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110자) · 단하 · 이월 초하루

여섯 걸음

두 번째 초식은 없다 · 한도윤

만 19세 이상 이용가

이월 초하루에 넷이 고개를 넘었다. 단하가 앞에 섰고, 소여가 그 뒤, 무진이 그 뒤였다. 채노는 한참 떨어져서 따라왔다. 아무도 그에게 같이 가자고 하지 않았고, 아무도 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고갯마루의 눈은 섣달보다 얕아졌지만, 한낮에 녹았다가 밤에 다시 언 자리가 거울처럼 번들거렸다. 소여는 그 자리를 밟을 때마다 발끝으로 먼저 디뎠다. 아버지의 헌 가죽신 속에 채운 짚이 걸을 때마다 사각거렸다. 단하는 뒤에서 나는 그 소리를 세면서 걸었다. 아이의 걸음은 섣달보다 빨라져 있었다.

단하는 걸으면서 열흘 전 도가의 일을 떠올렸다. 여팔은 광 앞 상에 앉아 단하에게 따뜻한 술을 권했고, 단하는 마시지 않았다.

「그 아이를 깨우시오. 깨워서 내 도가 대문 앞에 세워 두기만 하면 쉰두 냥은 없던 걸로 하겠소. 눈 감았다 뜨면 코앞에 오는 아이가 문 앞에 서 있으면, 이 고개에서 빚 안 갚을 사람이 없소.」

단하는 거절했다. 거절하고 도가를 나오면서, 그 셈이 저의 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단하도 그 아이를 깨우려 했다. 제가 다시는 못 쓰는 그것을, 세상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알고 쓰게 하려고. 그 누군가가 열한 살 아이라는 것을 단하는 이 고개를 넘으면서도 셈에서 빼지 못했다.

*

눈골 객잔은 섣달과 똑같이 서 있었다. 널지붕에 눈이 덮였고, 창 두 곳에만 등불이 켜져 있었고, 마당은 열 걸음이었다. 다른 것은 하나였다. 마당에 발자국이 없었다. 섣달 그 밤 이후로 이 마당에 손님이 들지 않았다.

봉삼이 울타리 문에서 넷을 맞았다. 반가운 얼굴이 아니었다.

“섣달 장사를 다 망쳤습니다. 사람 죽은 마당이라고 소문이 나서, 고개 넘는 장꾼들이 우리 집을 돌아 아래 주막으로 갑니다. 그 주막 국은 우리 국보다 짭니다.”

“마당을 빌리러 왔소.” 단하가 말했다.

“마당 빌리는 값은 따로입니다. 그리고 그날 일을 다시 한다고 들었는데, 그러면 소문이 또 나지요. 소문 난 값도 따로.”

무진이 봉삼의 손에 동전 한 줌을 쥐여 주었다.

“소문 난 값은 우리가 소문을 좋게 내 주는 걸로 퉁칩시다. 이 집 마당에서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이 났다고.”

봉삼은 동전을 세다가 고개를 들었다.

“산 사람이요?”

“오늘 밤에 나오.”

해 질 녘부터 눈이 내렸다. 섣달처럼 굵지는 않았고, 가루처럼 가늘게 내려서 마당에 얇게 깔렸다. 처마 밑 한 뼘만 흙이 마른 채 남았다. 섣달 그 밤 단하가 골라 딛었던 자리였다. 봉삼이 부엌 아궁이에 불을 더 넣었는지 굴뚝 연기가 낮게 깔려 마당을 한 번 훑고 지나갔다.

*

채노는 부엌문 앞 그 자리에 제 발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부엌문 경첩 하나가 섣달에 빠진 채 아직 안 고쳐져 있어서, 문짝이 비스듬히 기운 채 바람에 조금씩 흔들렸다. 장순이 꿇었던 자리였다. 늙은이는 무릎 밑에 눈이 스미는 것을 느끼는지 한 번 몸을 떨었고, 그 뒤로는 움직이지 않았다.

무진이 그 뒤에 섰다. 손에는 채노의 짧은 칼이 들려 있었다. 섣달 그 밤 눈 위에 떨어진 칼을 봉삼이 곰배의 도와 함께 장독 곁에 두었다가 내주었는데, 칼날에 녹이 조금 슬어 있었다. 무진은 칼끝을 채노의 목 뒤에 댔다. 대는 손이 떨려서 칼끝이 늙은이의 목덜미를 두 번 긁었다.

“내가 이걸 왜 하냐.” 무진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스승은 나한테 이런 건 안 시켰다.”

“사형이 안 하시면 제가 합니다.”

“너는 거기 서 있어야 부르지. 알아, 알아.”

단하는 소여를 마당 이쪽 끝, 처마 밑 마른 흙에 세웠다. 채노와 소여 사이가 여섯 걸음이었다. 그날 단하가 섰던 자리였다. 단하는 소여 곁 반 보 뒤에 섰다.

소여가 단하를 올려다봤다.

“칼을 하나 주십시오.”

“안 된다.”

“그날 어른은 검을 차고 계셨습니다.”

“그날 나는 검을 쓰지 않았다. 그 늙은이 손목을 잡았을 뿐이다.” 단하가 말했다. “네 몸이 그날을 기억하는 게 아니다. 내 몸이 그날 한 것을 네 몸이 받아 두었다. 칼은 거기 없다.”

소여가 채노를 봤다. 무릎 꿇은 늙은이가 아이를 마주 봤다. 목 뒤에 칼이 닿아 있었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안 움직인다.” 채노가 말했다. “이번에는.”

그때 울타리 문이 삐걱 열렸다.

*

해운이 지팡이를 짚고 들어섰다. 먹물 장삼 어깨에 가루눈이 앉아 있었다. 그는 마당에 들어서지 않고 울타리 문 안쪽에 멈춰 섰다. 귀를 기울이는 얼굴이었다. 무진의 떨리는 숨을 듣고, 채노의 무릎 밑에서 눈이 눌리는 소리를 듣고, 소여의 짚신 속 짚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 아이를 부르지 마시오.”

“스님.” 단하가 말했다. “모르는 채로 두면 이 아이는 겁날 때마다 누군가를 붙잡습니다. 붙잡을 때마다 그게 나가서 또 누구 몸에 듭니다.”

“알고 두면 이 아이는 평생 그것을 가지고 사오. 그리고 그대가 알고 있으니 써도 안 나가오. 세상에 거리를 없애는 것이 머물기 시작하오.” 해운이 말했다. “그 아이를 탐내는 자가 도가 하나로 끝나겠소? 그대는 지금 지은 분이 막으려던 것을 열한 살 아이 손에 쥐여 주려 하오.”

“압니다.”

“알면서 하오?”

“알면서 합니다.”

해운이 지팡이를 눈 속에 꽂았다. 그러고는 마당 쪽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막아서려는 걸음이었다.

소여가 해운 쪽으로 돌아섰다.

“스님.”

해운의 걸음이 멈췄다.

“저는 그날 마루 밑에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끌려 나가는 것도, 저 어른이 늦게 오는 것도 다 봤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아이가 말했다. “이제는 제 몸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는 채로 사는 게 싫습니다. 모르고 있으면 또 마루 밑에 있는 것 같습니다.”

해운은 오래 서 있었다. 가루눈이 그의 빡빡 깎은 정수리에 내려앉아 녹았다. 그는 눈먼 눈을 아이 쪽으로 향한 채 한 번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러고는 지팡이를 뽑아 울타리 문 쪽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

마당이 조용해졌다. 처마에서 눈 떨어지는 소리가 한 번 났다.

소여는 여섯 걸음 앞을 봤다. 무릎 꿇은 사람과, 그 목 뒤에 칼을 댄 사람. 섣달 그 밤에는 마루 밑에서 비스듬히 올려다본 광경을, 이번에는 똑바로 서서 봤다. 무릎 꿇은 사람이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아이의 숨이 가빠졌다. 명치가 뛰었다. 단하는 반 보 뒤에서 아이의 어깨가 한 번 떨리는 것을 봤다.

무진이 칼끝을 반 치 눌렀다. 그날 채노가 하던 대로.

소여가 없어졌다.

단하의 눈에는 아이가 선 자리의 눈이 한 번 흩날린 것만 보였다. 다음 순간 아이는 무진 앞에 있었고, 작은 손이 무진의 칼 쥔 팔목을 잡아 바깥으로 틀고 있었다. 그날 단하가 한 그대로였다. 무진의 손이 풀렸고, 칼이 눈 위에 떨어졌다.

“둘째.”

단하가 불렀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소여가 무진의 팔목을 잡은 채 굳었다. 아이의 몸이 방금 한 일을 처음부터 다시 따라가는 것이 보였다. 눈을 감았다 뜬 것, 발이 먼저 나간 것, 손이 팔목을 찾은 것. 아이는 그것을 하나씩 알아 갔다. 명치를 누르던 손이 천천히 내려왔다.

“안 아픕니다.” 아이가 말했다. “무겁습니다.”

채노는 무릎 꿇은 채 그대로 있었다. 목덜미에 칼끝이 긁은 자국이 가늘게 두 줄 나 있었는데, 피는 나지 않았다. 살아 있었다.

소여가 무진의 팔목을 놓았다. 놓고 나서 눈 위에 떨어진 칼을 봤다. 아이가 몸을 굽혀 그것을 주웠다.

마당의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무진이 손을 반쯤 뻗다가 멈췄다. 단하는 반 보 뒤에서 한 발도 떼지 않았다. 떼면 늦을 것을 알았고, 떼지 않으면 무엇이 일어날지도 알았다. 그는 이번에는 세지 않았다.

소여가 칼을 쥐고 채노 앞에 섰다. 늙은이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아이를 올려다봤다.

“그날 이렇게 했으면 아버지가 살았습니까?”

채노가 대답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그날은 내 칼이 이미 들어가 있었다. 누가 와도 늦었다.”

아이가 칼을 한참 들고 있었다. 칼끝이 늙은이의 가슴 앞에서 두 번 떨렸다. 그러고는 칼을 돌려 자루 쪽을 채노에게 내밀었다. 채노가 섣달 광에서 낫을 돌려 내밀던 그대로였다.

“살아 계십시오.” 소여가 말했다. “살아서 향회에 나가 말하십시오. 여팔 어른이 뭐라고 시켰는지. 아버지가 문고리를 안 놓았다는 것도.”

채노가 칼자루를 받았다. 받는 손이 떨려서 칼이 두 번 눈 위에 떨어질 뻔했다. 늙은이는 그것을 품에 넣지 않고 눈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이마를 눈에 댔다. 오래 그러고 있었다.

단하는 그제야 숨을 쉬었다. 명치가 아팠다. 아무것도 안 든 자리가 아팠다. 방금 아이가 한 것을 단하는 스무 해 아끼다가 섣달 그 밤에 한 번 썼고, 이제 단하의 몸은 그것을 다시는 못 한다. 아이는 앞으로 몇 번이고 할 수 있다. 단하는 그 둘을 나란히 놓고 셈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셈이 어느 쪽으로 나와도 마음 한쪽이 기뻤다. 그게 부끄러웠다.

*

봉삼의 아내가 부엌에서 나와 소여에게 짚신 한 켤레를 신겨 주었다. 섣달에 준 것보다 한 치 작게 새로 삼은 짚신이었고, 이번에는 짚을 채우지 않아도 아이의 발에 맞았다. 봉삼의 아내는 그것을 섣달부터 삼아 두었다고 했다. 언젠가 그 아이가 이 고개를 다시 넘을 것 같아서.

무진은 장독 곁에 주저앉아 제 팔목을 주물렀다.

“열한 살한테 팔목이 틀렸다. 바위나루에 소문나면 나 배 못 탄다.”

“배는 이미 파셨습니다.”

“그러니까 다행이지.”

해운은 울타리 문 곁에 아직 서 있었다. 단하가 그 앞으로 갔다. 노승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스님.”

“다 들었소.” 해운이 말했다. “이제 거리를 없애는 것이 세상에 머물기 시작했소. 그 아이가 죽을 때까지, 그 아이가 누구를 가르치면 그 뒤로도.”

“압니다.”

“그대가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하나 알려 드리리다.” 해운이 지팡이 끝으로 이 층을 가리켰다. 그는 볼 수 없었지만 소리가 나는 곳을 정확히 짚었다. “저 위 창호 뒤에 아까부터 사람 하나가 숨을 죽이고 있소. 먹 냄새가 나오.”

단하가 이 층을 올려다봤다. 등잔이 켜진 창 하나가 흔들리더니 꺼졌다.

봉삼이 부엌 문간에서 두 손을 모아 비볐다.

“그게, 그 방값은 사흘 전에 선불로 받아서요…….”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는 없었다. 대신 객잔 뒤편 쪽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가루눈 위로 사람 하나가 뛰어가는 발자국이 고개 쪽으로 이어졌다. 청계진 쪽이었다.

8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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