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022자) · 3658일차
사슬
관측자 K의 일지 · 정이한
만 19세 이상 이용가
3658일차. 오월 이십일일 목요일. 흐림. 실내 21도.
A창: 06:50 열림 B창: 06:40 열림 C창: 닫힘
오후 두 시에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났다. 서른두 단. 나는 발소리를 셌다. 스물여덟째 단에서 멈췄다. 사 분 동안 멈춰 있었다. 이 층 참이다. 나도 어제 그 참에서 무릎을 짚었다. 다시 올라왔다. 서른둘. 문 앞.
초인종이 울리지 않았다. 노크도 없었다. 문 밖에 사람이 서 있는 소리만 났다. 사람이 서 있는 데도 소리가 있다. 숨, 옷깃, 신발 밑창이 복도 타일을 조금씩 누르는 소리. 십 년 동안 나는 문 밖의 소리를 가스 점검과 택배로만 나눴다. 이 소리는 둘 다 아니었다.
14:06. 현관 밖 인물 1. 초인종 없음. 노크 없음. 14:10. 여전히.
십 분이 지나서 나는 현관으로 갔다. 사슬을 건 채 문을 열었다. 한 뼘. 복도의 빛이 한 뼘만큼 들어왔다. 그 한 뼘 안에 한수연이 있었다. 문 옆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무릎에 종이 봉투를 올려놓고.
“노크하면 안 여실 것 같아서요.”
“안 두드려도 안 열 수 있습니다.”
“그럼 여셨네요.”
그 사람은 일어나지 않았다. 앉은 채로 고개만 들어 사슬 너머 나를 봤다. 나는 선 채로 사슬 너머 그 사람을 내려다봤다. 이십이 미터에서 한 뼘이 되었다. 이십이 미터에서는 얼굴이 네모 안에 들어왔다. 한 뼘에서는 얼굴의 일부만 보였다. 왼쪽 눈과 코와 입의 반. 눈 밑이 거뭇했다.
“어제 그렇게 가시고 저 밤새 생각했어요. 아저씨 말이 맞아요. 그 종이가 누구 손을 거쳐서 오씨 집에 갔는지 저도 몰라요. 그래서 경찰에는 안 가져가요. 저한테만 보여 주세요.”
“보여 드려서 무엇을 하실 겁니까?”
“알려고요.”
“무엇을 아는 겁니까?”
“우리 언니가 그날 밤 거기서 나갔는지, 안 나갔는지요.”
나는 사슬을 봤다. 사슬은 금속 고리 일곱 개다. 십 년 전 이사 온 날 달았다. 4일차 밤 오태민이 이 문 앞에 섰을 때 나는 이 사슬을 걸고 문을 한 뼘 열었다. 그 사람은 지금 한수연이 앉은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아저씨 창이 참 좋네요, 하고 갔다. 그 뒤로 이 문은 가스 점검 말고는 열린 적이 없다.
“1일차는 네 줄입니다. 그건 이미 가지고 계십니다.”
“뒤에도 있잖아요. 6일차 화단. 그리고 그다음.”
“그다음은 안 됩니다.”
“왜요.”
“그다음은 제가 본 것이 아니라 제가 본 뒤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수연이 봉투를 무릎 위에서 폈다가 접었다. 종이가 꺾이는 소리가 복도에 크게 울렸다.
“아저씨, 저 이 년 동안 적금 붓고 전세금 빼서 그 방 샀어요. 경매로. 오씨네가 아버지 돌아가시고 세금 때문에 내놓은 거예요. 벽지 다 뜯어 봤어요. 장판도 들췄어요. 아무것도 없었어요. 십 년이면 없어지죠. 방은 아무것도 기억 안 해요. 그 창이 보는 데는 여기 하나밖에 없었어요. 가동 삼 층 가운데. 커튼 뒤에 사람 그림자가 앉아 있는 창.”
그 사람은 한 박자 쉬었다.
“기억하는 건 아저씨 하나예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문장이 없었다. 관측 규정 제1조는 이럴 때 쓰는 문장이 아니었다. 그 문장은 바람과 구름을 향해 만든 것이다. 사람이 문 앞에 앉아서 기억하는 건 당신 하나라고 할 때 쓰는 문장은 규정집에 없었다.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네.”
“언니분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한수연이 나를 올려다봤다. 사슬 너머로. 뜻밖이라는 얼굴이었다.
“그걸 왜요.”
“저는 1일차에 남자를 적었습니다. 키, 카펫 길이, 차 번호 끝자리. 그 방에 누가 살았는지는 적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한수연은 한참 있다가 봉투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사슬 틈으로 밀어 넣었다. 나는 받았다.
스물세 살. 긴 머리를 하나로 묶었다. 미용실 가운. 손에 가위를 들고 거울 속 카메라를 향해 혀를 내밀고 있었다. 뒤에 걸린 달력이 이천십육 년 사월이었다.
“미용 전문대 졸업하고 동네 미용실 보조였어요. 밤마다 저한테 전화했어요. 저는 그때 대구에서 대학 다녔거든요. 오늘 손님 머리 망쳤다, 원장님이 또 소리 질렀다, 옆집 할머니가 떡 줬다. 매일. 그 방에 화분이 하나 있었어요. 창가에. 제라늄. 언니가 그거 물 주는 사진을 보냈어요. 오월 십오일 밤 열한 시. 마지막 문자예요. 언니, 제라늄 꽃 폈다.”
오월 십오일 밤 열한 시. 1일차 02:10의 세 시간 전이다. 나는 그날 밤 이 방에 짐을 풀고 있었다. 창을 보지 않았다.
아니다.
나는 사진을 든 채 방으로 돌아갔다. 사슬은 풀지 않았다. 문은 한 뼘 열린 채로 두었다. 책상 서랍에서 첫 권을 꺼냈다. 1일차는 첫 장이 아니었다. 첫 장 앞에, 표지 안쪽에, 연필로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이사 온 날 밤, 창 앞에 처음 앉아서 공책을 펴기 전에, 시험 삼아 적은 것. 나는 십 년 동안 그 줄을 1일차에 넣지 않았다. 시각도 없고 항목도 없어서. 관측이 아니라서.
이사. 맞은편 사 층 가운데 창에 빨간 꽃. 누가 물을 줌. 웃는다.
나는 그 줄을 십 년 동안 표지 안쪽에 두고 한 번도 다시 읽지 않았다. 웃는다. 그 세 글자를 나는 적어 놓고 잊었다. 관측원은 표정을 적지 않는다. 이십이 미터에서 표정은 안 보인다고 스스로 정했다. 그런데 첫날 밤 나는 봤다. 적었다. 그리고 그 줄을 관측이 아니라는 이유로 밖에 두었다.
나는 공책을 들고 현관으로 돌아갔다. 사슬 너머로 표지 안쪽을 펴 보였다. 한수연이 일어섰다. 처음으로 일어섰다. 그 사람은 그 한 줄을 읽었다. 입술이 움직였다. 웃는다.
그 사람은 울지 않았다. 사슬을 잡았다. 금속 고리 일곱 개가 그 사람 손안에서 짤랑 소리를 냈다. 그 사람은 사슬을 잡은 채로 오래 서 있었다. 나는 공책을 든 채로 오래 서 있었다. 우리 사이에 문 한 뼘과 사슬 일곱 고리가 있었다.
“고맙습니다.”
그 사람이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고맙다는 말을 받을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 줄을 십 년 동안 버려 두었다.
“이 줄은 드리겠습니다. 베껴 가십시오. 다른 줄은 아직 안 됩니다.”
한수연은 수첩을 꺼내 베꼈다. 천천히. 한 글자씩. 다 베끼고 나서 수첩을 가슴에 대고 섰다.
“내일 또 올게요. 안 여셔도 앉아 있을게요.”
“비가 온다고 합니다.”
“그럼 우산 가져올게요.”
그 사람은 계단을 내려갔다. 내려가다가 삼 층과 이 층 사이에서 한 번 돌아보는 기척이 났다. 서른두 단. 나는 발소리를 셌다. 이 층 참에서 멈추지 않았다.
3658일차 14:06~14:52. 현관. 사슬 건 채 개방. B창 인물(한수연) 방문. 1일차 표지 안쪽 한 줄 보여 줌. 사진 1매 받음. 한수정. 스물셋.
그날 밤 나는 사진을 오래 봤다. 사진 속 거울에 미용실 창이 비쳐 있었다. 창밖은 낮이었다. 사진 속 사람은 창을 등지고 서 있었다. 창을 등지고 웃는 사람. 나는 십 년 동안 창을 향해서만 앉아 있었다.
사진은 책상 위, 창 옆에 세워 두었다. 그 자리에 무엇을 세워 둔 것은 처음이다. 창 옆은 늘 비워 두었다. 시야를 가리니까.
21:00. C창 열림.
C창에 불이 켜졌다. 여자가 돌아왔다. 이번 부재는 닷새. 사 년 이 개월 동안 가장 짧다. 여자는 창을 열고 창틀에 기댔다. 얼굴이 여전히 희었다. 손목에 흰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이십이 미터에서 흰 것은 희게 보인다. 여자는 B창을 봤다. 불 켜진 빈방을. 그러고는 이쪽을 봤다. 내 창을. 내 창 옆에 세워 둔 사진을, 이십이 미터에서 볼 수 있을 리는 없다.
여자가 손을 들었다. 인사로 판단된다.
나는 손을 들지 않았다.
3659일차. 금요일. 비.
A창: 06:52 열림 B창: 06:40 열림 C창: 08:30 열림
08:10. 나동 화단 앞. 마 씨와 남자 1(점퍼, 안전모). 줄자로 화단 가로세로를 잼. 08:22. 남자 1이 도면을 펴고 사진 촬영. 화단 가장자리 콘크리트를 망치로 두드림. 08:40. 퇴장.
비 오는 아침에 화단을 재는 사람은 없다. 재야 할 이유가 급한 사람만 잰다. 나는 그 두 줄 아래에 적었다가 지웠다. 추정이다. 지운 자리가 종이에 눌려 남았다.
08:30에 C창이 열렸고, 여자는 창을 열자마자 오른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B창 쪽이다. B창의 한수연도 창을 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는 벽 하나, 창과 창 사이 삼 미터. 여자가 손을 흔들었다. 한수연이 머뭇거리다 손을 흔들었다. 십 년 동안 나동 사 층의 창 셋은 서로를 본 적이 없었다. 나란히 붙은 창은 서로를 못 본다. 서로를 보려면 몸을 창밖으로 내밀어야 한다. 그날 아침 두 창이 몸을 내밀었다.
오후 두 시. 계단 서른두 단. 발소리가 멈췄다. 문 밖에서 우산 접는 소리가 났다. 물방울이 복도 타일에 떨어지는 소리. 한수연이 벽에 기대 앉는 소리.
나는 사슬을 건 채 문을 한 뼘 열었다. 그리고 그 틈에 의자를 하나 가져다 놓고 앉았다. 문 안쪽에 나, 문 밖에 한수연. 서로 얼굴의 반씩. 한수연이 먼저 물었다.
“아저씨는 왜 십 년 동안 안 나오셨어요?”
나는 4일차 이야기를 했다. 23:40. 초인종. 사슬. 한 뼘. 아저씨 창이 참 좋네요. 그 사람은 끝까지 듣고 나서 말했다.
“그럼 아저씨도 십 년 동안 그 방에 갇혀 있었던 거네요.”
“갇힌 게 아닙니다. 나가지 않은 겁니다.”
“그게 뭐가 달라요?”
“열쇠가 안쪽에 있습니다.”
한수연이 사슬 틈으로 나를 봤다. 그러고는 웃음을 참다가 못 참았다.
“아저씨, 그거 자랑이에요?”
“자랑이 아니라 구분입니다.”
“구분이 중요하세요?”
“저한테는 중요하고 다른 사람한테는 안 중요합니다.”
그 사람이 벽에 머리를 기대고 한참 웃었다. 복도에 웃음이 울렸다. 아래층 문이 한 번 열렸다가 닫혔다. 나는 웃음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끝나지 않아서 나도 조금 웃었다. 입 모양만.
그다음 우리는 두 시간 동안 날씨 이야기를 했다. 운량과 시정과 풍속을. 그 사람이 물었고 나는 대답했다. 섬에서는 비가 오면 바다 냄새가 먼저 오고, 운량이 팔을 넘으면 등대 불이 한 시간 일찍 켜진다고 하자 그 사람이 웃었다. 이 한 뼘 안에서 표정은 잘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