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050자)

비극의 탄생

니체의 삶 · 네오

루가노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알프스 남쪽이라 따뜻할 줄 알았는데 2월의 호수 위로 눈이 내렸고, 호텔 창 아래 야자나무 잎에 눈이 쌓이는 것을 그는 처음 보았다. 대학에 병가를 냈다. 가슴과 머리와 위장이 번갈아 아팠고 의사가 남쪽으로 가라고 했다. 엘리자베트가 따라왔다. 동생은 스물다섯이었고 오빠를 돌보러 왔다고 했지만 사실은 스위스 호텔에 묵어 보고 싶어서 왔다는 것을 둘 다 알았고, 둘 다 말하지 않았다.

그는 아침마다 썼다.

호텔 방 책상에서였다. 작년 겨울 코지마에게 준 원고가 씨앗이었다. 그는 그것을 키우고 있었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비극의 탄생과 죽음, 소크라테스, 그리고 지금 독일에서 다시 태어나려는 음악. 마지막 장들은 바그너를 향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알았고 멈추지 않았다. 바그너의 음악에서 그리스 비극이 다시 태어나고 있다고 그는 믿었다. 믿음이라는 말을 그는 쓰지 않았다. 다른 말을 찾았다. 찾지 못했다.

엘리자베트가 깨끗이 옮겨 적었다. 동생의 글씨는 단정했고 오빠의 글씨는 아니었다. 저녁에 동생이 옮겨 적은 것을 그가 읽었다. 어느 날 저녁 그는 한 문장에서 멈추어 동생에게 읽어 주었다.

「오직 미적 현상으로서만 삶과 세계는 영원히 정당화된다.」[주 10-01]

엘리자베트가 펜을 놓고 오빠를 보았다.

“무슨 뜻이야?”

“세계가 왜 있어도 되는지를 묻는다면, 아름답기 때문이라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는 뜻이야.”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선하지 않아. 세계는.”

“그러면 하나님은?”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에 눈이 야자나무 위로 내렸다. 엘리자베트가 펜을 다시 들었다.

“어머니한테는 이 문장 안 보여 드릴게.”

“그래.”

5월에 파리에서 소식이 왔다.

코뮌의 봉기가 진압되는 중에 루브르가 불탔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 소식을 바젤에서 들었다. 아침 신문이었다. 그는 신문을 든 채 한참 서 있다가 강의를 하러 가지 못했다. 하루 종일 방에 있었다. 저녁에 오버베크가 올라왔을 때 그는 울고 있었다. 오버베크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앉았다.

“그림이야.”

그가 말했다.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만든 것이, 하루 만에.”

“아직 확실한 소식은 아니라던데.”

“확실하지 않아도 가능하다는 게 문제야. 가능하다는 것.”

며칠 뒤 루브르는 무사하다는 소식이 왔다. 튈르리 궁이 탔을 뿐이었다. 그는 안도했고, 안도하면서 자기가 사람보다 그림 때문에 울었다는 것을 생각했다. 코뮌에서 사람이 2만 명 죽었다. 그는 그 숫자 때문에 울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게르스도르프에게 썼다. 문화라는 것이 얼마나 얇은 얼음 위에 서 있는지를 알았다고. 쓰면서 자기 얼음도 얇다는 것을 알았다.

책은 1월 2일에 나왔다.

「음악의 정신으로부터의 비극의 탄생」. 바그너의 출판사였고 표지에 사슬에서 풀려나는 프로메테우스가 있었다. 그는 첫 권을 손에 들고 무게를 가늠했다. 가벼웠다. 책이 이렇게 가벼운 것인지 몰랐다. 안에 자기 7년이 들어 있는데.

첫 권은 트립셴으로 갔다. 다음 날 답장이 왔다. 바그너였다.

「당신의 책보다 아름다운 것을 나는 아직 읽은 적이 없소! 모든 것이 훌륭하오!」[주 10-02]

그는 그 편지를 들고 방 안을 걸었다. 앉을 수 없었다. 코지마의 편지가 따로 왔다. 더 길었고 더 조용했다. 당신이 리하르트에게 준 것을 당신은 모를 거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자기가 바그너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그는 알았다. 책의 마지막 장들. 그가 모르는 것은 바그너가 자기에게 무엇을 주었는지였다.

두 번째 권은 라이프치히로 갔다. 리츨에게.

답이 없었다.

열흘이 지났다. 스무 날이 지났다. 그는 1월 30일에 리츨에게 편지를 썼다. 선생님의 의견을 기다린다고. 침묵이 가장 어렵다고. 2월 중순에 답이 왔다. 리츨은 정중했다. 자기는 늙었고 이런 종류의 책을 따라갈 수 없다고 했다. 문헌학자가 예술가가 되려는 것을 자기는 말릴 수 없지만 권할 수도 없다고 했다. 그는 그 편지를 두 번 읽고 서랍에 넣었다.

리츨은 일기에 다른 말을 적었다. 재치 있는 허풍. 그는 그것을 평생 보지 못했다.

5월에 바이로이트에서 극장의 주춧돌을 놓았다.

바그너의 생일이었고 비가 왔다. 그는 거기 있었다. 언덕 위의 진흙 바닥에 천막이 쳐졌고 비가 천막을 두드렸으며, 돌이 내려가는 동안 바그너는 모자를 벗고 서서 비를 맞았다. 그는 바그너의 젖은 머리를 보았다. 쉰아홉 살의 작은 사람이 자기 극장의 첫 돌을 보고 있었다. 돌 안에 바그너가 쓴 시구 한 장이 들어 있다고 했다. 돌이 내려가고 바그너가 짧게 말하고 그날 저녁 변경백의 오래된 오페라 극장에서 베토벤의 9번이 연주되었다. 바그너가 지휘했다. 마지막 악장에서 합창이 일어섰을 때 그는 자기 옆자리의 낯선 사람이 울고 있는 것을 보았고, 자기도 울고 있다는 것을 조금 뒤에 알았다. 그는 바그너 곁에 서 있었다. 바그너가 그를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내 책을 쓴 사람. 그는 그 말을 들었다. 내 책. 바그너는 그렇게 말했고 그는 고치지 않았다.

바젤로 돌아오니 소책자가 와 있었다.

「미래 문헌학!」 느낌표가 붙은 제목이었다. 지은이는 울리히 폰 빌라모비츠묄렌도르프. 스물두 살. 베를린의 학생. 슐포르타 출신. 그는 첫 장을 읽고 그 이름을 다시 보았다. 슐포르타. 자기보다 네 해 뒤에 같은 복도를 걷고 같은 종소리에 깼을 아이가 자기 책을 서른 쪽에 걸쳐 찢고 있었다. 그리스어 원문을 틀리게 읽었다, 연대를 틀렸다, 증거 없이 주장했다, 이것은 학문이 아니라 설교다. 마지막에는 교단에서 내려오라고 했다.

그는 그것을 끝까지 읽었다. 읽고 나서 창가에 섰다. 성문의 탑이 보였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떨리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그는 자기가 이것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공책에 적었다가 줄을 그었던 그 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아플 것이다. 아팠다. 그런데 아픈 자리가 생각보다 깊지 않았다. 혹은 너무 깊어서 아직 닿지 않았거나.

로데에게 그는 썼다. 로데는 답장에서 욕을 했다. 한 장을 꽉 채워 욕을 했고, 자기가 반박문을 쓰겠다고 했다. 바그너가 먼저 썼다. 6월에 신문에 공개 편지를 실었다. 젊은 교수를 변호하는 늙은 음악가의 편지. 그는 그것을 읽고 고마웠고, 고마운 만큼 불편했다. 문헌학자들의 싸움에 음악가가 끼어들었다. 그것은 빌라모비츠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책은 학문이 아니라 바그너의 것이라고.

로데의 반박문은 10월에 나왔다. 제목이 「사이비 문헌학」이었다. 로데는 상대의 느낌표에 자기 느낌표로 답했다. 그는 그것을 읽고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로데가 쓴 문장 가운데 하나가 이랬다. 저자는 니체의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냄새를 맡고 짖은 것이다. 그는 그 문장을 오버베크에게 읽어 주었고 오버베크도 웃었다. 둘이 웃는 동안 아래층에서 집주인 바우만이 천장을 쳐다보았을 것이다.

웃음은 겨울 학기까지 가지 않았다.

10월에 학기가 시작되었다. 그는 강의 공고를 냈다. 그리스·로마 수사학. 첫 시간에 강의실에 갔다. 학생이 둘 있었다. 한 명은 독문학을 하는 학생이었고 한 명은 법학을 하는 학생이었다. 문헌학 학생은 없었다. 한 명도. 그는 나중에 들었다. 본의 어느 교수가 학생들에게 말했다고. 그런 것을 쓴 사람은 학문적으로 죽은 것이다. 그래서 바젤로 오려던 문헌학 학생들이 오지 않았다.

그는 교탁 앞에 섰다. 둘이 그를 보았다. 둘 다 그가 왜 자기들을 보는지 몰랐다.

그는 강의를 했다. 두 시간을 꽉 채워서 했다. 수사학이 무엇인지, 그리스인들이 왜 말하는 법을 가르쳤는지, 설득이 진리와 어떻게 다른지. 둘을 위해 했고 둘뿐이라는 것을 한 번도 내비치지 않았다. 목소리는 낮고 정확하고 조금 느렸다. 강의가 끝나고 법학 학생이 손을 들었다.

“교수님, 그러면 설득당한 사람은 진리를 아는 겁니까, 모르는 겁니까?”

그는 그 학생을 보았다. 좋은 질문이었다. 문헌학 학생이라면 하지 않았을 질문이었다.

“모릅니다. 그런데 안다고 믿지요. 그게 수사학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교수님 책은요?”

강의실이 조용했다. 둘뿐인 강의실이 조용해지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책을 덮었다.

“다음 시간에 답하겠습니다.”

그는 강의실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복도 끝 창으로 라인이 보였다. 좁고 빠르고 초록인 강. 그는 다음 시간에 무어라고 답할지 생각했다. 생각하면서 자기가 그 질문을 7년 동안 피해 왔다는 것을 알았다. 설득당한 사람은 자기였다.

후주

[주 10-01] 니체, 『비극의 탄생』 5절. eKGWB GT-5. 한국어 작업 번역. 초기 예술형이상학의 핵심 문장으로, 후기의 니체가 이 입장을 그대로 유지하지는 않는다. 1886년의 「자기비판의 시도」는 이 소설에서 뒤의 자기비판 대목에 둔다.

[주 10-02] 바그너가 니체에게 보낸 편지, 1872년 1월 3일. 비평판 수신서신(KGB II/2). 한국어 작업 번역. 책을 받은 다음 날 쓴 것이다.

[근거 10-03] 1871년 2~4월 병가로 엘리자베트와 루가노 체류, 『비극의 탄생』 집필. 1871년 5월 말 파리 코뮌 진압 중 루브르 소실 오보에 크게 충격받은 것은 게르스도르프에게 보낸 6월 21일 편지에 전한다. 실제로 불탄 것은 튈르리 궁이었다.

[근거 10-04] 1872년 1월 2일 라이프치히 프리치 출판사에서 출간. 리츨은 답이 없었고 니체가 1월 30일 의견을 청하자 2월 14일 자기는 늙어 따라갈 수 없다는 취지로 답했다. 리츨이 일기에 「재치 있는 허풍」이라 적은 것은 사후 공개된 기록이다.

[근거 10-05] 1872년 5월 22일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정초식 참석. 5월 말 울리히 폰 빌라모비츠묄렌도르프(1848년생, 슐포르타 출신)의 소책자 「미래 문헌학!」. 6월 23일 바그너의 공개 편지. 10월 로데의 반박문 「사이비 문헌학」. 로데의 문장은 그 글의 어조를 옮긴 창작이다.

[근거 10-06] 1872/73년 겨울 학기 수사학 강의에 문헌학 전공 학생은 한 명도 오지 않았고 타과 학생 둘만 들었다. 본의 교수가 학생들에게 「학문적으로 죽었다」고 말했다는 것은 전해 들은 말이다.

엘리자베트와의 대화, 오버베크와의 대화, 코지마 편지의 문구, 강의실의 질문은 소설의 창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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