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118자) · 단하 · 정월 보름
반 보 뒤
두 번째 초식은 없다 · 한도윤
만 19세 이상 이용가
정월 보름 아침, 숯가마 마당의 눈은 가마 열기에 녹아서 가장자리만 남아 있었다. 가운데 맨흙이 드러난 자리가 대여섯 걸음쯤 됐고, 흙에 섞인 숯가루 때문에 녹은 물이 먹물처럼 고여 있었다. 그 마당 한가운데서 무진이 팔짱을 끼고 섰다.
“진검은 안 된다.”
“그날은 진검이었습니다.”
“그날 너는 나를 안 겨눴잖아. 산적을 겨눴지.” 무진이 턱으로 단하의 검집을 가리켰다. “목검 깎아 와. 안 깎아 오면 나 안 연다.”
“목검으로는 몸이 안 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안 답하는 거지. 열한 해 안 답하고도 살았다.”
소여가 부엌 문간에 앉아 둘을 보고 있었다. 열은 내렸지만 아직 명치를 손바닥으로 덮고 있었다. 광에서 돌아온 뒤로 아이는 밤마다 아버지의 낫을 베개 밑에 넣고 잤고, 아침이면 그것을 꺼내 날에 슨 녹을 재로 문질렀다. 귀덕은 그걸 보고도 아무 말을 안 했다. 귀덕은 가마 아궁이 앞에서 숯을 고르다가 한 번씩 고개를 들어 마당을 흘겨봤다.
단하는 검을 뽑지 않고 무진 앞에 섰다.
“사형. 해운 스님이 부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들었다.”
“저는 부르겠습니다. 사형 여덟을요.”
무진이 팔짱을 풀었다.
“왜?”
“모르고 가지신 채로 겁나실 때 쓰시면 또 나갑니다. 사형 몸에서 나가서 누구한테 갈지 모릅니다.”
“그게 다냐?”
단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진이 한 걸음 다가왔다. 숯가루 섞인 물이 무진의 가죽신 밑에서 찰박거렸다.
“스승은 나를 네 뒤에 세웠다. 네가 쓰는 걸 내가 받으라고. 이제 너는 못 쓰는 몸이 됐고, 그 스님 말로는 다시 못 배운다지.” 무진이 말했다. “그러니까 너 대신 쓸 몸이 필요한 거 아니냐. 네가 부르면 내가 쓰고.”
귀덕의 손에서 숯 한 덩이가 떨어졌다.
단하는 오래 서 있었다. 거짓말을 고르는 사이에 늦었던 일이 몇 번 있었다. 그는 이번에는 고르지 않았다.
“그것도 있습니다.”
무진이 코로 웃었다. 화가 난 웃음은 아니었다.
“그래, 그거면 됐다. 정직하게 더러운 게 낫지.” 그가 소매를 걷었다. “대신 조건이 있다. 어느 걸 열지는 내가 고른다. 내 몸이다.”
*
무진이 고른 첫째는 왼 옆구리였다. 계단에서 저를 살린 것부터 알고 싶다고 했다.
단하는 그것이 들어간 날을 기억했다. 재작년 여름, 청계진 남쪽 비탈이었다. 산적 둘이 위아래에서 몰아왔고, 위에서 오던 자가 먼저 몽둥이를 내리쳤다. 단하는 기우는 쪽으로 더 기울면서 반 보 안으로 들어갔다.
숯가마 뒤에 마침 비탈이 있었다. 단하는 무진을 비탈 아래에 세우고 제가 위로 올라갔다. 목검은 귀덕이 부지깽이 감으로 쌓아 둔 참나무를 한나절 깎은 것이라, 손잡이에 아직 옹이가 도드라져 있었다. 그는 위에서 내리쳤다. 산적이 그날 그랬듯 발밑의 눈을 무너뜨리면서.
무진의 몸이 기울었다. 넘어지는 쪽으로 더 기울었고, 기운 자리에서 반 보가 안으로 들어왔다.
“열한째.”
단하가 부르는 소리에 무진이 그 자리에서 굳었다. 한참 있다가 그가 왼 옆구리를 눌렀다.
“이게…… 계단에서 한 거다.”
“예.”
“이게 열한째냐.” 무진이 옆구리를 눌렀다 뗐다. “안 아프다. 무겁다.”
둘째는 뒷목이었다. 청계진 주막 싸움에서 상대의 주먹 밑으로 머리를 숙여 흘리고 그 팔을 끼어 돌리는 것, 스승의 일곱째였다. 그날 곁에 서 있던 무진이 술잔을 든 채 그것을 봤다. 단하가 주먹을 내질렀고, 무진의 머리가 숙여졌다가 팔이 감겼다. 단하가 불렀다. 무진이 뒷목을 문지르며 웃었다.
“이건 좀 쓸 만하다. 술자리에서 쓸 데가 많겠어.”
셋째는 왼 무릎이었다. 그것은 열리지 않았다.
앉은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고 발목만 써서 몸을 반 자 뒤로 옮기는 초식으로, 스승이 넷째로 가르쳤다. 단하는 네 해 전 나룻배 위에서 그것을 썼다. 배 위라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날 무진은 단하 뒤 고물에 앉아 있었다.
단하는 무진을 마당 흙바닥에 앉히고 정면에서 목검으로 찔러 들어갔다. 무진의 무릎이 움찔하기만 하고 몸은 그 자리에 있었다. 목검 끝이 무진의 가슴에 닿았다. 다시 해도 같았다. 스무 번을 해도 같았다.
“이건 왜 안 되냐?”
“모르겠습니다.”
“나머지는 한 번에 됐잖아.”
단하는 무진의 무릎을 짚었다. 짚으니 아프다고 했다. 자리는 맞았다. 스물한 번째 목검을 들다가 단하가 손을 내렸다.
“사형, 이걸 쓰시면 어디로 가십니까?”
“어디로 가다니.”
“이건 물러나는 것입니다. 앞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무진이 무릎에서 손을 뗐다.
“나는 물러난 적이 없다.”
“한 번도 없으십니까?”
“없다. 스승 밑에서 나는 늘 뒤에 섰다.” 무진이 말했다. “뒤에 선 놈은 물러날 자리가 없어. 물러나면 뒤에 아무도 없으니까 그대로 끝이다.”
단하는 목검을 땅에 꽂았다. 그러고는 무진의 등 뒤로 돌아가 반 보 떨어진 자리에 섰다. 스승이 스무 해 동안 무진을 세우던 그 자리였다.
“오늘은 제가 뒤에 서겠습니다.”
무진이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
“제가 사형 뒤에 섰습니다. 그러고 다시 해 보십시오.”
귀덕이 목검을 뽑아 들고 무진 앞에 섰다. 단하가 뒤에 있으니 앞에서 찌를 사람이 필요했다. 귀덕은 목검을 부지깽이처럼 쥐었다.
“숯쟁이 누이가 찌르면 아프오.” 무진이 말했다.
“아프라고 찌르는 거요.”
무진은 한참 앉아 있었다. 등 뒤에 단하의 숨이 닿는 거리였다.
“이상하다.” 그가 말했다. “뒤에 누가 있는데 돌아보게 되지가 않는다.”
귀덕이 찔렀다. 무진의 발목이 흙을 밀었고, 몸이 앉은 채로 반 자 물러나 단하의 무릎 앞에서 멈췄다. 목검 끝이 무진의 가슴 한 뼘 앞 허공을 찔렀다.
“넷째.”
무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제 무릎을 짚고 웃었다. 웃음이 조금 젖어 있었다.
“이게 뭐냐. 뒤에 누가 있어야 물러나지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럼 스승은 이걸 혼자 어떻게 쓰셨냐. 스승 뒤에는 아무도 없었을 텐데.”
단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스승은 마당을 쓸 때 늘 왼팔을 쓰지 않았다. 비를 오른손 하나로 쥐고 쓸었는데, 비질이 한쪽으로만 가서 마당에는 늘 비스듬한 결이 났다. 어린 단하는 그 결을 따라 걸으며 스승이 왼손잡이가 아니라서 그런 줄 알았다. 스승이 젊어서 쓴 것이 몇이었는지, 그것이 스승의 몸 어디에서 나갔는지, 그 뒤로 추운 날 어디가 쑤셨는지 단하는 한 번도 묻지 않았다. 묻지 않으면 답을 감당하지 않아도 됐다.
소여가 문간에서 일어섰다. 무진을 한참 보다가 제 명치를 봤다. 그러고는 도로 앉았다.
그날 저녁까지 열린 것은 넷이었다. 오른 어깨, 왼 옆구리, 뒷목, 왼 무릎. 무진은 저녁을 먹으면서 네 군데를 차례로 눌러 보고, 누를 때마다 「무겁다」고 했다. 귀덕이 그 말을 네 번째 들었을 때 조밥을 한 주걱 더 얹어 주었다.
“무거우면 많이 먹어야지.”
*
오목이 온 것은 해가 지고 나서였다. 이번에는 곰배만 데리고 왔고, 품에 향회 도장이 찍힌 종이를 한 장 넣어 왔다.
“향회가 정한 거요. 장순은 빚 다툼 끝에 눈길에 넘어져 죽었소. 실족이오.” 오목이 종이를 귀덕의 부엌 문설주에 대고 눌렀다. “그리고 하나 더. 도가 수금꾼 채노의 몸에 있던 것이 이 담보 아이 몸으로 옮겨 갔다는 말이 있소. 도가 사람 몸에 있던 거면 도가 물건이지. 물건이 담보 속에 들었으니, 어른께서 담보를 일찍 들이겠다고 하시오.”
단하가 부엌 문간을 막고 섰다.
“삼짇날까지는 아무 데도 안 간다고 문서에 적었소.”
귀덕이 아궁이 앞에서 일어섰다. 숯 고르던 손이 새까맸다.
“물건 값을 따지면, 우리 오라비 목숨 값은 어느 문서에 적혔소? 향회 도장은 그 값도 찍어 주오?”
오목은 귀덕을 보지 않았다. 그는 문설주에 붙인 종이의 귀퉁이를 손가락으로 한 번 더 눌렀다.
“문서에는 담보를 적었지, 담보 속에 든 물건은 안 적었소.” 오목이 웃었다. 물린 손가락에 아직 헝겊이 감겨 있었다. “어른이 검객 양반을 도가로 부르시오. 새 셈을 하자고. 쉰두 냥을 다 까 줄 수도 있다고 하셨소.”
“무엇을 받고?”
“그건 어른이 말씀하실 거요.”
곰배가 오목 뒤에서 무진을 흘끔 봤다. 무진이 뒷목을 문지르자 곰배가 반 걸음 물러났다.
“그 목은 왜 문지르시오?”
“이게 요즘 무겁다.”
곰배는 무슨 뜻인지 모르면서 한 걸음 더 물러났다.
*
그 밤 홍매집 문을 두드린 것은 채노였다.
단하가 대문을 열자 늙은이가 눈 속에 서 있었다. 광에서 나온 지 오래된 몰골이었다. 두루마기 자락이 쥐가 쏠아 너덜거렸고, 수염에 쌀겨가 붙어 있었다. 그는 들어오라는 말을 기다리지 않고 문턱에 주저앉았다.
“여팔이 나를 광에서 내보냈소. 이제 내 몸에 아무것도 없으니 가두어 둘 까닭이 없다고.” 채노가 말했다. “대신 그 아이를 원하오. 눈 감았다 뜨면 코앞에 가는 것이 든 아이를. 그걸 가진 자 하나가 수금꾼 백 명 몫이라고, 어제 제 입으로 그러더이다.”
눈발이 대문 안으로 비스듬히 들이쳐 늙은이의 어깨에 쌓였다. 털지 않아서 어깨가 금세 희어졌고, 녹은 눈이 두루마기 깃을 타고 목덜미로 흘러 들어갔다. 늙은이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단하는 채노를 내려다봤다. 이 사람이 장순의 등에 칼을 넣었다. 이 사람이 모르고 쓴 것이 소여의 명치에 들었다. 그 둘이 한 사람의 몸에서 나왔다는 것이 단하의 셈으로는 잘 맞지 않았다.
“왜 나한테 오셨소?”
“여팔이 보름 안에 그 아이를 데려가오. 삼짇날까지 안 기다리오.” 채노가 말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제 몸에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오. 모르는 채로 겁이 나면, 그 아이 몸이 제 혼자 가오. 가서 누구를 붙잡을지 모르오. 내가 그랬소.”
“해운 스님은 모르는 채로 두라 하셨소.”
“그 중은 광에서 쌀 냄새를 맡으며 명치를 쥐어 본 적이 없소.” 채노가 제 명치를 눌렀다. 이제 아무것도 안 아픈 자리였다. “깨우시오. 깨우는 자리에 내가 필요하면 부르시오. 그날 그 마당을 다시 세운다면, 그 마당의 늙은이는 나였소.”
늙은이가 무릎을 짚고 일어서서 눈 속으로 돌아갔다. 한 걸음마다 발을 끌어서 눈 위에 긴 자국이 두 줄 남았다. 단하는 대문 기둥을 잡고 서 있었다. 기둥의 나무가 얼어서 손바닥이 달라붙었다.
위층에서 무진이 창호를 열고 내려다봤다.
“누구냐?”
“채노입니다.”
무진이 한참 말이 없다가 창호를 닫았다. 닫히기 직전에 한마디가 새어 나왔다.
“그 늙은이도 뒤에 누가 있어야 물러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