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812자)

빨간 콘센트

국민 판사 추첨제 · 은해록

휴정을 알리는 망치 소리가 나자마자 병찬이 먼저 일어섰다⁠. 금분은 망치를 어떻게 쥐는지 몰라서 쇠망치 쥐듯 손잡이 끝을 잡았고⁠, 소리가 너무 커서 방청석 맨 앞의 유족 한 사람이 어깨를 움찔했다⁠. 판사석 뒤의 문을 열면 좁은 복도가 있었고⁠, 복도 끝이 합의실이었다⁠. 창 없는 방에 긴 탁자 하나⁠, 의자 넷⁠, 정수기 하나가 있었다⁠. 정수기 물통에서 공기 방울이 꾸르륵 올라갔다⁠.

병찬은 탁자에 앉지 않고 선 채로 말했다⁠.

“⁠다행입니다⁠. 사실관계를 다투지 않으면 다음 기일에 결심하고 바로 선고할 수 있습니다⁠. 한 달 안에 끝납니다⁠.⁠”

“⁠선생님이 다 인정했는데 무죄예요⁠?⁠”

“⁠피고인이 인정한 것은 그날 밤 무슨 일을 했느냐입니다⁠. 그 일이 죄가 되느냐는 저희가 정합니다⁠. 같은 무게의 목숨들 가운데 몇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면⁠, 법은 고른 사람을 벌하지 않습니다⁠.⁠”

금분은 정수기에서 종이컵에 물을 받았다⁠. 물이 너무 차서 이가 시렸다⁠.

“⁠그럼 다 좋네요⁠. 선생님은 무죄 받고⁠, 재단 변호사는 일찍 퇴근하고⁠, 판사님은 국회 사람들한테 보여 줄 판결 받고⁠.⁠”

“⁠유족에게는 좋지 않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판사님⁠. 자백할 때 선생님 눈이 어디 있었는지 보셨어요⁠?⁠”

병찬은 대답하지 않았다⁠. 볼 이유가 없었다는 얼굴이었다⁠.

“⁠오른편 두 번째 줄이요⁠. 재단 사람들 앉은 자리⁠. 판사석도 안 보고 유족도 안 보고 거기만 봤어요⁠.⁠”

“⁠눈길은 증거가 아닙니다⁠.⁠”

“⁠가게에서는 증거예요⁠. 계산할 때 돈을 안 세 보고 그냥 내미는 손님이 있어요⁠. 그런 손님은 뭘 숨겨요⁠. 거스름돈을 안 받고 가거나⁠, 아까 닭 상자 하나를 슬쩍 밀어 놓고 가거나요⁠. 선생님이 오늘 돈을 너무 빨리 냈어요⁠.⁠”

병찬은 그제야 의자를 빼서 앉았다⁠. 넥타이 매듭을 손가락으로 한 번 만졌다⁠.

“⁠판사님⁠. 자백 사건을 국민 판사가 굳이 늘린다는 기사가 내일 아침에 나옵니다⁠. 국회는 기사를 오려 붙일 겁니다⁠. 저는 의견으로 반대합니다⁠. 다만 증거를 무엇으로 볼지는 판사님이 정하십니다⁠.⁠”

“⁠그럼 오후에 선생님 얘기부터 들을게요⁠. 처음부터 끝까지⁠.⁠”

*

오후 두 시⁠, 피고인 신문이 시작됐다⁠. 자백한 피고인을 신문하겠다고 하자 재단 변호사는 은테 안경을 벗었다가 다시 썼다⁠. 공판 검사는 서류를 가지런히 하고 일어섰다⁠. 검사의 질문은 짧았고⁠, 정목의 대답도 짧았다⁠.

새벽 한 시 오십 분에 별관 전체의 불이 나갔다⁠. 비상등이 켜지고⁠, 이 초쯤 뒤에 비상 발전기가 돌기 시작했다⁠. 두 대 가운데 한 대만 돌았다⁠. 별관 중환자실 벽에는 흰 콘센트와 빨간 콘센트가 번갈아 붙어 있었고⁠, 빨간 콘센트에만 발전기 전기가 들어왔다⁠. 사건 밤 살아 있던 빨간 콘센트는 열두 개였다⁠. 스물네 병상의 인공호흡기는 몸속 배터리로 사십 분쯤 버틸 수 있었다⁠.

“⁠그래서 피고인이 어떤 병상을 빨간 콘센트에 연결할지 정했습니까⁠?⁠”

“⁠네⁠. 중증도 점수를 봤습니다⁠. 살 가능성을 숫자로 매긴 표입니다⁠. 숫자가 높은 사람부터 꽂았습니다⁠.⁠”

“⁠나머지 열두 병상은 어떻게 했습니까⁠?⁠”

“⁠배터리가 다 되면 손으로 숨을 넣었습니다⁠.⁠”

“⁠그 자리에 누가 있었습니까⁠?⁠”

“⁠당직 간호사 여섯 명이 있었습니다⁠. 책임 간호사는 서희윤 선생이었습니다⁠. 병상 플러그를 실제로 꽂고 뽑은 것은 간호사들입니다⁠. 순서는 제가 불렀습니다⁠.⁠”

정목은 간호사 이름을 말한 다음 곧바로 순서는 제가 불렀다는 말을 덧붙였다⁠. 덧붙이는 말이 앞말보다 빨랐다⁠. 금분은 손님이 묻지도 않은 거스름돈 이야기를 먼저 꺼낼 때의 얼굴을 떠올렸다⁠.

금분은 병찬이 써 준 쪽지를 덮고 마이크를 당겼다⁠. 병찬이 곁눈질했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선생님⁠, 손으로 숨을 넣는 게 뭐예요⁠? 저는 닭밖에 몰라서요⁠.⁠”

방청석에서 짧은 웃음이 났다가 금방 꺼졌다⁠. 정목은 판사석을 올려다보았다⁠. 이번에는 금분의 얼굴을 보았다⁠.

“⁠앰부백이라는 고무주머니가 있습니다⁠. 환자 입에 대고⁠, 이렇게 짜면 폐에 공기가 들어갑니다⁠.⁠”

정목이 두 손을 피고인석 난간 위로 들어 올렸다⁠. 손바닥 사이에 보이지 않는 공을 쥐고 꾹 눌렀다가 풀었다⁠. 꾹 눌렀다가 풀었다⁠. 법정 안 사람들이 모두 정목의 손을 보았다⁠.

“⁠일 분에 열두 번쯤 짭니다⁠. 손을 바꿔 가며 짭니다⁠. 간호사 여섯⁠, 의사 둘이 있었고⁠, 보호자 몇 분이 같이 짜 주셨습니다⁠.⁠”

“⁠선생님은 몇 시간 짰어요⁠?⁠”

“⁠다섯 시간쯤입니다⁠. 승강기가 멈춰서 본관으로 옮길 환자는 계단으로 들고 내려갔습니다⁠. 들것을 넷이 들고⁠, 한 사람은 옆에서 주머니를 짰습니다⁠. 별관 3층에서 본관 지하 통로까지 계단이 아흔여섯 개입니다⁠.⁠”

정목은 계단 수를 말할 때만 말이 빨라졌다⁠. 금분은 정목의 오른손을 보았다⁠. 엄지와 검지 사이 살이 다른 데보다 두꺼웠다⁠. 석 달이 지났는데도 굳은살이 남아 있었다⁠. 열두 해 닭 목을 비틀어 온 금분의 손에도 같은 자리에 굳은살이 있었다⁠.

금분은 쪽지에 없는 질문을 하나 더 했다⁠. 금요일 밤 미경이 계산대 앞에서 한 말이 귀에 남아 있었다⁠.

“⁠4번 병상 할머니를 빨간 콘센트에서 흰 콘센트로 옮긴 건 누가 정했어요⁠?⁠”

재단 변호사가 벌떡 일어났다⁠.

“⁠이의 있습니다⁠. 공소 사실에 다툼이 없는 부분입니다⁠. 피고인은 이미 병상 배치를 모두 자신이 정했다고 인정했습니다⁠.⁠”

“⁠다툼이 없으면 대답하셔도 되잖아요⁠.⁠”

금분의 말에 병찬이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 법리로 반박할 말이 없다는 끄덕임이었다⁠. 정목은 재단 변호사를 보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했습니다⁠.⁠”

“⁠언제요⁠?⁠”

“⁠두 시가 조금 넘어서였습니다⁠.⁠”

방청석 왼편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미경이 일어서 있었다⁠. 무릎에서 사진이 떨어져 바닥에 엎어졌다⁠.

“⁠왜 옮겼어요⁠! 우리 엄마 처음엔 빨간 데 있었다면서요⁠!⁠”

법정 경위가 미경 쪽으로 걸어갔다⁠. 금분은 손을 들어 경위를 멈춰 세웠다⁠. 미경은 숨을 몰아쉬다가 스스로 앉았고⁠, 옆자리 유족이 사진을 주워 미경 무릎에 다시 올려 주었다⁠. 정목은 대답하지 않고 난간을 쥔 손을 내려다보았다⁠. 굳은살 박인 손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

신문이 끝나고 금분은 마이크 앞에서 한참 앉아 있었다⁠. 병찬이 탁자 아래로 메모지를 밀어 주었다⁠. 「⁠다음 기일 결심 — 지정하시면 됩니다⁠」⁠. 금분은 메모지를 뒤집어 놓고 말했다⁠.

“⁠피고인이 공소 사실을 인정한 건 알겠습니다⁠. 근데 저는 이 자백을 그대로 받지 않겠습니다⁠. 다음 기일은 4월 2일 오전 열한 시⁠, 세온대학병원 별관에서 현장 검증을 합니다⁠. 중환자실 병상 자리하고⁠, 지하 발전기실을 봅니다⁠.⁠”

재단 변호사가 다시 일어섰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반 음 높았다⁠.

“⁠재판장님⁠, 아니 국민 판사님⁠. 중환자실은 지금도 환자가 있는 곳입니다⁠. 환자 사생활과 병원 운영에 지장이 큽니다⁠. 무엇보다 피고인이 다 인정한 사건에서 현장 검증은 필요가 없습니다⁠.⁠”

“⁠중환자실은 환자분들 없는 자리만 볼게요⁠. 지하 발전기실에는 환자가 없잖아요⁠.⁠”

“⁠발전기는 이 사건의 공소 사실과 관계가 없습니다⁠.⁠”

“⁠전기가 나가서 생긴 사건인데 전기 나오는 데를 안 봐요⁠? 닭이 탔는데 기름솥을 안 보는 거랑 같아요⁠.⁠”

방청석 왼편 유족들이 서로 얼굴을 보았다⁠. 오른편 재단 사람 하나가 휴대전화를 꺼내 무언가 쳤다⁠. 병찬은 고개를 숙인 채 메모지에 한 줄을 적었다⁠. 「⁠현장 검증 — 법리 의견⁠: 반대⁠. 결정⁠: 국민 판사⁠」⁠. 다 적고 나서 병찬은 메모지를 금분 앞에 놓았다⁠. 서명할 칸에 볼펜까지 얹어 두었다⁠. 금분은 닭 기름이 밴 손가락으로 볼펜을 쥐고⁠, 닭 주문서에 쓰던 글씨로 이름을 썼다⁠.

“⁠폐정합니다⁠.⁠”

이번에는 어서 오세요가 튀어나오지 않았다⁠. 망치 소리도 아까보다 작았다⁠.

판사석 뒤 복도에서 법복 단추를 풀고 있는데 누가 금분을 불렀다⁠. 재단 변호사였다⁠. 복도는 판사와 직원만 다니는 길이었고⁠, 변호사는 복도 입구의 유리문 밖에 서 있었다⁠. 은테 안경 너머 눈이 웃고 있었다⁠. 입은 웃지 않았다⁠.

“⁠국민 판사님⁠,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피고인은 빨리 끝나기를 원합니다⁠. 교수님 뜻을 존중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변호사님⁠. 그 말은 법정에서 하세요⁠. 여기서 하시면 반칙이에요⁠.⁠”

“⁠법정에서도 드렸습니다⁠.⁠”

“⁠그럼 하나만 물어볼게요⁠. 빨리 끝내자는 거⁠, 선생님 뜻이에요⁠, 재단 뜻이에요⁠?⁠”

변호사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인사인지 회피인지 알 수 없는 각도였다⁠. 유리문이 닫히면서 변호사의 구두 소리가 계단으로 멀어졌다⁠. 금분은 풀다 만 법복 단추를 다시 채웠다⁠. 앞치마 주머니에 손을 넣자 노란 공이 손바닥에 닿았다⁠. 공을 한 번 꽉 쥐었다가 놓았다⁠.

*

밤 아홉 시의 가게는 또 다른 법정이었다⁠. 찬별이 태블릿에 낮의 중계 영상을 띄워 놓고 손님들에게 틀어 주었다⁠. 영상 아래 댓글 창이 쉴 새 없이 올라갔다⁠. 「⁠국민 판사 어서 오세요ㅋㅋㅋ 개정 대신 개업⁠」 「⁠닭이 탔는데 기름솥 안 보냐 명언⁠」 「⁠자백한 걸 왜 질질 끄냐 세금 아깝다⁠」 「⁠유족 어머님 우실 때 판사 손 든 거 봤음⁠?⁠」⁠.

“⁠사장님⁠, 짤 생겼어요⁠. 어서 오⁠— 하는 데서 멈추는 거⁠. 조회수가 우리 가게 리뷰 수보다 많아요⁠.⁠”

“⁠그거 지워⁠.⁠”

“⁠제 거 아니에요⁠. 전국이 만든 거예요⁠.⁠”

정육점 사장이 생닭 상자를 들고 들어오다가 태블릿 화면을 보고 멈췄다⁠. 상인회장을 맡은 사람이었다⁠. 정육점 사장의 아들은 세온대학병원 원무과에 다녔다⁠.

“⁠금분 사장⁠, 다 인정했다며⁠. 빨리 끝내 주지 그래⁠. 우리 아들 병원 분위기가 말이 아니래⁠.⁠”

“⁠빨리 끝내면 미경 언니네 분위기는요⁠?⁠”

정육점 사장은 대답 대신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상자 안의 생닭들이 얼음 위에서 미끄러졌다⁠.

문 방울이 울리고 낯익은 남자가 들어왔다⁠. 낮에 법정에서 미경을 향해 걸어가던 법정 경위였다⁠. 제복 대신 등산 점퍼를 입고 있었다⁠. 영통에 산 지 오 년⁠, 야간 근무가 있는 날마다 후라이드 한 마리를 포장해 가는 단골이었다⁠. 경위는 계산대 앞에서 어색하게 모자를 벗었다⁠.

“⁠판사님⁠, 아니 사장님⁠. 오늘 한 말씀만 드리려고요⁠.⁠”

“⁠오늘 한 말씀만 하자는 분이 왜 이렇게 많아요⁠?⁠”

“⁠망치요⁠. 너무 세게 치셨어요⁠. 판사석 망치 받침에 금 갔어요⁠. 내일 시설과에 말해야 돼요⁠.⁠”

찬별이 포장 상자를 접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금분은 후라이드 한 마리를 튀김기에 넣으면서 말했다⁠.

“⁠받침 얼마예요⁠? 제가 물어 드릴게요⁠.⁠”

“⁠그게 법적으로⁠—⁠”

경호와 경위가 동시에 같은 말을 꺼내다 서로 쳐다보았다⁠. 경위는 받침 값은 국가가 낸다며 손을 저었고⁠, 포장한 후라이드 값은 제 지갑에서 냈다⁠. 계산대 텔레비전에서는 법사위 의원이 또 기자들 앞에 서 있었다⁠. 자막이 흘렀다⁠. 「⁠“⁠자백한 사건도 끌고 가는 국민 판사 … 이런 재판에 혈세⁠”⁠」⁠. 경호가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렸다⁠. 홈쇼핑에서 돌침대를 팔고 있었다⁠.

“⁠여보⁠, 법적으로 우리가 잘하고 있는 거 맞지⁠?⁠”

“⁠우리가 아니고 내가⁠.⁠”

“⁠부부는 법적으로 일심동체야⁠. 민법 팔백몇 조⁠.⁠”

열 시 십 분⁠, 계산대 태블릿이 길게 울렸다⁠. 평소의 띵동보다 두 배는 긴 소리였다⁠. 단체 주문 알림이었다⁠. 찬별이 먼저 화면을 보고 입을 벌렸다⁠.

「⁠띵동⁠! 한입배달 · 단체 주문 · 후라이드 백 마리 · 주문처 세온의료재단 총무팀 · 배달 4월 2일 오전 열한 시 반 · 배달지 세온대학병원 별관 1층 · 요청사항⁠: 현장 검증 날 직원들 점심입니다⁠. 판사님 고생 많으십니다⁠.⁠」

“⁠백 마리⁠!⁠”

경호가 소리치며 태블릿 쪽으로 달려왔다⁠. 금분은 화면의 날짜를 보았다⁠. 4월 2일 오전 열한 시⁠. 오늘 법정에서 제 입으로 말한 시각이었다⁠. 배달은 검증을 시작하고 반 시간 뒤였다⁠. 배달지는 검증할 건물의 1층이었다⁠.

“⁠여보⁠, 백 마리면 한 달 가게 세가 나와⁠. 이거 받으면 법적으로⁠—⁠”

“⁠경호 씨⁠, 손 떼⁠.⁠”

금분이 계산대를 돌아 태블릿을 잡았을 때 화면은 이미 바뀌어 있었다⁠. 「⁠주문을 수락했습니다 · 조리 준비를 시작해 주세요⁠」⁠. 경호의 검지가 초록 단추 위에 그대로 얹혀 있었다⁠. 손가락 끝이 아직 떨렸다⁠.

3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빨간 콘센트 · 국민 판사 추첨제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