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102자) · 유하 · 5월 15일
사십일 년 전 상장
밤의 복도에서 세 번째 문 · 백해원
만 19세 이상 이용가
삼 층에 한 번만 더 올라가면 끝이라는 말을 듣고 나서, 나는 서관 1층 도서관에 살다시피 했다. 도서관은 삼 층과 같은 건물인데 공기가 전혀 달랐다. 창이 남쪽으로 크게 나 있어서 오후 내내 햇빛이 책상 위로 비스듬히 누웠고, 그 빛 속에서 먼지가 천천히 돌았다. 낡은 책 냄새는 삼 층 밤 복도의 종이 냄새와 비슷했지만, 여기서는 그 냄새가 따뜻했다. 사서 선생님은 오후 세 시만 되면 어김없이 졸았다. 그 삼십 분이 내 시간이었다.
서가 맨 아래 칸, 교지와 학교 연감이 꽂힌 자리에 「서율원 연감 1985」가 있었다. 표지 천이 닳아서 제목의 금박이 반쯤 떨어져 나갔다. 책장을 넘기자 종이끼리 붙어 있던 자리가 쩍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아무도 이 책을 오래 펴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책장 사이에 눌린 네잎클로버 하나가 갈색으로 말라 붙어 있었다.
2학년 3반 단체 사진이 있었다. 운동장 계단에 스물여섯 명이 세 줄로 앉아 있었다. 흑백이었는데, 둘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 자리만 하얬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가 지우개로 여러 번 문질러져 종이 섬유가 일어나 있었다. 보풀이 인 자리가 햇빛에 비쳐 솜털처럼 보였다. 몸은 남아 있었다. 마른 어깨, 소매가 긴 교복, 무릎 위에 올린 두 손. 한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었다. 작은 공책이었다.
그 옆자리에는 여학생이 하나 앉아 있었다. 머리를 뒤로 단단히 묶었고 턱을 조금 들고 있었다. 사진 아래 이름 목록을 손가락으로 따라갔다. 둘째 줄 왼쪽부터. 김, 박, 그리고 한 칸이 비어 있었다. 인쇄된 칸인데 비어 있었다. 그다음이 여숙희였다.
나는 한참 그 이름을 봤다. 사감 선생님은 열일곱에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문질러진 사람 바로 옆에.
연감 뒤쪽에 교내 상장 수여 목록이 있었다. 1985년 10월 교내 백일장, 장원 2학년 3반. 이름 자리가 수정액으로 덮여 있었다. 흰 수정액이 누렇게 바래서 딱지처럼 들떠 있었다. 나는 그 쪽을 창에 대고 햇빛에 비췄다. 수정액 밑에 볼펜으로 쓴 세 글자가 비쳤다. 문재언. 장원 작품 제목도 비쳤다. 제목은 「라온」이었다.
같은 칸에 1985년 교지 「서율」 제12호가 꽂혀 있었다. 백일장 장원 작품은 교지에 싣는다고 앞머리에 적혀 있었다. 목차를 따라가니 「라온」이라는 제목이 있었고, 지은이 자리는 검은 매직으로 칠해져 있었다. 쪽수는 사십칠. 사십칠 쪽을 폈다. 없었다. 마흔여섯 쪽 다음이 쉰 쪽이었다. 두 장이 면도날 같은 것으로 제본선 바짝 붙여 잘려 나가 있었다. 잘린 자리에 손톱만 한 종이 끄트머리가 남아 있었는데, 거기에 글자 몇 개가 걸려 있었다. 「즐거운 것은 늘 밤에」. 그다음은 잘려서 없었다.
나는 그 끄트머리를 손끝으로 만졌다. 종이가 얇아서 손끝 온기에 조금 휘었다. 누군가는 이 시를 없애려고 칼을 들었고, 누군가는 그걸 보고도 교지를 도로 서가에 꽂았다. 그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
교칙 개정 대장은 사서실 캐비닛에 있었다. 사서 선생님이 졸고 있는 동안 한결이가 망을 봤다. 한결이는 망을 볼 때 괜히 책을 거꾸로 들고 있어서 오히려 눈에 띄었다. 도경 선배가 지나가다 책을 똑바로 돌려 주었다. 한결이는 그 책을 보더니 「아, 이거 요리책이었네요」 하면서 진짜로 읽기 시작했다. 망을 보는 사람이 망을 잊었다. 사서 선생님이 한 번 뒤척였을 때 우리 셋 다 숨을 멈췄는데, 한결이만 「된장찌개에 설탕을 넣는대요」라고 속삭였다.
대장은 얇았다. 오십 년 동안 교칙이 바뀐 게 아홉 번뿐이었다. 1985년 11월 22일, 제22조 신설. 밤 열 시 이후 서관 3층 복도 출입 금지. 사유 칸에 「학생 안전」. 결재란에 도장 하나. 사감 권영조.
“권영조가 누구예요?”
한결이가 물었다.
“설립자. 교감 아버지.”
도경 선배가 대답했다. 선배는 재단 이사회 명단을 외우고 있었다. 아버지 이름이 거기 있어서였다.
“그분 아직 살아 계셔. 학교 뒤 관사에. 명예이사장이야.”
11월 22일은 금요일이었다. 그 사흘 전은 화요일이었다. 나는 그 화요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 모르는데 사흘이라는 숫자가 이상하게 무거웠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그 일을 덮는 데 사흘이면 충분했다.
*
그날 오후 교감이 본관 복도에서 한결이를 붙잡았다. 나는 계단 위에서 그걸 봤다. 한결이는 도망치려다 교감이 부르는 소리에 발이 멈췄다.
“한결이. 요즘 유하 뭐 하냐?”
한결이 입이 벌어졌다. 한결이가 두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막은 손바닥 사이로 말이 새어 나왔다. 한결이는 유하를 팔았던 일에 대해서만은 거짓말을 못 했고, 교감이 묻는 건 바로 그 일이었다.
“도서관에서 1985년 연감이랑 교칙 대장 뒤져요. 문재언이라는 사람 찾았어요. 백일장 장원인데 수정액으로 지워져 있어요. 사진 얼굴도 지워져 있어요. 교칙 스물두 번째는 교감 선생님 아버지 도장이에요.”
한결이는 다 말하고 나서 제 입을 때렸다. 짝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교감은 한결이를 보지 않았다. 계단 위의 나를 보고 있었다.
“유하, 내려와라.”
*
교감실 선풍기는 꺼져 있었다. 교감은 앉지 않았다. 나도 서 있었다. 둘 다 서 있으니 교감실이 좁았다.
“연감 봤냐?”
“봤어요. 문재언이요. 그 사람 어디 있어요?”
“가출했다. 그해 겨울에 뒷산 계곡에서 찾았다. 실족이었고. 학교는 할 만큼 했다.”
교감은 대답을 준비해 둔 사람처럼 말했다. 숫자를 짚을 때와 똑같은 목소리였다. 나는 그 대답을 처음 들었는데, 교감은 그 대답을 백 번쯤 말해 본 사람 같았다.
“그럼 왜 사유 칸이 비었어요? 가출이면 가출이라고 쓰면 되잖아요. 왜 상장에서 지우고, 사진에서 문지르고, 사흘 뒤에 교칙을 만들었어요?”
교감이 창가로 걸어갔다. 창밖으로 학교 뒤 관사가 보였다. 기와를 올린 단층집이었고, 마당에 향나무가 공처럼 둥글게 다듬어져 있었다.
“유하야. 우리 아버지는 여든셋이다. 이 산에 학교를 맨손으로 세우셨다. 전기도 안 들어오던 데다가. 네가 지금 뒤지고 있는 건 한 노인의 무덤이다.”
“그 노인은 살아 계시잖아요. 문재언이 죽었고요.”
“사십일 년 전 일이다. 그걸로 지금 백스물여덟을 흔들 거냐? 시월에 오십 주년 행사가 있다. 교육청에서도 오고 신문사에서도 온다. 그 전에 착공해야 돈이 나온다. 네가 떠드는 소리 하나에 사십이억이 날아가면, 그다음에 기숙사비 못 내는 스무 명은 어디로 가냐? 한결이는?”
한결이 이름이 나오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교감은 그걸 봤다. 사람이 어디서 입을 다무는지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오십 년짜리 학교를 이십 년째 버티게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교감이 돌아섰다.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 처음으로 교감 얼굴에서 웃음 비슷한 것이 전부 빠졌다.
그가 책상 서랍에서 서류 한 장을 꺼냈다. 이미 반쯤 채워져 있었다. 학생 전학 권고 결정서. 이름 유하. 사유 품행 불량 및 학교 명예 훼손. 아래에 결재란이 셋 있었다. 교감, 학년부장, 사감.
“삼 층엔 안 올라갔더구나. 약속은 지켰어. 그런데 학교 명예는 삼 층에만 있는 게 아니다.”
그가 교감 칸에 서명했다. 이번에는 도장을 한 번에 찍었다. 어긋나지 않았다.
“사감 선생님 확인만 받으면 다음 주에 나간다. 이번엔 가정 사정이 아니라 권고 전학이다. 다음 학교가 그 네 글자를 먼저 보겠지.”
나는 서류를 봤다. 사유 칸에 글자가 있었다. 윤보라의 「가사」처럼, 하목이의 「기물 파손」처럼, 학교가 적을 수 있는 말만 적혀 있었다.
*
교감실을 나와 운동장을 가로지르는데 관사 마당에서 노인이 향나무를 다듬고 있었다. 흰 러닝셔츠에 회색 바지를 입었고, 가위를 쥔 손이 크고 두꺼웠다. 여든셋이라는데 허리가 굽지 않았다. 가위가 가지를 자를 때마다 향나무 냄새가 담장 너머까지 퍼졌다. 쨍한, 코가 따가운 냄새였다.
노인이 가위를 멈추고 나를 봤다. 담장이 가슴께까지밖에 안 와서 얼굴이 다 보였다. 눈썹이 하얗고 눈이 맑았다.
“서관 계단은 미끄럽지. 나무라서.”
노인이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노인은 다시 향나무 쪽으로 돌아섰다.
“조심해라. 거기는 옛날부터 미끄러웠다.”
노인의 목소리는 나무랄 데 없이 다정했다. 손주한테 계단 조심하라고 이르는 할아버지 목소리였다. 그 다정함이 담장을 넘어오는 동안 내 등에 땀이 식었다. 노인은 내 이름을 묻지 않았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가위 소리가 다시 났다. 싹둑, 싹둑. 나는 그 소리를 세면서 기숙사까지 걸었다. 여든셋 번째에서 기숙사 문에 닿았다. 일부러 맞춘 게 아니었는데 그 숫자가 발밑에 오래 붙어 있었다.
*
그날 밤 나는 삼 층에 가지 않았다. 대신 도경 선배와 한결이가 갔다. 둘은 벌점이 이십 점에 한참 모자랐다. 나는 207호 불을 끄고 창가에 앉아 서관 3층 창을 봤다. 창 하나에 불이 들어왔다가 꺼졌다. 한 시간쯤 뒤에 둘이 돌아왔다. 한결이가 먼저 들어왔는데 얼굴이 하얬고 입술이 파랬다. 도경 선배는 문을 닫고 한참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
“형, 문이 열넷이에요.”
한결이가 말했다.
“왼쪽 네 번째랑 다섯 번째 사이, 제 문 있다는 자리 바로 옆에 하나 더 생겼어요. 제 건 저한테 안 보이는데 그건 보였어요. 문 아래 빛이 새요. 바닥에 글자가 떠 있어요.”
한결이가 숨을 삼켰다. 내 이름을 말하기 싫은 얼굴이었다. 말해야 하는 얼굴이기도 했다.
“유하라고 써 있어요.”
도경 선배가 문고리에서 손을 뗐다.
“네 문은 따뜻해. 다른 문들은 문 앞이 추운데 네 문 앞은 난로 옆 같아. 아직 안 닫힌 문이라서 그런가 봐. 서류가 아직 다 안 채워졌으니까.”
“안에서 소리 나요?”
“전화 소리.”
선배가 말했다.
“유선 전화기 신호음이 계속 가. 아무도 안 받아.”
나는 창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서관 3층 창은 이제 까맸다. 교감 서랍 속 서류에 교감 서명 하나가 들어간 날, 밤의 복도는 벌써 나를 셌다. 사감 서명 하나가 남아 있었다. 나는 수첩 마지막 장의 가늘고 반듯한 글씨를 손끝으로 쓸었다. 넉 초는 그 아이가 시를 외울 때 숨 쉬던 박자다. 그 글씨를 쓴 사람의 손에 이제 내 서류가 넘어갈 차례였다. 선생님이 서명하면 내 문은 닫히고, 서명하지 않으면 선생님 문이 열릴 것 같았다. 선생님에게도 그런 문이 있다면 말이다. 나는 그 밤 내내 전화 신호음이 가는 소리를 상상했다. 받는 사람 없이 길게 이어지는 신호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