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371자)

밥솥이 비었다

무지출 챌린지 단톡방 · 도결애

일요일 새벽 다섯 시⁠, 골목에 바퀴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나는 공용 부엌 불을 끄고 밥솥 옆에 앉아 기다렸다⁠. 영원하우스에 들어가기 전 화요일 새벽처럼⁠. 다섯 시 십이 분이 지나고⁠, 다섯 시 반이 지났다⁠. 고무바퀴가 시멘트 이음매를 넘는 덜컥 소리는 끝내 오지 않았다⁠.

밥솥의 보온 표시등이 빨갛게 켜져 있었다⁠. 어젯밤 창길이 습관처럼 켜 둔 것이었다⁠. 뚜껑을 열었다⁠. 솥 바닥이 말라 하얗게 빛났다⁠. 빈 솥이 따뜻했다⁠. 따뜻하게 비어 있었다⁠.

일곱 시가 되자 세입자들이 내려왔다⁠. 208호 재수생이 밥그릇을 들고 와서 밥솥을 열었다가 닫았다⁠. 다시 열었다⁠. 210호 경찰 시험 준비생이 냉장고를 열었다⁠. 김치 통 둘이 바닥만 남아 있었다⁠.

“⁠총무님⁠, 밥 없어요⁠?⁠”

창길이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부엌에 들어왔다⁠. 사장과 통화 중이었다⁠. 네⁠, 네⁠, 하던 창길의 얼굴이 굳었다⁠. 전화를 끊고 창길이 부엌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나를 마지막에 보았다⁠.

“⁠영원하우스가 골목 공급 끊었대⁠. 오늘부터⁠. 다른 고시원도 다⁠.⁠”

“⁠왜요⁠?⁠”

창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창길의 눈이 나를 향해 있었고⁠, 세입자들의 눈이 창길의 눈을 따라왔다⁠.

*

여덟 시⁠, 골목 편의점 앞에 줄이 생겼다⁠. 즉석밥 진열대가 비었다⁠. 컵라면 진열대도 반쯤 비었다⁠. 직원이 창고에서 상자를 들고 나오며 소리쳤다⁠. 즉석밥은 오후에 들어온다고⁠. 줄에서 한숨이 한꺼번에 나왔다⁠.

은행나무고시원 부엌에서는 창길이 남은 김치를 배급했다⁠. 김치 통 바닥을 숟가락으로 긁어 한 사람 앞에 한 조각씩 놓았다⁠.

“⁠적시 배급이야⁠. 한 사람 한 조각⁠. 두 조각 집으면 내가 봐⁠.⁠”

“⁠총무님⁠, 밥이 없는데 김치는 왜 줘요⁠?⁠” 재수생이 물었다⁠.

“⁠김치는 있으니까⁠. 있는 걸 있을 때 먹는 게 적시야⁠.⁠” 창길이 진지하게 말했다⁠. 재수생이 김치 한 조각을 맨입에 넣고 얼굴을 찡그렸다⁠. 짰다⁠. 부엌에 웃음이 잠깐 돌았다가 금방 식었다⁠.

경찰 시험 준비생이 나를 보았다⁠. 우리는 석 달 동안 이 부엌에서 밥을 같이 먹었다⁠. 인사를 한 적은 없었다⁠.

“⁠너 때문이라며⁠.⁠”

“⁠네⁠?⁠”

“⁠사장님이 그랬다던데⁠. 영원하우스 갔다 나온 애가 이상한 소문 내서 끊겼다고⁠.⁠” 경찰 시험 준비생이 김치 조각을 젓가락으로 찔렀다⁠. “⁠나 아침 공짜 밥 때문에 이 고시원 왔어⁠. 방세 이만 원 더 내고⁠. 너 때문에 내 아침 없어졌어⁠.⁠”

“⁠방세에 얹은 이만 원이 밥값이에요⁠. 공짜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이제 이만 원 내고 밥도 없어⁠.⁠”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의자가 바닥을 긁었다⁠. “⁠고마워⁠, 진짜⁠.⁠”

부엌 문간에 은행나무고시원 사장이 서 있었다⁠. 예순을 넘긴 여자였다⁠. 사장이 나를 손가락으로 불렀다⁠.

“⁠207호⁠. 방 빼⁠. 다음 주 말고 내일⁠.⁠”

“⁠다음 주까지라고 들었어요⁠.⁠”

“⁠한솥 이사장이 다음 주라고 했지⁠. 나는 내일이라고 해⁠.⁠” 사장이 팔짱을 꼈다⁠. “⁠너 하나 때문에 내 세입자 서른 명이 밥을 굶어⁠. 서른 명이 나가면 나도 굶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은 많았다⁠. 반찬 값 영수증 열두 장이 내 방 침대 밑 신발 상자에 있었다⁠. 나는 참았다⁠. 지금 영수증을 꺼내면 사장은 상자째 가져갈 것이었다⁠. 참는 데는 선수였고⁠, 이번에는 참는 것이 맞았다⁠. 참아서 맞는 일도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서러웠다⁠.

*

열 시⁠, 부엌 텔레비전에서 지역 뉴스가 나왔다⁠. 「⁠노량진 고시촌 ‘⁠공짜 밥⁠’ 하루아침에 끊겨 … 청년 공동체 공급 중단⁠」 화면에 막다른 골목의 영원하우스 간판이 나왔다⁠. 기자는 조합이 내부 사정으로 공급을 잠시 쉰다고 전했다⁠. 내부 사정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단톡방에 사흘 만에 방장 글이 올라왔다⁠.

「⁠절약왕⁠: 영원하우스는 문 닫지 않습니다⁠. 골목 공급은 잠시 쉽니다⁠. 식구들은 모두 잘 지냅니다⁠.⁠」

방장 글 아래로 글이 쏟아졌다⁠. 참여자는 오천칠백이었다⁠.

「⁠반지하왕형⁠: 공급 왜 끊겼어요⁠? 참을인 때문이라는데 진짜예요⁠?⁠」

「⁠거지왕자⁠: 참을인 님 뭐 하셨음⁠?⁠」

「⁠통장잔고요정⁠: 참을인 님 배신자 소리 나오던데 무슨 일인지 말해 주세요⁠」

「⁠컵밥언니⁠: 하린이 욕하지 마⁠」

예림 언니의 글이었다⁠. 병원에서 쓴 글이었다⁠. 한 줄이었고⁠, 이모티콘이 없었다⁠. 나는 입력 칸에 글을 쓰다가 지웠다⁠. 다시 쓰다가 지웠다⁠. 세 번째에 한 줄만 남겨 보냈다⁠.

「⁠참을인⁠: 다 말할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일 분 뒤 전화가 왔다⁠. 예림 언니였다⁠.

“⁠라희 방귀 나왔어⁠.⁠” 예림 언니가 다짜고짜 말했다⁠. “⁠아까 열한 시 십 분에⁠. 간호사가 박수 쳐 줬어⁠. 병실 사람들도 쳤어⁠. 걔 얼굴 빨개져서 이불 뒤집어썼어⁠.⁠”

“⁠물 마셨어요⁠?⁠”

“⁠반 컵⁠. 천천히⁠.⁠” 예림 언니가 숨을 길게 쉬었다⁠. “⁠천천히 마시더라⁠. 처음으로 누가 안 시켰는데 천천히⁠.⁠”

“⁠다행이에요⁠.⁠”

“⁠단톡방 봤어⁠.⁠” 예림 언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나 아직 너 용서 안 했어⁠. 근데 너 욕하는 건 나만 해⁠. 남들은 안 돼⁠.⁠”

전화가 끊겼다⁠. 나는 휴대전화를 귀에서 떼고 한참 화면을 보았다⁠. 통화 시간은 일 분 사십 초였다⁠. 영원하우스에서 라희가 예림 언니에게 걸던 삼 분보다 짧았다⁠. 짧은데 꽉 차 있었다⁠.

*

오후 두 시⁠, 나는 막다른 골목 끝 영원하우스 앞까지 갔다⁠. 지하 창살 사이로 김이 올라오지 않았다⁠. 부엌이 쉬고 있었다⁠. 2층 창문에서 짠물이 얼굴을 내밀었다가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흔들다가 누군가에게 불려 들어갔다⁠.

현관문이 열리고 곰국이 나왔다⁠. 큰 몸이 문을 다 막았다⁠.

“⁠가⁠.⁠”

“⁠곰국 오빠⁠, 확인서 숫자가⁠—⁠”

“⁠알아⁠.⁠” 곰국이 내 말을 끊었다⁠. “⁠방장님이 말했어⁠. 잔액 그대로라고⁠. 회계상 숫자라고⁠. 졸업할 때 한 번에 정리한다고⁠.⁠”

“⁠그 말 믿어요⁠?⁠”

“⁠믿을 게 그거밖에 없어⁠.⁠” 곰국이 가슴 주머니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열다섯 번째 확인서가 든 주머니였다⁠. “⁠너 때문에 우리 밥이 골목에 안 나가⁠. 밥이 안 나가면 우리 일이 없어⁠. 일이 없으면 봉사 공제가 없어⁠. 봉사 공제가 없으면 확인서 숫자가 안 내려가⁠. 이번 주 확인서 숫자가 멈췄어⁠. 열다섯 달 만에 처음으로⁠.⁠”

곰국의 목소리는 느렸다⁠. 느려서 한 마디 한 마디가 무거웠다⁠.

“⁠오빠가 열다섯 달 일한 돈이요⁠. 오빠 빚보다 많을 수 있어요⁠.⁠”

“⁠그 돈 누가 주는데⁠? 네가 줘⁠?⁠” 곰국이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예림 언니와 같은 말이었다⁠. “⁠나 열다섯 달 동안 밥 먹었어⁠. 너는 열이레 먹고 나갔어⁠. 열이레 먹은 애가 열다섯 달 먹은 사람한테 숫자 얘기하지 마⁠.⁠”

현관문이 닫혔다⁠. 문 너머에서 곰국이 졸업함 앞을 지나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막다른 벽 앞에 남았다⁠. 벽에 붙은 「⁠영원하우스⁠」 간판의 페인트 밑으로 「⁠고시원⁠」 세 글자가 비쳤다⁠.

*

밤 아홉 시⁠, 노량진역 육교 위로 강바람이 올라왔다⁠. 5월인데 바람 끝이 아직 4월이었다⁠. 태언은 정수기 앞에서 텀블러에 물을 받지 않았다⁠. 텀블러를 들고 오지 않았다⁠. 빈손을 바람막이 주머니에 넣고 계단을 올라왔다⁠.

“⁠나오셨네요⁠.⁠”

“⁠하린 님이 불렀잖아요⁠.⁠” 태언이 난간에 팔을 올렸다⁠. 처음 만난 밤과 같은 자리였다⁠. “⁠하린 님한테 할 말이 있었어요⁠. 라희 씨 일이요⁠. 저도 그날 밤 매실 줬어요⁠. 체한 거라고 했어요⁠.⁠”

“⁠저는 알면서 기다렸어요⁠.⁠”

“⁠알아요⁠.⁠” 태언이 나를 보지 않았다⁠. “⁠둘 다 참았어요⁠.⁠”

육교 아래로 전철이 지나갔다⁠. 발밑 철판이 떨렸다⁠. 다 떨고 나서 내가 말했다⁠.

“⁠근무표 사진 주세요⁠.⁠”

태언의 어깨가 굳었다⁠.

“⁠부엌 벽 근무표⁠, 매주 일요일에 지우잖아요⁠. 지우기 전에 방장님이 사진 찍어 두는 거 봤어요⁠. 관리인 휴대전화로⁠. 삼 년 치 있죠⁠?⁠”

“⁠있어요⁠.⁠”

“⁠그거면 돼요⁠. 누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일했는지⁠. 고시원 영수증이랑 같이 내면⁠, 봉사가 아니라 일이라는 게 돼요⁠. 일이면 월급이에요⁠. 월급은 빚이랑 못 바꿔요⁠.⁠”

“⁠그거 내주면 다들 밖으로 나와요⁠.⁠” 태언이 천천히 말했다⁠. “⁠1호점 스물네 명⁠, 2호점 서른두 명⁠. 다들 하루 한 끼로 돌아가요⁠. 월급은 언제 나와요⁠? 일 년 뒤⁠? 이 년 뒤⁠? 그사이에 누가 밥 줘요⁠?⁠”

“⁠모두 같은 말을 해요⁠. 누가 밥 줘요⁠.⁠”

“⁠맞는 말이니까요⁠.⁠”

“⁠방장님 숫자 보셨어요⁠?⁠”

태언이 나를 돌아보았다⁠.

“⁠이사장실 표 맨 아래에 관리인 칸이 따로 있어요⁠. 비밀번호가 걸려 있어요⁠. 방장님 숫자가 거기 있어요⁠.⁠” 나는 태언의 바람막이 가슴께를 보았다⁠. 지갑이 있는 자리였다⁠. “⁠지갑 속 확인서 말고요⁠.⁠”

태언의 배에서 소리가 났다⁠. 길고 낮았다⁠. 육교 철판 떨리는 소리보다 컸다⁠.

“⁠저녁 드셨어요⁠?⁠”

“⁠식구들 먼저 먹였어요⁠.⁠” 태언이 배를 손으로 눌렀다⁠. “⁠부엌이 쉬니까 쌀이 남아요⁠. 남는데도 반 공기만 먹게 돼요⁠.⁠”

육교를 내려오자 계단 밑 붕어빵 노점이 그대로 있었다⁠. 팥 익는 냄새가 우리를 덮쳤다⁠. 노점 주인이 우리를 알아보고 집게로 틀을 탁 쳤다⁠.

“⁠또 둘이 냄새만 맡으러 왔어⁠?⁠”

“⁠네⁠.⁠” 태언이 대답했다⁠.

“⁠냄새도 장사라니까⁠.⁠” 노점 주인이 붕어빵 두 마리를 종이봉투에 넣어 내밀었다⁠. “⁠어제 거야⁠. 식어서 못 팔아⁠. 가져가⁠.⁠”

태언이 봉투를 받았다⁠. 한 마리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받았다⁠. 식은 붕어빵은 딱딱했고⁠, 팥이 꼬리까지 들어 있었다⁠. 우리는 노점 앞에서 식은 붕어빵을 한 마리씩 먹었다⁠. 태언은 꼬리부터 먹었고⁠, 나는 머리부터 먹었다⁠. 다 먹을 때까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처음 만난 밤에 제가 하린 님한테 말을 참고 있다고 했죠⁠.⁠” 태언이 종이봉투를 접었다⁠. 접은 자리를 손톱으로 꾹꾹 눌렀다⁠. 지갑 속 확인서를 접던 손버릇이었다⁠. “⁠저도 참고 있었어요⁠. 물어보는 걸요⁠. 삼 년 동안요⁠. 물어보면 배가 아플 것 같아서요⁠.⁠”

“⁠지금은요⁠?⁠”

“⁠지금도 배는 고파요⁠.⁠” 태언이 웃었다⁠. 웃음이 오래가지 않았다⁠. “⁠생각해 볼게요⁠. 숫자는 제 눈으로 볼게요⁠.⁠”

태언은 골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바람막이 소매 밖으로 나온 손목이 바람에 빨갰다⁠. 나는 손가락에 묻은 팥을 핥았다⁠. 넉 달 만에 먹는 붕어빵이었고⁠, 이번에도 공짜였다⁠. 공짜인데 목에서 오래 내려가지 않았다⁠.

*

밤 열한 시 사십 분⁠, 207호 침대에서 휴대전화가 떨렸다⁠. 태언이었다⁠. 글은 없었다⁠. 사진 한 장이었다⁠.

이사장실 오른쪽 모니터를 찍은 사진이었다⁠. 화면 귀퉁이에 비상등 빛이 번져 있었다⁠. 불을 켜지 않고 찍은 사진이었다⁠. 표 맨 아래 「⁠관리인⁠」 칸이 열려 있었다⁠.

「⁠육태언 · 매입 2024⁠.01⁠.08 · 원 채권자 모래알캐피탈⁠」

「⁠채권액 18⁠,000⁠,000 · 잔액 18⁠,000⁠,000⁠」

「⁠비고⁠: 관리인 숙식비 상계⁠」

삼 년이었다⁠. 태언이 졸업했다고 믿은 삼 년⁠, 지갑 속에서 네 번 접힌 「⁠남은 빚 0원⁠」이 닳아 가던 삼 년 동안⁠, 화면 속 숫자는 한 원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사진을 키웠다⁠. 화면 아래쪽에 손가락 하나가 찍혀 있었다⁠. 사진을 찍는 손이 아니었다⁠. 키보드 위에 얹힌 손가락이었다⁠. 비밀번호를 치고 나서 미처 떼지 못한 손가락이었다⁠. 손톱이 짧게 깎여 있었다⁠. 반 공기를 덜어 주던 손이었다⁠.

13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밥솥이 비었다 · 무지출 챌린지 단톡방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