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519자)

마지막 말

국민 판사 추첨제 · 은해록

5월 25일 금요일 아침⁠, 미경은 법원 정문을 걸어서 지났다⁠. 경호가 한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 팔을 내밀었지만 미경이 잡지 않았다⁠. 천막은 걷혔고⁠, 영정 탁자만 정문 옆에 남아 있었다⁠. 미경은 탁자 앞에서 사진 열두 장을 하나씩 손바닥으로 훔치고 계단을 올랐다⁠. 계단 난간을 두 번 짚었다⁠. 세 번째는 짚지 않았다⁠.

대법정 방청석 왼편 맨 앞자리에 미경이 앉았다⁠. 스무사흘 동안 비어 있던 자리였다⁠. 무릎 위에 노순자의 사진을 올리고⁠, 사진 위에 작은 콩나물 비닐봉지 하나를 얹었다⁠. 시장에서 오늘 아침에 산 콩나물이라고 경호가 금분에게 문자로 알려 주었다⁠.

금분은 판사석에 앉아 법복 아래 앞치마 주머니를 만졌다⁠. 미경이 빨간 실로 꿰맨 자리에 노란 공이 들어 있었다⁠. 실이 단단했다⁠.

공판 검사가 일어나 최종 의견을 말했다⁠. 골무를 끼지 않은 손이었다⁠. 업무상과실치사에 금고 이 년⁠, 진료 기록을 거짓으로 고친 죄에 징역 여섯 달⁠. 검사는 구형을 말하고 서류를 내려놓은 뒤⁠, 서류에 없는 말을 한 줄 덧붙였다⁠.

“⁠검사는 이 법정에서 공소장 밖의 사실들을 보았습니다⁠. 그 사실들이 이 사건의 피고인석 밖에 있다는 것도 압니다⁠.⁠”

금분은 검사를 보았다⁠. 검사는 판사석을 보지 않고 방청석 오른편의 빈 의자들을 보고 있었다⁠.

*

“⁠피해자 유족의 진술을 듣겠습니다⁠.⁠”

미경이 일어섰다⁠. 증인석까지 걸어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경위가 의자를 빼 주었다⁠. 미경은 앉지 않고 난간을 잡고 섰다⁠. 콩나물 봉지를 난간 위에 올려놓았다⁠.

“⁠엄마는 영통시장에서 콩나물을 사십육 년 팔았어요⁠.⁠”

미경의 목소리가 처음에는 작았다⁠. 법정 안 사람들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미경은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시루에 물을 줬어요⁠. 콩나물은 물을 안 주면 하루 만에 쓰러져요⁠. 엄마는 사십육 년 동안 하루도 안 쉬었어요⁠. 명절에도 시루에 물 주러 시장에 갔어요⁠. 저는 그게 싫어서 수선을 배웠어요⁠. 앉아서 하는 일이 하고 싶어서요⁠.⁠”

미경은 콩나물 봉지를 손가락으로 만졌다⁠. 비닐이 바스락거렸다⁠.

“⁠엄마 입원한 날⁠, 저 병원 안 갔어요⁠. 가게에 단체 수선이 들어와서요⁠. 교복 바지 서른 벌이요⁠. 엄마가 저녁에 전화해서 밥은 먹었냐고 했어요⁠. 제가 바빠⁠, 이따 해⁠, 하고 끊었어요⁠. 그게 마지막이에요⁠. 이따가 안 왔어요⁠.⁠”

방청석이 조용했다⁠. 피고인석의 정목이 고개를 숙였다⁠. 미경은 정목을 보지 않고 판사석을 보았다⁠. 금분을 보았다⁠.

“⁠판사님⁠. 저는 형량 몰라요⁠. 금고가 뭔지도 몰라요⁠. 저는 엄마가 왜 빨간 데서 뽑혔는지 알고 싶었어요⁠. 그래서 굶었어요⁠. 이제 알아요⁠. 전화 한 통하고⁠, 점수표하고⁠, 기름 안 간 발전기요⁠. 그거 세 개요⁠. 그거 판결에 써 주세요⁠. 엄마 이름 옆에요⁠.⁠”

미경은 그제야 피고인석을 보았다⁠. 정목도 고개를 들었다⁠. 둘 사이에 법정 바닥이 있었다⁠. 석 주 전 생수병이 구르던 바닥이었다⁠.

“⁠희윤 선생님이 그러더라고요⁠. 엄마 플러그 뽑고⁠, 배터리 다 된 다음에⁠, 선생님이 엄마 주머니를 제일 먼저 짰다고요⁠. 18번 할아버지한테 가기 전에⁠, 사십 분 동안⁠. 선생님 손이 엄마 입에 숨을 넣었다고요⁠.⁠”

정목의 어깨가 한 번 흔들렸다⁠. 미경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고맙다는 말은 안 할게요⁠. 대신 미워하는 것도 이제 그만할게요⁠. 선생님 미워하느라 재단 미워할 시간이 없었어요⁠.⁠”

미경은 콩나물 봉지를 집어 들고 증인석에서 내려왔다⁠. 자리로 돌아가는 동안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경호가 미경 자리 옆에서 손수건을 내밀었다⁠. 미경은 받지 않았다⁠. 울지 않았다⁠.

*

국선 변호인의 최후 변론은 길었다⁠. 서른 장을 준비해 왔다고 했다⁠. 다섯 장째에서 목이 잠겨 물을 마셨고⁠, 열 장째에서 종이 순서가 섞였다⁠. 경위가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주워 주었다⁠. 금분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다가⁠, 국선 변호인이 열한 장째에서 한 말에 웃음이 들어갔다⁠.

“⁠피고인은 그 밤 다섯 시간 동안 앰부백을 짰습니다⁠. 변호인은 어젯밤 집에서 고무공으로 오 분 짜 보았습니다⁠. 오 분 뒤에 손이 떨려서 이 변론서를 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변론서 글씨가 이렇습니다⁠.⁠”

국선 변호인이 종이 한 장을 들어 보였다⁠. 글씨가 비뚤비뚤했다⁠. 방청석에서 웃음이 났다가⁠, 웃음 끝이 이상하게 젖었다⁠. 병찬이 판사석에서 고개를 숙였다⁠. 금분은 병찬의 어깨가 아주 조금 떨리는 것을 보았다⁠. 웃는 것이었다⁠.

“⁠피고인⁠,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 있으세요⁠?⁠”

정목이 일어섰다⁠. 회색 점퍼 소매 끝이 오늘은 단정하게 접혀 있었다⁠. 정목은 난간을 쥐지 않았다⁠. 두 손을 몸 옆에 내렸다⁠.

“⁠그 밤 저는 열두 개의 콘센트에 누구를 꽂을지 골랐습니다⁠. 그중 하나는 제가 왜 골랐는지 모릅니다⁠. 모르는 것으로는 벌을 받을 수 없다고 변호인에게 들었습니다⁠. 법이 그렇다면 따르겠습니다⁠.⁠”

정목은 숨을 한 번 쉬었다⁠.

“⁠기록을 고친 것은 압니다⁠. 제 손으로 고쳤습니다⁠. 그것은 벌을 주십시오⁠. 무겁게 주셔도 됩니다⁠.⁠”

정목은 방청석 왼편 맨 앞을 보았다⁠. 미경 무릎 위의 콩나물 봉지를 보았다⁠.

“⁠어머님 손이 따뜻하셨습니다⁠. 주머니를 짜는 동안 어머님 손을 제 손목에 얹어 두었습니다⁠. 마지막까지 따뜻하셨습니다⁠.⁠”

정목은 고개를 숙이고 앉았다⁠. 미경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콩나물 봉지를 두 손으로 감쌌다⁠.

금분은 마이크를 당겼다⁠. 손이 떨려서 마이크 받침이 탁자에 부딪쳤다⁠. 금분은 앞치마 주머니의 공을 쥐었다⁠.

“⁠변론을 끝내겠습니다⁠. 선고는 6월 4일 월요일 오전 열 시에 합니다⁠.⁠”

망치는 세게 치지 않았다⁠. 새 받침은 나무가 두꺼웠고⁠, 소리가 낮게 울렸다⁠.

*

5월 31일 목요일⁠, 계약이 끝나는 날이었다⁠. 아침 일곱 시부터 금분이네 통닭 앞에 사람들이 모였다⁠. 정육점 사장이 자기 트럭을 끌고 왔고⁠, 철물점 사장이 공구 가방을 들고 왔다⁠. 떡집 사장은 해방 떡을 또 해 왔다⁠. 이번 떡에는 이름이 없었다⁠. 미용실 사장은 유리문의 「⁠유족과 함께합니다⁠」를 떼어 금분에게 주었다⁠. 기념이라고 했다⁠.

튀김기 두 대를 들어내는 데 남자 넷이 붙었다⁠. 경호는 들지 말라는 말을 듣고 문간에서 지휘만 했다⁠. 왼쪽으로⁠, 아니 오른쪽⁠, 법적으로 왼쪽⁠. 철물점 사장이 튀김기 다리를 풀다가 웃었다⁠. 벽에 붙은 콘센트 여섯 개가 드러났다⁠. 튀김기가 있던 자리에 열두 해 기름때가 사각형으로 남아 있었다⁠. 금분은 기름때 사각형 앞에 쪼그려 앉아 손바닥으로 바닥을 쓸어 보았다⁠. 끈적했다⁠.

냉동고를 비우던 찬별이 맨 위 칸에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 뚜껑에 매직 글씨가 있었다⁠. 「⁠선고 날 찾아가세요⁠」⁠.

“⁠사장님⁠, 이건요⁠?⁠”

“⁠집 냉동고로⁠.⁠”

“⁠선고 날 그분이 와요⁠?⁠”

“⁠몰라⁠. 오라고 했어⁠.⁠”

정오에 2층에서 미경이 내려왔다⁠. 상가 복도에 서서 텅 빈 가게 안을 오래 보았다⁠. 금분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손에 실 한 타래가 있었다⁠. 빨간 실이었다⁠.

“⁠주머니 또 터지면 이걸로 꿰매⁠. 나 없을 때⁠.⁠”

“⁠언니 어디 가요⁠?⁠”

“⁠안 가⁠. 근데 금분 씨가 가잖아⁠.⁠”

오후 세 시⁠, 정육점 트럭 뒤에 다른 차 한 대가 들어왔다⁠. 낡은 하얀 화물 트럭이었다⁠. 짐칸에 튀김솥을 앉힐 수 있게 철판을 깐 트럭이었다⁠. 운전석에서 경호가 내렸다⁠. 금분이 처음 보는 트럭이었다⁠.

“⁠중고야⁠. 적금 깬 거 남은 걸로 샀어⁠. 계약금만 냈어⁠.⁠”

“⁠이게 뭔데⁠.⁠”

“⁠가게⁠. 법적으로 트럭은 상가 계약이 필요 없어⁠. 변호사 언니가 그랬어⁠. 이번엔 끝까지 봤어⁠.⁠”

금분은 트럭 짐칸을 보았다⁠. 튀김솥 한 대가 겨우 들어갈 자리였다⁠. 콘센트 대신 발전기가 한 대 실려 있었다⁠. 작은 휴대용 발전기였다⁠. 금분은 발전기 앞에 쪼그려 앉아 기름 막대를 뽑았다⁠. 막대 끝의 기름이 맑은 꿀색이었다⁠.

“⁠새 기름이네⁠.⁠”

“⁠갈았어⁠. 어제⁠.⁠”

금분은 막대를 꽂고 일어섰다⁠. 경호가 트럭 문을 손바닥으로 두 번 두드렸다⁠. 정육점 사장이 두드리는 소리에 웃었다⁠. 금분은 웃지 않고 오래 트럭을 보았다⁠. 상가 계단 위에서 미경도 트럭을 보고 있었다⁠.

*

6월 1일 금요일 밤 열한 시⁠, 합의실 탁자 위에 영수증 용지 대신 하얀 종이가 놓여 있었다⁠. 찬별이 이틀 밤을 새워 영수증 롤의 글씨를 쳐서 출력한 판결문 초안이었다⁠. 일곱 장이었다⁠. 금분은 정수기에서 물을 받지 않았다⁠. 병찬은 넥타이를 풀어 의자 등받이에 걸어 두었다⁠. 병찬이 넥타이를 푼 것은 처음이었다⁠.

“⁠소리 내어 읽겠습니다⁠. 눈으로 읽으면 제가 쓴 거 같지가 않아서요⁠.⁠”

“⁠읽으십시오⁠.⁠”

금분은 첫 장을 들었다⁠. 사건 번호와 피고인과 검사와 변호인을 읽었다⁠. 주문에서 목소리가 한 번 갈라졌다⁠. 금분은 물을 마시지 않고 다시 읽었다⁠. 주문을 다 읽고 이유로 넘어갔다⁠. 사건 밤의 정전⁠, 빨간 콘센트 열두 개⁠, 3번과 4번 사이 하나뿐인 콘센트⁠, 점수표⁠, 두 시 십사 분⁠, 계단 아흔여섯 개⁠, 다섯 시간의 앰부백⁠. 금분은 가게에서 주문을 받아 외우듯 한 줄씩 읽었다⁠. 병찬은 눈을 감고 들었다⁠. 볼펜을 쥐지 않았다⁠.

다섯 장째에서 금분이 발전기 이야기를 읽었다⁠. 기름 막대⁠, 점검 스티커⁠, 두 번 찍힌 연기 도장⁠, 연기 도장 옆의 이름⁠. 병찬이 눈을 떴다⁠. 금분은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여섯 장째 끝에서 한 문장을 읽었다⁠.

「⁠노순자는 마흔여섯 해 동안 새벽 네 시에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었다⁠.⁠」

금분이 일곱 장째를 넘기려 할 때 병찬이 손을 들었다⁠.

“⁠판사님⁠. 반대 의견을 붙이겠습니다⁠. 발전기와 재단의 이야기를 판결 이유에 쓰는 것은 판결의 범위를 넘는다고 쓰겠습니다⁠. 반 장입니다⁠. 판사님 이유는 일곱 장이고요⁠.⁠”

“⁠네⁠.⁠”

“⁠그리고 하나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반대 의견과 상관없는 부탁입니다⁠.⁠”

병찬은 탁자 위의 여섯 장째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방금 금분이 읽은 문장이었다⁠.

“⁠이 문장은 사실입니다⁠. 판사님이 법정에서 들으신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은 판결 이유가 아닙니다⁠. 두 해 전 세 번째 문단에 있던 청소복 단추와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금분은 문장을 보았다⁠. 콩나물시루⁠, 새벽 네 시⁠, 마흔여섯 해⁠. 미경이 법정에서 말한 그대로였다⁠. 금분이 영수증 롤에 가장 먼저 쓴 문장이었고⁠, 열한 번 고쳐 쓰면서도 한 번도 줄을 긋지 않은 문장이었다⁠.

금분은 오래 보았다⁠. 손님이 날개만 열 개 달라고 할 때의 얼굴을 떠올렸다⁠. 날개만 열 개는 안 된다고 말해야 손님이 다시 왔다⁠.

“⁠이건 마음이에요⁠. 빼요⁠.⁠”

금분은 볼펜을 들어 문장 위에 줄을 그었다⁠. 한 줄로 반듯하게⁠. 줄 아래로 글씨가 그대로 비쳤다⁠.

“⁠판결문에서는 빼요⁠. 선고할 때 입으로도 안 해요⁠. 미경 언니가 이미 법정에서 했잖아요⁠. 엄마 말은 딸이 했고⁠, 판사는 판사 말을 해야죠⁠.⁠”

병찬은 줄 그어진 문장을 보았다⁠. 오래 보았다⁠. 의자 등받이에 걸어 둔 넥타이를 집어 들었다가⁠, 매지 않고 탁자에 내려놓았다⁠.

“⁠서명하겠습니다⁠.⁠”

“⁠읽어 보고 정한다면서요⁠.⁠”

“⁠읽었습니다⁠.⁠”

병찬은 양복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기름 자국이 손가락 모양대로 번진 손수건이었다⁠. 병찬은 손수건으로 안경을 닦았다⁠. 닦고 나서 손수건을 보았다⁠. 기름 자국 위에 안경 김이 조금 더 번졌다⁠.

금분은 판결문 일곱 장을 모아 탁자에 세워 툭툭 쳤다⁠. 종이 끝이 맞춰졌다⁠. 앞치마 주머니에서 노란 공을 꺼내 판결문 위에 올려놓았다⁠. 공은 굴러가지 않았다⁠. 일곱 장 무게에 눌려 가만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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