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688자)

발전기실

국민 판사 추첨제 · 은해록

새벽 다섯 시⁠, 금분이네 통닭 바닥에는 생닭 상자가 열 개 쌓여 있었다⁠. 상자마다 열 마리씩⁠, 얼음에 묻혀 하얗게 김을 뿜었다⁠. 어젯밤 주문을 수락하자마자 경호가 정육점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고⁠, 정육점 사장은 신이 나서 새벽 첫 차로 백 마리를 들여 주었다⁠. 금분이 취소 단추를 누른 것은 반 시간이 더 지나서였다⁠.

태블릿에는 빨간 글씨가 떠 있었다⁠. 「⁠수락 후 취소한 주문은 가게 평가에 반영됩니다 · 취소 사유를 고객에게 알려 주세요⁠」⁠. 찬별이 금분 어깨 너머로 취소 사유 칸을 들여다보았다⁠.

“⁠사장님⁠, 뭐라고 써요⁠? 판사님이 피고 측 닭을 튀기면 기사가 납니다⁠?⁠”

“⁠그렇게 쓰면 그게 기사야⁠.⁠”

“⁠그럼 재료 소진⁠?⁠”

“⁠재료가 백 마리 넘게 쌓였는데 재료 소진이라고 쓰면 거짓말이지⁠.⁠”

금분은 기타를 누르고 짧게 쳤다⁠. 「⁠죄송합니다⁠. 이 주문은 받을 수 없는 주문입니다⁠.⁠」 전송을 누르자 가게 평점이 4⁠.9에서 4⁠.8로 내려갔다⁠. 경호가 상자 사이에 쪼그려 앉아 얼음을 만졌다⁠.

“⁠여보⁠, 이거 다 어떡해⁠.⁠”

“⁠튀겨⁠.⁠”

“⁠백 마리를⁠?⁠”

“⁠반값에⁠. 상가 앞에 판 깔고 팔아⁠. 현수막도 하나 써⁠.⁠”

찬별이 박스 뚜껑을 찢어 매직으로 글씨를 썼다⁠. 「⁠오늘만 반값 · 사정이 있는 닭⁠」⁠. 금분이 고개를 끄덕였다가 다시 보았다⁠. 찬별은 글씨 아래에 작게 한 줄을 더 썼다⁠. 「⁠판사님이 튀김⁠」⁠. 금분은 박스 뚜껑을 빼앗아 마지막 줄을 매직으로 북북 지웠다⁠.

아침 아홉 시부터 상가 앞에 튀김솥 하나가 나갔다⁠. 떡집 사장이 두 마리를 샀고⁠, 미용실 사장이 세 마리를 샀다⁠. 정육점 사장은 자기가 판 닭을 반값에 다시 사 가면서 이게 법적으로 무슨 거래냐고 경호에게 물었다⁠. 경호는 민법 몇 조를 대려다 그만두었다⁠. 2층 계단참에서 미경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경은 닭을 사지 않았다⁠. 대신 계단을 내려와 금분 앞치마 주머니를 손가락으로 당겨 보더니⁠, 실이 버티는 것을 확인하고 도로 올라갔다⁠.

*

4월 2일 오전 열한 시⁠, 세온대학병원 별관 앞에서 남자 하나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쉰 후반쯤⁠, 빗질이 반듯한 회색 머리에 감색 양복을 입었고⁠, 왼쪽 깃에 재단 배지가 반짝였다⁠. 손이 따뜻하고 말랐다⁠.

“⁠세온의료재단 상임이사 도상철입니다⁠. 판사님도 아시겠지만⁠, 재단은 검증에 최대한 협조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알긴 뭘 알아요⁠.⁠”

상철은 웃었다⁠. 웃음이 얼굴 전체에 고르게 퍼졌다⁠. 금분은 저런 웃음을 아는 손님이 있었다⁠. 단체 주문을 하고 나서 꼭 할인을 묻는 손님이었다⁠.

검증하러 온 사람은 여덟이었다⁠. 금분과 병찬⁠, 공판 검사⁠, 재단 변호사⁠, 법정 경위⁠, 법원 기록 담당 직원⁠, 피고인 조정목⁠, 유족 대표로 참관을 허락받은 미경⁠. 정목은 가장 뒤에서 걸었고⁠, 미경은 가장 앞에서 걸었다⁠. 둘 사이에 여섯 사람이 끼어 있었다⁠.

별관 3층 중환자실 문에는 「⁠임시 폐쇄⁠」라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상철이 앞장서 문을 열며 말했다⁠.

“⁠사고 뒤로 별관 중환자실은 닫았습니다⁠. 재단이 이십억을 들여 본관에 새 중환자실을 지었습니다⁠. 비상 발전기도 새것으로 두 대를 들였고요⁠.⁠”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병상은 다 치웠고⁠, 바닥에 바퀴 자국만 직사각형으로 남았다⁠. 벽에 1부터 24까지 번호가 붙어 있었다⁠. 번호마다 아래에 콘센트가 있었다⁠. 흰 콘센트와 빨간 콘센트가 번갈아 붙었는데⁠, 고르지 않았다⁠. 어떤 번호 아래에는 빨간 것이 둘⁠, 어떤 번호 아래에는 하나도 없었다⁠.

미경이 4번 앞에 멈췄다⁠. 4번 아래 벽에는 흰 콘센트 하나만 있었다⁠. 미경은 고개를 돌려 옆자리를 보았다⁠. 3번과 4번 사이 벽⁠, 두 번호의 딱 가운데에 빨간 콘센트 하나가 붙어 있었다⁠.

금분은 무릎을 꿇고 빨간 콘센트 앞에 얼굴을 가져갔다⁠. 기름솥 온도계를 볼 때처럼 눈을 바짝 댔다⁠. 플라스틱 구멍 둘레에 하얀 긁힌 자국이 여러 줄 나 있었다⁠. 플러그를 급하게 꽂았다 뺐다 한 자국이었다⁠.

“⁠3번하고 4번이 이거 하나를 같이 썼어요⁠?⁠”

정목은 문간에 서 있었다⁠. 중환자실 안으로 한 걸음도 들어오지 않았다⁠. 금분의 물음에 정목이 고개를 들었다가⁠, 3번 번호판에서 눈을 피했다⁠.

“⁠네⁠. 그 자리는 하나였습니다⁠.⁠”

“⁠3번 병상 환자분은 어떻게 됐어요⁠?⁠”

금분이 묻자 상철이 정목보다 먼저 대답했다⁠.

“⁠회복해서 퇴원하셨습니다⁠. 지금은 댁에 계십니다⁠. 환자분 정보라 더는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미경이 작게 중얼거렸다⁠. 금분만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3번 할머니는 살았대⁠. 우리 엄마 바로 옆에서⁠.⁠”

미경이 빨간 콘센트를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을 뻗어 만지려다가 거두었다⁠. 미경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금분은 일어서면서 무릎을 털었다⁠. 바닥 먼지가 법복 자락에 하얗게 묻었다⁠.

*

“⁠계단으로 가 보겠습니다⁠.⁠”

금분이 말하자 재단 변호사가 승강기를 가리켰다⁠. 금분은 고개를 저었다⁠. 사건 밤 승강기는 멈춰 있었다⁠. 정목이 아흔여섯 개라고 말한 계단이었다⁠.

금분은 계단을 하나씩 소리 내어 세며 내려갔다⁠. 하나⁠, 둘⁠, 셋⁠. 스물을 넘기자 병찬이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마흔에서 병찬이 난간을 잡았다⁠.

“⁠판사님⁠, 현장 검증 규정에 계단 보행은 없습니다⁠.⁠”

“⁠금지도 없죠⁠?⁠”

“⁠없습니다⁠.⁠”

“⁠그럼 걸어요⁠. 들것 들고 다섯 시간도 다녔대요⁠.⁠”

일흔을 넘기자 계단참의 비상등이 녹색으로 깜박였다⁠. 금분은 계단참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넷이 들것을 들고 한 사람이 옆에서 주머니를 짜며 내려가려면 몸을 옆으로 틀어야 했다⁠. 난간 모서리마다 페인트가 벗겨져 있었다⁠. 들것 손잡이가 부딪쳐 벗겨진 자리였다⁠. 미경도 금분 곁에 서서 같은 모서리를 보았다⁠. 아흔여섯에서 계단이 끝났고⁠, 병찬은 이마의 땀을 손수건으로 찍어 냈다⁠. 손수건은 다림질이 되어 있었다⁠.

*

지하 2층 발전기실은 철문 두 겹 안에 있었다⁠. 문을 열자 경유 냄새가 확 끼쳤다⁠. 사람 키보다 큰 발전기 두 대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앞의 것에는 「⁠A⁠」⁠, 뒤의 것에는 「⁠B⁠」라고 노란 페인트로 쓰여 있었다⁠. 시설팀장이라는 남자가 서류철을 들고 따라왔다⁠.

“⁠사고 밤에 B가 기동하지 않았습니다⁠. 시동용 배터리가 약했고⁠, 연료 필터가 막혀 있었습니다⁠. 지금은 쓰지 않는 기계입니다⁠. 증거 보전 때문에 그대로 둔 겁니다⁠.⁠”

금분은 B 앞에 섰다⁠. 엔진 옆구리에 노란 손잡이가 달린 쇠막대가 꽂혀 있었다⁠. 엔진 기름 양을 재는 막대였다⁠. 금분은 장갑도 끼지 않고 막대를 뽑았다⁠. 시설팀장이 아⁠, 하고 손을 뻗었지만 늦었다⁠.

막대 끝에 묻은 기름은 검고 끈적했다⁠. 형광등 아래 들어 올리자 기름이 실처럼 늘어지다 끊겼다⁠. 금분은 막대를 코앞에 대지도 않고 색만 보았다⁠.

“⁠이거 몇 달 안 갈았네요⁠.⁠”

“⁠판사님⁠, 그건 전문가가⁠—⁠”

“⁠우리 튀김 기름도 이 색 되면 닭이 까매져요⁠. 그날 버려야 돼요⁠. 저는 열두 해 동안 아침마다 기름 색 보고 갈았어요⁠. 이 색은 손님 받으면 안 되는 색이에요⁠.⁠”

시설팀장은 대답하지 않고 상철을 보았다⁠. 상철은 웃는 얼굴 그대로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금분은 막대를 제자리에 꽂고 발전기 옆구리를 훑어보았다⁠. 철판에 하얀 스티커가 두 장 붙어 있었다⁠. 위 스티커는 「⁠정기 점검 2039⁠.11 이상 없음⁠」이었고⁠, 아래 스티커는 빛이 바래 글씨가 흐렸다⁠. 금분은 휴대전화 손전등을 켜서 비추었다⁠.

「⁠정밀 점검 2038⁠.10 · 다음 정밀 점검 2039⁠.04⁠」

“⁠다음 점검이 작년 사월이었는데⁠, 사고는 십이월이에요⁠. 여덟 달 지났네요⁠.⁠”

금분은 A 발전기 앞으로 가서 같은 자리를 비춰 보았다⁠. A의 스티커는 「⁠정밀 점검 2039⁠.09⁠」였다⁠. 금분은 두 스티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손전등을 비추었다⁠. 병찬이 금분 곁에 와서 스티커를 같이 읽었다⁠. 병찬의 얼굴에서 숨찬 기색이 가셨다⁠.

상철이 한 걸음 다가왔다⁠.

“⁠판사님도 아시겠지만⁠, 정기 점검은 법대로 매달 했습니다⁠. 정밀 점검은 법이 정한 의무가 아니라 제조사 권고입니다⁠. 재단은 법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그럼 정비 기록 주세요⁠. 언제 미뤘는지⁠, 왜 미뤘는지⁠.⁠”

“⁠재단 내부 자료입니다⁠. 업체 계약 단가와 영업 비밀이 들어 있습니다⁠. 밖으로 내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럼 제가 내라고 할게요⁠.⁠”

상철의 웃음이 아주 잠깐 멈췄다⁠. 금분은 처음으로 웃음이 없는 상철의 얼굴을 보았다⁠. 눈 밑에 잔주름이 많았고⁠, 입술이 얇았다⁠. 웃음은 곧 돌아왔다⁠.

재단 변호사가 끼어들었다⁠.

“⁠발전기는 공소 사실 밖입니다⁠. 피고인은 의사이지 시설 책임자가 아닙니다⁠. 제출 명령은 지나칩니다⁠.⁠”

금분은 병찬을 보았다⁠. 병찬은 손수건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대답이 나오기까지 철문 밖 환풍기가 두 번 덜컹거렸다⁠.

“⁠법리상 문제없습니다⁠. 피고인의 선택이 열두 명의 죽음과 이어지는지 보려면⁠, 빨간 콘센트가 왜 열두 개뿐이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인과관계를 판단하는 데 필요한 자료입니다⁠.⁠”

재단 변호사가 병찬을 쳐다보았다⁠. 같은 편인 줄 알았던 사람한테 발을 밟힌 얼굴이었다⁠. 금분은 기록 담당 직원에게 말했다⁠.

“⁠세온의료재단에 별관 비상 발전기 정비 기록 일체 제출을 명령합니다⁠. 두 주 안에요⁠.⁠”

“⁠정밀 점검 연기 결재 문서도 포함합니까⁠?⁠”

공판 검사가 물었다⁠. 처음으로 검사의 목소리가 빨랐다⁠. 금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목은 발전기실 문간에 서서 B를 보고 있었다⁠. 사건 밤에 돌지 않은 기계를 정목이 똑바로 보는 것을 금분은 처음 보았다⁠.

*

발전기실을 나와 지상으로 올라가는 승강기 안에서 병찬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계단 대신 승강기를 탔다⁠. 병찬이 고집을 부리지 않았고 금분도 우기지 않았다⁠.

“⁠판사님 편을 든 게 아닙니다⁠. 법이 그렇습니다⁠.⁠”

“⁠알아요⁠. 판사님은 법 편이잖아요⁠.⁠”

“⁠한 가지는 알고 계셔야 합니다⁠. 발전기가 나쁠수록 피고인은 무죄에 가까워집니다⁠. 기계가 돌지 않아서 빨간 콘센트가 열두 개뿐이었다면⁠, 피고인은 더더욱 고를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됩니다⁠. 판사님이 재단을 파고들수록 유족이 바라는 유죄에서 멀어집니다⁠.⁠”

승강기 숫자가 B2에서 B1로 바뀌었다⁠. 금분은 숫자를 보면서 병찬의 말을 한 번 더 되짚었다⁠. 기름이 나빠서 닭이 탔으면 튀긴 사람 잘못이 줄어든다⁠. 맞는 말이었다⁠. 맞는 말이라서 목구멍이 따가웠다⁠.

“⁠그럼 미경 언니는 어떡해요⁠?⁠”

“⁠유족이 바라는 것과 법이 줄 수 있는 것은 다릅니다⁠. 그 차이를 설명하는 일이 판결문입니다⁠.⁠”

“⁠설명해서 배부르면 우리 가게 메뉴판도 설명으로 채우게요⁠.⁠”

병찬은 대꾸하지 않았다⁠. 승강기 문이 열리기 직전에 아주 작게 덧붙였다⁠.

“⁠스티커는 잘 보셨습니다⁠. 저는 못 봤을 겁니다⁠.⁠”

*

별관 1층 로비로 올라오자 재단 직원들이 긴 탁자 위에 점심 상자를 늘어놓고 있었다⁠. 다른 가게 통닭 상자였다⁠. 금분은 지나가다가 상자 하나에서 올라오는 냄새를 맡고 걸음을 멈췄다⁠.

“⁠기름 오래 썼네⁠.⁠”

“⁠네⁠?⁠”

직원이 되물었지만 금분은 대답하지 않고 걸었다⁠. 병찬이 옆에서 작게 웃었다⁠. 웃는 소리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로비 텔레비전에서 낮 뉴스가 돌았다⁠. 「⁠국민 판사제 폐지 법안⁠, 다음 달 두 번째 주 법사위 상정⁠」⁠. 아래 자막이 하나 더 지나갔다⁠. 「⁠외신 “⁠한국의 추첨 판사⁠, 세계에서 가장 큰 사법 실험⁠”⁠」⁠.

출입문 앞에서 상철이 금분 곁으로 다가왔다⁠. 다른 사람들은 몇 걸음 앞서 있었다⁠. 상철은 재단 배지를 손끝으로 만지며⁠, 날씨 이야기를 하듯 말했다⁠.

“⁠판사님⁠, 영통중앙상가 건물 주인이 누군지 아세요⁠?⁠”

“⁠재단 분이 상가 얘기를 왜 해요⁠?⁠”

“⁠저희 재단 겁니다⁠. 제가 관리 책임자고요⁠.⁠”

상철은 문을 열어 금분이 먼저 나가게 했다⁠. 봄바람이 로비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계약 갱신이 오월 말이시죠⁠?⁠”

4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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