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110자) · 유하 · 4월 10일

사유 칸

밤의 복도에서 세 번째 문 · 백해원

만 19세 이상 이용가

토요일 아침 서관 1층 도서관 앞에서 청소하시는 정 여사님이 대걸레를 벽에 기대 놓고 화를 내고 있었다. 들통에 담긴 물에서 락스 냄새가 올라와 눈이 따가웠다.

“누가 삼 층 벽에 연필로 이름을 써 놨어. 지우개로 지우면 도로 올라와. 물걸레로 닦아도 올라와. 내가 이 학교에서 이십 년을 닦았는데 이런 연필은 처음 봐.”

한결이가 내 옆구리를 찔렀다. 나는 모르는 척 대출 반납함에 책을 넣었다. 책이 떨어지는 소리가 쿵 하고 났다.

“무슨 이름인데요?”

한결이가 물었다. 한결이는 이런 걸 참지 못했다.

“윤, 뭐라더라. 보라. 보라색 할 때 보라.”

정 여사님은 대걸레 자루를 들고 계단 쪽을 올려다보았다. 삼 층 방화문의 철망 유리 너머로 연녹색 벽이 조금 보였다. 거리가 멀어서 글씨는 안 보였다. 그래도 나는 그 자리가 어디인지 알았다. 창고 문 옆, 14라는 숫자 바로 아래였다.

“폐쇄한다며 자물쇠까지 걸어 놓고, 밤에 누가 올라가는 거야. 교감 선생님한테 말씀드렸어.”

한결이가 내 옆구리를 두 번째로 찔렀다. 이번에는 아팠다.

*

교감실 난로는 꺼져 있었다. 대신 책상 위에 보온병이 있었고, 권태석 교감은 뚜껑에 보리차를 따라 마시면서 나를 세워 두었다. 앉으라는 말은 없었다.

“서관 3층, 갔지?”

“안 갔어요.”

말이 쉽게 나왔다. 거짓말이 나왔다. 나는 그것이 이상하게 반가웠다. 도경 선배 말대로 문 앞에서 한 그 얘기가 아니면 거짓말은 여전히 되었다.

교감이 보온병 뚜껑을 내려놓았다. 책상 서랍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내 쪽으로 밀었다. 두 번째 학교의 생활기록부 사본이었다. 행동특성 칸이 형광펜으로 칠해져 있었다.

“어제 그쪽 교감 선생님이랑 다시 통화했다. 작년 시월 화장실 일. 목격자가 한 명 있었는데 끝까지 못 봤다고 했다지. 그게 너냐?”

“네. 제가 봤어요.”

입이 먼저 열렸다. 목구멍에서 무언가가 밀려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삼키려고 했는데 삼켜지지 않았다.

“셋이었어요. 2학년 한동우, 박진서, 최은규요. 민재는 세면대 밑에 있었어요. 저는 사십 초쯤 보다가 나왔어요.”

교감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내가 이렇게 쉽게 말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나도 그랬다. 이름 셋이 교감실 공기에 떠서 내려앉지 않았다.

“그걸 왜 이제 말하지?”

“그때는 못 했어요.”

“그럼 넌 방관자다.”

그가 펜을 들어 상담 기록지에 뭔가를 적었다. 적는 소리가 길었다.

“학교폭력 방관, 허위 진술. 이건 네 어머니한테도 알려야겠다. 그리고 유하 학생, 여기서 한 번만 더 일을 만들면 끝이다. 전학이 아니라 끝이야. 알아듣지?”

“선생님은 뭐 하시려고 그 학교에 전화하셨어요?”

말이 또 먼저 나갔다. 이번에는 문 앞에서 한 얘기가 아니었다. 그냥 내가 한 말이었다. 교감이 펜을 멈췄다.

“학생 관리다.”

“관리하시려고 그 얘기를 찾으신 거죠. 저를 조용히 시키려고요.”

“그 수첩 내놔라.”

그가 내 셔츠 주머니를 가리켰다. 수첩 모서리가 튀어나와 있었다. 계단 수, 복도 걸음, 문 열세 개, 그리고 어젯밤 적은 이름 하나가 들어 있었다.

“이건 제 거예요.”

“학교 안에서 학생 물건은 학교가 보관할 수 있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 밑에서 수첩 스프링이 눌렸다. 교감과 나 사이에 책상 하나가 있었다. 그는 일어서지 않았다. 대신 수화기를 들었다.

“사감 선생님 좀 올라오시라고 해.”

나는 그 틈에 인사를 하고 나왔다. 문을 닫을 때 그의 목소리가 등 뒤로 따라 나왔다. 벌점 추가, 교감 지시 불이행. 복도를 걸으며 나는 걸음을 셌다. 교감실에서 계단까지 서른한 걸음이었다. 다리가 계속 떨려서 스물다섯에서 한 번 다시 세었다.

*

점심이 끝날 무렵 사감실에서 나를 불렀다. 엄마 전화였다. 사감실 유선 전화기는 베이지색이었고 수화기 줄이 여러 번 꼬여 있어서, 귀에 대려면 허리를 굽혀야 했다. 사감 선생님은 창가에 등을 돌리고 서서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물뿌리개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규칙적이었다.

“교감 선생님이 전화하셨어.”

엄마 목소리가 낮았다. 가게 계산대 앞에서 거는 전화인지 뒤로 바코드 찍는 소리가 났다. 삑, 삑. 두 번 나고 멈췄다.

“민재라는 애가 맞는 걸 네가 봤다고. 네가 못 봤다고 했다고. 그게 사실이야?”

“응. 봤어.”

말은 쉽게 나왔다. 쉽게 나온 것이 무서웠다. 엄마가 한참 아무 말도 안 했다. 삑 소리가 한 번 더 났다.

“그래서 옮기자고 한 거였니? 가정 사정이라고 네가 먼저 말했잖아. 엄마는 엄마 때문인 줄 알았어. 가게 옮기느라, 그래서.”

“엄마 때문 아니야.”

“그럼 왜 말 안 했어?”

“무서워서.”

수화기 너머에서 엄마가 숨을 들이쉬었다. 들이쉬는 소리가 길었다. 나는 수화기 줄을 손가락에 감았다. 한 바퀴, 두 바퀴 감다가 손끝이 하얘졌다.

“유하야, 엄마는 네가 무서웠다는 말을 지금 처음 들어.”

엄마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게 더 견디기 어려웠다. 전화를 끊고 돌아서자 사감 선생님이 물뿌리개를 든 채 나를 보고 있었다. 화분 흙이 넘치도록 물이 고여 있었다. 선생님은 그걸 모르는 것 같았다.

*

한결이는 사감실 열쇠 꾸러미를 빌려 오는 데 이십 분이 걸렸다. 방법을 물었더니 한결이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선생님 커피 타 드리고, 설탕 두 스푼 넣으시냐고 여쭤보고, 틀려서 다시 타 드리고, 또 틀려서 다시 타 드렸어요. 세 번째에 선생님이 열쇠 들고 가서 도서부 반납이나 하라고 하셨어요.”

“설탕을 몇 스푼 넣었는데?”

“처음엔 네 스푼이요. 두 번째는 영이요. 세 번째가 두 스푼이요.”

“일부러?”

“아뇨, 진짜 몰랐어요.”

지하 서고는 서관 1층 도서관 사서실 뒤, 철문을 열고 계단을 열두 칸 내려가야 했다. 형광등을 켜니 두 개 중 하나만 들어왔다. 공기는 서늘하고 축축했고, 곰팡이와 오래된 풀 냄새가 벽돌 틈에서 배어 나왔다. 숨을 쉴 때마다 혀끝에 먼지 맛이 났다. 궤짝이 여섯, 벽을 따라 줄지어 있었다. 뚜껑에 흰 페인트로 연도가 적혀 있었다. 1976~1985, 1986~1995, 그렇게 십 년씩.

1996~2005 궤짝에서 1998년 명부를 찾았다. 한지에 먹지를 대고 쓴 것 같은 얇은 종이였다. 3학년 칸을 따라 손가락을 내려가다 멈췄다.

윤보라. 1998년 12월 31일 제적. 사유 칸에는 두 글자가 있었다.

가사

“가사면 집안 사정이잖아요.”

한결이가 어깨 너머로 봤다.

“본인이 그만둔 거면 자퇴라고 쓰잖아. 여기는 제적이야. 학교가 내보낸 거야.”

나는 옆 궤짝에서 성적 대장을 꺼냈다. 같은 해 3학년 2학기 기말. 윤보라, 수학 87. 국어 91. 한 과목도 빠지지 않았다. 12월 17일까지 다 봤다. 그리고 2주 뒤에 제적이었다.

나는 그 두 장을 나란히 놓았다. 한 장은 이 아이가 끝까지 다 했다고 말하고, 한 장은 이 아이가 집안 사정으로 사라졌다고 말했다. 같은 학교가 같은 해에 쓴 종이였다. 어젯밤 문 뒤에서 들은 목소리가 귀 안쪽에서 한 번 더 울렸다. 수학은 팔십칠이야. 목소리가 말한 숫자와 종이의 숫자가 같았다. 나는 그 숫자를 손톱으로 한 번 눌러 보았다. 종이가 얇아서 손톱 자국이 뒷장까지 배었다.

그다음부터는 둘이 손가락으로 셌다. 오십 년 치 명부에서 졸업 말고 중간에 나간 학생을 전부 짚었다. 한 시간이 걸렸다. 한결이는 처음 스무 명까지는 제 손가락으로 세다가 「형, 손가락이 모자라요」 하고는 제 발가락을 보려고 양말을 벗으려 했다. 내가 말렸다. 한결이는 중간에 두 번 졸았고, 한 번은 명부에 침을 흘릴 뻔해서 내가 이마를 받쳤다. 중간에 나간 학생은 백아흔넷이었다. 그중 사유 칸이 아예 빈 사람이 열넷이었다. 사유 칸에 「가사」 두 글자만 있고 아무 설명도 없는 사람이 서른하나였다.

“벽에 있는 14가 이거였네요.”

한결이가 속삭였다. 서고에서는 다들 속삭이게 된다.

“누가 먼저 셌어.”

“그럼 가사 서른하나까지 치면 마흔다섯이에요.”

“윤보라처럼 사유가 거짓인 사람까지 치면 더 많아.”

“형, 그럼 문이 열셋인 건 적은 거 아니에요?”

나는 대답을 못 했다. 세다 보니 수가 줄지 않고 계속 늘었다. 늘기만 하는 셈은 처음이었다.

“거기서 뭐 하니.”

서고 계단 위에 사감 선생님이 서 있었다. 형광등 하나가 선생님 얼굴 반쪽만 비췄다. 한결이가 열쇠 꾸러미를 등 뒤로 숨겼다. 쇠끼리 부딪혀 짤랑 소리가 났다. 숨긴 의미가 없었다.

선생님이 계단을 내려왔다. 한 칸 한 칸 무겁게 내려왔다. 명부가 펼쳐진 궤짝 앞에 서서 윤보라라는 이름을 내려다봤다. 선생님의 손가락이 그 이름 위에 잠깐 떴다가 내려앉지 않았다.

“보라는 내가 가르쳤다. 여기 온 첫해였다. 국어를 잘했어. 시를 외우면 끝까지 틀리지 않았지.”

“선생님은 아셨어요? 졸업장 못 받은 거요.”

“알았다.”

선생님이 명부를 덮었다. 덮는 손이 조금 떨렸는데, 나는 그 떨림을 못 본 척했다.

“알았는데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때 사감은 내가 아니었으니까.”

선생님은 말을 끊고 형광등을 올려다봤다. 들어오지 않는 쪽 형광등이 한 번 깜빡이려다 말았다. 선생님의 입이 무언가를 더 말하려는 모양으로 열렸다가 닫혔다. 나는 그 입 모양을 알았다. 어젯밤 문 앞에 서기 전까지 내가 이 년 동안 하던 입 모양이었다. 말이 목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가는 사람의 입이었다.

“그럼 누구였어요?”

선생님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한결이 손에서 열쇠 꾸러미를 가져갔다. 그리고 제일 안쪽, 1976~1985 궤짝의 뚜껑이 한 뼘쯤 열려 있는 것을 보더니 발로 밀어 닫았다. 쿵 소리가 서고 벽돌에 부딪혀 한참 울렸다.

“그 궤짝은 열지 마라. 교감 선생님이 다음 주에 명부를 전부 재단 사무실로 옮기신다.”

“옮기면요?”

“그다음은 나도 모른다.”

선생님이 계단을 올라갔다. 올라가면서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한결이가 내 소매를 잡았다.

“형, 저 설탕 두 스푼 맞게 탔는데 왜 혼나는 기분이에요?”

나는 웃지 못했다. 한결이 얼굴에도 웃음기는 없었다. 한결이는 농담을 할 때가 제일 겁먹은 때라는 걸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서고 공기가 갑자기 1도쯤 더 내려간 것 같았다. 나는 팔짱을 끼고 그 추위를 참았다. 닫힌 궤짝 뚜껑 위에 흰 페인트로 적힌 연도가 보였다. 1985라는 숫자가 제일 크게 벗겨져 있었다. 누가 손톱으로 여러 번 긁은 자국이었다.

3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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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곱줄2026.05.16· 3화

    설정이 과하지 않게 깔려서 편하게 따라갔습니다.

    • 조용한책상2026.05.17

      저도 그 장면에서 멈췄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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