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003자) · 3667일차
일곱 고리
관측자 K의 일지 · 정이한
만 19세 이상 이용가
3666일차. 오월 이십구일 금요일. 흐림. 실내 23도.
A창: 06:50 열림 B창: 06:40 열림 / 종일 열림 C창: 18:40 열림(퇴원)
14:00. 한수연이 오지 않았다. 서른두 단의 발소리가 없었다. 나는 창으로 B창을 봤다. 한수연은 빈방 바닥에 앉아 있었다. 벽에 등을 대고. 무릎에 종이 한 장. 두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16:10. 한수연이 창가로 와서 종이를 창유리에 붙였다. 매직이 아니었다. 인쇄된 공문이었다. 이십이 미터에서 글자는 안 읽혔다. 맨 위 굵은 줄 하나만 읽혔다. 솔뫼경찰서. 그리고 맨 아래 도장. 빨간 동그라미는 이십이 미터에서도 빨갛다.
그 사람은 종이 아래에 매직으로 한 줄을 덧붙였다.
재수사 불가. 새 증거 없음. 담당 김태식.
16:10. B창. 재수사 불가 통지 게시.
나는 그 줄을 쓰고 한참 있다가 한 줄을 더 썼다.
새 증거는 이 방에 있다.
그 줄을 쓰고 나서 나는 책상 서랍과 벽장을 열었다. 일지를 꺼냈다. 한 권씩 바닥에 눕혔다. 창 쪽에서 문 쪽으로, 1권부터. 스물여덟 권이 방바닥을 가로질러 한 줄로 누웠다. 1권 표지는 누레져 있었고 28권 표지는 아직 까맸다. 그 사이의 색이 십 년이었다. 한 권에 백삼십 일 남짓. 나는 줄 끝에 서서 그것을 내려다봤다. 창에서 문까지. 내가 십 년 동안 오간 거리가 그 줄의 길이와 같았다. 그 줄을 넘어가야 문이 나온다. 나는 그 줄을 밟지 않고 넘으려고 크게 한 발을 디뎠다.
18:40. C창에 불이 켜졌다. 서주안 씨가 퇴원했다. 창을 열자마자 이쪽을 향해 두 손으로 그릇 모양을 만들었다. 그다음 숟가락을 입에 넣는 흉내를 냈다. 이십이 미터에서 그 동작은 틀림없이 죽이었다. 나는 쌀을 불리기 시작했다.
3667일차. 토요일. 맑음.
A창: 06:49 열림 B창: 06:40 열림 C창: 09:00 열림
11:00. 노크 두 번, 짧고 세게. 서주안 씨. 사슬을 풀었다. 이제 이 노크에는 사슬을 푼다. 서주안 씨는 식탁에 앉자마자 창 옆 사진과, 그 옆에 새로 세워 둔 수첩 복사본을 봤다. 한수연이 그려 놓은 표. 동그라미 다섯.
“저도 있네요. C창.”
“그날 밤은 못 보셨습니다.”
“지금 보잖아요. 그리고 저 그 표 밑에 있는 거 알아요? 동그라미가 창 모양이에요. 네모 안에 동그라미. 언니가 그렇게 그렸어요.”
나는 복사본을 다시 봤다. 칸이 네모였고 동그라미가 그 안에 있었다. 창이었다. 나는 그것을 표로만 봤다.
죽을 젓는 동안 서주안 씨는 병원 이야기를 했다. 이번 입원은 짧았다고. 이식 대기 순번이 조금 올라갔다고. 사 년 동안 백이십 번째였다가 이번에 서른네 번째가 되었다고. 앞에 선 사람들이 이식을 받았거나, 받지 못하고 떠났거나. 그 사람은 그 숫자를 말할 때 목소리를 바꾸지 않았다.
“숫자가 줄어드는 게 좋은 건지 모르겠어요. 줄어들면 내 차례가 오는 건데, 줄어든 만큼 누가 없어진 거니까.”
나는 국자를 멈추지 않았다. 이십사 분. 불을 껐다.
“아저씨는 뭐 셀 때 늘어나는 게 좋아요, 줄어드는 게 좋아요?”
“창은 늘어나는 것이 좋습니다.”
서주안 씨가 웃었다. 두 그릇을 먹었다.
14:30. 초인종. 한 번, 짧게. 이 초인종은 처음 듣는 누르는 법이었다. 가볍고 정중했다. 서주안 씨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나는 현관으로 갔다. 사슬을 걸었다. 한 뼘 열었다.
오태민이었다.
서주안 씨가 등 뒤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나는 사슬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고리 일곱 개가 손바닥 안에서 차가웠다.
현수막의 얼굴이 한 뼘 안에 들어왔다. 세로 이 미터에서 세로 이십 센티미터로 줄어든 얼굴. 줄어드니까 현수막에 없던 것이 보였다. 턱 아래 면도 자국. 왼쪽 귀밑의 작은 점. 웃을 때 오른쪽 입꼬리만 먼저 올라가는 것. 그 사람은 흰 셔츠에 선거 띠를 두르고 있었다. 뒤에 아무도 없었다. 혼자 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기호 이 번 오태민입니다. 동네 한 바퀴 돌면서 인사드리고 있어요.”
그 사람은 명함을 사슬 틈으로 내밀었다. 나는 받지 않았다. 그 사람은 명함을 문틀과 사슬 사이에 끼워 놓았다. 명함이 거기 걸렸다. 세로로.
“십 년 만이네요, 선생님.”
“십 년하고 열하루입니다.”
그 사람이 소리 내어 웃었다.
“역시. 날짜 세시는 분. 요새 창문 여닫으시고, 화단에도 서 계시고, 권 영감님 댁에도 가시고, 편의점에도 가셨다고. 동네가 조용한 동네라 금방 들려요.”
“그래서 오셨습니까?”
“걱정돼서 왔죠. 선생님 십 년 동안 밖에 안 나오셨잖아요. 갑자기 나오시면 몸도 놀라고 마음도 놀라요. 저 사람 언니 일은 안됐지만, 그게 벌써 십 년이에요. 선생님이 창으로 보신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밤 두 시에 창밖으로 뭘 보면 사람이 착각을 해요.”
그 사람은 목소리를 낮췄다. 복도에 아무도 없는데도.
“그리고 선생님, 이 집 전세시죠. 저희 재개발 들어가면 이 골목 전부 보상 대상이에요. 선생님처럼 오래 사신 분들은 더 챙겨 드려야죠. 제가 당선되면.”
뒤에서 서주안 씨가 식탁 의자를 밀고 일어서는 소리가 났다.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십 년 전 오월 열아흐레 밤 열한 시 사십 분에 이 문 앞에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오태민의 웃음이 멈췄다. 입꼬리가 올라간 채로 멈췄다. 그 사람은 사슬을 봤다. 일곱 고리. 그 사슬을 그날도 봤을 것이다. 그러고는 다시 웃었다. 이번에는 양쪽 입꼬리가 같이.
“기억이 안 나네요. 뭐라고 했을까요?”
“아저씨 창이 참 좋네요.”
“아, 그랬나요? 좋은 창이죠. 지금도.”
그 사람은 고개를 조금 기울여 내 어깨 너머를 봤다. 방 안을. 창을. 창 옆에 세워 둔 사진을. 그 사람의 눈이 사진에서 한 번 멈췄다. 사진 속 사람은 창을 등지고 가위를 들고 혀를 내밀고 있었다. 오태민의 눈 밑이 한 번 떨렸다. 떨림은 금방 없어졌다.
나는 사슬을 봤다. 금속 고리 일곱 개. 십 년 전 이사 온 날 달았다. 4일차 밤에 처음 걸었다. 그 뒤로 이 사슬 없이 이 문을 연 적이 없다. 가스 점검 때도. 서주안 씨에게 처음 풀어 줄 때도, 나는 사슬을 풀고 한 발 물러서서 문을 열었다. 사슬이 풀린 문 앞에 내가 먼저 서 본 적은 없었다.
나는 문을 조금 닫았다. 사슬이 늘어졌다. 걸쇠에서 사슬 끝을 뺐다. 짤랑. 그리고 문을 열었다. 끝까지.
오태민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없었다. 한 뼘이 아니라 한 걸음이었다. 그 사람은 나보다 한 뼘 작았다. 현수막에서는 세로 이 미터였다. 한 걸음 거리에서 그 사람은 내 눈을 올려다봐야 했다.
“1일차 02:14.”
내가 말했다.
“당신이 나동 402호에서 말린 카펫을 어깨에 메고 나오는 것을 봤습니다. 길이 약 170센티미터. 02:31 흰 승합차. 번호판 끝자리 4. 6일차에 화단에 콘크리트를 부었습니다. 두께 약 20센티미터. 그 위에 회양목 여섯 그루. 십 년 동안 한 뼘도 안 자랐습니다.”
오태민은 웃지 않았다. 웃음을 찾는 얼굴이었다. 찾지 못했다.
“선생님, 그거 창 하나에서 보신 거잖아요. 창 하나는 착각이에요. 법이 그래요.”
“창 다섯입니다.”
그 사람의 눈이 내 얼굴에서 떠났다. 복도 창 너머로. 나동으로. 사 층 왼쪽 A창에 권 영감님이 서 있었다. 창을 열고. 개를 안고. 사 층 가운데 B창에 한수연이 서 있었다. 그리고 내 뒤에서, 서주안 씨가 국자를 든 채 현관까지 걸어 나와 내 어깨 옆에 섰다.
“안녕하세요, 후보님. C창이에요.”
오태민은 한 걸음 물러섰다. 복도 타일 위에서 구두 굽이 미끄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 사람은 문틀에 끼워 둔 명함을 빼 가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갔다. 서른두 단. 이 층 참에서 멈추는 소리가 났다. 이 초. 그러고는 끝까지 내려갔다.
3667일차 14:30~14:41. 방문 1. 오태민. 사슬 해제. 문 전체 개방. 4일차 이후 처음. 1일차 02:14 구두 진술. 창 다섯 고지.
15:00. 서른두 단. 이 층 참에서 멈추지 않는 발소리. 뛰는 발소리. 한수연이었다.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은 문 앞에서 멈췄다. 사슬이 늘어져 있었다. 한 뼘이 아니라 문 하나가 통째로 비어 있었다. 그 사람은 들어오지 않았다. 문턱 앞에서 나를 봤다.
“들어가도 돼요?”
“예.”
한수연은 문턱을 넘었다. 방바닥에 누운 스물여덟 권 옆을 조심조심 걸어서 창 앞에 섰다. 내 의자 뒤에. 그리고 내 창으로 건너편을 봤다. 나동 사 층. A, B, C. 가운데, 자기 창. 벽지를 뜯어낸 빈방, 형광등 하나.
“여기서 보면 제 방이 이렇게 작네요.”
“백이십 센티미터 안에 셋이 들어옵니다.”
그 사람은 오래 봤다. 자기 창을. 십 년 전 언니의 창을. 그러다 창 옆 사진을 봤다. 자기가 준 사진이 이 창 옆에 서 있는 것을.
“아저씨는 십 년 동안 이걸 봤구나.”
“예.”
“언니는 몰랐겠지.”
“첫날 밤, 한 번은 저쪽에서도 봤을 겁니다. 물을 주다가 웃었으니까요.”
한수연이 창틀을 잡았다. 서주안 씨가 식탁에서 죽을 한 그릇 더 퍼서 한수연 앞에 놓았다. 아무 말 없이. 한수연은 선 채로 그걸 먹었다. 창을 보면서.
서주안 씨가 국자로 문틀의 명함을 툭 쳤다. 명함이 바닥에 떨어졌다.
“아저씨, 사슬 다시 거실 거예요?”
나는 사슬을 봤다. 늘어진 채 문틀에 매달려 있었다.
“오늘은 안 겁니다.”
“내일은요?”
“내일 판단하겠습니다.”
서주안 씨가 손가락 세 개를 폈다가, 하나를 접었다.
“이 초. 줄었네요.”
17:50. 나동 앞. 박 통장, 권 영감 댁 방문. 이십 분. 18:15. A창. 권 영감이 창을 열고 한참 아래를 봄. 경위 안 짖음. 18:40. 나동 화단 옆. 마 씨가 소형 굴착기 임대 업체 명함을 화단 턱에 테이프로 붙임. 6월 1일까지 이틀.
나는 그 네 줄을 적고 나서 문을 봤다. 사슬은 늘어진 채 문틀에 매달려 있었다. 걸지 않았다. 대신 방바닥에 누운 스물여덟 권을 한 권씩 세워 상자에 담았다. 1권부터. 뚜껑은 덮지 않았다. 덮으면 다시 벽장으로 들어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