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001자)
스물네 살의 교수
니체의 삶 · 네오
편지는 1월에 왔다.
리츨이 그를 서재로 불러 편지 한 장을 건넸다. 바젤 대학에서 온 것이었다. 고전문헌학 교수 자리가 비었는데 적임자를 추천해 달라는 내용이었고, 리츨은 이미 답장을 보냈다고 했다. 그는 편지를 두 번 읽고 리츨을 보았다.
“누구를 추천하셨습니까?”
“자네.”
“저는 박사도 아닙니다.”
“그건 내가 어떻게 해 보지.”
“저는 스물네 살입니다.”
“그건 자네가 어떻게 해 보게.”
리츨은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작고 빠르고 날카로운 사람이 웃는 것을 그는 처음 보았다. 리츨이 바젤에 보낸 추천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나중에 그는 들었다. 이 사람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 문장을 듣고 기뻤고, 기쁜 만큼 무서웠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는 아직 몰랐다.
2월에 바젤에서 임용 통지가 왔다. 고전문헌학 원외교수. 연봉 3천 프랑. 대학 강의와 함께 부속 김나지움에서 그리스어를 주 여섯 시간 가르칠 것. 3월에 라이프치히 대학이 그에게 박사 학위를 주었다. 시험 없이, 논문 없이, 이미 발표한 글들로. 학위증은 우편으로 왔다. 그는 봉투를 열고 양피지를 꺼내 들고 하숙방에 혼자 서 있었다. 축하해 줄 사람이 없어서 자기가 자기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것이 우스워서 웃었다.
4월에 그는 프로이센 국적을 버렸다.
바젤의 교수는 스위스 사람이어야 한다는 규정은 없었지만 프로이센 사람이 남의 나라 공직에 있으려면 서류가 복잡했고, 간단한 길은 국적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는 나움부르크 관청에 가서 서류 한 장에 서명했다. 관리가 도장을 찍었다. 그는 관청을 나오면서 자기가 이제 어느 나라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생각했다. 스위스 국적은 몇 해 살아야 받을 수 있었고 그때까지 그는 아무 데도 속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 생각이 싫지 않았다. 싫지 않은 것이 조금 놀라웠다.
어머니는 울지 않았다. 역에서 어머니는 그의 외투 단추를 하나 다시 끼워 주고 말했다.
“교수님.”
“어머니.”
“네 아버지가 보셨으면.”
그는 그 말이 올 줄 알았다. 알았는데도 가슴 어디가 당겼다. 흉터 자리였다. 엘리자베트가 옆에서 손수건을 쥐고 있었다. 기차가 움직였다.
바젤은 라인 강가에 있었다.
본의 라인과 같은 강이었는데 다른 강이었다. 본에서는 넓고 느리고 검었던 강이 여기서는 좁고 빠르고 초록이었다. 산에서 막 내려온 물이었다. 그는 첫날 저녁에 강가에 서서 그것을 보았다. 자기가 강을 거슬러 올라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도시는 작고 오래되고 부유했다. 몇백 년 된 상인 가문들이 몇백 년 된 집에 살았고, 대학은 그들이 세운 것이었으며, 교수는 그들이 고용한 사람이었다. 그는 슈팔렌토어베크에 방을 얻었다. 창에서 성문의 탑이 보였고, 아침마다 탑의 종이 그를 깨웠는데 슐포르타의 종보다 낮고 길어서 못이 아니라 손바닥으로 깨우는 것 같았다. 연봉 3천 프랑은 그가 평생 본 돈 가운데 가장 큰 돈이었고 바젤에서는 적은 돈이었다. 그는 그것을 첫 달에 알았다.
첫 수업은 김나지움이었다.
열다섯 살 열여섯 살이 열두 명 앉아 있었다. 그는 스물네 살이었다. 교실에 들어가서 교탁 앞에 섰을 때 맨 앞줄의 아이가 그를 보고 옆 아이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그는 그 아이를 보았다. 아이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칠판에 그리스 글자를 썼다. 손이 떨리지 않는 것이 스스로 신기했다. 아이스킬로스였다. 그는 아이들에게 그 문장을 읽게 했다. 아이들은 글자를 읽었다. 소리를 내지는 못했다. 그는 그것을 알았다. 글자와 소리가 다르다는 것을 아이들은 몰랐다.
“이것은 읽는 글이 아니었다. 듣는 글이었어. 노래였고.”
아이들이 그를 보았다. 그는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운율대로. 교실이 조용해졌다. 그가 다 읽었을 때 맨 앞줄의 아이가 물었다.
“선생님, 그러면 저희도 노래해야 합니까?”
교실이 웃었다. 그도 웃었다.
“아니. 하지만 노래였다는 것은 잊지 마라.”
그 아이의 이름을 그는 그날 외웠다.
5월에 그는 루체른행 기차를 탔다.
트립셴은 루체른 호숫가에 있었다. 바그너가 사는 집. 그는 반년 전의 초대를 잊지 않았고, 바그너도 잊지 않았기를 바라면서 갔다. 호수를 끼고 걷는 길이 20분이었다. 집은 호수 쪽으로 튀어나온 땅 위에 있었고, 집 앞에 포플러가 서 있었고, 호수 건너로 필라투스 산이 보였다. 그는 집에 가까이 가다가 멈추었다.
피아노 소리가 났다.
같은 화음이었다. 한 번, 다시 한 번, 또 한 번. 조금 바뀌어서 한 번. 누군가 안에서 한 화음을 찾고 있었다. 그는 길에 서서 그것을 들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소리가 어디로 갈지를 찾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랬다. 그는 그 자리에 얼마나 서 있었는지 몰랐다. 하인이 나와서 그를 보았다. 주인님은 작곡 중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습니다. 그는 명함을 두고 돌아섰다.
다음 날 초대장이 왔다. 월요일 점심에 오라고.
월요일에 그는 그 집의 식탁에 앉았다. 바그너가 있었고, 바그너의 옆에 키가 크고 코가 길고 눈이 깊은 여자가 있었다. 코지마. 아직 다른 사람의 아내였고 배가 불러 있었다. 아이들이 둘 있었고 개가 한 마리 있었다. 뉴펀들랜드 종의 커다란 검은 개였는데 이름이 루스였다. 바그너는 라이프치히에서보다 더 작아 보였고 더 커 보였다. 자기 집이어서였다.
식탁에서 말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은 바그너였고 가장 적게 한 사람은 코지마였는데, 코지마는 적게 말하면서 식탁의 모든 것을 움직이고 있었다. 하인이 접시를 바꾸는 때, 아이가 포크를 떨어뜨렸을 때 눈짓 하나로 조용해지는 것, 바그너의 말이 길어질 때 잔에 물을 따라 끊는 것. 그는 그것을 보았다. 코지마가 그에게 물었다.
“교수님은 목사님 아드님이시라고요.”
“네. 아버지는 제가 다섯 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신학을 하지 않으셨군요.”
“못 했습니다.”
코지마가 그를 보았다. 「안 했습니다」가 아니라 「못 했습니다」라고 한 것을 그녀가 들었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코지마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바그너 쪽으로 고개를 돌려 말했다.
“리하르트, 교수님께 어제 그 화음을 들려 드려요.”
점심을 먹고 바그너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어제 찾던 화음을 쳤다. 찾았다고 했다. 「지크프리트」 3막이었다. 그는 들었다. 어제 길에서 들은 소리가 집 안에서 완성되어 울렸다. 코지마가 그를 보고 있었다. 그는 그 시선을 느꼈고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자기 얼굴에 무엇이 있을지 알아서였다.
돌아오는 기차에서 그는 로데에게 편지를 썼다. 쓰다가 멈추고 창밖을 보고 다시 썼다. 쓸 말이 너무 많아서 쓸 수 없었다. 그는 결국 이렇게만 적었다. 이 사람 곁에 있으면 내가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다. 적어 놓고 보니 리츨의 추천서와 비슷했다. 그는 그 줄을 지우지 않았다.
5월 28일에 취임 강연이 있었다.
바젤 박물관의 큰 강당이었다. 교수들이 앞줄에 앉았고 학생들이 뒷줄에 앉았고 도시의 상인 가문 사람들이 가운데 앉았다. 그는 연단에 올랐다. 스물네 살이었다. 앞줄에 야코프 부르크하르트가 있었다. 쉰한 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를 쓴 사람, 이 도시가 낳은 가장 유명한 학자. 그는 그 사람 앞에서 호메로스를 말해야 했다.
주제는 「호메로스와 고전문헌학」이었다. 호메로스라는 사람이 있었는가. 그 이름 아래 모인 시들은 한 사람의 것인가 여러 세대의 것인가. 그는 그 오래된 문제를 말하면서, 사실은 다른 것을 말하고 있었다. 문헌학이 무엇이냐는 것. 낱말의 철자를 따지는 일인가, 아니면 그 낱말로 살았던 사람들을 되살리는 일인가. 그는 한 시간 동안 말했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목소리는 낮고 정확하고 조금 느렸다.
마지막에 그는 세네카의 문장을 뒤집었다. 세네카는 철학이었던 것이 문헌학이 되었다고 한탄했다. 그는 그것을 거꾸로 말했다.
「문헌학이었던 것이 철학이 되었다.」[주 8-01]
강당이 조용했다. 박수가 조금 늦게 나왔다. 그는 연단을 내려왔고 부르크하르트가 일어나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젊은 분이 큰 말을 하셨소.”
“너무 컸습니까?”
“큰 말은 다 너무 크지요. 그래서 하는 거고.”
부르크하르트는 그렇게 말하고 모자를 썼다. 그는 그 뒷모습을 보았다. 이 도시에서 자기가 말을 걸 수 있는 사람이 하나는 있다고 생각했다.
저녁에 하숙으로 돌아오니 편지가 와 있었다. 트립셴에서였다. 봉투의 글씨는 바그너의 것이 아니었다. 길고 기울어진 글씨. 코지마였다. 토요일에 오시라고 적혀 있었다. 아이들이 선생님을 기다린다고.
그는 편지를 책상에 놓고 창가에 섰다. 성문의 탑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바젤에 집이 있었고 트립셴에 식탁이 있었다. 둘 다 자기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것을 알았고, 그래서 둘 다에 가고 싶었다.
후주
[주 8-01] 니체, 취임 강연 「호메로스와 고전문헌학」, 1869년 5월 28일 바젤. 비평판 초기 저작(KGW II/1)에 수록. 강연은 세네카의 「철학이었던 것이 문헌학이 되었다」를 뒤집은 라틴어 문장으로 끝난다. 한국어 작업 번역.
[근거 8-02] 1869년 1월 바젤 대학이 리츨에게 추천을 구했고 리츨은 니체를 추천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추천서의 표현은 리츨의 편지에 근거한다. 2월 임용(고전문헌학 원외교수, 연봉 3천 프랑, 김나지움 그리스어 수업 겸임), 3월 라이프치히 대학이 시험 없이 박사 학위 수여, 4월 17일 프로이센 국적 포기. 이후 스위스 국적을 얻지 않아 평생 무국적이었다. 4월 19일 바젤 도착.
[근거 8-03] 1869년 5월 15일 트립셴을 처음 찾아가 집 밖에서 작곡 중인 피아노 소리(지크프리트 3막)를 들었고, 명함을 두고 돌아왔다가 5월 17일 월요일 점심에 초대받았다. 코지마는 당시 한스 폰 뷜로의 아내였고 6월에 지크프리트를 낳는다. 개 루스는 실제 그 집의 뉴펀들랜드였다.
[근거 8-04] 5월 28일 취임 강연.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바젤 대학 동료였다. 강연 뒤 부르크하르트가 건넨 말, 김나지움 첫 수업의 대화, 로데에게 쓴 편지의 문구, 코지마의 편지는 소설의 창작이다. 코지마가 니체를 트립셴에 자주 초대한 것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