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598자)

선고

국민 판사 추첨제 · 은해록

6월 4일 월요일 아침 여덟 시⁠, 금분은 이층 거울 앞에서 빨간 앞치마 끈을 묶었다⁠. 기름에 절어 굳은 매듭 자리에 끈을 다시 맞추었다⁠. 오른쪽 주머니 귀퉁이에 빨간 실이 단단히 박혀 있었다⁠. 금분은 노란 공을 주머니에 넣었다⁠. 공이 실밥을 밀었지만 실은 버텼다⁠. 틀어 올린 곱슬머리에서 잔머리가 귀 옆으로 삐져나왔다⁠. 금분은 잔머리를 손가락으로 밀어 넣다가 그만두었다⁠. 석 달 동안 한 번도 들어가 있던 적이 없는 잔머리였다⁠.

경호가 문간에서 배달 조끼 대신 양복 상의를 입고 서 있었다⁠. 결혼식 때 산 양복이라 단추가 잠기지 않았다⁠. 경호는 단추를 잠그지 않은 채 넥타이를 맸다⁠.

“⁠여보⁠, 법적으로 오늘 내가 할 일 있어⁠?⁠”

“⁠앉아 있어⁠. 방청석에⁠.⁠”

“⁠그건 법적으로 쉽네⁠.⁠”

*

열 시⁠, 대법정 방청석은 처음으로 양쪽이 다 찼다⁠. 왼편에 유족들이 사진을 무릎에 올리고 앉았다⁠. 맨 앞자리에 미경이 앉았고⁠, 무릎 위 노순자의 사진 옆에 오늘도 콩나물 봉지가 있었다⁠. 오른편에는 재단 배지를 단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대신 상가 사람들이 앉았다⁠. 정육점 사장⁠, 떡집 사장⁠, 미용실 사장⁠, 약사⁠, 철물점 사장⁠. 약사 옆에 서희윤이 앉아 있었다⁠. 맨 뒷줄 문 옆에 감색 양복 하나가 혼자 서 있었다⁠. 도상철이었다⁠. 배지를 달지 않았다⁠.

금분은 판사석 가운데에 앉았다⁠. 법복 아래 앞치마가 무릎을 덮었다⁠. 병찬이 오른쪽에 앉았다⁠. 넥타이 매듭은 반듯했고⁠, 탁자 위 볼펜은 한 자루뿐이었다⁠. 천장 중계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선고하겠습니다⁠.⁠”

어서 오세요는 튀어나오지 않았다⁠. 금분은 판결문 일곱 장을 앞에 놓고 첫 장을 펼쳤다⁠. 피고인 조정목이 피고인석에 섰다⁠. 회색 점퍼 대신 흰 셔츠를 입었다⁠. 처음 법정에 오던 날처럼 볼이 꺼져 있었지만⁠, 난간을 쥐지 않았다⁠.

“⁠주문⁠. 피고인을 징역 여섯 달에 처한다⁠. 다만 이 판결이 확정된 날부터 일 년 동안 형의 집행을 유예한다⁠. 이 사건 공소 사실 가운데 업무상과실치사의 점은 무죄⁠.⁠”

방청석 왼편에서 숨소리가 흔들렸다⁠. 오른편에서 약사가 두 손을 모았다⁠. 미경은 움직이지 않았다⁠. 정목도 움직이지 않았다⁠.

금분은 판결문을 덮었다⁠. 병찬이 곁눈질했다⁠. 판결문은 법원에 남는다⁠. 국민 판사는 이유를 판결문대로 읽어도 되고⁠, 판결문을 바탕으로 말로 해도 된다⁠. 제도가 처음 생길 때 정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열한 명은 모두 읽었다⁠. 금분은 일곱 장을 손바닥으로 덮어 누르고 마이크를 당겼다⁠.

“⁠이유를 말하겠습니다⁠. 길게 안 할게요⁠. 판결문에 다 있어요⁠.⁠”

금분은 피고인석을 보았다⁠.

“⁠2039년 12월 18일 새벽⁠, 별관 3층에는 빨간 콘센트가 열두 개 있었고 숨이 필요한 사람이 스물네 명 있었습니다⁠. 피고인은 열두 명을 골랐습니다⁠. 고른 사람을 법은 벌하지 않습니다⁠. 같은 무게의 목숨 가운데 몇을 고를 수밖에 없었던 사람을 벌하면⁠, 다음 한파 밤에 아무도 고르지 않습니다⁠. 그럼 스물네 명이 다 죽습니다⁠. 이건 옆에 앉은 한병찬 판사님한테 배웠어요⁠.⁠”

병찬이 볼펜을 쥐었다가 놓았다⁠.

“⁠두 시 십사 분에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 뒤에 피고인은 3번이라고 불렀습니다⁠. 전화가 피고인 손을 움직였는지⁠, 이 법정은 석 달 동안 들여다보았고 끝내 알지 못했습니다⁠. 피고인 자신도 모른다고 했고⁠, 저는 그 말을 믿었습니다⁠. 믿음은 판결 이유가 안 됩니다⁠. 모른다는 것이 판결 이유입니다⁠. 모르는 것으로 사람을 벌하지 않습니다⁠.⁠”

금분은 미경을 보았다⁠. 미경이 금분을 보았다⁠. 석 달 전 정문 앞에서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와 같은 눈이었다⁠.

“⁠피고인은 아침 여덟 시 십이 분에 간호 기록의 두 시 십육 분을 두 시 오 분으로 고쳤습니다⁠. 이건 압니다⁠. 피고인이 이 법정에서 말했고⁠, 서희윤 증인의 사진이 받칩니다⁠. 고친 까닭이 간호사들을 지키려는 것이었다는 것도 압니다⁠. 그래도 벌합니다⁠. 기록을 고치면⁠, 다음 사람이 그 밤을 다시 볼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이 법정이 그 밤을 다시 보는 데 석 달이 걸린 것도 고친 기록 때문입니다⁠.⁠”

정목이 고개를 숙였다⁠. 오래 숙이지 않고 다시 들었다⁠.

금분은 판결문 다섯 장째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덮은 채로 짚었다⁠.

“⁠마지막으로⁠, 이 법정이 본 것을 말하겠습니다⁠. 이건 피고인의 죄가 아닙니다⁠. 이 법정은 피고인석에 없는 사람을 벌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벌하지 않고 본 대로만 말합니다⁠.⁠”

방청석 맨 뒷줄에서 상철이 등을 벽에서 뗐다⁠.

“⁠빨간 콘센트가 열두 개뿐이었던 까닭은 비상 발전기 B가 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발전기 B는 2039년 4월에 정밀 점검을 받아야 했습니다⁠. 점검은 4월에 한 번⁠, 10월에 한 번⁠, 두 번 미뤄졌습니다⁠. 미룬 도장 옆에 세온의료재단 상임이사의 이름이 있습니다⁠. 증인은 이 법정에서 제 입으로 그 이름을 두 번 읽었습니다⁠. 사건 밤 별관에 있던 의사와 간호사 누구도 점검이 미뤄진 것을 몰랐습니다⁠. 이 법정은 발전기실에서 엔진 기름 색을 보았습니다⁠. 갈아야 할 때를 넘긴 색이었습니다⁠.⁠”

금분은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법정 안이 조용했다⁠. 천장 카메라의 모터 소리가 들렸다⁠.

“⁠유족 대표께서 결심 공판 날 엄마 이름 옆에 세 개를 써 달라고 하셨습니다⁠. 전화 한 통⁠, 점수표⁠, 기름 안 간 발전기⁠. 판결문에 세 개 다 썼습니다⁠. 이름 옆에요⁠. 그 이상은 판사가 쓸 수 없어서 안 썼습니다⁠.⁠”

미경이 콩나물 봉지를 두 손으로 감쌌다⁠. 비닐이 아주 작게 바스락거렸다⁠.

“⁠이 판결에는 한병찬 판사님의 반대 의견이 붙어 있습니다⁠. 발전기 이야기를 판결 이유에 쓴 것은 판결의 범위를 넘는다는 의견입니다⁠. 판사님은 반대 의견을 붙이고 서명하셨습니다⁠. 두 의견 다 판결문에 있습니다⁠. 둘 다 읽어 주세요⁠.⁠”

금분이 병찬을 보았다⁠. 병찬은 마이크를 당기지 않았다⁠.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병찬이 판사석에서 끄덕인 것 가운데 가장 깊었다⁠.

“⁠선고를 마칩니다⁠.⁠”

망치는 치지 않았다⁠. 금분은 망치를 들었다가 받침 위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새 받침의 두꺼운 나무가 소리 없이 망치를 받았다⁠.

*

정문 앞 계단에서 공판 검사가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골무 없는 손에 서류 봉투를 쥐고 있었다⁠. 금분은 판사실 창 대신 계단 옆 통로로 내려가다 검사의 목소리를 들었다⁠.

“⁠오늘 아침 유족 열두 가족이 고발장을 냈습니다⁠. 세온의료재단 비상 발전기 정비 연기와 관련해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수사에 들어갑니다⁠. 수사 대상에는 상임이사가 포함됩니다⁠.⁠”

계단 아래 정문 옆에 상철이 서 있었다⁠. 영정 탁자 바로 곁이었다⁠. 상철은 기자들을 보지 않았다⁠. 사진 열두 장 앞에 서서⁠, 맨 끝 콩나물시루 앞 사진을 보고 있었다⁠. 통로를 지나던 금분과 눈이 마주쳤다⁠. 상철은 고개를 숙였다⁠. 판사석에 하던 목례와 같은 각도였다⁠. 이번에는 숙인 고개를 금방 들지 않았다⁠.

선고 날 오후 네 시⁠, 국회 법사위가 국민 판사제 폐지 법안을 표결에 부쳤다⁠. 금분은 판사실에서 법복 단추를 풀다가 복도 텔레비전 자막을 보았다⁠. 「⁠국민 판사제 폐지 법안⁠, 법사위 부결 … 찬성 7 반대 11⁠」⁠. 자막 아래로 병찬이 공청회에서 한 말이 짧게 다시 흘렀다⁠. 「⁠“⁠판결을 보고 정해 주십시오⁠”⁠」⁠.

병찬이 판사실 문간에 서서 같은 자막을 보았다⁠. 넥타이를 한 손으로 느슨하게 풀었다⁠.

“⁠판사님⁠. 판결문 다섯 장째는 지금도 범위를 넘었다고 생각합니다⁠.⁠”

“⁠알아요⁠. 반대 의견에 쓰셨잖아요⁠.⁠”

“⁠그래도 그 장이 없었으면 저는 다음 국민 판사 옆에 앉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

6월 5일 화요일⁠, 임기 마지막 날이었다⁠. 금분은 법원 1층 민원 창구에 법복을 개어 올려놓았다⁠. 석 달 전 사퇴서를 내밀던 창구였다⁠. 같은 직원이 법복을 받아 들고 목록에 체크를 했다⁠.

“⁠공은요⁠?⁠”

“⁠공은 기념이라면서요⁠.⁠”

“⁠네⁠. 가져가세요⁠. 지금까지 열두 분이 계셨는데 공 속 종이까지 꺼내 읽으신 분은 판사님 한 분이래요⁠. 경위님이 그러시던데요⁠.⁠”

창구 옆에서 경위가 등산 점퍼 차림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비번이라고 했다⁠. 경위는 금분에게 작은 비닐 꾸러미를 내밀었다⁠. 금 간 옛 망치 받침이었다⁠.

“⁠시설과에서 버린다길래 챙겼어요⁠. 판사님 첫날 치신 거요⁠.⁠”

“⁠이걸 왜 저를 줘요⁠?⁠”

“⁠국가 거라 원래는 안 되는데요⁠, 버린 거라 괜찮대요⁠. 법적으로요⁠.⁠”

“⁠남편한테 배웠어요⁠?⁠”

“⁠지난주에 후라이드 포장하면서요⁠.⁠”

금분은 꾸러미를 받아 앞치마 주머니 옆구리에 끼웠다⁠. 공 옆에 넣기에는 받침이 컸다⁠.

금분은 법복을 벗은 몸을 내려다보았다⁠. 빨간 앞치마가 나왔다⁠. 기름 얼룩이 석 달 전과 같은 자리에 있었고⁠, 주머니 귀퉁이에 빨간 실이 박혀 있었다⁠. 법원 정문을 나서는데 영정 탁자가 치워지고 있었다⁠. 미경이 사진을 한 장씩 신문지에 싸서 상자에 담고 있었다⁠. 금분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미경도 사진을 싸던 손을 멈추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

6월 두 번째 금요일 밤 아홉 시⁠, 영통 골목 끝 공터에 하얀 트럭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짐칸 철판 위에서 튀김솥이 끓었다⁠. 휴대용 발전기가 낮게 돌았다⁠. 트럭 옆에 플라스틱 탁자 하나와 의자 넷이 놓였다⁠. 탁자는 하나뿐이었다⁠. 트럭 앞 유리 안쪽 계기판 위에 노란 공이 놓여 있었다⁠.

배달 앱 노출은 지난주에 풀렸다⁠. 찬별이 트럭 옆 간이 의자에 앉아 태블릿 알림을 받았다⁠. 「⁠띵동⁠! 한입배달 · 새 주문 · 순살 한 마리⁠」⁠. 찬별이 리뷰 답글 창을 열었다가 금분 눈치를 보고 닫았다⁠. 경호가 오토바이에 상자를 싣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내복 두 겹 위에 배달 조끼를 입었다⁠. 조끼 안쪽에 시침핀이 꽂혀 있었다⁠.

아홉 시 십 분⁠, 트럭 앞에 흰 셔츠 차림의 남자가 섰다⁠. 정목이었다⁠. 면허가 석 달 정지됐다고 상가 단톡방에서 약사가 알려 주었다⁠. 정목은 메뉴판을 올려다보지 않았다⁠. 금분은 정목의 눈이 어디에도 멈추지 않는 것을 보았다⁠. 시킬 것을 이미 아는 손님의 눈이었다⁠.

“⁠반반 한 마리요⁠. 목 따로⁠. 무 많이⁠.⁠”

“⁠냉동고에 선고 날 찾아가라고 써 둔 거 있어요⁠. 그건 얼어서 못 드려요⁠. 새로 튀길게요⁠.⁠”

“⁠기다리겠습니다⁠.⁠”

금분은 닭을 손질했다⁠. 날개를 접고⁠, 다리를 꺾고⁠, 목을 따로 떼어 냈다⁠. 목을 따로 튀기는 동안 정목은 플라스틱 탁자의 한쪽 끝 의자에 앉았다⁠. 손을 탁자 위에 올렸다⁠. 엄지와 검지 사이 굳은살이 트럭 조명 아래 노랬다⁠.

아홉 시 십오 분⁠, 골목 어귀에서 슬리퍼 소리가 왔다⁠. 미경이었다⁠. 손에 콩나물 한 봉지를 들고 있었다⁠. 미경은 트럭 앞에서 멈춰 탁자 끝의 정목을 보았다⁠. 정목이 일어서려 했다⁠. 미경이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앉아 있으라는 손이었다⁠.

“⁠반반⁠. 포장⁠. 무 많이⁠.⁠”

“⁠앉아서 기다리세요⁠. 금방 나와요⁠.⁠”

미경은 탁자를 보았다⁠. 탁자는 하나였다⁠. 미경은 정목이 앉은 끝의 반대편 끝 의자를 빼서 앉았다⁠. 콩나물 봉지를 무릎에 올렸다⁠. 탁자 길이만큼 둘 사이가 떨어져 있었다⁠. 둘 다 말하지 않았다⁠. 정목은 탁자 위 제 손을 보았고⁠, 미경은 트럭 계기판 위의 노란 공을 보았다⁠.

금분은 튀긴 목을 상자에 담다가 손을 멈췄다⁠. 무를 한 접시 따로 담았다⁠. 흰 무 조각이 접시 위에 수북했다⁠. 금분은 트럭에서 내려와 접시를 탁자 한가운데에 내려놓았다⁠. 정목 쪽으로도 미경 쪽으로도 밀지 않고⁠, 딱 가운데에⁠.

튀김솥에서 기름이 다시 끓어올랐다⁠. 발전기가 낮게 돌았고⁠, 계기판 위의 노란 공이 엔진 떨림에 아주 조금씩 흔들렸다⁠. 탁자 양 끝에서 두 사람이 앉은 채⁠, 가운데 무 접시 위로 트럭 조명이 하얗게 떨어졌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작가를 구독하면 다음 화가 올라올 때 알려 드립니다.

15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