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120자) · 도경 · 5월 8일

동의서

밤의 복도에서 세 번째 문 · 백해원

만 19세 이상 이용가

나 도경은 거짓말을 딱 한 가지만 못 한다. 의대 이야기다. 작년 봄 서관 3층 안쪽 복도에서 문 하나를 열면서 그 말을 내놓았고, 그 뒤로 누가 그 얘기를 꺼내면 참말이 먼저 나간다. 다른 거짓말은 잘한다. 한결이 과자를 안 먹었다고 하는 것쯤은 눈을 왼쪽으로 한 번 굴리면 된다. 문제는 세상이 생각보다 자주 의대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이다. 삼 학년 오월이면 특히 그렇다.

5월 8일 아침, 교감실에 불려 갔다. 유하의 퇴사 심의가 오후 네 시였다. 교감은 난로 대신 선풍기를 틀어 놓고 있었다. 날개 하나에 먼지가 두껍게 앉아서 돌 때마다 딸깍 소리가 났다. 책상 위에 서류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맨 위에 굵은 글씨로 학생 대표 의견서. 아래에 한 줄. 본인은 서율원 학생을 대표하여 서관 철거 및 신축 기숙사 건립에 동의합니다. 그 아래 서명란이 비어 있었다.

“석 달째 미루고 있더구나, 도경이.”

“검토 중입니다.”

“뭘 검토하냐.”

교감이 서랍에서 종이를 한 장 더 꺼냈다. 숫자가 빽빽했다. 올해 신입생 서른여섯, 오 년 전엔 쉰둘. 기숙사비 체납 스무 명, 체납액 합계. 서관 안전진단 D등급, 보수 비용 추정치. 교육청 지원금 사십이억, 조건은 서관 부지 철거 후 신축. 교감은 그 숫자들을 볼펜 끝으로 하나씩 짚었다. 볼펜이 종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선풍기 딸깍 소리와 박자가 맞았다.

“이대로면 삼 년 안에 문 닫는다. 백스물여덟이 다 흩어진다. 너희 3학년은 졸업하고 나가면 그만이지만, 한결이 같은 애들은 네 번째 학교를 찾아야 한다. 네 서명 하나로 그걸 막는다.”

틀린 숫자는 하나도 없었다. 나는 학생회장이라 그 숫자를 교감보다 먼저 알았다. 작년 가을 예산 설명회 때 이미 봤다. 그래서 석 달 동안 서명을 미뤘다. 숫자가 맞아서 미룬 게 아니라, 숫자가 맞는데도 손이 안 가서 미뤘다.

“그리고 아버님이 어제 이사회에서 말씀하시더구나.”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가 재단 이사라는 걸 잊고 있었다. 읍내 내과 원장이 재단 이사를 맡는 건 이 동네에서는 별일도 아니었다.

“네가 의대 안 가겠다고 했다고. 그게 사실이냐?”

“네. 안 갑니다.”

입이 먼저 움직였다. 교감이 볼펜을 내려놓았다. 선풍기가 딸깍, 하고 한 번 더 돌았다.

“아버님 속이 어떠시겠냐. 오후에 심의 들어와서 학생 대표답게 굴어라.”

*

점심에 유하와 한결이가 식당 구석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반찬은 제육볶음이었는데 한결이가 제 몫을 절반이나 내 식판에 덜어 놓았다. 한결이가 음식을 덜어 주는 건 부탁이 있을 때다.

“선배, 교감이 서명하라고 했죠?”

유하가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제육을 한 점 집었다. 매웠다. 이 식당 제육은 늘 설탕이 모자랐다.

“하지 마세요. 저 때문이면 더 하지 마세요. 저는 퇴사당해도 돼요. 엄마한테는 제가 말할게요.”

“너 네 번째 학교는 없다며.”

“없으면 없는 대로 해요.”

유하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았다. 문 앞에서 말 하나를 내놓은 뒤로 유하는 목소리가 조금 달라졌다. 전에는 끝을 흐렸는데 요즘은 끝까지 말했다. 끝까지 말하는 사람 앞에서는 나도 끝까지 들어야 했다.

“형, 선배가 서명하면 그 문들 다 어떻게 돼요?”

한결이가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한결이가 제육을 제 식판으로 다시 조금 옮겨 갔다. 부탁이 안 먹혔을 때 하는 행동이었다.

*

네 시, 본관 이 층 회의실. 긴 탁자 한쪽에 교감, 학년부장 남 선생님, 생활부 윤 선생님, 보건 선생님, 그리고 사감 선생님이 앉았다. 맞은편에 유하와 유하 어머니가 앉았다. 유하 어머니는 새벽 첫차를 타고 네 시간을 걸려 왔다고 했다. 무릎 위에 가방을 올려놓고 두 손으로 손잡이를 꼭 쥐고 있었다. 손톱 끝에 가게 박스 테이프를 뜯다가 난 듯한 작은 상처가 여럿 있었다. 나는 탁자 끝, 학생 대표 자리에 앉았다. 회의실에는 커피 냄새와 새로 깐 리놀륨 냄새가 섞여 있었고, 창문은 닫혀 있었는데도 서관 쪽에서 무언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윤 선생님이 벌점 내역을 읽었다. 4월 6일, 서관 3층 무단 출입. 4월 10일, 교감 지시 불이행. 4월 21일, 서관 3층 무단 출입. 날짜와 시각이 분까지 적혀 있었다. 한결이가 적어 낸 그 글씨가 여기서 또박또박한 인쇄 글자가 되어 나오고 있었다. 유하 어머니가 시각을 들을 때마다 조금씩 어깨를 움츠렸다.

“학생, 왜 자꾸 거기에 올라갔니?”

남 선생님이 물었다. 유하는 숨을 한 번 쉬었다. 넉 초짜리 숨이었다.

“거기 문이 있어서요. 이 학교에서 없던 일로 처리된 사람들 문이요.”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보건 선생님이 커피잔을 내려놓다가 받침에 부딪쳤다. 교감만 표정이 그대로였다.

“어머님, 들으셨습니까. 이게 지금 이 학생 상태입니다. 저 건물은 D등급입니다. 거기서 헛것을 보고 다니다 떨어지기라도 하면 학교는 책임을 못 집니다.”

유하 어머니가 가방 손잡이를 더 세게 쥐었다. 그러고는 유하를 보지 않고 교감을 보면서 말했다.

“우리 애가 헛것 보는 애는 아니에요. 무서운 걸 무섭다고 말 못 하는 애예요. 그게 문제였어요. 헛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감 선생님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 숙였다. 탁자 밑에서 사감 선생님 무릎이 떨리고 있는 것을 나는 봤다. 탁자 끝 자리에서는 그게 보였다.

“학생 대표 의견은 어떤가?”

교감이 나를 봤다. 나는 대답을 고르려고 했다. 그때 남 선생님이 끼어들었다.

“도경이는 의대 준비로 바쁠 텐데 이런 일까지 맡아서 고생이다.”

“저 의대 안 갑니다.”

회의실이 두 번째로 조용해졌다. 유하가 탁자 밑에서 제 무릎을 꼬집었다. 웃음을 참는 거였다. 이 와중에 웃음이 나오는 게 이상했는데, 나도 입꼬리가 올라가려고 해서 볼 안쪽을 깨물었다. 남 선생님이 「아, 그래?」 하고 커피를 마셨다. 커피는 비어 있었다.

“도경아. 학생 대표 의견.”

교감이 다시 말했다. 목소리가 한 칸 낮아져 있었다.

나는 교감을 봤다. 교감 앞에 서류철이 있었다. 그 맨 위에 오늘 아침 본 학생 대표 의견서가 서명란이 빈 채로 끼워져 있었다. 교감은 그걸 나한테 보여 주려고 일부러 맨 위에 올려놓았다. 거래를 하자고 내민 종이였다. 나는 그걸 알았고, 교감도 내가 안다는 걸 알았다. 선풍기도 없는 회의실이 갑자기 더웠다.

“유하는 제 룸메이트입니다. 제가 처음 규칙 스물두 개를 알려 줬고, 스물두 번째를 알려 준 것도 저입니다. 올라가지 말라고 했지만, 올라가면 뭐가 있는지도 제가 흘렸습니다. 벌을 주시려면 저한테도 주셔야 합니다.”

“그건 학생 대표 의견이 아니라 네 사정이다.”

“그럼 학생 대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서류철 쪽으로 손을 뻗었다. 교감이 서류를 내 쪽으로 밀었다. 망설임이 없었다. 볼펜까지 같이 밀었다.

“제가 이 의견서에 서명하겠습니다. 대신 유하 학생 벌점을 초기화하고, 이 심의는 없던 걸로 해 주십시오.”

유하가 의자에서 반쯤 일어났다.

“선배, 그거 서명하면 서관이.”

“앉아.”

내가 말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컸다. 유하가 앉았다. 유하 어머니가 유하의 소매를 잡고 있었다.

교감은 대답 대신 다른 선생님들을 둘러봤다. 남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고, 윤 선생님이 따라 끄덕였다. 보건 선생님은 빈 잔을 봤다. 사감 선생님은 아무것도 안 했다.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았다. 교감이 사감 선생님 쪽을 한 번 더 봤다. 사감 선생님은 끝내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나는 서명했다. 이름 두 글자를 쓰는 데 삼 초가 걸렸다. 볼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회의실 안에서 제일 컸다. 서명하는 손이 떨리지 않은 게 나는 싫었다.

“심의는 취소한다. 유하 학생 벌점은 초기화. 대신 한 번만 더 서관 3층에 올라가면 그때는 이 서명과 상관없이 끝이다.”

교감이 서류를 챙겨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나를 보고 한 번 웃었다. 입꼬리만 올라간 웃음이었다. 나는 그 웃음을 오래 기억할 것 같았다. 서류철을 옆구리에 끼고 나가는 교감의 구두 소리가 복도 끝까지 또각또각 이어지다가 계단에서 끊겼다.

*

저녁에 유하 어머니가 마지막 버스를 타러 내려갔다. 유하가 정류장까지 배웅했다. 나는 207호 창문으로 둘이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것을 봤다. 유하 어머니가 중간에 멈춰 서서 유하 머리를 한 번 쓸었다. 유하는 가만히 있었다. 한결이는 내 옆에서 창틀에 턱을 괴고 「저 두 분 걸음이 똑같아요」라고 했다. 정말 그랬다. 왼발을 조금 끄는 것까지 같았다.

일곱 시 반에 사감실에서 방송이 나왔다. 도경 학생, 전화. 한 달 만이었다.

사감실 유선 전화기 줄은 여전히 꼬여 있었다. 사감 선생님은 자리를 비켜 주려고 일어섰다가, 문 앞에서 멈춰 서서 창밖을 봤다. 나가지 않았다. 나는 허리를 굽혀 수화기를 귀에 댔다.

“이사회에서 들었다. 서명했다며.”

아버지 목소리였다. 병원 진료실에서 환자한테 하는 목소리와 똑같았다.

“네.”

“잘했다. 학교가 살아야지.”

아버지가 잠깐 말을 멈췄다. 뒤에서 누군가 원장님, 하고 불렀다. 아버지가 수화기를 막고 뭐라고 대답하는 소리가 먹먹하게 들렸다. 그러고는 다시 돌아왔다.

“의대는?”

“안 가요.”

“그럼 뭐 할 거냐?”

“아직 몰라요.”

수화기 너머가 조용했다. 작년처럼 삼십 초가 지났다. 나는 아버지가 끊을 거라고 생각했다. 수화기를 쥔 손에 땀이 뱄다. 그런데 사십 초가 지나고 오십 초가 지나도 끊기지 않았다. 아버지의 숨소리가 들렸다. 들이쉬고 내쉬는 데 오래 걸렸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게 맞지.”

아버지가 말했다. 그리고 한참 더 있다가 전화를 끊었다. 이번에는 끊기 전에 「밥 먹어라」라고 했다. 일 년 만에 들은, 의대하고 아무 상관 없는 말이었다. 나는 끊긴 수화기를 바로 내려놓지 못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돌아서니 사감 선생님이 아직 창가에 서 있었다. 선생님은 서관 3층을 보고 있었다. 창 하나에 불이 켜져 있었다. 선생님이 나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서명 잘했다는 말은 안 하마.”

“네.”

“잘못했다는 말도 안 하고.”

선생님은 그 말만 하고 화분에 물을 줬다. 물뿌리개에서 물이 넘치도록 떨어졌다. 나는 207호로 돌아와 창문 앞에 앉았다. 서관 3층 불은 자정이 넘도록 꺼지지 않았다. 그 불빛 아래에서 문 열세 개가 헐릴 날을 세고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 불이 꺼질 때까지 앉아 있으려 했는데, 한결이가 자면서 내 이불을 다 가져가는 바람에 새벽 한 시에 포기했다.

7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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