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033자) · 나무 계단
청산 이주민 명부
정오의 방송 · 서지오
만 19세 이상 이용가
그 주 토요일 정오의 방송은 한 문장이 달랐다.
“정오입니다. 오늘의 명단을 알려 드립니다. 서정동 둘. 남산동 둘. 사택동 없음. 청산동 하나.”
그리고 숫자를 다 읽은 뒤, 늘 붙던 마지막 문장 대신 처음 듣는 문장이 나왔다.
“이 방송을 듣는 두 분께. 이번 주에는 혼자 계시지 마십시오.”
두 분. 나는 녹음기 세 대를 되감아 처음부터 다시 들었다. 두 분. 셋 다 같은 말을 했다. 이 방송을 만드는 사람은 듣는 사람이 몇인지 알고 있었다. 정오가 쪽지에 쓴 숫자를. 다음 주에는 둘입니다.
정오는 그날 수리점에 오지 않았다. 떡집 장씨가 세 접시를 들고 왔다가 한 접시를 도로 가져갔다. 계약 재검토로 오전 배송이 없어졌다고 했는데, 오지 않았다. 전화를 걸었다. 안 받았다. 문자를 보냈다. 읽음 표시가 뜨지 않았다. 일요일에도. 월요일 아침에도.
월요일 아침 시장 입구 편의점에 들렀다. 지수가 야간을 마치고 교대하던 참이었다. 정오를 봤느냐고 물었다.
“토요일 밤 열한 시쯤 왔어요. 요구르트 다섯 개짜리 사 갔어요. 맨날 그거 사요. 택배 아저씨들 단골이에요.”
“혼자였어요?”
지수가 계산대 모니터를 돌려 보였다. 매장 앞 카메라. 토요일 밤 열한 시 사 분. 정오가 요구르트를 들고 나간다. 길 건너편 가로등 밑에 검은 승용차 한 대가 서 있다. 정오가 골목으로 꺾어지자 승용차가 시동을 켠다. 헤드라이트가 켜지고, 천천히 따라간다.
“이거 경찰 줘야 돼요?”
“복사해 줄 수 있어요?”
“사장님 허락받아야 되는데.”
지수는 모니터를 한참 보다가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찍었다. 두 장. 그리고 나에게 보냈다.
“사장님한테는 모니터 닦다가 찍힌 거라고 할게요. 제 귀 재 줬잖아요.”
월요일 오후 두 시에 나는 정오의 원룸으로 갔다. 청산동 삼 번지 골목, 사 층짜리 원룸 건물 삼 층. 주소는 국숫집에서 받아 두었다. 계단이 나무였다. 밟을 때마다 울렸다. 오래된 니스 냄새가 났고, 계단참마다 누가 두고 간 택배 상자가 하나씩 있었다. 이 건물에서 나무 계단은 소리를 숨기지 못한다. 삼 층 복도 끝 문 앞에 섰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방 안에서 소리가 났다. 여러 사람이 움직이는 소리. 상자에 무언가를 넣는 소리.
나는 문을 밀었다.
방은 하나였다. 책상 하나, 침대 하나. 그리고 벽을 따라 녹음기가 열두 대 놓여 있었다. 열두 대가 다 88.3에 맞춰져 있었다. 녹음기마다 테이프로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서정동 삼 번지 전봇대. 남산동 경로당 옥상. 사택 이단지 쓰레기장. 청산시장 입구. 택배 배송 경로였다. 정오는 도시 열두 군데에 녹음기를 놓고 다니며 방송이 어디까지 닿는지 재고 있었다. 오늘 아침 그걸 다 걷어 온 모양이었다.
그 녹음기들을 상자에 담고 있는 사람이 셋이었다. 둘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작업복. 하나는 구태식이었다. 책상 앞에 서서 노트 한 권을 넘기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내가 물었다. 구태식이 노트에서 눈을 들었다.
“한겸 씨. 여기서 또 뵙네요. 이 건물 관리 대행입니다. 하평화학 복지재단 소유 건물이거든요. 정오 씨가 어제 퇴거 신청을 했어요. 짐 정리해 드리는 중입니다.”
“정오 씨는 어디 있습니까?”
“이사 갔대요. 급하게. 택배 계약도 끝났다던데.”
작업복 하나가 녹음기 하나를 상자에 넣다가 떨어뜨렸다. 빨간 불이 들어왔다. 녹음 중이었다. 작업복이 버튼을 눌러 껐다.
“그 녹음기들, 정오 씨 개인 물건입니다.”
“퇴거자 짐은 재단이 보관합니다. 계약서에 있어요. 찾아가시려면 본인이 오시면 되고.”
책상 위에는 마트 전단 뭉치가 쌓여 있었다. 뒷면마다 같은 문장. 다음 주에는 둘입니다. 백 장쯤. 정오가 한 장씩 손으로 쓴 것이었다. 볼펜 잉크가 뒷장까지 배어 있었다. 작업복 하나가 그 뭉치를 쓰레기봉투에 쓸어 넣었다. 한 장이 바닥에 떨어져 내 발 앞으로 미끄러져 왔다. 나는 그걸 밟지 않으려고 발을 뗐다.
구태식은 노트를 덮었다. 표지에 손글씨가 있었다. 청산 이주민 명부. 그 글씨를 나는 알았다. 정오의 글씨가 아니었다. 더 가늘고 반듯했다. 정오가 국숫집에서 보여 준 형의 청구서 사본과 같은 글씨였다. 정현.
“그 노트도 개인 물건입니다.”
“이건 좀 봐야겠네요. 회사 기밀이 들어 있을 수도 있어서. 정현 씨가 우리 직원이었잖아요.”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작업복 둘이 앞을 막았다. 나는 그 사이로 손을 뻗어 노트를 잡았다. 구태식이 노트를 놓지 않았다. 둘이 노트 하나를 양쪽에서 잡은 채로 섰다. 가까이서 보니 구태식의 오른손 손가락 마디에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공구를 오래 쥔 손이었다. 스패너를.
“한겸 씨. 놓으시죠. 여기 남의 집이에요.”
“정오 씨 집입니다.”
“어제까지는요.”
나는 놓지 않았다. 구태식이 노트를 홱 당겼다. 표지가 찢어졌다. 절반이 내 손에, 절반이 구태식 손에. 그 순간 작업복 하나가 내 옆구리를 쳤다. 숨이 멎었다. 나는 무릎을 꿇었다. 찢어진 반쪽을 가슴에 안았다. 두 번째 주먹이 등에 떨어졌다. 나무 바닥이 울렸다. 아래층에서 누가 천장을 두드렸다. 쿵쿵. 조용히 하라고.
구태식이 손을 들었다. 작업복이 멈췄다.
“그만. 아래층 할머니 깨시겠다.”
그는 자기 손에 남은 반쪽 노트를 상자에 넣었다. 그리고 쪼그려 앉아 내 얼굴을 봤다.
“한겸 씨. 그 반쪽 가지세요. 선물로. 대신 이 건물엔 다시 오지 마세요. 청산동 원룸 절반이 재단 건물이에요. 한겸 씨 수리점 건물도요. 월세가 왜 싼지 전무님이 말씀드렸죠.”
그들은 상자 셋을 들고 나갔다. 나무 계단이 울렸다. 셋이 내려가는 소리. 그 소리가 다 멀어질 때까지 나는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일어나서 먼저 112에 전화를 걸었다. 이십 분 뒤 순찰차가 왔고, 그 뒤로 사복 차림 형사 하나가 따라왔다. 하평경찰서 형사과 석 경위. 쉰 가까이 된 남자. 그는 방을 둘러보고, 재단 관리인이 두고 간 퇴거 신청서를 집어 들었다. 서명란에 정오. 날짜는 어제.
“본인 서명이네요.”
“본인이 쓴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필적 감정하려면 사건이 돼야 돼요. 성인이 이사 간 거는 사건이 아니고요.”
나는 편의점 카메라 사진을 보여 주었다. 검은 승용차. 석 경위는 사진을 확대했다가 도로 줄였다.
“번호판이 안 보이네요. 차가 사람 따라가는 게 죄는 아니고.”
“이 층 할머니가 어젯밤 업혀 나가는 걸 봤답니다.”
“술 취했다고 했다면서요.”
석 경위는 휴대폰 사진을 나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내 옆구리를 봤다. 셔츠가 찢어져 있었다.
“맞으셨어요? 그건 사건이 되네요. 쌍방인지 봐야겠지만. 한겸 씨가 남의 건물에 들어오셨으니까.”
석 경위는 수첩에 뭔가를 적고 나갔다. 나가면서 한마디 했다. 「실종 신고는 가족이 해야 돼요. 가족 있으면.」 정오의 가족은 작년 십일월에 서정동 원룸에서 죽었다.
일어나서 찢어진 반쪽을 폈다. 뒤쪽 절반이었다. 표가 있었다. 자를 대고 그린 반듯한 표.
청산 이주민 청취 기록. 2019년부터 2026년까지.
이름, 입주 연월, 첫 청취, 마지막 청취, 비고. 스물세 줄. 정현이 2019년에 첫 줄을 쓰고, 정오가 올해 마지막 두 줄을 이어 쓴 것 같았다. 글씨가 중간에 바뀌었다. 가는 글씨에서 굵은 글씨로. 작년 십일월에서.
비고 칸을 읽었다. 스물세 명 가운데 열여섯 줄에 전출. 날짜는 다 입주 삼 년 전이었다. 들리는 동안 떠난 사람들. 남은 일곱 줄 가운데 다섯에 청취 불가. 입주 삼 년 무렵. 그리고 둘에 사망. 둘 다 이름 옆에 방송 날짜와 동 이름과 숫자가 붙어 있었다. 2022년 3월 서정동 넷 중 하나. 2024년 7월 청산동 셋 중 하나. 방송 숫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맨 아래 두 줄.
한겸. 2026년 5월 입주. 청취 가능. 비고 없음. 정오. 2023년 11월 입주. 청취 가능, 원거리. 비고.
비고 칸에 정오의 굵은 글씨로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날짜는 지난주 금요일.
형 방 녹음기, 찾음. 십일월 이십일 일 밤. 들어 볼 것.
형 방 녹음기. 나는 방을 둘러봤다. 녹음기 열두 대는 상자에 담겨 나갔다. 형 방 녹음기라면 열세 번째일 것이다. 상자에 없던 것. 구태식이 노트를 넘기며 찾던 것.
휴대폰을 꺼내 정오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갔다.
방 안에서 진동 소리가 났다.
침대 밑이었다. 나는 바닥에 엎드려 침대 밑을 봤다. 먼지 사이에서 휴대폰 화면이 빛나고 있었다. 내 이름이 떠 있었다. 한겸 라디오. 그 옆에 손바닥만 한 녹음기 하나가 굴러 있었다. 다른 열두 대와 기종이 달랐다. 오래된 것.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가는 글씨로. 서정동 원룸, 내 방.
나는 휴대폰과 녹음기를 꺼내 들었다. 정오는 휴대폰 없이 이사를 가지 않는다. 택배 기사가 휴대폰 없이 하루를 버틸 수 없는 것처럼.
계단을 내려오는데 이 층 문이 열리고 할머니가 얼굴을 내밀었다. 천장을 두드린 사람이었다.
“총각, 그 삼 층 총각 친구지.”
“네.”
“어젯밤에 그 총각 업혀 나갔어. 남자 둘이 부축해서. 술 취했다고 하더라. 근데 그 총각 술 안 마셔. 내가 알아. 맨날 밤에 요구르트 사 와.”
할머니는 문을 닫으려다 말고, 손에 든 요구르트 한 병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정오가 지난주에 나눠 준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나는 여기 삼십 년 살아서 귀가 어두워. 무슨 말 했는지는 못 들었어. 근데 계단이 울리는 건 다 알아. 발소리가 셋이었어. 둘은 내려가고, 하나는 끌려갔어.”
수리점으로 돌아와 형 방 녹음기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켜지지 않았다. 배터리 칸을 열자 건전지 두 개가 하얗게 부풀어 있었다. 열 달 동안 침대 밑이 아니라 어딘가 습한 데 있었던 물건이었다. 전극에 녹이 슬어 있었다. 나는 부드러운 솔로 녹을 털고 새 건전지를 끼웠다. 빨간 불이 한 번 깜빡이다가 꺼졌다. 기판 어딘가가 죽어 있었다.
작업대 조명을 켰다. 확대경을 내렸다. 라디오 기술자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고치는 것. 정오가 어디로 업혀 갔는지는 모른다. 그가 들어 보라고 적어 둔 그날 밤이 이 작은 기계 안에 있다는 것만 안다. 인두가 달아오르는 동안 나는 녹음기 뒤판 나사를 하나씩 풀었다. 나사가 넷이었다. 하나에 스패너 자국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