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432자)

노동절

무지출 챌린지 단톡방 · 도결애

토요일 아침 일곱 시⁠, 은행나무고시원 공용 부엌의 밥솥에서 김이 올랐다⁠. 영원하우스에서 온 밥이었다⁠. 나는 밥솥 앞에 서서 밥을 푸지 않았다⁠. 퇴소한 지 이틀째였다⁠. 이 밥을 짓는 함지 앞에 오늘 새벽에도 짠물과 이백원과 곰국이 서 있었을 것이었다⁠. 예림 언니는 병원에 있었고⁠, 라희는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질 참이었다⁠.

창길이 신발 상자를 안고 부엌에 들어왔다⁠. 운동화 상자였다⁠. 뚜껑에 매직으로 「⁠적시⁠」라고 쓰여 있었다⁠.

“⁠목요일 다섯 시에 뒷문에 놨는데 네가 안 와서 도로 들였어⁠.⁠” 창길이 상자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적시가 빗나갔어⁠. 내 인생 첫 빗나감이야⁠.⁠”

“⁠죄송해요⁠.⁠”

“⁠네가 왜 죄송해⁠. 병원 갔다며⁠.⁠” 창길이 뚜껑을 열었다⁠. “⁠라희는⁠?⁠”

“⁠수술 잘 끝났어요⁠.⁠”

창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다 말고 상자 안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상자 안에 영수증 열두 장이 고무줄로 묶여 있었다⁠. 「⁠반찬 공급 대금 · 은행나무고시원 → 한솥살림 사회적협동조합⁠」 매달 한 장⁠, 지난해 5월부터 올해 4월까지⁠. 영수증 밑에 하얀 봉투가 빼곡했다⁠. 봉투마다 창길의 글씨로 날짜와 방 번호가 적혀 있었다⁠.

“⁠열아홉 개야⁠.⁠” 창길이 봉투 다발을 들어 보였다⁠. “⁠내가 넘긴 사람 열아홉⁠. 오만 원씩 구십오만 원⁠. 하나도 안 쓰고 다 갖고 있어⁠. 인강 끊었다는 거 거짓말이야⁠.⁠”

“⁠왜 안 썼어요⁠?⁠”

“⁠적시가 아니었어⁠. 쓸 때가 안 오더라⁠.⁠” 창길이 봉투를 상자에 도로 넣었다⁠. “⁠쓰면 내가 사람을 판 게 되잖아⁠. 안 쓰면 그냥 소개한 거고⁠. 그렇게 버텼어⁠.⁠”

마지막 봉투에는 날짜 옆에 「⁠209⁠」가 적혀 있었다⁠. 예림 언니의 방 번호였다⁠. 창길은 「⁠209⁠」 봉투를 꺼내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이건 언니한테 줘⁠. 언니 거야⁠. 언니 이름으로 받은 돈이니까⁠.⁠”

부엌 구석 텔레비전에서 아침 뉴스가 나왔다⁠. 「⁠오늘 근로자의 날 … 쉬지 못하는 노동자들⁠」 화면에 택배 차와 편의점 계산대가 지나갔다⁠. 창길이 텔레비전을 보며 중얼거렸다⁠. 오늘 쉬는 날인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이 골목에 수두룩하다고⁠. 영원하우스 부엌도 오늘 쉬지 않았다⁠. 봉사는 쉬는 날이 없었다⁠.

*

열한 시⁠, 대학병원 일반 병동 복도에서 예림 언니가 보호자 침대 시트를 개고 있었다⁠. 라희는 콧줄을 꽂고 잠들어 있었다⁠. 배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볼이 이틀 만에 홀쭉해져 있었다⁠.

예림 언니는 나를 보고도 시트 개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창길이 준 봉투를 침대 옆 탁자에 올려놓았다⁠. 「⁠209⁠」

“⁠이게 뭐야⁠?⁠”

“⁠창길 총무님이 언니를 넘기고 받은 오만 원이요⁠. 안 쓰고 갖고 있었대요⁠.⁠”

예림 언니가 봉투를 오래 보았다⁠. 열어 보지 않았다⁠. 봉투를 라희의 베개 밑에 밀어 넣었다⁠.

“⁠걔 깨면 바나나 사 줄 거야⁠. 반값 말고 제값으로⁠.⁠”

라희가 눈을 떴다⁠. 콧줄이 불편한지 코를 찡그렸다⁠. 예림 언니를 보고⁠, 나를 보았다⁠.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언니⁠, 나 밥 언제 먹어⁠?⁠”

“⁠가스 나와야 드세요⁠.⁠” 마침 들어온 간호사가 링거를 확인하며 말했다⁠. “⁠방귀요⁠. 방귀 나오면 물부터⁠.⁠”

“⁠방귀가 밥표야⁠?⁠” 라희가 갈라진 목소리로 웃다가 배를 잡았다⁠. “⁠아⁠, 웃으면 안 되겠다⁠. 언니⁠, 웃기지 마⁠.⁠”

“⁠아무도 안 웃겼어⁠.⁠” 예림 언니가 라희의 이마를 짚었다⁠. 열이 내려 있었다⁠.

라희가 나를 보았다⁠. 무언가 물으려다 말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채 손을 이불 밖으로 내밀었다⁠. 예림 언니가 내민 손을 잡았다⁠. 라희의 다른 손은 이불 위에 놓여 있었다⁠. 나는 남은 손을 잡지 못했다⁠. 내가 잡을 자격이 있는 손인지 몰랐다⁠.

*

열두 시 반⁠, 병원 지하 식당 입구에 「⁠근로자의 날 특식 — 제육볶음⁠」이 붙어 있었다⁠. 채묘정이 식판 셋을 들고 와서 식탁에 놓았다⁠. 예림 언니 앞에 하나⁠, 내 앞에 하나⁠, 자기 앞에 하나⁠. 채묘정 옆에는 회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앉았다⁠. 서류 가방을 무릎에 올렸다⁠. 조합의 변호사라고 했다⁠.

“⁠먹으면서 얘기해⁠. 병원 밥은 내가 살게⁠.⁠” 채묘정이 수저를 놓아 주었다⁠. “⁠공짜야⁠.⁠”

예림 언니는 수저를 들었다⁠.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손이었다⁠. 나는 수저를 들지 않았다⁠. 변호사가 서류 가방에서 종이 세 장을 꺼냈다⁠.

“⁠조합에서 세 가지를 해 드립니다⁠.⁠” 변호사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설라희 씨의 수술비와 입원비 전액을 조합이 부담합니다⁠. 채무에 더하지 않습니다⁠. 설예림 씨의 보증 채무를 없앱니다⁠. 그리고 남궁하린 씨의 채무 이천백사십만 원을 전부 탕감합니다⁠.⁠”

예림 언니의 수저가 식판 위에서 멈췄다⁠.

“⁠대신 두 가지를 부탁드립니다⁠.⁠” 변호사가 종이 한 장을 내 앞으로 밀었다⁠. 「⁠비밀유지 서약서⁠」 “⁠영원하우스와 조합 운영에 관해 보고 들은 것을 외부에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 달 안에 노량진을 떠난다⁠.⁠”

“⁠노량진을 왜 떠나요⁠?⁠”

“⁠골목 사장들이 네 얼굴을 알아⁠.⁠” 채묘정이 제육을 집었다⁠. “⁠네가 이 골목에 있으면 사장들이 불안해해⁠. 사장들이 불안하면 반찬 값이 늦게 들어와⁠.⁠”

나는 서약서를 내려다보았다⁠. 아래쪽에 서명 칸이 있었다⁠. 서명 하나에 이천백사십만 원이 사라졌다⁠. 볼펜 한 줄이면 매달 같은 번호로 보내던 삼십일만 원도⁠, 아버지가 모르는 척해 주던 거짓말도 끝났다⁠. 배 속이 이상하게 가벼워졌다⁠. 가벼워지는 배가 무서웠다⁠.

“⁠라희가 일한 열 달 치는요⁠?⁠” 내가 물었다⁠.

“⁠라희 씨는 한 달 열흘 계셨습니다⁠.⁠” 변호사가 고쳐 말했다⁠.

“⁠곰국 오빠 열다섯 달 치는요⁠. 짠물⁠, 이백원⁠, 반지하왕⁠, 2호점 서른두 명은요⁠.⁠”

“⁠그분들은 봉사 활동을 하셨습니다⁠. 동의서에 다 있습니다⁠.⁠” 변호사가 웃었다⁠. 말끔한 웃음이었다⁠. “⁠근로기준법을 말씀하시려는 거면⁠, 근로자가 아니면 해당이 없습니다⁠.⁠”

“⁠고시원 사장님들이 돈을 내고 사 가는 밥이에요⁠.⁠”

변호사의 웃음이 반쯤 남은 채 멈췄다⁠. 채묘정이 제육을 씹다가 나를 보았다⁠.

“⁠참을인⁠. 너는 숫자만 봐⁠. 나는 밥을 봐⁠.⁠” 채묘정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노량진 골목 스물여덟⁠, 신림 마흔⁠. 내 부엌에서 밥 나가는 고시원이 예순여덟 곳이야⁠. 매일 아침 이천 명 넘게 내 밥을 먹어⁠. 내가 문 닫으면 내일 아침 이천 명이 라면 먹어⁠. 너는 그 이천 명한테 노동법 읽어 줄래⁠?⁠”

“⁠그 밥은 일한 사람들이 지었어요⁠. 월급 없이요⁠.⁠”

“⁠월급 대신 밥 먹었지⁠. 방에서 잤고⁠. 독촉 안 받았고⁠.⁠” 채묘정이 귤 하나를 꺼내 깠다⁠. 병원 식당에서도 귤이 나왔다⁠. “⁠밖에서 월급 받던 애들이 왜 내 집에 왔는지 생각해 봐⁠. 월급으로는 빚이 안 줄었어⁠. 내 집에서는 숫자가 그대로여도 배는 안 고파⁠. 그걸 고른 건 걔들이야⁠.⁠”

예림 언니가 제육을 한 입 먹었다⁠. 꼭꼭 씹었다⁠. 씹으면서 나를 보았다⁠.

“⁠하린아⁠, 사인해⁠.⁠”

“⁠언니⁠.⁠”

“⁠네 빚 없어진대⁠. 이천백사십⁠. 라희 병원비도⁠. 내 보증도⁠.⁠” 예림 언니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다시 빨라졌다⁠. “⁠우리 셋이 한 번에 사는 거야⁠. 너 하나 사인하면⁠.⁠”

채묘정이 귤 한 조각을 예림 언니의 식판에 올려 주었다⁠. 예림 언니는 귤을 먹지 않았다⁠. 나를 보는 눈을 거두지 않았다⁠.

“⁠스물네 시간 줄게⁠.⁠” 채묘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트렌치코트를 팔에 걸쳤다⁠. “⁠내일 정오까지 서명해서 보내⁠. 안 보내면 이 종이는 없던 일이야⁠.⁠”

채묘정과 변호사가 식당을 나갔다⁠. 식판 셋 가운데 채묘정의 식판만 비어 있었다⁠. 내 식판은 그대로였다⁠. 제육이 식어 기름이 하얗게 굳었다⁠.

*

오후 세 시⁠, 병원 비상계단 계단참에서 창길이 신발 상자를 안고 기다렸다⁠. 내가 문자로 불렀다⁠. 예림 언니도 따라 나왔다⁠. 비상계단은 차고 조용했다⁠. 위층에서 누군가 담배를 몰래 피우는 냄새가 내려왔다⁠.

나는 가방에서 노동법 기본서를 꺼냈다⁠. 영원하우스 2층에서 퇴소할 때 태언이 현관까지 들고 나와 준 책이었다⁠. 제21조가 있는 장을 펴서 창길과 예림 언니 앞에 들었다⁠.

“⁠읽어 봐요⁠.⁠”

창길이 소리 내어 읽었다⁠. “⁠사용자는 전차금이나 그 밖에 근로할 것을 조건으로 하는 전대채권과 임금을 상계하지 못한다⁠.⁠” 읽고 나서 고개를 갸웃했다⁠. “⁠한국말 맞아⁠?⁠”

“⁠일을 시키는 사람이 빌려준 돈을 월급하고 맞바꿔 지우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나는 손가락으로 조문을 짚었다⁠. “⁠한솥살림은 빚을 사 와서 빌려준 사람이 됐어요⁠. 그리고 식구들한테 밥 짓는 일을 시켰어요⁠. 그 밥을 고시원에 팔았어요⁠. 그러면 봉사가 아니라 일이에요⁠. 일이면 한솥살림은 월급을 줘야 해요⁠. 월급을 빚하고 맞바꾸면 안 되고요⁠.⁠”

“⁠그 증거가 이거야⁠?⁠” 창길이 신발 상자를 들었다⁠.

“⁠밥을 판 증거요⁠. 고시원이 돈 내고 산 증거요⁠.⁠”

“⁠다른 건⁠?⁠”

“⁠일한 시간이요⁠. 영원하우스 부엌 벽에 근무표가 있어요⁠. 방장님 손글씨로요⁠. 누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일했는지 매일⁠.⁠” 나는 책을 덮었다⁠. “⁠그리고 줄지 않은 잔액이요⁠. 그건 졸업함에서 갖고 나왔어요⁠.⁠”

예림 언니가 계단 난간에 기대 있었다⁠. 팔짱을 꼈다⁠.

“⁠그거 이기면 라희 빚은⁠?⁠”

“⁠그대로예요⁠.⁠”

예림 언니가 웃었다⁠. 소리 없이⁠.

“⁠근데 라희가 받을 돈이 더 많아요⁠.⁠” 나는 공책을 펴 보였다⁠. 하루 아홉 시간⁠, 한 달⁠, 최저임금⁠. 숫자 하나가 공책 가운데에 동그라미 쳐져 있었다⁠. “⁠라희가 한 달 열흘 일한 값이 숙식비를 빼고도 남아요⁠. 곰국 오빠는 열다섯 달이에요⁠. 곰국 오빠가 받을 돈이 곰국 오빠 빚보다 많을 수도 있어요⁠.⁠”

“⁠빚 주인한테 월급을 받아서 빚 주인한테 빚을 갚는다고⁠?⁠” 창길이 머리를 긁었다⁠. “⁠그거 완전 적시네⁠.⁠”

예림 언니는 공책의 동그라미를 오래 보았다⁠. 손가락을 뻗어 동그라미를 한 번 문질렀다⁠. 볼펜 자국이 번지지 않았다⁠.

“⁠이거 언제 받는데⁠?⁠”

“⁠몰라요⁠. 오래 걸려요⁠.⁠”

“⁠오래 걸리는 사이에 걔는 어디서 밥 먹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예림 언니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계단참 창문 밖으로 병원 주차장이 보였다⁠. 흰 차 한 대가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

저녁 여섯 시⁠, 나는 병원 앞 벤치에서 채묘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두 번 가고 채묘정이 받았다⁠. 귤 까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서명했어⁠?⁠”

“⁠안 해요⁠.⁠”

전화 너머가 조용했다⁠. 귤껍질 벗기는 소리만 이어졌다⁠.

“⁠네 빚 이천백사십 그대로야⁠. 다음 달 말까지⁠.⁠”

“⁠알아요⁠.⁠”

“⁠그리고 하나 더⁠.⁠” 채묘정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다정하게 말할수록 부드러워지는 목소리였다⁠. “⁠내일 아침부터 골목에 밥 안 나간다⁠. 스물여덟 곳 전부⁠. 사장들한테 이유도 말해 줄게⁠. 참을인 때문이라고⁠.⁠”

전화가 끊겼다⁠. 단톡방을 열었다⁠. 참여자는 오천삼백이었다⁠. 이틀 동안 방장 글이 하나도 없었다⁠. 빈 이틀을 회원들의 글이 메웠다⁠.

「⁠거지왕자⁠: 방장님 어디 감⁠? 순위 안 올라옴⁠」

「⁠통장잔고요정⁠: 영원하우스 식구 하나 실려 갔다는 소문 있던데⁠」

「⁠반값인생⁠: 참을인 님도 졸업하셨던데 왜 다시 인증 안 올림⁠?⁠」

나는 답을 쓰지 않았다⁠. 벤치 옆 화단에서 비둘기 두 마리가 땅을 쪼았다⁠. 쪼아 먹을 것이 없는 흙이었다⁠. 나는 휴대전화를 무릎에 내려놓고 배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점심을 굶은 배가 울었다⁠. 내일 아침이면 골목 고시원 스물여덟 곳의 밥솥이 빈 채로 보온 표시등만 켜고 있을 것이었다⁠.

12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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