 박 통장을. 흙 위에 선 나를.

08:52. 열린 창 서른여덟.

박 통장이 휴대폰을 내렸다. 그 사람도 창을 봤다. 자기 집 옆집 창을. 그 창에서 자기 이웃이 자기를 내려다보는 것을.

08:58. 골목 입구에 검은 승용차가 섰다. 김태식 반장이 내렸다. 혼자. 셔츠 단추를 두 개 풀고. 그 사람은 박 통장의 단축번호를 받고 온 사람의 걸음으로 걸어왔다. 빠르고 곧게. 화단 앞에 섰다. 나를 봤다. 흙 위의 나를. 바가지 아래의 나를.

“선생님. 내려오세요.”

“반장님은 십 년 전에 제 종이를 받으셨습니다.”

“지금 그 얘기 할 때가 아닙니다.”

“십 년 전에는 창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오 사장 댁에 가서 물으셨습니다. 창 하나는 착각이 될 수 있으니까요.”

나는 손을 들어 골목을 가리켰다. 김태식 반장은 내 손끝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처음으로 위를 봤다. 서른여덟 개의 창을. 그 창마다 얼굴이 있었다. 권 영감님과 개. 빨래집게를 든 할머니. 러닝셔츠 바람의 청년. 창틀에 턱을 괸 아이 둘.

“오늘은 서른여덟입니다. 반장님이 오늘 무엇을 하시는지, 서른여덟 개의 창이 봅니다.”

김태식 반장은 오래 위를 봤다. 목이 뒤로 젖혀진 채로. 그 사람의 목울대가 한 번 오르내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내렸다. 마 씨를 봤다. 마 씨가 눈을 피했다. 박 통장을 봤다. 박 통장이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사무장을 봤다. 사무장이 서류를 가방에 넣었다.

“공사 중지합니다.”

김태식 반장이 말했다. 크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런데 서른여덟 개의 창에 다 들렸다.

“현장 보존합니다. 재수사 요건, 오늘 다시 검토합니다. 마 씨, 기사님 내려오시라고 하세요.”

“반장님, 이거 허가 다 받은.”

“허가는 제가 구청에 다시 전화합니다. 내려오시라고요.”

굴착기 청년이 바가지를 천천히 내렸다. 화단 옆 보도블록 위로. 내 머리 위에서 그림자가 걷혔다. 해가 정수리에 닿았다. 나는 그제야 내가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무릎이 아니라 온몸이.

한수연이 화단 턱을 넘어 들어왔다. 내 옆에 섰다. 셋째 그루와 넷째 그루 사이. 우리 둘이 서 있기에는 좁았다. 그 사람은 내 소매를 잡았다. 떨림이 그 사람 손으로 옮겨 갔다가, 그 사람 손에서 멈췄다.

김태식 반장이 화단 턱 앞으로 왔다. 손을 내밀었다. 사슬 틈으로 내밀던 그 손. 손바닥이 위로.

“선생님, 일지 주시겠습니까?”

나는 그 손을 봤다. 십 년 전 1일차 한 장을 받은 손. 그 손에서 오씨 집으로 간 종이. 그 손이 지금 서른여덟 개의 창 아래 있었다.

“반장님께 드리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오늘은 다 봅니다.”

09:10. 마 씨가 안전모를 벗었다. 화단 턱에 앉았다. 내 쪽을 보지 않고 말했다.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나는 콘크리트만 부었어요. 오 사장님이 화단 물 빠지라고 바닥을 새로 하자고 해서. 아들이 밤새 흙을 파 놨더라고. 나는 거기다 부었어요. 이십 센티. 그 밑에 뭐가 있는지 나는 몰랐어요.”

“십 년 동안 그 화단을 매주 쓰셨습니다.”

“쓸었죠.”

“회양목이 안 자라는 것을 보셨습니다.”

마 씨는 대답하지 않았다. 안전모를 무릎 위에서 돌렸다. 한 바퀴, 두 바퀴. 그 사람은 십 년 동안 월요일마다 이 화단 앞을 쓸면서 한 번도 흙을 쓸어 넣지 않았다. 흙이 얕은 것을 알면서.

“몰랐다고 할 거예요. 경찰한테도.”

“그러십시오. 저는 제가 본 것을 말하겠습니다.”

마 씨가 고개를 들었다. 처음으로 나를 똑바로 봤다. 그러고는 다시 안전모를 돌렸다. 세 바퀴째에 멈췄다.

08:58~09:20. 김태식 반장 도착. 공사 중지. 현장 보존. 일지 제출 약속. 스물여덟 권. 서른여덟 개의 창이 봄.

위에서 누가 손뼉을 쳤다. 한 번. 권 영감님이었다. 경위가 따라 짖었다. 그다음은 아무도 손뼉을 치지 않았다. 창들은 조용히 하나씩 닫혔다. 열린 순서와는 다른 순서로. 아이 둘이 있던 창이 제일 먼저 닫혔다. 누가 부르는 소리가 났다. 밥 먹으라고. 마지막까지 열려 있던 것은 A창이었다. 영감님은 한참 화단을 내려다보다가, 개를 안고 창을 닫았다.

8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