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054자) · 3668일차

이백십 걸음

관측자 K의 일지 · 정이한

만 19세 이상 이용가

3668일차. 오월 삼십일일 일요일. 맑음. 기온 모름. 밖에 있었다.

오늘 일지는 창 앞에서 쓴 것이 아니다. 대부분 수첩에 적었다가 밤에 옮겼다. 시각이 비는 곳이 있다. 비는 곳은 비는 대로 둔다.

A창: 06:50 열림 B창: 06:30 열림 / 09:40 닫힘 C창: 08:10 열림

09:40. B창이 닫혔다. 한수연이 나동 현관으로 나왔다. 손에 편의점에서 받은 실종자 전단. 코팅을 했는지 햇빛에 번들거렸다. 그 사람은 골목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오늘 열한 시에 골목 입구 공영 주차장에서 오태민의 마지막 주말 유세가 있다. 사흘 전부터 확성기 차가 그렇게 알렸다. 내 창에서는 주차장이 보이지 않는다.

10:40. 나는 운동화 끈을 맸다. 한 번에 맸다. 서른두 단. 공동 현관. 골목. 편의점 앞을 지나 주차장까지 이백십 걸음. 세지 않으려고 했다. 백 걸음까지는 세지 않았다.

골목은 창에서 볼 때보다 좁았다. 창에서는 골목 바닥이 안 보인다. 바닥에는 껌 자국과 전단지와 비둘기 깃털이 있었다. 전봇대마다 세로 이 미터의 얼굴이 웃고 있었다. 백 걸음 동안 같은 얼굴을 열한 번 지나쳤다. 십 년 동안 창으로 본 이 동네는 나동 사 층 세 칸이었다. 골목에서 보니 이 동네는 얼굴 열한 개였다.

주차장에 유세 차가 서 있었다. 짐칸을 무대로 만든 트럭. 옆면에 세로 이 미터 얼굴. 스피커 두 대. 앞에 사람이 오십여 명. 파란 조끼를 입은 운동원들이 태반이었다. 박 통장이 맨 앞에서 손뼉을 치며 사람들을 앉혔다. 확성기에서 노래가 나왔다. 동네를 아는 사람, 오태민.

11:05. 오태민이 트럭 위에 올라섰다. 흰 셔츠, 소매를 두 번 접었다. 마이크를 들었다.

“솔뫼동 여러분, 저 오태민, 이 골목에서 태어나서 이 골목에서 자랐습니다.”

한수연은 무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앉지 않았다. 전단을 가슴 높이로 들고. 운동원 하나가 앉으시라고 손짓했다. 한수연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 골목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 이 골목을 바꾸겠습니다. 재개발, 제가 약속드립니다.”

한수연이 전단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트럭 위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높이였다. 오태민의 말이 한 박자 늦어졌다. 확성기에서 숨소리가 났다. 그 사람은 전단을 봤다. 증명사진. 웃지 않는 스물세 살. 그러고는 웃었다. 오른쪽 입꼬리부터.

“이 골목에서 안타까운 일도 있었습니다. 저도 압니다. 저희 아버님 건물에 사시던 분이었죠. 저희 가족도 그 일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한수연이 말했다. 마이크가 없었다. 그런데 들렸다. 스피커 사이 틈으로, 노래가 끝난 자리로.

“그날 밤 두 시에 카펫 메고 나온 사람이 누구예요.”

오십여 명이 한수연을 봤다. 파란 조끼들이 일어섰다. 박 통장이 제일 먼저 움직였다. 한수연의 팔을 잡았다. 한수연이 뿌리쳤다. 전단이 기울었다. 박 통장이 다시 팔을 잡았다. 이번엔 두 손으로. 그 사람은 한수연을 무대 앞에서 끌어내려고 했다.

나는 이백십 걸음 떨어진 데서 오지 않았다. 삼십 걸음 떨어진 데 서 있었다. 관측원은 개입하지 않는다. 판단은 관측원의 업무가 아니다. 나는 그 문장을 속으로 끝까지 말했다. 말하는 동안 발이 앞으로 갔다. 판단보다 발이 먼저였다. 1일차 이후 처음으로 순서가 거꾸로였다.

박 통장의 손목을 잡았다. 한수연의 팔을 잡은 손목을. 박 통장이 나를 봤다. 가운데 집 아저씨.

“놓으십시오.”

“이 양반이 지금.”

“놓으십시오. 유세를 방해하는 것은 저분이 아니라 통장님입니다. 저분은 서 있었고 통장님이 잡아끌었습니다. 11:07입니다.”

박 통장이 손을 놓았다. 나도 놓았다. 트럭 위에서 오태민이 우리를 내려다봤다. 세로 이 미터의 얼굴 옆에 선 실제 얼굴. 둘 다 웃고 있었다. 실제 얼굴 쪽이 덜 웃었다.

“여러분, 이런 분들도 저희 동네 주민이십니다. 다 품고 가겠습니다.”

박수가 나왔다. 파란 조끼들에게서. 조끼를 입지 않은 사람들 몇은 손뼉을 치지 않았다. 나는 그 사람들을 셌다. 버릇이다. 손뼉을 치지 않은 사람 일곱. 그중 하나가 편의점 재민 씨였다. 앞치마를 입은 채 주차장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하나는 나동 이 층 할머니. 장바구니를 든 채. 하나는 권 영감님. 개를 안고. 나머지 넷은 모르는 얼굴이었다.

한수연이 전단을 내리고 걸어 나왔다. 나는 그 옆을 걸었다. 주차장을 나서는데 뒤에서 누가 불렀다. 모르는 넷 가운데 하나였다. 사십 대 여자. 가동 이 층 오른쪽에 산다고 했다. 내 바로 아래층. 십 년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내 창에서는 아래층이 안 보인다.

“그날 밤 저도 깼어요. 개가 너무 짖어서. 창문 열었는데 흰 차가 시동을 켜 놓고 있었어요. 배기가스 냄새가 올라와서 창을 도로 닫았어요. 그게 다예요. 그게 다인데, 그것도 되나요?”

한수연이 수첩을 폈다. 가동 이 층 오른쪽 칸. 동그라미.

다른 셋도 왔다. 나동 일 층의 부부. 그날 밤 두 시 반에 현관 밖에서 물 쓰는 소리를 들었다고. 호스로 바닥을 씻는 소리. 새벽에 누가 물청소를 하나 했다고. 그리고 골목 끝 세탁소 아저씨. 그날 아침 여섯 시에 가게 문을 열다가 오씨 집 아들이 젖은 카펫을 봉투에 넣어 수거함에 버리는 것을 봤다고. 카펫은 무늬만 기억한다고. 빨간 제라늄 같은 꽃무늬.

한수연은 마지막 말에서 연필을 떨어뜨렸다. 내가 주웠다. 건넸다. 그 사람은 받아서 동그라미를 그렸다. 연필 끝이 떨렸다. 동그라미가 동그랗지 않았다.

12:20. 유세가 끝났다. 오태민이 트럭에서 내려와 사람들과 악수를 하며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우리 앞을 지날 때 그 사람은 손을 내밀지 않았다. 대신 걸음을 늦췄다. 한수연의 수첩을 봤다. 동그라미들을.

“창이 많네요.”

그 사람이 말했다. 목소리는 낮았고 얼굴은 웃고 있었다. 뒤에서 보는 사람들한테는 인사하는 얼굴로 보였을 것이다.

“창이 열이든 스물이든, 증거는 흙 밑에 있어야 증거죠. 내일 아침이면 그 화단에 흙이 새로 들어가요. 회양목도 새로 심고요. 동네가 깨끗해져야죠.”

“내일이 6월 1일입니다.”

내가 말했다.

“맞아요. 선생님은 날짜를 정확히 아시네요.”

그 사람은 내 어깨를 한 번 두드렸다. 두 번째는 두드리지 않았다. 그리고 파란 조끼들 사이로 걸어갔다. 나는 두드린 자리를 봤다. 셔츠에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런데 그 자리가 오래 무거웠다.

11:07. 공영 주차장. 박 통장, 한수연 팔 잡아끔. 제지. 12:20. 오태민. 「내일 아침 화단에 흙이 새로 들어간다」. 11:20~12:10. 주민 진술 넷. 가동 201, 나동 101(2), 골목 세탁소. 창 여덟.

12:30. 편의점 재민 씨, 이 층 할머니, 권 영감님이 한수연의 수첩을 들여다봤다. 할머니가 자기 집 칸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날 밤 할머니는 병원에 있었다고 했다. 그래도 그렸다. 오늘 봤으니까, 하고. 재민 씨 아버지가 가게에서 나와 표 바깥 골목 입구 네모 옆에 네모를 하나 더 그렸다. 가게 창고 창. 그날 밤은 닫혀 있었다고. 그래도 그렸다. 서주안 씨가 C창에 그린 것과 같은 이유였다.

창 열.

21:40. 노크 두 번. 짧고, 약하게. 서주안 씨의 노크는 짧고 세다. 오늘은 약했다. 나는 문을 열었다. 사슬은 걸려 있지 않았다. 서주안 씨가 벽을 짚고 서 있었다. 얼굴이 희었다. 창에서 보던 흰색보다 더 흰색. 입술이 파랬다.

“아저씨, 기계가 이상해요. 배가 너무 아파요. 병원에 전화했는데 구급차 부르래요. 근데 혼자 타기 싫어서.”

나는 신발을 신었다. 끈을 매지 않았다. 서주안 씨 팔을 어깨에 걸었다. 서른두 단. 계단을 내려가면서 세지 않았다. 세지 않았다는 것을 끝까지 몰랐다.

21:52. 구급차. 동승. 22:20. 대학병원 응급실. 복막염 의심.

구급차 뒷문 유리창으로 골목이 뒤로 멀어졌다. 가동이 멀어졌다. 나는 삼 층 쪽으로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내 창을 밖에서 보는 일은 아직 하지 않았다. 오늘도 하지 않았다. 응급실은 창이 없었다. 벽과 커튼과 불빛뿐이었다. 커튼으로 나뉜 칸마다 사람이 누워 있었다. 스물몇 칸. 나는 세지 않았다. 서주안 씨의 칸 커튼 밖 의자에 앉았다. 간호사가 보호자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을 삼 초 미뤘다. 아니, 이 초. 그리고 예라고 했다.

새벽 세 시에 서주안 씨가 병동으로 올라갔다. 칠 층. 창가 침대. 창밖으로 도시가 보였다. 이십이 미터가 아니었다. 끝이 없었다. 새벽 세 시에도 불 켜진 창이 셀 수 없이 많았다. 나는 그 창들을 셀 수 없었다. 처음으로 세지 못해서 편했다.

서주안 씨가 링거를 꽂은 채 눈을 떴다.

“아저씨 창 오늘 꺼져 있겠네.”

“예.”

“그럼 오늘은 제가 아저씨 대신 창 봐 줄 사람이 없는데.”

“오늘은 제가 여기 있습니다.”

그 사람은 웃었다. 입술이 조금 돌아와 있었다. 눈을 감았다. 나는 창가 의자에 앉았다. 병실 창은 가로 백오십 센티미터였다. 내 창보다 삼십 센티미터 넓었다. 그 넓은 창 앞에서 나는 밤새 한 사람의 숨을 봤다. 이불이 오르내리는 것을. 일지에는 적지 않았다. 적을 필요가 없었다. 내가 보고 있었다.

새벽 다섯 시, 서주안 씨가 잠든 것을 보고 나는 일 층 로비로 내려갔다. 공중전화가 한 대 있었다. 동전을 넣고 한수연이 수첩 끝에 적어 준 번호를 눌렀다. 한 번 만에 받았다. 그 사람도 안 자고 있었다.

“공사는 몇 시입니까?”

“아홉 시래요. 마 씨가 굴착기 여덟 시 반에 온대요. 아저씨, 언니는요.”

“서주안 씨는 괜찮습니다. 여덟 시까지 가겠습니다.”

“아저씨 혼자요?”

“창이 열 개입니다. 혼자가 아닙니다.”

수화기 너머가 조용했다. 그러다 한수연이 웃었다. 우는 것처럼 웃었다.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동전을 하나 더 넣지 않았다. 할 말은 다 했다.

3669일차 06:00. 병동 칠 층. 서주안 안정. 6월 1일. 오늘 화단 공사.

나가기 전에 서주안 씨 머리맡 탁자에 수첩 한 장을 뜯어 놓았다. 무엇을 쓸지 몰라서 한참 볼펜을 들고 있었다. 병실 창밖이 밝아지고 있었다. 도시의 창들이 하나씩 꺼졌다. 결국 이렇게 썼다.

06:10. 죽 끓이러 갔다 오겠습니다. 또.

「또」 옆에 동그라미를 쳤다가 지웠다. 지운 자국이 남았다. 남은 채로 두었다.

7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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