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516자)

전쟁과 디오니소스

니체의 삶 · 네오

2월 1일 저녁, 그는 소크라테스를 공격했다.

바젤 박물관 강당에서였다. 시민을 위한 공개 강연이었고 지난달에 한 「그리스 음악극」의 후속이었다. 지난달 강연은 무사했다. 그리스 비극이 읽는 글이 아니라 노래와 춤과 음악이 함께 있는 공연이었다는 말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은 달랐다. 그는 그 비극이 왜 죽었는지를 말했고, 죽인 사람의 이름을 댔다. 에우리피데스, 그리고 그 뒤에 선 소크라테스.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고 믿은 사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름다울 수 없다고 믿은 사람, 음악 대신 논증을 무대에 올린 사람. 그는 2천 년 동안 유럽이 스승으로 모셔 온 사람을 가리켜 비극의 살해자라고 했다.

강당이 조용했다. 지난달의 조용함과 달랐다. 그는 연단에서 그 차이를 느꼈다. 박수는 나왔다. 짧았다.

며칠 뒤 트립셴에서 편지가 왔다. 바그너였다. 강연 원고를 보냈더니 답이 온 것이었다. 바그너는 걱정하고 있었다. 당신이 목을 부러뜨릴까 봐 걱정이 된다고. 그런 말은 조심해서 해야 한다고, 세상은 아직 그 말을 들을 준비가 안 되었다고. 코지마가 덧붙인 줄도 있었다. 선생님은 너무 많은 것을 너무 빨리 말씀하세요.

그는 그 편지를 두 번 읽었다. 걱정이었다. 걱정은 사랑이었다. 그런데 걱정 속에 다른 것이 있었다. 너무 빨리. 그는 그 말을 보면서 자기가 느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말이 느리고 걸음이 느렸다. 그런데 생각은 빨랐다. 그 둘 사이에 사람들이 넘어졌다.

로데에게 그는 썼다. 강연이 공포와 오해를 일으켰다고. 쓰면서 그는 그 문장이 자랑처럼 읽힐까 봐 고쳤다. 고치고 보니 자랑이 더 드러났다. 그는 그대로 보냈다.

4월에 오버베크가 왔다.

프란츠 오버베크. 서른둘, 신학 교수, 예나에서 초빙되어 왔고, 같은 집 아래층에 들었다. 슈첸그라벤 45번지, 바우만이라는 사람의 집이라 둘은 그 집을 바우만의 동굴이라고 불렀다. 신학자가 아래층에 살고 소크라테스를 죽인 사람이 위층에 살았다.

둘은 저녁마다 만났다. 오버베크의 방에서였다. 오버베크는 교회사를 가르쳤는데 자기가 가르치는 교회를 거의 믿지 않았다. 그렇다고 믿지 않는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런 사람을 처음 보았다.

“믿지 않으면서 어떻게 가르칩니까?”

“믿지 않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은 다르지요. 나는 교회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압니다. 그걸 가르칩니다.”

“그러면 학생들은요?”

“학생들은 믿든지 말든지 하겠지요. 내 일이 아닙니다.”

그는 그 대답이 비겁한지 정직한지 한참 생각했다. 생각하다가 둘 다라고 결론을 내렸고, 그 결론이 오버베크를 더 좋아하게 만들었다. 오버베크는 그의 쇼펜하우어 이야기를 들었고 바그너 이야기를 들었고 소크라테스 이야기를 들었다. 동의하지 않았다.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냥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저녁에 또 들었다. 그는 그런 사람을 처음 보았다.

여름에 그는 「디오니소스적 세계관」을 썼다.

트립셴에서 돌아온 밤들이었다. 바그너의 음악을 듣고 돌아와 책상에 앉으면 몸 안에 아직 소리가 남아 있었고, 그는 그 소리가 무엇인지를 적으려고 했다. 그리스에는 신이 둘이었다. 아폴론은 꿈의 신이었다. 또렷한 형상, 경계, 개인, 조각과 서사시. 디오니소스는 도취의 신이었다. 형상이 녹고 경계가 사라지고 개인이 없어지는 것, 음악과 춤. 그리스 비극은 둘이 만난 자리였다. 디오니소스의 음악 위에 아폴론의 형상이 선 것. 그래서 비극은 사람에게 가장 끔찍한 것을 보여 주면서 사람을 살게 했다.

그는 그것을 적으면서 자기가 무엇을 적고 있는지 알았다. 피아노 밑에서 들은 소리. 트립셴 길에서 들은 화음. 아버지의 손과 바그너의 손. 그것들이 디오니소스였다. 그리고 지금 그것을 또렷한 문장으로 적고 있는 자기가 아폴론이었다. 둘이 한 사람 안에 있었다. 그는 그것을 적지 않았다. 적으면 너무 개인적인 글이 될 것 같았다.

7월 19일에 전쟁이 났다.

프랑스가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했고 독일의 모든 나라가 프로이센 편에 섰다. 바젤은 스위스였고 스위스는 중립이었으며 그는 어느 나라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대학에 휴가를 청했다. 싸우러 가는 것이 아니라 간호병으로 가겠다고. 대학은 중립국의 교수가 교전국에 가는 것을 꺼렸다. 그는 간호는 중립이라고 했다. 허가가 났다.

어머니는 편지에 가지 말라고 쓰지 않았다. 네 가슴을 생각해라고만 썼다. 그는 가슴을 생각했다. 그리고 갔다.

에를랑겐에서 열흘 동안 붕대 감는 법과 상처 씻는 법과 들것 드는 법을 배웠다. 그다음에 기차를 타고 서쪽으로 갔다. 라인을 건넜다. 세 번째 라인이었다. 본의 라인, 바젤의 라인, 그리고 전쟁의 라인.

뵈르트의 들판에 도착한 것은 전투가 끝나고 3주 뒤였다.

시체는 치워져 있었다. 냄새는 치워지지 않았다. 그는 들판에 서서 그 냄새를 맡았다. 8월 말이었고 더웠고, 땅에 밴 것이 올라오고 있었다. 마을마다 부상병이 있었다. 교회에, 학교에, 헛간에. 그는 사흘 동안 그들 사이를 다녔다. 상처를 씻고 붕대를 갈고 물을 먹였다. 가슴의 흉터를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상처를 씻었다. 질산은이 닿을 때 그들은 소리를 냈다. 어머니가 손을 잡아 주지 않아서였다.

중상자 여섯을 카를스루에로 옮기라는 명령이 왔다.

가축 차량이었다. 창이 없고 바닥에 짚이 깔린 화차. 여섯이 짚 위에 누웠고 그가 그들과 함께 탔다. 사흘이었다. 사흘 동안 그는 그 안에 있었다. 둘은 뼈가 부러졌고 둘은 총상이었고 둘은 이질이었다. 이질은 쉬지 않고 쏟았다. 화차 안은 똥과 고름과 피 냄새로 가득 찼고 문을 열 수 없었으며, 그는 그 안에서 물을 먹이고 붕대를 갈고 토하는 사람의 머리를 받쳤다. 첫날 밤에 한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턱이 깨진 젊은 병사였는데 말이 새어 나왔다.

“선생님은 뭐 하는 분이십니까?”

“교수입니다.”

“뭘 가르치십니까?”

“그리스어.”

병사가 웃었다. 깨진 턱으로 웃어서 피가 났다. 그는 그 피를 닦아 주었다. 병사는 셋째 날 아침에 죽었다. 그는 병사의 눈을 감겨 주고 짚을 조금 덮어 주었다. 다른 다섯이 그것을 보았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카를스루에에서 그는 쓰러졌다. 이질이었다. 그리고 디프테리아. 화차 안에서 옮은 것이었다. 에를랑겐의 병원에서 그는 열흘 동안 누워 있었다. 그는 자기 몸에서 나오는 것을 또 보았다. 2년 전에는 고름이었고 이번에는 다른 것이었다. 몸이라는 것이 얼마나 쉽게 열리는지를 그는 알았다.

병원에서 그는 바그너에게 편지를 썼다.

손이 떨려서 글씨가 흔들렸다. 그는 자기가 본 것을 썼다. 그리고 그 뒤에 이렇게 썼다. 그 체험들의 대기가 어두운 안개처럼 자기를 감쌌다고. 한동안 끊이지 않는 신음 소리를 들었다고. 바그너의 답은 짧고 따뜻했다. 코지마의 글씨가 더 길었다.

9월에 그는 나움부르크로 옮겨졌다. 엘리자베트가 그를 간호했다. 동생은 스물네 살이었고 손이 빨랐다. 어머니는 방에 들어올 때마다 창문을 열었다. 냄새 때문이었다. 그의 외투에서 냄새가 났다. 빨아도 났다. 어머니는 결국 그 외투를 태웠고 그는 말리지 않았다.

10월 말에 그는 바젤로 돌아갔다. 전보다 더 말랐고 전보다 더 천천히 걸었다. 오버베크가 계단에서 그를 보고 아무 말 없이 가방을 받았다.

11월에 그는 게르스도르프에게 썼다.

「나는 지금의 프로이센을 문화에 가장 위험한 세력 가운데 하나로 본다.」[주 9-01]

프로이센이 이기고 있었다. 독일의 모든 도시에서 종이 울렸다. 그는 종이 울리는 것을 들으면서 그 문장을 썼다. 쓰고 나서 자기가 두 달 전에 프로이센 군대의 부상병을 씻었다는 것을 생각했다. 둘은 모순이 아니었다. 그는 그 둘이 모순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 설명하지 않았다. 그냥 썼다.

겨울에 그는 여름의 원고를 다시 썼다.

「디오니소스적 세계관」을 줄이고 날카롭게 해서 「비극적 사유의 탄생」이라고 제목을 바꾸었다. 손으로 깨끗이 옮겨 적었다. 코지마에게 줄 것이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그는 그것을 적으면서 화차 안의 냄새를 맡았다. 종이에서 나는 냄새가 아니었다. 자기 손에서 나는 냄새였다. 빨아도 났다. 그는 그 손으로 디오니소스를 적었다. 가장 끔찍한 것을 보여 주면서 사람을 살게 하는 것. 여름에 적을 때 그것은 생각이었다. 겨울에 적을 때 그것은 다른 것이었다.

크리스마스 아침에 그는 트립셴에 있었다.

코지마의 생일이었다. 그녀는 이제 바그너의 아내였다. 여름에 결혼했다. 아침에 그녀가 깨기 전에 바그너가 계단에 악사 열다섯을 세웠다. 그가 그들 사이에 서 있었다. 바그너가 지휘봉을 들었다. 음악이 시작되었다. 코지마를 위해 쓴 곡이었다. 아무도 들어 본 적 없는 곡.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 소리가 침실 문 앞에서 멈추었다가 문 아래로 스며들었다.

그는 그 음악을 들었다. 들으면서 자기 손을 보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추워서가 아니었다. 그는 그 손을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 안에 코지마에게 줄 원고가 있었다.

음악이 끝나고 코지마가 문을 열고 나왔다. 울고 있었다. 바그너가 그녀를 안았다. 아이들이 달려 나왔다. 개가 짖었다. 그는 계단 아래에서 그것을 보았다. 아침 햇빛이 창으로 들어와 계단에 길게 누웠다. 그는 주머니 속의 원고를 잡았다. 아직 꺼내지 않았다. 이 음악 뒤에 바로 디오니소스를 꺼낼 수는 없었다. 조금 기다려야 했다.

코지마가 계단 아래를 보았다. 그를 보았다. 그리고 그의 주머니에 든 손을 보았다.

후주

[주 9-01] 니체가 카를 폰 게르스도르프에게 보낸 편지, 1870년 11월 7일. eKGWB BVN-1870(번호는 비평판에서 재확인). 한국어 작업 번역. 전쟁 중 독일의 승리 분위기 속에서 쓴 편지다.

[근거 9-02] 1870년 1월 18일 「그리스 음악극」, 2월 1일 「소크라테스와 비극」 공개 강연. 두 번째 강연이 공포와 오해를 일으켰다는 것은 니체가 로데에게 쓴 편지의 표현이다. 바그너가 걱정하는 답장을 보낸 것은 사실이며 본문의 문구는 그 취지를 옮긴 것이다.

[근거 9-03] 1870년 4월 프란츠 오버베크가 바젤 신학 교수로 부임해 슈첸그라벤 45번지 같은 집에 들었다. 두 사람은 그 집을 「바우만의 동굴」이라 불렀다. 대화는 창작이다.

[근거 9-04] 1870년 여름 「디오니소스적 세계관」 집필. 겨울에 이를 고쳐 「비극적 사유의 탄생」으로 만들어 1870년 크리스마스에 코지마에게 선물했다.

[근거 9-05] 1870년 7월 19일 개전. 무국적자였던 니체는 바젤 대학의 허가를 받아 간호병으로 참전, 에를랑겐에서 훈련 뒤 8월 말 뵈르트 등 전장 지역에서 부상병을 돌보았고, 중상자 여섯을 가축 화차로 사흘 동안 카를스루에로 옮기다 이질과 디프테리아에 걸렸다. 에를랑겐 병원과 나움부르크에서 요양하고 10월 말 바젤로 돌아왔다. 「어두운 안개」 표현은 1870년 9월 바그너에게 보낸 편지에 근거한다.

[근거 9-06] 1870년 12월 25일 코지마의 생일 아침 트립셴 계단에서 「지크프리트 목가」가 처음 연주되었고 니체가 그 자리에 있었다. 코지마와 바그너는 1870년 8월에 결혼했다.

턱이 깨진 병사와의 대화, 어머니가 외투를 태운 것, 오버베크가 가방을 받은 것, 코지마에게 원고를 꺼내지 못한 순간은 소설의 창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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