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309자)

쌀 씻는 방

무지출 챌린지 단톡방 · 도결애

새벽 네 시 반⁠, 지하 부엌의 찬물은 손목까지 잘랐다⁠. 커다란 스테인리스 함지에 쌀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함지 셋이 개수대 앞에 나란히 놓였다⁠. 벽을 따라 가스 취반기 세 대가 놓여 있었다⁠. 내 키만 한 철 상자에 서랍 같은 솥이 층층이 들어 있었고⁠, 아래에서 파란 불꽃이 낮게 울었다⁠. 밥 짓는 냄새와 가스 냄새와 찬물 냄새가 한 공기 안에서 섞였다⁠.

“⁠참을인 언니⁠?⁠”

함지 너머에서 단발머리가 고개를 들었다⁠. 앞치마 끈을 허리에 두 번 감은 라희였다⁠. 볼이 사진보다 더 통통했다⁠.

“⁠우리 고시원 207호 언니⁠! 왜 여기 있어⁠?⁠”

“⁠일등 했어⁠.⁠”

“⁠대박⁠.⁠” 라희가 젖은 손으로 손뼉을 쳤다⁠. 물방울이 내 얼굴에 튀었다⁠. “⁠언니도 빚 있었어⁠? 하나도 없어 보였는데⁠. 맨날 노동법 책 들고 다녀서 부자인 줄 알았어⁠.⁠”

“⁠책은 공짜로 물려받은 거야⁠.⁠”

나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조미김 봉지를 꺼냈다⁠. 라희가 봉지를 받아 들고 한참 쳐다보았다⁠. 노점 상표가 찍힌 봉지였다⁠. 라희는 봉지를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고추장 냄새가 배어 있었다⁠.

“⁠언니가 보냈지⁠.⁠”

“⁠밥 천천히 먹으래⁠.⁠”

“⁠언니는 맨날 그 소리⁠.⁠” 라희가 김 봉지를 앞치마 안주머니에 넣고 단추를 채웠다⁠. “⁠빨리 먹어도 여기는 밥이 안 없어지는데⁠.⁠”

*

식구들은 서로를 닉네임으로 불렀다⁠. 본명을 묻는 사람은 없었다⁠. 이백원은 안경알이 두꺼운 스물여섯 남자였고⁠, 짠물은 말이 빠른 스물셋 여자였다⁠. 쌀을 씻는 동안 이백원은 쉬지 않고 숫자를 바꿨다⁠.

“⁠이 바가지 하나가 이백 원짜리 스무 개야⁠. 함지 하나에 바가지 서른⁠. 그럼 이 함지가 이백 원짜리 육백 개⁠.⁠”

“⁠오빠는 왜 다 이백 원으로 바꿔⁠?⁠” 짠물이 물었다⁠.

“⁠이자 내고 통장에 남는 게 이백 원이었으니까⁠. 그게 내 화폐 단위야⁠.⁠” 이백원이 쌀을 휘저었다⁠. “⁠우리 엄마는 나 키우는 데 이백 원짜리 몇 개 썼을까⁠.⁠”

“⁠그건 세지 마⁠. 밥맛 떨어져⁠.⁠” 짠물이 이백원의 등을 철썩 쳤다⁠. “⁠참을인 언니⁠, 이 오빠 말 다 들으면 머리 아파⁠. 그냥 손만 움직여⁠.⁠”

나는 손만 움직였다⁠. 쌀을 움켜쥐었다 놓을 때마다 찬물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처음 몇 분은 손끝이 아렸고⁠, 그다음에는 감각이 사라졌다⁠. 감각이 사라진 뒤에도 손은 움직였다⁠. 참는 손은 어디서나 잘 움직였다⁠.

다섯 시가 되자 함지마다 쌀이 하얗게 불었다⁠. 열네 달째 산다는 곰국이 쌀을 솥 서랍에 나눠 담았다⁠. 곰국은 덩치가 크고 말이 느렸다⁠. 일주일 동안 곰국 국물 하나로 버틴 날 닉네임을 지었다고 했다⁠. 서랍이 하나씩 밀려 들어갈 때마다 철 상자가 덜컹 울었다⁠.

태언은 계단 위에서 김치 통 뚜껑에 상표를 붙였다⁠. 「⁠한솥살림 · 영원하우스 손김치⁠」 한 통에 한 장⁠, 반듯하게⁠. 상표를 붙이는 손이 빨랐다⁠.

*

일곱 시⁠, 1층 식당 식탁에 아침이 차려졌다⁠. 밥⁠, 시래기국⁠, 계란말이⁠, 멸치볶음⁠, 김치⁠. 식판이 따뜻했다⁠. 나는 숟가락을 들고 잠깐 망설였다⁠. 첫 숟가락을 입에 넣자 배가 놀랐다⁠. 놀란 배가 꾸르륵거리며 다음 숟가락을 재촉했다⁠.

고백하자면⁠, 나는 두 공기를 먹었다⁠. 두 번째 공기를 받으러 일어서는 다리가 부끄러웠는데⁠, 밥을 푸는 주걱 앞에서는 부끄러움이 금방 식었다⁠. 시래기국에 밥을 말아 먹으면서 석 달 동안 공용 부엌에서 먹은 밥을 떠올렸다⁠. 보온 표시등 아래 미지근하게 말라 가던 밥⁠. 같은 솥에서 나온 밥이 여기서는 김이 났다⁠.

라희는 맞은편에서 밥을 먹었다⁠. 숟가락이 쉬지 않았다⁠. 국을 들이켜고⁠, 계란말이를 두 조각씩 집고⁠, 밥을 크게 떠 넣었다⁠. 사 분 만에 식판이 비었다⁠. 라희가 딸꾹질을 했다⁠.

“⁠천천히⁠.⁠”

“⁠언니 목소리로 말하지 마⁠.⁠” 라희가 딸꾹질 사이로 웃었다⁠. “⁠여기 사람들 다 빨리 먹어⁠. 밖에서 버릇 들어서⁠.⁠”

정말로 식탁 전체가 빨랐다⁠. 스무 명 넘는 식구가 숟가락 소리만 내며 먹었고⁠, 식판이 비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났다⁠. 가장 늦게 먹는 사람은 태언이었다⁠. 태언은 밥을 반 공기만 받았고⁠, 반 공기에서도 또 덜어 짠물의 식판에 얹었다⁠.

“⁠방장님 또 안 드세요⁠?⁠”

“⁠아침은 원래 조금 먹어요⁠.⁠”

태언의 배에서 작게 소리가 났다⁠. 태언은 못 들은 척 국을 마셨다⁠.

*

식판을 반납하고 나오는 길에 졸업함 앞을 지났다⁠. 철문 스물네 개가 형광등 아래 회색으로 번들거렸다⁠. 짠물이 행주로 졸업함 손잡이를 닦고 있었다⁠.

“⁠여기 진짜 꺼내 간 사람 있어⁠?⁠”

“⁠한 명⁠.⁠” 짠물이 손잡이 하나를 반짝반짝 닦았다⁠. “⁠사흘 만에 꺼내 갔어⁠. 여기 밥이 짜대⁠. 지금 밖에서 라면 먹고 산대⁠. 라면은 안 짜나 봐⁠.⁠”

짠물이 깔깔 웃었다⁠. 웃음이 멎자 짠물은 자기 번호가 찍힌 문을 손끝으로 한 번 두드렸다⁠. 열일곱 번째 문이었다⁠.

“⁠나는 안 꺼내⁠. 꺼내면 엄마 전화 와⁠. 병원비 얘기 해⁠. 여기 있으면 엄마는 내가 서울에서 취직한 줄 알아⁠.⁠”

짠물은 행주를 접어 앞치마 주머니에 넣고 부엌으로 내려갔다⁠. 문 스물네 개 가운데 스물셋이 잠겨 있었고⁠, 맨 아래 오른쪽 내 문도 잠겨 있었다⁠.

*

오후는 자유였다⁠. 2층 끝 방이 공부방이었다⁠. 기증받은 문제집이 책장에 꽂혀 있었고⁠, 낡은 태블릿 두 대에 무료 인강이 깔려 있었다⁠. 이백원은 전기기사 문제집을 폈고⁠, 짠물은 토익 단어장을 폈다⁠. 태언이 책상마다 보리차를 한 컵씩 놓아 주었다⁠.

“⁠밥 먹고⁠, 일하고⁠, 공부해요⁠. 그러다 졸업하고요⁠.⁠” 태언이 내 책상 위 노동법 기본서를 보았다⁠. “⁠하린 님 책 두꺼워서 좋네요⁠. 여기 오래 있어도 되겠어요⁠.⁠”

태언은 공부방 창가에 앉아 보리차를 마셨다⁠. 창밖으로 막다른 골목의 벽이 보였다⁠. 벽 너머로 학원 건물 옥상의 물탱크가 머리를 내밀었다⁠.

“⁠저 처음 왔을 때 겨울이었어요⁠.⁠” 태언이 나를 보지 않고 말했다⁠. “⁠이사장님이 제 손을 잡더니 손이 차다고 했어요⁠. 그러고는 바로 방을 줬어요⁠. 저는 고시원에서 쫓겨나기 이틀 전이었고요⁠. 누가 제 손이 찬 걸 알아본 게 처음이었어요⁠.⁠”

“⁠그래서 지금 방장님이 다른 사람 손을 잡아요⁠?⁠”

“⁠네⁠.⁠” 태언이 웃었다⁠. “⁠하린 님 손도 차요⁠. 쌀 씻고 나서 계속 소매 안에 넣고 있잖아요⁠.⁠”

나는 후드티 소매에서 손을 빼지 않았다⁠. 태언은 보리차 컵을 내 앞으로 밀어 주지 않고 내 책상 모서리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컵이 따뜻했다⁠. 따뜻한 것을 받는 일이 이 집에서는 너무 쉬웠다⁠.

3층 복도 끝 곰국의 방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벽에 종이가 일렬로 붙어 있었다⁠. 열네 장이었다⁠. 맨 왼쪽 종이에 「⁠남은 빚 18⁠,000⁠,000원⁠」⁠, 맨 오른쪽 종이에 「⁠남은 빚 6⁠,000⁠,000원⁠」이 찍혀 있었다⁠. 종이 맨 위에는 「⁠상환 확인서 · 한솥살림 사회적협동조합⁠」이 있었다⁠. 종이마다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곰국은 침대에 누워 종이들을 보고 있었다⁠. 내가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알고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잘 때 보면 잘 와⁠. 숫자가 내려가는 거 보면서 자⁠.⁠”

*

저녁 식탁에서 나는 곰국 옆에 앉았다⁠. 고등어조림이 나왔다⁠. 짠물이 고등어를 보고 라희를 놀렸다⁠. 라희는 고등어 반 마리를 접시에 올려 들고 “⁠이건 내 거⁠, 반토막은 영원히 내 거⁠”라고 외쳤다⁠. 식탁이 웃었다⁠.

웃음이 가라앉을 때 나는 곰국에게 물었다⁠.

“⁠열네 달에 천이백이 줄었네요⁠.⁠”

“⁠응⁠. 대단하지⁠.⁠”

“⁠한 달에 팔십 넘게요⁠. 부엌 일이 한 달에 얼마로 쳐지는 거예요⁠? 하루 몇 시간 일하고요⁠?⁠”

곰국이 젓가락을 멈췄다⁠. 대답하려고 입을 여는데 태언이 식탁 끝에서 먼저 말했다⁠.

“⁠하린 님⁠.⁠”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식탁의 숟가락 소리가 줄었다⁠.

“⁠밖의 숫자 얘기는 밖에서 해요⁠. 여기서는 확인서 숫자만 봐요⁠. 다들 그 숫자로 버텨요⁠.⁠”

“⁠확인서 숫자가 나오는 계산을 물어봤어요⁠.⁠”

“⁠이사장님이 계산해서 주세요⁠.⁠”

“⁠계약서도 이사장님이 갖고 있어요⁠?⁠”

“⁠계약서는 이사장님 방에 있어요⁠. 한 달 적응 끝나면 채묘정 이사장님이 직접 보여 주세요⁠.⁠”

“⁠제 계약서를 왜 한 달 뒤에 봐요⁠?⁠”

태언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웃음이 걷히지 않은 얼굴로⁠, 식탁 전체에 들리게 말했다⁠.

“⁠하린 님은 아직 아무것도 서명 안 했어요⁠. 여기는 서명 전에 밥부터 먹는 집이에요⁠. 밥 먹고 마음에 안 들면 졸업함에서 휴대전화 꺼내 가면 돼요⁠. 아무도 안 붙잡아요⁠.⁠”

식탁 여기저기서 고개가 끄덕였다⁠. 짠물이 내 팔꿈치를 슬쩍 쳤다⁠.

“⁠참을인 언니⁠, 밥 먹을 때 숫자 얘기하면 체해⁠. 이백원 오빠 봐⁠, 맨날 숫자 얘기해서 맨날 체해⁠.⁠”

“⁠나 안 체해⁠.⁠” 이백원이 말하고 바로 트림을 했다⁠.

식탁이 다시 웃었다⁠. 나만 웃지 않았다⁠. 곰국은 고등어 가시를 발라 접시 가장자리에 가지런히 놓았고⁠, 다시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부엌 라디오에서 저녁 뉴스가 흘렀다⁠. 「⁠정부⁠, 청년 채무조정 기준 완화 검토⁠」 이어서 「⁠국제 쌀값 오름세에 국내 쌀값도 들썩⁠」 쌀값 소리에 곰국이 라디오를 껐다⁠. 우리가 씻는 쌀이 비싸지는 이야기는 밥맛에 나빴다⁠.

*

밤 열 시⁠, 2층 방은 라희와 함께 썼다⁠. 침대 둘 사이가 팔 하나였다⁠. 바닥이 차서 라희는 양말을 두 켤레 신고 잤다⁠. 라희가 앞치마 안주머니에서 김 봉지를 꺼내 한 장을 뽑았다⁠. 불 꺼진 방에서 김을 혀에 올려놓고 녹여 먹었다⁠. 바삭하는 소리도 나지 않게⁠.

“⁠언니한테 말하지 마⁠.⁠”

“⁠뭘⁠?⁠”

“⁠나 여기서 나갈 생각 없는 거⁠.⁠” 라희가 천장을 보았다⁠. “⁠밖에서는 저녁만 먹었어⁠. 밤에 배 아파서 깨면 물 마셨어⁠. 물 마시면 배가 좀 덜 아파⁠. 근데 아침에 또 아파⁠. 여기서는 배가 안 아파⁠. 한 번도 안 아팠어⁠.⁠”

라희가 김을 한 장 더 꺼내다가 봉지에 도로 넣었다⁠. 아끼는 손이었다⁠.

“⁠언니 숫자 물어볼 때⁠, 나 좀 무서웠어⁠.⁠”

“⁠왜⁠?⁠”

“⁠숫자가 틀렸을까 봐⁠.⁠” 라희가 벽을 보고 돌아누웠다⁠. “⁠틀렸다고 해도 나는 여기 있을 거야⁠. 그러니까 나한테는 말하지 마⁠.⁠”

라희는 금방 잠들었다⁠. 배부른 사람의 숨소리였다⁠. 나는 잠이 오지 않아 물을 마시러 지하로 내려갔다⁠.

밤의 부엌은 취반기 불이 꺼져 조용했다⁠. 개수대 위 벽에 커다란 화이트보드 두 장이 붙어 있었다⁠. 왼쪽 판은 배달표였다⁠. 골목 고시원 이름이 위에서 아래로 줄지어 있었다⁠. 해오름⁠, 청운⁠, 대성⁠, 노량⁠. 한 줄 한 줄 짚어 내려가다 손가락이 멈췄다⁠. 스물여덟 곳 가운데 여섯 번째 줄에 「⁠은행나무⁠」가 있었다⁠. 옆에 「⁠밥 30 · 김치 2⁠」가 적혀 있었다⁠.

오른쪽 판은 근무표였다⁠. 시간마다 닉네임이 태언의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05⁠:00 쌀 — 곰국 · 라희 · 이백원⁠」⁠, 「⁠06⁠:00 김치 — 짠물⁠」 내일 칸에 내 닉네임이 새로 들어가 있었다⁠. 「⁠05⁠:00 배달 — 방장 · 참을인⁠」

나는 근무표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석 달 동안 아침마다 먹은 밥이 이 부엌에서⁠, 이 사람들의 찬 손에서 나왔다⁠. 내일 새벽에는 내가 지은 밥을 내 손으로 들고 은행나무고시원 뒷문을 두드리게 되어 있었다⁠. 배 속에서 저녁 고등어가 천천히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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