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107자) · 3657일차
화단
관측자 K의 일지 · 정이한
만 19세 이상 이용가
3657일차. 오월 이십일 수요일. 맑음. 실내 22도.
A창: 06:48 열림 B창: 07:00 열림 C창: 닫힘
07:40. B창의 한수연이 창턱에 종이를 올려놓고 접었다. 접는 데 사 분이 걸렸다. 접는 방식은 표준형이다. 어릴 때 누구나 배우는 그것. 07:44에 날렸다. 종이비행기는 사 층에서 떨어지면서 한 번 솟았다가 두 번 꺾였고, 나동 화단 가운데, 회양목 셋째 그루와 넷째 그루 사이 흙 위에 내려앉았다.
한수연은 창턱에 팔을 얹고 이쪽을 봤다. 손가락으로 화단을 가리켰다. 그리고 나를 가리켰다. 다시 화단을.
07:44. B창에서 종이비행기 투하. 낙하 지점 나동 화단 중앙. 07:45. B창 인물이 화단과 관측자를 번갈아 가리킴.
나는 이 두 줄을 쓰고 한 시간을 앉아 있었다. 쓰지 않은 한 시간이다. 그 한 시간에 대해 적는다. 창에서 화단까지 직선으로 이십 미터 남짓. 창에서 현관까지 네 걸음. 현관에서 계단까지 두 걸음. 계단 서른두 단. 공동 현관에서 화단까지는 재어 본 적이 없다. 십 년 동안 그 거리를 걸을 일이 없었으므로 잴 필요가 없었다. 나는 그 거리를 모른다는 것을 한 시간 동안 알았다.
08:44. 현관.
현관에는 신발이 한 켤레 있다. 검은 운동화. 십 년 전 섬에서 신고 올라온 것. 발을 넣었다. 끈이 굳어 있었다. 끈을 매는 데 이 분이 걸렸다. 손이 끈의 모양을 기억하지 못했다. 섬에서는 장화를 신었다.
08:47. 문을 열었다.
복도의 공기는 실내보다 서늘했다. 복도 창으로 들어온 빛이 바닥의 먼지를 세로로 비추고 있었다. 먼지는 가라앉지 않고 그 빛 안에서만 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다가 첫 계단에 발을 올렸다. 하나. 둘. 셋. 세지 않으려고 했는데 셌다. 몸이 먼저 센다. 열여섯째 단 참에서 멈췄다. 무릎이 떨렸다. 근력 저하로 판단된다. 십 년 동안 방 안에서 하루 평균 천이백 걸음을 걸었다. 계단은 걸음에 들어가지 않는다.
08:53. 서른두 단. 공동 현관.
유리문 너머가 밝았다. 밝아서 아무것도 안 보였다. 나는 유리문 손잡이를 잡았다가 놓았다. 다시 잡았다. 놓았다. 세 번째에 밀었다.
바깥은 창이 없었다. 이것이 제일 먼저 든 생각이다. 가로 백이십 센티미터, 세로 구십 센티미터의 테두리가 없었다. 테두리가 없으니 어디를 봐야 할지 정할 수 없었다. 오른쪽에 전봇대와 오태민의 얼굴. 왼쪽에 편의점 간판. 편의점 앞 파라솔 아래에서 교복 입은 아이 둘이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한 아이가 나를 흘끗 봤다. 그 아이 눈에 나는 그냥 아침에 나온 아저씨였다. 십 년이 그 한 번의 흘끗에 들어가지 않았다. 위에 하늘. 하늘이 너무 컸다. 섬에서 십일 년 동안 하늘을 봤다. 운량을 십분율로 적었다. 오늘 운량은 이. 적을 곳이 없어서 입 안으로 말했다. 운량 이. 시정 이십 킬로미터 이상. 말하고 나니 다리가 조금 덜 떨렸다.
나동 화단까지 스물아홉 걸음이었다.
화단은 창에서 볼 때보다 낮았다. 가장자리 콘크리트 턱이 무릎 아래까지밖에 안 왔다. 회양목은 창에서 볼 때보다 작았다. 흙은 창에서 볼 때보다 검었다. 창으로는 색이 반쯤 빠진다. 십 년 동안 나는 반쯤 빠진 색을 봤다. 종이비행기는 셋째 그루와 넷째 그루 사이에 있었다. 팔을 뻗으면 닿지 않았다. 화단 안으로 한 발을 들여야 했다.
나는 턱을 넘어 흙을 밟았다.
흙이 얕았다. 발바닥 밑이 금방 딱딱했다. 한 뼘도 안 되는 흙 밑에 평평하고 딱딱한 것이 있었다. 6일차 14:10. 두께 약 20센티미터로 추정. 나는 그 위에 서 있었다. 십 년 동안 창으로 내려다본 자리에, 처음으로 서 있었다. 무릎이 다시 떨렸다. 이번에는 근력 저하가 아니었다.
“아저씨.”
뒤에서 목소리가 났다. 돌아봤다. 쉰쯤 된 남자가 나동 공동 현관 앞에 서 있었다. 푸른 작업복. 허리에 열쇠 꾸러미. 손에 대빗자루. 나는 그 얼굴을 안다. 십 년 동안 매주 월요일 아침 여덟 시에 나동 앞을 쓸었다. 오씨 집안 건물 관리인. 마 씨. 그리고 6일차 07:30 일지의 인부 둘 가운데 하나였다.
“화단 밟으시면 안 돼요.”
“종이를 줍겠습니다.”
“제가 주울게요. 나오세요.”
마 씨가 빗자루를 든 채로 다가왔다. 느렸다. 느린 사람이 제일 멀리 온다. 섬에서 배웠다. 태풍은 느린 것이 무섭다. 마 씨가 화단 턱 앞에 섰다. 나는 턱 안에, 그 사람은 턱 밖에.
“나오시라니까요. 회양목 상해요.”
“회양목은 십 년 동안 한 뼘도 안 자랐습니다.”
마 씨가 나를 봤다. 처음으로 똑바로.
“아저씨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 씨의 눈이 내 얼굴에서 가동 삼 층으로 올라갔다. 가운데 창. 커튼이 반쯤 열린 창. 그러고는 내려와 내 신발을 봤다. 끈을 잘못 맨 검은 운동화.
“아, 가운데 집. 십 년 만에 나오셨네요.”
그 사람은 웃었다. 웃음이 오태민의 현수막과 닮았다. 입만 웃는 웃음.
“오 사장님이 궁금해하시겠네. 가운데 집 아저씨가 요새 창을 여닫는다고, 어젯밤에.”
어젯밤 아홉 시. 커튼 두 번. 그걸 본 사람이 한수연 말고도 있었다. 나는 십 년 동안 창을 봤다. 창 쪽에서 나를 보는 창이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관측원은 관측되지 않는다. 그것이 조건이었다. 조건은 오래전에 깨져 있었다.
마 씨가 빗자루로 화단 턱을 두 번 쳤다. 탁, 탁.
“나오세요. 종이는 제가 치워요.”
그 사람이 손을 뻗어 종이비행기를 집으려 했다. 그때 나동 공동 현관 문이 열렸다.
“그거 제 거예요.”
한수연이었다. 회색 점퍼. 운동화. 사 층에서 뛰어 내려온 숨이었다. 그 사람은 마 씨와 화단 사이로 들어와 섰다. 빗자루와 종이비행기 사이에.
“사 층 새 주인이에요. 402호. 제가 날린 거예요.”
“아, 경매로 들어오신.”
마 씨가 빗자루를 세웠다.
“오 사장님이 인사드리러 가셨다던데.”
“오셨어요. 손목 잡고 가셨어요.”
마 씨의 얼굴이 굳었다. 한수연은 마 씨를 보지 않았다. 나를 봤다. 화단 안에 서 있는 나를.
“아저씨. 그거 주워 주세요.”
나는 허리를 숙였다. 종이비행기를 집었다. 가벼웠다. 줄 공책을 뜯은 종이였다. 뜯은 자리가 톱니처럼 들쭉날쭉했다. 급하게 뜯은 사람의 가장자리였다. 흙이 한쪽 날개에 묻어 있었다. 폈다. 안쪽에 볼펜으로 한 줄.
보고 계신 거 알아요. 내려와 주세요.
나는 내려와 있었다. 그 종이가 나를 내려오게 했는지, 내가 내려와서 그 종이를 폈는지 순서가 헷갈렸다. 순서가 헷갈린 것은 십 년 만이다.
마 씨가 빗자루를 다시 들었다.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나동 현관 앞을 쓸기 시작했다. 월요일이 아니었다. 수요일이었다. 그 사람은 쓸면서 우리를 봤다. 쓰는 척을 하면서 보는 사람의 등은 뻣뻣하다. 나는 그것을 십 년 동안 창으로 봤다. 가까이서 봐도 같았다.
골목 끝에서 개 발톱 소리가 났다. 권 영감님과 경위였다.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경위는 노란 비옷 대신 빨간 목줄을 하고 있었다. 창으로 볼 때는 누렁이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털 끝이 희끗했다. 경위가 화단 앞에서 멈췄다. 코를 흙에 박았다. 그리고 짖었다. 두 번. 낮게.
“또 그런다. 이놈은 이 화단만 오면 짖어.”
영감님이 목줄을 당기다가 나를 봤다. 한참 봤다. 안경을 벗었다가 다시 썼다.
“가만, 가동 가운데 집 양반 아니오? 창가에 맨날 앉아 있는.”
“예.”
“내가 그 창을 십 년 봤는데 사람인 줄은 알았어도 서 있는 건 처음 보네. 키가 크시구먼.”
경위가 내 운동화 끈을 핥았다. 잘못 맨 끈이었다. 영감님이 웃었다.
“전에 키우던 놈도 그랬어. 이 화단만 오면 짖었지. 그놈은 밤에도 짖었어. 한번은 새벽 두 시에 어찌나 짖던지.”
영감님은 그 말을 하다가 말았다. 한수연이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영감님은 그 얼굴을 보고, 무엇을 알아본 사람처럼 목줄을 짧게 감아쥐고 나동 현관으로 들어갔다. 경위가 끌려가면서 한 번 더 화단을 돌아보고 짖었다.
한수연이 화단 턱에 걸터앉았다. 나도 화단 밖으로 나와 턱에 앉았다. 콘크리트가 아침 해에 조금 데워져 있었다. 우리 사이에 회양목 한 그루.
“보셨죠. 그날 밤.”
“봤습니다.”
“다 적으셨죠.”
“적었습니다.”
그 사람이 숨을 한 번 쉬었다. 길게.
“십 년 동안 아무도 봤다고 안 했어요. 경찰도, 이 동네도. 우리 언니는 가출한 사람이었어요. 저는 그 말을 십 년 들었어요.”
그 사람은 점퍼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흐린 복사본이었다. 복사한 것을 또 복사한 것. 1일차 02:10. 내 글씨였다. 오른쪽으로 조금 기운.
“올해 삼월에 정보공개 청구로 사건 기록을 받았어요. 맨 뒤에 이게 끼워져 있더라고요. 이름도 없이. 누가 보냈는지 아무도 안 찾았대요.”
그 사람은 종이를 내 무릎에 올려놓았다.
“그 일지 주세요. 1일차부터 다.”
나는 종이를 봤다. 십 년 전 내 손이 복사기 앞에서 떨렸던 것이 복사본에도 남아 있었다. 02:14의 4가 번져 있었다.
“안 됩니다.”
한수연이 나를 봤다. 화가 난 얼굴이 아니었다. 그게 더 어려웠다.
“왜요.”
“한 번 보냈습니다. 사흘 뒤에 오태민이 제 현관 앞에 왔습니다.”
그 사람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그때 이 종이가 누구 손을 거쳐 오씨 집에 갔는지 저는 모릅니다. 모르는 채로 다시 보낼 수 없습니다.”
나는 일어섰다. 무릎이 떨렸다. 가동 쪽으로 걸었다. 스물아홉 걸음. 뒤에서 마 씨의 빗자루 소리가 멈췄다. 공동 현관 유리문 앞에서 나는 올려다보지 않았다. 내 창이 저 위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저 창을 밖에서 보면 무엇이 보이는지, 나는 아직 보고 싶지 않았다.
3657일차 08:53~09:31. 외출. 화단까지 스물아홉 걸음. 화단 흙 두께 한 뼘 미만. 그 밑 딱딱함. 6일차 기록과 일치. 관리인 마 씨. 어젯밤 커튼 개폐를 봄.
마지막 줄을 적고 나서 나는 커튼을 닫지 않았다. 닫으면 저쪽에서 또 볼 것이다. 열어 두어도 볼 것이다. 둘 다 보인다면, 열어 두는 쪽이 적어도 나도 볼 수 있다.
운동화를 벗었다. 밑창 홈에 화단 흙이 끼어 있었다. 검은 흙. 나는 그것을 털지 않고 신문지 위에 올려 두었다. 십 년 만에 이 방에 들어온 바깥이었다. 저녁까지 그 흙은 말라서 회색이 되었다. 창으로 보는 흙의 색이었다. 그제야 알았다. 창으로 본 십 년은 마른 쪽의 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