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330자)

골목 배달

무지출 챌린지 단톡방 · 도결애

새벽 다섯 시⁠, 손수레 고무바퀴가 시멘트 이음매를 넘을 때마다 덜컥거렸다⁠. 수레에는 은색 보온 통 여섯과 김치 통 열둘이 실려 있었다⁠. 보온 통 뚜껑 틈으로 김이 새어 나와 새벽 공기에 금방 식었다⁠. 태언이 앞에서 끌고 내가 뒤에서 밀었다⁠. 손바닥에 닿는 손잡이가 얼음장이었다⁠.

“⁠밥은 식기 전에⁠, 김치는 시기 전에요⁠.⁠” 태언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골목 끝에서 시작해서 큰길까지 나가요⁠. 큰길 가까운 고시원일수록 밥이 식어서 받아요⁠. 그래서 다음 주에는 거꾸로 돌아요⁠.⁠”

“⁠공평하게요⁠?⁠”

“⁠공평하게요⁠.⁠”

첫 집은 해오름고시원이었다⁠. 뒷문 앞에서 태언이 초인종을 짧게 두 번 눌렀다⁠. 슬리퍼를 끄는 소리가 나더니 머리에 수건을 두른 총무가 문을 열었다⁠. 태언이 보온 통 하나와 김치 통 두 개를 안으로 들여놓았다⁠. 총무는 고맙다는 말 대신 조끼 주머니에서 접은 종이를 꺼내 태언의 손에 쥐여 주었다⁠. 태언은 펴 보지 않고 바람막이 안주머니에 넣었다⁠.

두 번째 집도 그랬다⁠. 세 번째 집 총무는 쪽지 없이 김치 통만 받았다⁠. 네 번째 청운고시원 총무는 일흔 가까운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김치 통을 받아 들고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았다⁠.

“⁠방장⁠, 김치 한 통 더 주면 내가 우리 애들한테 방장 칭찬해 줄게⁠.⁠”

“⁠지난주에도 칭찬해 주신다고 하셨어요⁠.⁠”

“⁠지난주 칭찬은 지난주에 다 썼어⁠.⁠” 할머니가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이 넓었다⁠. 태언이 웃으면서 수레에서 김치 통 하나를 더 내려 주었다⁠. 할머니는 김치 통 두 개를 겨드랑이에 끼고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이번 주는 하나야⁠. 착한 애야⁠. 밥 많이 줘⁠.⁠”

수레를 밀며 다음 집으로 가는데 트레이닝복 차림의 남자가 청운고시원 창문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머리가 새집처럼 눌려 있었다⁠.

“⁠오늘 계란말이 있어요⁠?⁠”

“⁠고시원 밥은 밥이랑 김치만이에요⁠.⁠” 태언이 대답했다⁠.

“⁠에이⁠, 영원하우스 사진엔 계란말이 있던데⁠.⁠” 남자가 창틀에 턱을 괴었다⁠. “⁠나도 거기 가고 싶은데 어떻게 가요⁠? 빚이 얼마나 있어야 돼요⁠? 저 천 좀 넘는데⁠.⁠”

태언은 대답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남자는 창문을 닫지 않고 우리 뒷모습을 오래 보았다⁠. 골목 안에서 영원하우스는 벌써 소문이었다⁠. 소문 안에서 영원하우스는 계란말이가 나오는 집이었다⁠. 나는 내 손으로 밀고 가는 김치 통을 내려다보았다⁠. 이 김치를 먹는 사람들이 다시 이 김치가 나오는 집을 부러워했다⁠.

*

여섯 번째 집이 은행나무고시원이었다⁠. 뒷문 앞 은행나무 가지에 새순이 연두색으로 돋아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창길이 하품을 하며 문을 열었다⁠. 나를 보고 하품을 반만 하다 말았다⁠.

“⁠어⁠, 하린 씨⁠.⁠”

“⁠밥 왔어요⁠.⁠”

나는 보온 통을 안고 공용 부엌에 들어갔다⁠. 석 달 동안 밥을 받아먹던 밥솥에 내 손으로 밥을 쏟았다⁠. 김이 얼굴로 확 올라왔다⁠. 밥솥 보온 표시등이 켜졌다⁠. 이 밥이 저녁 다섯 시가 되면 미지근하게 마를 것이었다⁠. 미지근한 밥을 먹을 사람의 얼굴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208호의 재수생⁠, 210호의 경찰 시험 준비생⁠, 그리고 209호⁠.

부엌 문간에서 창길이 태언에게 접은 종이를 내밀었다⁠. 태언이 받으려는 순간 내가 먼저 낚아챘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종이에는 볼펜 글씨 한 줄이 있었다⁠.

「⁠209 설예림 — 두 달⁠」

“⁠하린 씨⁠, 그거 줘⁠.⁠”

“⁠예림 언니예요⁠?⁠”

“⁠방세가 두 달 밀렸어⁠.⁠” 창길이 목소리를 낮췄다⁠. 낮춘 목소리가 또 개수대까지 갔다⁠. “⁠사장님이 이번 달 넘기면 내보내래⁠. 내보내면 언니 어디 가⁠? 찜질방⁠? 찜질방에서 밥 줘⁠? 저기 가면 밥 줘⁠. 동생도 있고⁠.⁠”

“⁠언니한테 물어봤어요⁠?⁠”

“⁠물어보면 안 간다고 하지⁠. 다들 그래⁠. 그러다 가 보면 다 좋아해⁠. 사진 봐⁠, 다 웃잖아⁠.⁠”

태언이 개수대에 등을 기댔다⁠. 텀블러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예림 씨 동생도 있잖아요⁠. 둘이 같이 살면 좋죠⁠. 예림 씨 노점에서 떡 남은 거 먹는 거 하린 님도 알잖아요⁠.⁠”

“⁠언니가 원하면요⁠. 원할 때요⁠.⁠”

“⁠원하게 될 때까지 기다리면 그사이에 굶어요⁠.⁠” 태언의 목소리는 끝까지 부드러웠다⁠. “⁠하린 님 석 달 굶어 봤잖아요⁠. 원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얼마나 긴지 알잖아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쪽지를 쥔 손에 땀이 뱄다⁠. 태언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쪽지를 주지 않고 내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하린 님⁠.⁠”

“⁠제가 갖고 있을게요⁠. 방장님 주머니에 들어가면 이사장님 책상으로 가잖아요⁠.⁠”

태언은 더 달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바람막이 안주머니에서 하얀 봉투 하나를 꺼내 창길에게 건넸다⁠. 창길이 봉투를 받아 손끝으로 두께를 가늠했다⁠. 그러고는 나를 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오만 원⁠. 적시에 들어오는 돈이야⁠. 이걸로 나 이번 달 인강 끊었어⁠.⁠” 창길이 봉투를 바지 뒷주머니에 넣었다⁠. “⁠나쁜 돈 아니야⁠. 사람 하나 밥 먹게 해 주고 받는 돈이야⁠.⁠”

“⁠예림 언니 이름은 제 주머니에 있어요⁠. 이번 봉투에는 언니 몫 없죠⁠?⁠”

창길의 얼굴이 굳었다⁠. 태언이 짧게 웃었다⁠. 처음 보는⁠, 웃음이 걷힌 웃음이었다⁠.

“⁠이번 봉투는 지난주 몫이에요⁠.⁠”

*

수레를 끌고 나오는데 고시원 앞 계단에서 예림 언니가 올라오고 있었다⁠. 노점에서 퇴근하는 길이었다⁠. 주황 앞치마를 팔에 걸고⁠, 고추장 얼룩이 묻은 운동화를 끌었다⁠. 예림 언니가 영원하우스 앞치마를 두른 나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잘 먹어⁠?⁠”

예림 언니가 먼저 물었다⁠. 라희 얘기였다⁠.

“⁠잘 먹어요⁠. 김 아껴 먹어요⁠. 하루에 한 장씩요⁠. 불 끄고 혀에 올려서요⁠.⁠”

“⁠아껴 먹는 건 나 닮았네⁠.⁠” 예림 언니가 웃었다⁠. 웃다가 눈가를 손등으로 문질렀다⁠. 손등에 고추장 냄새가 났다⁠. “⁠밥은⁠? 빨리 먹지⁠?⁠”

“⁠사 분이요⁠.⁠”

“⁠미치겠다⁠.⁠” 예림 언니가 또 웃었다⁠.

앞치마 주머니 속에서 쪽지가 손가락에 닿았다⁠. 「⁠209 설예림 — 두 달⁠」 지금 말하면 예림 언니는 창길의 멱살을 잡을 것이고⁠, 사장은 이번 주에 예림 언니를 내보낼 것이었다⁠. 말하지 않으면 다음 주 새벽 태언이 이 계단에 와서 예림 언니에게 웃으며 손을 내밀 것이었다⁠. 나는 쪽지를 주먹 안에 구겨 쥐었다⁠.

“⁠언니⁠, 밥 먹고 자요⁠. 노점 떡 말고요⁠.⁠”

“⁠너나 먹어⁠.⁠”

예림 언니가 계단을 올라갔다⁠. 나는 말하지 않았다⁠. 또 참았다⁠. 참는 일은 이번에도 너무 쉬웠고⁠, 쉬운 만큼 배가 차가워졌다⁠.

*

큰길에 닿자 수레가 가벼워졌다⁠. 보온 통 여섯이 다 비었고 김치 통도 둘만 남았다⁠. 컵밥 골목 입구에서 노점 주인들이 비닐을 걷고 있었다⁠. 태언이 수레를 세우고 텀블러를 꺼내 물을 마셨다⁠. 나는 앞치마 주머니의 쪽지를 손가락으로 만졌다⁠.

“⁠그 쪽지들은 어디로 가요⁠?⁠”

“⁠이사장님한테요⁠.⁠” 태언이 순순히 말했다⁠. “⁠이사장님이 보고⁠, 방세 대신 내 줄 사람을 골라요⁠. 빚이 무거운 사람부터요⁠.⁠”

“⁠방세 대신 내 주고⁠, 그다음엔요⁠?⁠”

“⁠빚도 사 와요⁠.⁠” 태언이 텀블러 뚜껑을 닫았다⁠. “⁠빚진 사람이 독촉 전화를 안 받게요⁠. 빚 주인이 이사장님으로 바뀌면 전화가 끊겨요⁠. 이자도 없어지고요⁠. 그다음엔 여기서 밥 먹으면서 갚으면 돼요⁠.⁠”

“⁠빚을 어떻게 사요⁠?⁠”

“⁠저도 몰라요⁠. 그건 이사장님 일이에요⁠.⁠” 태언이 웃으며 수레 손잡이를 다시 잡았다⁠. “⁠저는 밥 일이에요⁠.⁠”

빚을 산다는 말이 골목 바람보다 차가웠다⁠. 나는 수레를 밀면서 내 빚을 떠올렸다⁠. 카드사에서 푸른대부로 넘어간 이천백사십만 원⁠. 넘어간 뒤로 독촉 전화가 끊긴 지 한 달쯤 되었다는 것이 그제야 떠올랐다⁠. 연체 없이 꼬박꼬박 보내서 끊긴 줄로만 알았다⁠.

*

마지막 집까지 돌고 영원하우스에 돌아오니 아홉 시였다⁠. 식당에서 짠물이 공용 태블릿을 들고 소리를 질렀다⁠.

“⁠고등어반토막 터졌다⁠!⁠”

라희가 지난주에 올린 짧은 영상이었다⁠. 함지에 쌀을 쏟는 장면⁠, 취반기 서랍을 여는 장면⁠, 밥 두 공기를 들고 웃는 장면이 십오 초 안에 지나갔다⁠. 자막은 「⁠빚 이천삼백 청년의 하루 세 끼⁠」 조회수가 삼십만을 넘어 있었다⁠.

「⁠무지출 끝판왕들의 집이네⁠」

「⁠저기 어떻게 들어가요⁠?⁠」

「⁠빚 많으면 된다던데⁠」

「⁠나 빚 많은데⁠」

「⁠나도⁠」

「⁠밥 두 공기 부럽다⁠. 나는 오늘 삼각김밥 반 개⁠」

「⁠반 개 남은 거 나 줘⁠」

라희가 댓글을 소리 내어 읽다가 깔깔 웃었다⁠. “⁠반 개 남은 거 나 줘래⁠. 웃겨⁠.⁠” 웃음 끝에 라희는 같은 댓글을 한 번 더 읽었고⁠, 두 번째에는 웃지 않았다⁠.

댓글이 끝없이 내려갔다⁠. 라희는 태블릿을 받아 들고 제 얼굴을 몇 번이고 되돌려 보았다⁠. 이백원이 옆에서 조회수를 이백 원짜리로 바꾸다가 숫자가 너무 커서 포기했다⁠.

“⁠단톡방도 난리래⁠.⁠” 짠물이 말했다⁠. “⁠방장님이 그러는데 오늘 아침에 육백 명 넘었대⁠. 일주일 전엔 이백 명이었는데⁠.⁠”

나는 태블릿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나 빚 많은데⁠」 「⁠나도⁠」 「⁠나도⁠」 같은 말이 아래로⁠, 아래로 번졌다⁠. 화면이 한 칸 내려갈 때마다 골목 끝의 이 집이 조금씩 넓어졌다⁠.

*

낮 열두 시⁠, 영원하우스 현관 앞에 흰 차가 멈췄다⁠. 운전석에서 내린 여자가 귤 상자를 안고 들어왔다⁠. 은빛 단발이 턱선에서 반듯하게 잘려 있었고⁠, 베이지색 트렌치코트 끝이 무릎을 스쳤다⁠. 식구들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라희도⁠, 짠물도⁠, 곰국도 일어났다⁠.

“⁠앉아⁠, 앉아⁠. 밥 먹는데 일어나긴⁠.⁠”

여자는 귤 상자를 식탁에 내려놓고 하나씩 집어 식구들에게 던져 주었다⁠. 귤이 식탁 위로 통통 튀었다⁠. 곰국이 두 개를 받았고⁠, 라희가 하나를 받았다⁠. 태언이 여자 손에서 트렌치코트를 받아 들었다⁠.

“⁠이사장님⁠, 오늘 오신다고 안 하셨잖아요⁠.⁠”

“⁠방송국에서 전화 왔어⁠. 고등어 영상 보고⁠.⁠” 여자가 라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고등어 스타 됐다⁠.⁠”

채묘정이었다⁠. 채묘정은 식당 뒤편 이사장실 문을 열쇠로 열었다⁠. 문이 열린 사이로 책상과 철제 서류함과 모니터 두 대가 보였다⁠. 채묘정은 문을 열어 둔 채 의자에 앉아 귤을 깠다⁠. 손톱 밑이 귤껍질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무언가를 늘 까먹는 손이었다⁠.

내가 식당을 지나 계단으로 가는데 채묘정이 나를 불렀다⁠.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네가 참을인이구나⁠.⁠”

나는 이사장실 문간에서 걸음을 멈췄다⁠. 채묘정이 귤 한 조각을 떼어 내밀었다⁠.

“⁠이천백사십⁠.⁠”

내가 털어놓은 숫자였다⁠. 고해방에⁠, 한 번⁠.

“⁠먹어⁠. 공짜야⁠.⁠”

귤 조각이 채묘정의 손가락 끝에서 나를 향해 기울어 있었다⁠. 배가 울었다⁠. 나는 귤을 받지 않았다⁠. 채묘정은 웃으며 귤 조각을 제 입에 넣고 오래 씹었다⁠.

“⁠노동법 공부한다며⁠. 태언이가 그러더라⁠. 책이 두껍다고⁠.⁠” 채묘정이 귤껍질을 책상 위에 꽃잎처럼 펼쳐 놓았다⁠. “⁠우리 조합에 공부한 애가 하나 있으면 좋지⁠. 서류가 많거든⁠. 다음에 얘기하자⁠.⁠”

“⁠제 계약서도 그 서류에 있어요⁠?⁠”

“⁠있지⁠.⁠” 채묘정이 서류함을 턱으로 가리켰다⁠. “⁠너는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어⁠.⁠”

채묘정은 다음 귤을 집었다⁠. 이사장실 문은 열린 채였고⁠, 나는 문간에서 한 발짝도 더 들어가지 못했다⁠. 귤 껍질 냄새가 차가운 식당까지 퍼졌다⁠.

5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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