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524자)

책임 간호사

국민 판사 추첨제 · 은해록

4월 16일 월요일 아침⁠, 재단 변호사가 낸 서면은 세 장이었다⁠. 정비 업체가 문을 닫아 원본을 모으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4월 30일까지 늘려 달라는 신청이었다⁠. 금분은 서면 첫 줄부터 마지막 줄까지 손가락으로 짚으며 읽었다⁠. 맨 끝에 재단 상임이사의 확인 도장이 찍혀 있었다⁠. 도장 인주가 번지지 않고 또렷했다⁠.

“⁠업체가 문을 닫았는데 원본은 업체가 갖고 있어요⁠?⁠”

“⁠발전기 정비 기록은 업체와 재단이 나눠 가집니다⁠. 재단이 가진 원본이 불완전하다는 주장입니다⁠. 받아들이지 않을 법적 이유는 약합니다⁠. 대신 기한을 넘기면 제출 거부로 보고 불리하게 판단하겠다고 덧붙이시면 됩니다⁠.⁠”

금분은 4월 30일이라는 글자 위에 볼펜을 올려놓았다⁠. 법원 정문 앞 미경의 생수 상자에는 4⁠.23이 적혀 있었다⁠. 두 날짜 사이는 이레였다⁠. 금분은 볼펜을 들어 서면 여백에 썼다⁠. 「⁠허가 · 4월 30일 넘기면 재단이 숨긴 것으로 봄⁠」⁠. 글씨가 주문서 글씨처럼 비뚤었다⁠.

*

아홉 시 사십 분⁠, 법원 정문 앞 천막에서 미경이 먼저 금분을 불렀다⁠. 기한을 늘려 줬다는 소식은 법원 누리집에 올라가자마자 상가 단톡방으로 내려왔다⁠. 미경은 생수 상자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상자에 적힌 4⁠.23 옆에 누군가 매직으로 「⁠4⁠.30⁠?⁠」이라고 써 놓았다⁠. 미경 글씨가 아니었다⁠.

“⁠두 주 늘려 줬다며⁠.⁠”

“⁠법이 안 늘려 줄 이유가 약하대요⁠. 대신 30일 넘기면 재단이 숨긴 걸로 보기로 했어요⁠.⁠”

“⁠보기로 하면 뭐가 달라지는데⁠.⁠”

“⁠판결문에 그렇게 써요⁠. 재단이 안 냈다고⁠. 안 낸 걸 숨긴 걸로 본다고⁠.⁠”

미경은 생수 상자의 「⁠4⁠.30⁠?⁠」을 엄지로 문질렀다⁠. 매직이 번지기만 하고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23일에 굶어⁠. 판사가 날짜를 늘려 줘도 내 날짜는 안 늘어⁠.⁠”

“⁠언니⁠.⁠”

“⁠들어가⁠. 늦겠다⁠.⁠”

미경은 고개를 돌려 영정 탁자의 먼지를 손바닥으로 훔쳤다⁠. 노순자 사진 앞에서 손이 조금 오래 머물렀다⁠. 금분은 대답을 찾다가 찾지 못하고 정문을 지났다⁠.

*

열 시⁠, 증인석에 여자 하나가 앉았다⁠. 서른 후반⁠, 짧게 자른 머리에 회색 니트를 입었다⁠. 두 손을 무릎 위에 포개 올렸고⁠, 포갠 손 밑에 휴대전화가 있었다⁠. 서희윤이었다⁠. 사건 밤 별관 중환자실의 책임 간호사였다⁠. 정목이 첫 공판 날 순서는 제가 불렀다고 말할 때 이름이 나온 사람이었다⁠.

공판 검사의 신문이 먼저였다⁠. 희윤의 대답은 짧았다⁠. 네⁠. 아니요⁠. 그렇습니다⁠.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다섯 글자를 넘는 대답이 없었다⁠. 재단 변호사가 반대 신문에서 간호 기록을 들어 보였을 때도 희윤은 기록에 있는 대로입니다⁠, 하고 끝냈다⁠. 변호사는 만족한 얼굴로 앉았다⁠. 희윤은 대답할 때마다 변호사를 한 번씩 보았다⁠. 시험 감독관을 보는 수험생 눈이었다⁠.

금분은 쪽지를 덮었다⁠. 병찬이 곁눈질했지만 이번에도 말리지 않았다⁠.

“⁠선생님⁠, 그날 밤 몇 시에 집에 가셨어요⁠?⁠”

희윤이 판사석을 올려다보았다⁠. 질문이 예상과 달랐다는 얼굴이었다⁠.

“⁠아침 아홉 시요⁠.⁠”

“⁠밥은요⁠?⁠”

“⁠…⁠…못 먹었어요⁠.⁠”

“⁠지금은요⁠? 오늘 아침은요⁠?⁠”

방청석에서 웃음이 났다⁠. 희윤도 입술이 조금 풀렸다⁠.

“⁠커피 마셨어요⁠.⁠”

“⁠커피는 밥이 아니에요⁠. 끝나고 뭐 드세요⁠. 이따 경위님이 김밥 집 알려 드릴 거예요⁠.⁠”

법정 경위가 문 옆에서 뒷머리를 긁었다⁠. 병찬이 탁자 아래로 금분의 법복 소매를 당겼지만⁠, 금분은 소매를 빼고 다음 질문을 했다⁠. 목소리는 아까보다 낮았다⁠.

“⁠3번 병상 인공호흡기 플러그⁠, 빨간 콘센트에 누가 꽂았어요⁠?⁠”

희윤은 대답하기 전에 변호사를 보지 않았다⁠. 금분을 보았다⁠.

“⁠제가 꽂았습니다⁠. 선생님이 시키셔서요⁠.⁠”

“⁠4번 병상 플러그는 누가 뺐어요⁠?⁠”

희윤의 포갠 손이 휴대전화를 눌렀다⁠. 손가락 끝이 하얘졌다⁠.

“⁠…⁠…제가요⁠.⁠”

“⁠몇 시예요⁠?⁠”

재단 변호사가 일어섰다⁠.

“⁠이의 있습니다⁠. 시각은 간호 기록에 다 있습니다⁠. 두 시 오 분으로 적혀 있습니다⁠. 증인이 이미 기록에 있는 대로라고 답했습니다⁠.⁠”

“⁠기록 말고 선생님 입으로 듣고 싶어요⁠.⁠”

희윤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변호사를 보았고⁠, 다시 금분을 보았다⁠. 무릎 위의 휴대전화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법정 안이 조용해서 정수기 공기 방울 소리가 합의실 문 너머에서 희미하게 들렸다⁠.

“⁠기록에 있는 대로입니다⁠.⁠”

금분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휴대전화를 덮은 희윤의 손을 오래 보았다⁠. 희윤은 물러가려고 일어서다가⁠, 증인석 난간을 잡고 다시 섰다⁠. 아무도 묻지 않은 말을 꺼냈다⁠.

“⁠한 가지만 말씀드려도 될까요⁠?⁠”

금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 다섯 시간 동안 앰부백을 놓지 않으셨어요⁠. 3번도 4번도 아니고 18번 할아버지 주머니를요⁠. 손바닥이 터져서 주머니에 피가 묻었어요⁠. 아침에 교대한 간호사가 피 묻은 주머니를 버리려고 하니까⁠, 선생님이 그거 버리지 말라고⁠, 18번 보호자분께 드리라고 했어요⁠.⁠”

피고인석의 정목이 고개를 숙였다⁠. 방청석 왼편 유족들 사이에서 누군가 짧게 흐느꼈다⁠. 18번 할아버지의 딸이었다⁠. 미경은 울지 않았다⁠. 미경은 휴대전화를 덮은 희윤의 손을⁠, 금분과 같은 눈으로 보고 있었다⁠.

휴정 시각에 판사석 뒤 복도로 나서던 금분은 유리문 너머를 보고 걸음을 늦췄다⁠. 계단참에서 재단 변호사가 희윤에게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변호사는 손바닥을 아래로 누르는 시늉을 되풀이했다⁠. 희윤은 고개를 저었다가⁠, 다시 끄덕였다가⁠,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쥔 손만 가슴께로 올라와 있었다⁠. 금분이 유리문 손잡이를 잡자 변호사가 먼저 알아보고 고개를 숙였고⁠, 희윤은 계단을 뛰다시피 내려갔다⁠.

*

“⁠밥 이야기로 신문을 여시면 내일 기사 제목이 됩니다⁠.⁠”

합의실에서 병찬이 말했다⁠. 정수기 앞에서 종이컵에 물을 받으며 등을 돌린 채였다⁠.

“⁠제목이 뭔데요⁠?⁠”

“⁠국민 판사⁠, 증인에게 김밥 권해⁠.⁠”

“⁠김밥 권한 거 맞잖아요⁠.⁠”

“⁠맞습니다⁠. 맞는 말이 기사가 되면 더 아픕니다⁠.⁠”

금분은 의자를 빼서 앉았다⁠. 법복 단추 하나를 풀자 앞치마 끈이 숨을 쉬었다⁠.

“⁠판사님⁠, 그 간호사 휴대전화 봤어요⁠? 대답할 때마다 손으로 덮었어요⁠. 가게에서 손님이 지갑을 그렇게 덮으면⁠, 지갑에 돈이 있어요⁠. 안 내려고 덮는 거예요⁠.⁠”

“⁠휴대전화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판사님 짐작입니다⁠.⁠”

“⁠짐작이니까 아직 안 물었죠⁠.⁠”

병찬은 종이컵을 들고 돌아섰다⁠. 무언가 말하려다 물을 마셨다⁠. 물이 차가워서 병찬도 이를 한 번 다물었다⁠.

*

밤 열 시 오십 분⁠, 가게 전화가 울렸다⁠. 배달 앱이 생긴 뒤로 거의 울리지 않던 유선 전화였다⁠. 찬별이 받았다가 수화기를 손으로 막고 금분을 불렀다⁠.

“⁠사장님⁠. 기자래요⁠.⁠”

금분은 고무장갑을 벗고 수화기를 받았다⁠. 젊은 남자 목소리였다⁠. 인사도 짧았다⁠.

“⁠국민 판사님⁠, 한 가지만 확인하겠습니다⁠. 남편분이 세 해 전 세온대학병원에서 수술받으실 때 수술비 천팔백만 원이 재단 자선 기금으로 감면된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감면 추천서에 조정목 교수의 서명이 있습니다⁠.⁠”

금분은 대답하지 못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재단 관계자에게서 확인했습니다⁠. 판사님 입장을 듣고 싶습니다⁠.⁠”

“⁠…⁠…제 입장은 법정에서 말할게요⁠.⁠”

금분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손바닥이 벌겋게 달아 있었다⁠. 고무장갑 속에서 땀이 찼던 손이었다⁠. 금분은 주방 안쪽을 보았다⁠. 경호가 배달 조끼를 벗다 말고 서 있었다⁠. 조끼 깃에 미경이 꽂아 둔 시침핀이 아직 있었다⁠.

*

새벽 한 시⁠, 가게 셔터를 내린 주방에서 둘은 마주 섰다⁠. 튀김기는 꺼져 있었고 기름 표면에 형광등이 비쳤다⁠. 찬별은 먼저 보냈다⁠.

“⁠천팔백이 보험이야⁠?⁠”

경호는 대답 대신 앞치마를 걸어 두는 못을 보았다⁠. 금분은 못 대신 남편 눈을 보았다⁠. 열두 해 손님 눈을 읽은 눈으로 스물두 해 함께 산 사람 눈을 읽었다⁠. 읽지 않아도 알았다⁠.

“⁠보험이 다 안 됐어⁠. 비급여가 많았대⁠. 수술 끝나고 원무과에서 계산서 나왔는데⁠, 가게 보증금 빼도 모자랐어⁠. 선생님이 병실에 와서 물어보더라⁠. 사장님이 갚을 수 있냐고⁠. 못 갚는다고 했어⁠. 그랬더니 재단 기금이 있다고⁠, 추천서를 써 주겠다고⁠.⁠”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여보는 빚지면 못 자잖아⁠. 외상 준 손님한테도 미안해서 못 자는 사람이잖아⁠. 선생님한테 천팔백 빚진 거 알면 매일 밤 닭 튀기다가 울 거잖아⁠.⁠”

“⁠그래서 보험이라고 했어⁠?⁠”

“⁠응⁠.⁠”

“⁠세 해 동안⁠?⁠”

“⁠응⁠.⁠”

경호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가슴께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금분은 남편 손바닥 아래의 흉터를 알았다⁠. 가슴 한가운데를 세로로 지나가는 긴 흉터였다⁠. 정목이 열한 시간 동안 열고 닫은 자리였다⁠.

“⁠경호 씨⁠. 나 지금 그 선생님 재판하고 있어⁠.⁠”

“⁠알아⁠.⁠”

“⁠내가 그 선생님한테 천팔백 빚진 사람이래⁠. 내일 아침이면 전국이 알아⁠.⁠”

“⁠빚진 건 나야⁠. 여보는 몰랐잖아⁠. 몰랐다고 하면 되잖아⁠.⁠”

“⁠몰랐다고 하면 끝나⁠?⁠”

경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금분도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것이 아니었다⁠. 금분은 꺼진 튀김기 손잡이를 쥐었다⁠. 손잡이가 차가웠다⁠. 열두 해 동안 한 번도 차가운 적이 없던 손잡이 같았다⁠. 경호가 한 걸음 다가왔다가 멈췄다⁠.

“⁠여보⁠. 나 법적으로 뭐 잘못한 거야⁠?⁠”

“⁠법적으로는 몰라⁠. 집에서는 잘못했어⁠.⁠”

경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배달 조끼를 다시 입었다⁠.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새벽 한 시에 배달 갈 데도 없으면서 조끼를 입고⁠, 주방 바닥에 떨어진 튀김 부스러기를 쓸기 시작했다⁠. 금분은 쓸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금분은 뒷문을 열고 상가 뒷골목으로 나갔다⁠. 사월 새벽 공기가 기름 냄새 밴 앞치마를 뚫고 들어왔다⁠. 고개를 들자 2층 수선집 창이 캄캄했다⁠. 미경은 오늘도 천막에서 잘 것이었다⁠. 건물 모퉁이에 붙은 동판이 가로등 불빛에 희미하게 빛났다⁠. 「⁠영통중앙상가 · 소유 세온의료재단⁠」⁠. 열두 해 동안 동판 앞을 수천 번 지나다니면서 한 번도 읽지 않은 글자였다⁠. 금분은 동판 앞에 한참 서 있다가 앞치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노란 공이 손바닥에 닿았다⁠. 동판 귀퉁이에 거미줄이 한 올 바람에 흔들렸다⁠.

*

아침 일곱 시⁠, 찬별이 문자를 보내왔다⁠. 기사 주소 하나와 울고 있는 고양이 그림 하나였다⁠. 금분은 기사를 열었다⁠.

「⁠[단독] 국민 판사⁠, 피고 의사에게 남편 수술비 천팔백만 원 감면받아 … 재단 관계자 “⁠추천서에 피고인 서명⁠”⁠」

아래 댓글이 이미 천 개를 넘었다⁠. 금분은 댓글을 읽지 않았다⁠. 텔레비전을 켜자 아침 뉴스가 국회를 비추고 있었다⁠. 법사위 소속 의원이 기자들 앞에서 신문을 펼쳐 들었다⁠.

「⁠“⁠피고인에게 돈을 받은 사람이 피고인을 재판합니다⁠. 이것이 국민 판사제의 민낯입니다⁠”⁠」

화면 귀퉁이에 금분의 얼굴이 작게 떴다⁠. 첫 공판 날 중계 화면에서 따 온 사진이었다⁠. 입이 반쯤 벌어져 있었다⁠. 어서 오⁠, 하다 멈춘 입이었다⁠.

금분은 계산대 카드 단말기 옆의 노란 공을 집었다⁠. 공을 두 쪽으로 비틀어 열었다⁠. 안에 접힌 종이가 그대로 있었다⁠. 17이라는 숫자 아래에 작은 글씨가 한 줄 인쇄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읽지 않은 줄이었다⁠.

「⁠국민 판사는 자신이 아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금분은 종이를 다시 접어 공에 넣고⁠, 공을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셔터를 올렸다⁠. 아침 햇빛이 기름 표면에 하얗게 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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