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427자)

매실

무지출 챌린지 단톡방 · 도결애

화요일 오후⁠, 승합차가 막다른 골목에 다시 들어왔다⁠. 예림 언니가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라희가 차에서 내리자 예림 언니는 라희의 얼굴부터 두 손으로 잡았다⁠. 볼을 눌러 보고⁠, 이마를 짚어 보고⁠, 배를 보았다⁠.

“⁠너 얼굴이 왜 노래⁠?⁠”

“⁠2호점 형광등이 노래서 그래⁠.⁠” 라희가 웃었다⁠. “⁠언니⁠, 나 반장 됐어⁠. 부엌 반장⁠.⁠”

“⁠반장은 무슨⁠.⁠” 예림 언니가 라희의 이마에 손등을 댔다⁠. “⁠뜨거워⁠.⁠”

“⁠부엌에서 불 앞에 있다 와서 그래⁠.⁠”

라희는 예림 언니의 손을 떼어 내고 현관으로 들어갔다⁠. 걸음이 조금 굽어 있었다⁠. 오른손이 앞치마 위로 배를 받치고 있었다⁠. 나는 가방을 들고 따라 들어가면서 라희의 굽은 등을 보았다⁠.

저녁 식탁에서 라희는 밥을 세 숟가락 먹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짠물이 놀라서 라희의 식판을 들여다보았다⁠.

“⁠고등어가 밥을 남겨⁠? 오늘 지구 멸망해⁠?⁠”

“⁠체했어⁠. 2호점에서 떡 먹고⁠.⁠”

“⁠체했을 땐 등을 두드려야 돼⁠.⁠” 짠물이 라희의 등을 두드렸다⁠. “⁠우리 할머니는 엄지를 실로 감았어⁠. 이백이 오빠⁠, 실 있어⁠?⁠”

“⁠실 대신 고무줄 있어⁠.⁠” 이백원이 손목의 고무줄을 뺐다⁠.

“⁠고무줄은 안 돼⁠. 그건 머리 묶는 거야⁠.⁠”

식탁이 웃었다⁠. 라희도 웃었다⁠. 웃다가 배를 움켜쥐었다⁠. 태언이 일어나 부엌에서 매실 병을 들고 왔다⁠. 큰 유리병이었다⁠. 따뜻한 물에 매실액을 타서 라희 앞에 놓았다⁠.

“⁠천천히 마셔요⁠.⁠”

라희는 천천히 마셨다⁠. 천천히 마시는 라희는 두 번째였다⁠.

*

화요일 밤 열한 시⁠, 2층 방에서 라희가 끙끙거렸다⁠. 잠결에 내는 소리였다⁠. 불을 켜자 라희가 이불을 걷어차고 옆으로 웅크려 있었다⁠. 이마가 땀으로 젖어 있었다⁠.

“⁠어디가 아파⁠?⁠”

“⁠여기⁠.⁠” 라희가 손으로 짚었다⁠. 배꼽이 아니었다⁠. 아랫배⁠, 오른쪽이었다⁠. “⁠배꼽에 있던 게 여기로 내려왔어⁠.⁠”

나는 라희의 이마를 짚었다⁠. 손바닥이 데일 듯 뜨거웠다⁠. 배 아픔이 배꼽에서 아랫배 오른쪽으로 옮겨 가면 맹장염을 의심하라는 말을⁠, 나는 어디서 들었는지도 모르게 알고 있었다⁠. 열이 나고⁠, 밥을 못 먹고⁠, 오른쪽 아랫배를 누르면 아파한다는 것도⁠.

“⁠라희야⁠, 병원 가자⁠.⁠”

“⁠싫어⁠.⁠”

“⁠맹장일 수도 있어⁠.⁠”

“⁠맹장이면 수술하잖아⁠.⁠” 라희가 웅크린 채 고개를 저었다⁠. “⁠수술비 얼마야⁠? 백⁠? 이백⁠? 그거 빚에 얹으면 확인서 숫자 올라가⁠. 나 이제 막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벽의 확인서가 형광등 아래 반듯했다⁠. 「⁠남은 빚 21⁠,800⁠,000원⁠」 내가 엄지로 누른 귀퉁이였다⁠.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태언을 깨웠다⁠. 태언은 1층 이사장실 옆 작은 방에서 잤다⁠. 관리인 방이었다⁠. 벽에 「⁠남은 빚 0원 · 졸업⁠」 확인서가 붙어 있었다⁠. 태언이 관리인 휴대전화로 채묘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피커를 켰다⁠. 자다 깬 채묘정의 목소리가 방을 채웠다⁠.

“⁠체한 거 아니야⁠?⁠”

“⁠열이 나요⁠. 오른쪽 아랫배요⁠.⁠” 내가 말했다⁠.

“⁠본인이 원하면 보내⁠. 병원비는 빚에 얹는다⁠. 조합 원칙이야⁠. 식구 하나 병원비를 조합이 다 내면 다른 식구들 밥값이 줄어⁠. 고등어한테 물어봐⁠. 원하는지⁠.⁠”

전화가 끊겼다⁠. 태언이 꺼진 휴대전화를 오래 보았다⁠. 나는 2층으로 올라가 라희에게 물었다⁠. 라희는 원하지 않았다⁠. 예림 언니도 방문 앞에 와 있었다⁠. 예림 언니가 라희의 손을 잡았다⁠.

“⁠내일 아침에도 아프면 가자⁠. 언니가 같이 가⁠.⁠”

“⁠아침에 쌀 씻어야 돼⁠.⁠”

“⁠언니가 대신 씻어⁠.⁠”

라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고 나서 다시 웅크렸다⁠. 예림 언니가 라희의 등을 쓸었다⁠. 등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

수요일 새벽 배달 길⁠, 은행나무고시원 부엌에서 창길이 나를 붙잡았다⁠. 창길은 웬일로 하품을 하지 않았다⁠. 목소리를 낮추지도 않았다⁠.

“⁠목요일 새벽에 줄게⁠. 영수증⁠.⁠”

“⁠진짜요⁠?⁠”

“⁠사장님이 목요일에 지방 가⁠. 이틀⁠. 그때가 딱 그때야⁠.⁠” 창길이 손가락으로 허공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일 년 치 있어⁠. 신발 상자에⁠. 반찬 값 영수증이랑⁠, 내가 받은 봉투도⁠. 봉투에 날짜 다 써 놨어⁠. 나 원래 그런 거 적어 둬⁠. 적시에 쓰려고⁠.⁠”

“⁠왜 마음 바꿨어요⁠?⁠”

“⁠방송 봤어⁠.⁠” 창길이 냉장고를 열고 김치 통을 넣었다⁠. 등을 보인 채 말했다⁠. “⁠손만 나온 거⁠. 네 손⁠. 그 손으로 지은 밥을 내가 오만 원 받고 사람 넘겨서 먹이고 있더라⁠. 반값 김밥도 그렇게는 안 사⁠.⁠”

창길이 냉장고 문을 닫았다⁠. 나는 수레를 끌고 나오면서 목요일 새벽 다섯 시를 손꼽았다⁠. 영수증이 손에 들어오면⁠, 부엌 벽 근무표를 찍을 휴대전화만 있으면 되었다⁠. 휴대전화는 졸업함에 있었다⁠. 졸업함을 열면 퇴소였다⁠. 퇴소하면 배달 길도⁠, 이사장실 열쇠도⁠, 근무표도 다시는 못 볼 것이었다⁠.

목요일 새벽 다섯 시까지는 하루였다⁠.

*

수요일 낮⁠, 라희는 쌀을 씻지 않았다⁠. 예림 언니가 대신 씻었다⁠. 라희는 2층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침에 매실 물을 마시고⁠, 점심에 죽 두 숟가락을 먹었다⁠. 오후가 되자 열이 조금 내렸다⁠. 라희가 웃었다⁠.

“⁠봐⁠. 나아⁠.⁠”

예림 언니가 안도하는 얼굴로 라희의 이마를 짚었다⁠. 나는 라희의 아랫배 오른쪽을 손가락으로 살짝 눌렀다⁠. 라희가 숨을 들이켰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이를 물었다⁠.

고백한다⁠. 나는 수요일 밤 119를 부르지 않았다⁠.

라희가 원하지 않았다⁠. 예림 언니도 아침까지 보자고 했다⁠. 채묘정은 본인이 원하면 보내라고 했다⁠. 셋 다 맞는 말이었고⁠, 셋 다 나에게 핑계가 되어 주었다⁠. 핑계 밑에 내가 있었다⁠. 목요일 새벽 다섯 시에 창길의 신발 상자가 오고⁠, 신발 상자와 부엌 벽 근무표를 한 번에 들고 나가고 싶었다⁠. 오늘 밤 졸업함을 열면 둘 다 놓친다⁠. 나는 라희의 배 소리를 들으면서⁠, 증거를 기다렸다⁠. 참는 일은 이번에도 쉬웠다⁠. 쉬워서 아무도 나를 말리지 않았다⁠.

*

목요일 새벽 세 시⁠, 라희가 소리를 질렀다⁠.

짧고 높은 소리였다⁠. 불을 켜자 라희가 침대에서 바닥으로 굴러떨어져 있었다⁠. 무릎을 배에 붙이고 몸을 활처럼 말았다⁠. 얼굴이 하얬다⁠. 입술이 하얬다⁠. 손을 대자 배가 판자처럼 딱딱했다⁠.

“⁠언니⁠.⁠” 라희가 나를 불렀다⁠. 나를 부르는 건지 예림 언니를 부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까 갑자기 안 아팠어⁠. 하나도⁠. 그래서 나은 줄 알았는데⁠.⁠”

아프던 것이 갑자기 멎었다가 배 전체로 번지는 것⁠. 그게 무슨 뜻인지 나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 기다렸다⁠.

나는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맨발이었다⁠. 관리인 방 문을 두드렸다⁠. 태언이 문을 열었다⁠.

“⁠열쇠 줘요⁠.⁠”

태언이 나를 보았다⁠. 내 얼굴을 보고⁠, 내 맨발을 보았다⁠. 이사장님께 먼저⁠, 하고 말을 꺼내다가 멈췄다⁠. 태언이 바람막이 안주머니에서 작은 열쇠를 꺼냈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열쇠를 내 손바닥에 놓았다⁠.

졸업함 스물네 번째 문을 열었다⁠. 휴대전화가 누워 있었고⁠, 위에 접힌 종이 네 장이 얹혀 있었다⁠. 휴대전화를 켰다⁠. 화면이 켜지는 데 걸린 시간이 이 집에서 산 열이레보다 길었다⁠. 119를 눌렀다⁠.

“⁠노량진 고시원 골목 맨 끝 건물이요⁠. 막다른 데요⁠. 스물네 살 여자가 배가 아파요⁠. 오른쪽 아래요⁠.⁠” 번지를 몰라서 나는 그렇게 말했다⁠. 석 달 넘게 지나다닌 골목인데도 막다른 끝의 번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

새벽 네 시 사십 분⁠, 대학병원 응급실 복도는 차고 밝았다⁠. 의사는 맹장이 터져 배 안에 염증이 번졌다고 했다⁠. 복막염이라고 했다⁠. 바로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이라고 말하다가 의사는 말끝을 접었다⁠. 라희는 수술실로 들어갔다⁠. 예림 언니가 보호자 서류에 서명했다⁠. 이번에는 읽고 서명했다⁠.

복도 끝 의자에 취한 남자가 앉아 혼자 노래를 불렀다⁠. 같은 소절을 되풀이했다⁠. 간호사가 지나가며 “⁠아저씨⁠, 노래는 퇴원하고 하세요⁠”라고 했다⁠. 남자는 “⁠퇴원하면 노래 안 나와요⁠”라고 대답했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남자 혼자 웃었다⁠.

예림 언니가 내 앞에 와서 멈췄다⁠. 수술실 문이 닫힌 지 이십 분이 지나 있었다⁠.

“⁠너 어젯밤에 알았지⁠.⁠”

“⁠네⁠.⁠”

“⁠오른쪽 아래⁠. 너 눌러 봤잖아⁠. 낮에⁠.⁠” 예림 언니의 목소리는 빠르지 않았다⁠. 처음 듣는 느린 목소리였다⁠. “⁠왜 기다렸어⁠?⁠”

“⁠창길 총무님이 오늘 새벽에 영수증을 주기로 했어요⁠. 근무표도 찍어야 했고요⁠. 졸업함을 열면 퇴소라서⁠—⁠”

“⁠영수증⁠.⁠” 예림 언니가 내 말을 잘랐다⁠. 웃었다⁠. “⁠영수증⁠. 우리 라희 배보다 영수증⁠.⁠”

“⁠죄송해요⁠.⁠”

“⁠너도 참았구나⁠.⁠” 예림 언니가 내 후드티 끈을 잡았다⁠. 영원하우스에 들어가던 새벽처럼 손가락으로 한 번 잡아당겼다⁠. 이번에는 놓지 않았다⁠. “⁠참는 거 잘하잖아⁠. 남의 배도 대신 참아 주고⁠. 너 그거 진짜 잘해⁠.⁠”

예림 언니가 끈을 놓았다⁠. 수술실 앞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 등을 벽에 붙이고⁠, 두 손을 무릎 사이에 끼웠다⁠. 나와 예림 언니 사이에 의자가 다섯 개 있었다⁠. 빈 의자 다섯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다⁠.

*

다섯 시 오십 분⁠, 수술실 문이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수술은 잘 끝났다고 했다⁠. 배 안을 오래 씻어 냈다고⁠, 중환자실에서 며칠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예림 언니가 의자에서 일어나려다 다시 주저앉았다⁠. 무릎이 접혔다⁠. 예림 언니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오래 숨을 쉬었다⁠. 울지 않았다⁠. 숨만 쉬었다⁠.

복도 끝에 자판기가 있었다⁠. 따뜻한 율무차가 사백 원이었다⁠. 나는 자판기 앞으로 가서 후드티 주머니를 뒤졌다⁠. 동전이 없었다⁠. 지갑은 영원하우스 2층 가방 속에 있었다⁠. 석 달 넘게 나는 동전을 넣고 다니지 않았다⁠. 동전이 있으면 쓰게 되니까⁠. 자판기 불빛 앞에서 빈 주머니를 뒤집어 보는 손이 우스웠다⁠. 율무차 하나 사 줄 수 없는 손으로⁠, 나는 열이레 동안 남의 빚 숫자를 뽑았다⁠.

나는 빈손으로 예림 언니에게 돌아가다가 다섯 번째 빈 의자 앞에서 멈췄다⁠. 더 가까이 가지 못했다⁠.

*

여섯 시⁠, 채묘정이 응급실 복도에 나타났다⁠. 귤 봉지를 들고 있었다⁠. 트렌치코트 단추를 잘못 끼워 한쪽 깃이 들려 있었다⁠. 채묘정은 예림 언니에게 귤 봉지를 내밀었다⁠. 예림 언니는 받지 않았다⁠. 채묘정은 귤 봉지를 빈 의자에 놓았다⁠.

“⁠수술비는 조합에서 우선 낸다⁠. 나중에 고등어 빚에 얹고⁠.⁠” 채묘정이 나를 돌아보았다⁠. “⁠참을인⁠, 너는 퇴소야⁠. 졸업함 열었잖아⁠.⁠”

“⁠네⁠.⁠”

“⁠태언이한테 들었어⁠. 열쇠도 네가 달랬다며⁠.⁠” 채묘정이 단추를 고쳐 끼웠다⁠. “⁠네 빚 이천백사십⁠, 다음 달 말까지 전부 갚아⁠. 빚 주인은 나니까 날짜도 내가 정해⁠. 은행나무 사장한테는 내가 전화해 뒀다⁠. 네 방⁠, 다음 주까지만이야⁠.⁠”

채묘정은 수술실 문을 한 번 보고 복도를 걸어 나갔다⁠. 태언이 응급실 입구 기둥 옆에 서 있었다⁠. 채묘정이 지나가자 태언은 고개를 숙였고⁠, 고개를 든 뒤에도 나를 보지 않았다⁠. 태언의 손에 텀블러가 없었다⁠. 처음 보는 빈손이었다⁠.

나는 손에 든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열이레 만에 켜진 화면에 알림이 수백 개 쌓여 있었다⁠. 단톡방 참여자는 오천을 넘어 있었다⁠. 맨 위의 알림은 다섯 시 이 분에 온 일대일 메시지였다⁠. 창길이었다⁠. 사진 한 장과 한 줄⁠. 사진에는 은행나무고시원 뒷문 앞⁠, 시멘트 바닥에 놓인 신발 상자가 있었다⁠.

「⁠딱그때⁠: 지금이 그때냐⁠」

1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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