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554자)

안부 전화

국민 판사 추첨제 · 은해록

월요일 새벽 다섯 시⁠, 금분은 버릇처럼 눈을 떴다⁠. 생닭이 들어오는 시각이었다⁠. 이층 창을 열자 골목에 정육점 트럭이 없었다⁠. 금분이 계단을 내려가 가게 뒷문을 열었을 때⁠, 주방에는 형광등이 켜져 있었다⁠. 경호가 식은 튀김기 앞에 쪼그려 앉아 기름을 퍼내고 있었다⁠. 열두 해 쓴 기름솥 바닥에 검은 찌꺼기가 눌어붙어 있었다⁠.

“⁠뭐 해⁠?⁠”

“⁠닦아 놓으려고⁠. 다시 켤 때 깨끗하게⁠.⁠”

“⁠다시 켤지 몰라⁠.⁠”

“⁠그러니까 지금 닦아⁠. 켤 줄 알면 그때 닦지⁠.⁠”

경호는 철 수세미로 솥 바닥을 문질렀다⁠. 수세미 소리가 새벽 주방에 길게 울렸다⁠. 금분은 앞치마를 둘렀다⁠. 둘러 놓고 할 일이 없어서 앞치마 끈만 다시 묶었다⁠. 이층 계단 위에서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드르륵⁠, 드르륵⁠. 2층 수선집 재봉틀 소리였다⁠. 미경은 토요일에 퇴원했고⁠, 일요일부터 재봉틀 앞에 앉았다⁠. 소리가 예전보다 느렸다⁠. 한 땀 한 땀 쉬어 가며 박는 소리였다⁠.

*

열 시⁠, 대법정⁠. 공판 검사가 공소장 변경 신청서를 읽었다⁠. 의료법 위반⁠, 진료 기록 거짓 작성⁠. 2039년 12월 18일 오전 여덟 시 십이 분⁠, 피고인이 별관 중환자실 전자 간호 기록의 시각을 두 시 십육 분에서 두 시 오 분으로 고침⁠. 금분이 피고인에게 인정하느냐고 묻자 정목이 일어섰다⁠.

“⁠인정합니다⁠.⁠”

석 달 전 첫 공판에서 들은 말과 같은 말이었다⁠. 목소리가 달랐다⁠. 그때는 누군가에게 건네는 말이었고⁠, 지금은 제 몫을 받는 말이었다⁠.

“⁠증인 도상철⁠, 들어오세요⁠.⁠”

상철이 방청석 뒤 문으로 들어왔다⁠. 감색 양복에 재단 배지를 달았다⁠. 증인석으로 걸어가는 걸음이 판사석 앞에서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선서문을 읽는 목소리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양심에 따라 숨기거나 보태지 않고 사실 그대로 말하며⁠,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 상철은 맹세합니다에서 반 박자 쉬었다⁠. 금분은 쉬어 간 반 박자를 들었다⁠.

검사의 신문이 먼저였다⁠. 상철의 대답은 텔레비전에서 들은 말과 거의 같았다⁠. 정전 소식을 시설팀에게서 들었다⁠. 이사장의 어머니가 별관 3번 병상에 계셨다⁠. 안부를 여쭈려 교수에게 전화했다⁠. 병상 배치는 교수가 의학적으로 판단했고 재단은 관여하지 않았다⁠.

검사가 앉자 금분이 마이크를 당겼다⁠. 병찬이 탁자 위에서 볼펜을 내려놓았다⁠. 국선 변호인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상임이사님⁠. 안부 전화를 일 분 사십 초 하셨어요⁠?⁠”

“⁠네⁠.⁠”

“⁠우리 엄마는 안부 전화를 십 초에 끊어요⁠. 밥 먹었냐⁠, 먹었다⁠, 끊어라⁠. 그게 다예요⁠. 일 분 사십 초면 우리 엄마는 김장 얘기까지 해요⁠.⁠”

방청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경위가 헛기침을 했지만 경위 입꼬리도 올라가 있었다⁠. 상철은 웃지 않았다⁠. 웃는 얼굴을 고르게 펴지도 않았다⁠.

“⁠정전 상황이라 여쭐 것이 많았습니다⁠.⁠”

“⁠그럼 뭘 여쭤봤어요⁠? 선생님한테 괜찮으시냐고 물었어요⁠? 그 밤에 선생님도 계단을 아흔여섯 개씩 오르내렸잖아요⁠.⁠”

상철은 대답하기 전에 피고인석을 보았다⁠. 정목은 상철을 보지 않았다⁠.

“⁠…⁠…교수님 안부는 여쭙지 않았습니다⁠.⁠”

“⁠간호사들 안부는요⁠? 4번 할머니 안부는요⁠?⁠”

“⁠여쭙지 않았습니다⁠.⁠”

“⁠그럼 누구 안부를 물었어요⁠?⁠”

“⁠이사장님 어머님 안부입니다⁠.⁠”

“⁠일 분 사십 초 동안 한 사람 안부만요⁠.⁠”

“⁠네⁠.⁠”

금분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이 메뉴판에서 한 줄만 오래 볼 때와 같았다⁠. 그런 손님은 다른 메뉴를 묻지 않았다⁠.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세 번 하셨대요⁠. 선생님이 그랬어요⁠.⁠”

“⁠재단 사람들이 인사로 늘 하는 말입니다⁠.⁠”

“⁠저는 단체 주문 손님이 잘 부탁드린다고 하면 서비스 콜라를 넣어요⁠. 그 말 들으면 사장은 다 알아요⁠. 콜라 넣으라는 거예요⁠. 상임이사님은 그 밤에 콜라 넣으라고 한 거예요⁠, 인사한 거예요⁠?⁠”

웃음이 다시 났다가 금방 가라앉았다⁠. 이번에는 아무도 오래 웃지 않았다⁠. 상철은 손을 증인석 난간에 얹었다⁠. 손이 마르고 따뜻해 보였다⁠. 처음 악수하던 날의 손이었다⁠.

“⁠제 말이 교수님께 어떻게 들렸는지는 제가 정할 수 없습니다⁠.⁠”

“⁠그럼 아침 여덟 시 전화는요⁠? 기록 정리해 달라고 하셨대요⁠.⁠”

“⁠정리를 부탁드린 적은 있습니다⁠. 정리와 수정은 다릅니다⁠. 저는 기록을 고치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정리했더니 두 시 십육 분이 두 시 오 분이 됐어요⁠. 우리 가게에서 영수증 정리하다가 만팔천 원이 만오천 원 되면⁠, 저는 그거 정리라고 안 해요⁠. 알바한테 그날 일당 다시 계산하자고 해요⁠.⁠”

상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증인이 대답하지 않을 권리는 있었다⁠. 금분은 기다리지 않고 공판 검사를 보았다⁠.

“⁠검사님⁠. 재단이 낸 정비 기록 원본⁠, 오늘 증거로 내 주세요⁠. 먹 걷힌 거요⁠.⁠”

*

법정 화면에 정비 기록 한 장이 떴다⁠. 2039년 4월 별관 비상 발전기 B 정밀 점검 견적서⁠, 마지막 장⁠. 업체 이름과 금액이 적혀 있었고⁠, 아래에 붉은 도장 하나가 찍혀 있었다⁠. 「⁠연기⁠」⁠. 도장 옆 칸에 손으로 쓴 서명이 있었다⁠.

“⁠증인⁠. 여기 서명 옆에 이름 좀 읽어 주세요⁠.⁠”

상철은 화면을 보았다⁠. 오래 보지 않았다⁠. 법정 안에서 상철만이 서명 옆 이름을 처음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도상철입니다⁠.⁠”

“⁠다음 장이요⁠.⁠”

검사가 화면을 넘겼다⁠. 2039년 10월 견적서였다⁠. 같은 도장⁠, 같은 서명이었다⁠.

“⁠도상철입니다⁠.⁠”

상철은 두 번째에는 화면을 보지 않고 읽었다⁠. 방청석 왼편 유족석에서 누군가 일어나려다 옆 사람 손에 앉았다⁠. 18번 할아버지의 딸이었다⁠. 금분은 상철의 눈을 보았다⁠. 눈이 화면도 판사석도 아닌 법정 천장에 가 있었다⁠. 기름 막대를 뽑던 날 발전기실 형광등을 보던 눈이었다⁠.

“⁠왜 두 번 미뤘어요⁠?⁠”

상철은 손을 난간에서 떼어 무릎 위로 내렸다⁠. 증인석에 앉은 뒤 처음으로 몸을 움직였다⁠.

“⁠2039년에 재단 지방 병원 두 곳이 적자였습니다⁠. 정밀 점검 비용이 사억이었습니다⁠. 간호사 서른 명의 반년 치 월급입니다⁠. 발전기는 매달 정기 점검에서 이상 없음이 나왔습니다⁠. 저는 정밀 점검을 미루고⁠, 그 돈으로 간호사들 월급을 줬습니다⁠. 그해 지방 병원 간호사가 한 명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상철은 숫자를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병찬처럼⁠, 정목처럼⁠.

“⁠저도 골랐습니다⁠. 조 교수처럼요⁠. 조 교수는 그 밤 다섯 시간 동안 열두 명을 골랐고⁠, 저는 한 해 동안 서른 명을 골랐습니다⁠. 제가 고른 서른 명은 지금도 지방 병원에서 환자를 봅니다⁠.⁠”

법정이 조용했다⁠. 금분은 대꾸할 말을 바로 찾지 못했다⁠. 열두 해 동안 기름값이 오를 때마다 금분도 골랐다⁠. 알바 시간을 줄일지⁠, 닭 크기를 줄일지⁠. 기름을 하루 더 쓸지⁠. 하루 더 쓴 기름으로 튀긴 닭은 손님 상에 나갔다⁠. 금분은 하루 더 쓴 기름을 버리던 날의 냄새를 기억했다⁠.

“⁠상임이사님은 고르실 때⁠, 고른 거 누가 알아요⁠?⁠”

“⁠재단 이사회에 보고했습니다⁠.⁠”

“⁠그 밤 별관 사람들은요⁠? 선생님하고 간호사들은 발전기가 일곱 달 넘게 정밀 점검을 못 받은 거 알았어요⁠?⁠”

상철은 처음으로 말을 고르는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몰랐습니다⁠.⁠”

“⁠선생님은 골랐다는 걸 다 알고 골랐어요⁠. 열두 개밖에 없는 걸 알고⁠, 다섯 시간 동안요⁠. 상임이사님은 골랐다는 걸 아무한테도 안 알리고 골랐어요⁠. 고른 건 같아도⁠, 그게 달라요⁠.⁠”

금분은 말을 마치고 마이크에서 손을 뗐다⁠. 병찬이 곁에서 볼펜을 쥐었다가 놓았다⁠. 볼펜 굴러가는 소리가 탁자 위에서 짧게 났다⁠.

*

상철은 증인석에서 바로 내려가지 않았다⁠. 검사가 신문을 마쳤다고 말하고⁠, 국선 변호인도 질문이 없다고 한 뒤였다⁠. 금분이 증인은 나가셔도 된다고 했다⁠. 상철은 일어서는 대신 판사석을 올려다보았다⁠.

“⁠국민 판사님께 한 가지만 여쭤도 되겠습니까⁠?⁠”

병찬이 금분을 보았다⁠. 증인이 판사에게 묻는 일은 드물었다⁠. 금분은 고개를 끄덕였다⁠.

“⁠판사님이 판결문에 재단을 쓰시면⁠, 재단은 본관 중환자실 증설을 멈춥니다⁠. 이사회가 이미 그렇게 정했습니다⁠. 소송과 수사에 대비해야 하니까요⁠. 지금 본관 중환자실에 누운 환자가 서른 명입니다⁠. 다음 겨울 한파 밤에 들어올 환자가 몇 명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상철은 재단 배지를 손끝으로 만졌다⁠.

“⁠판사님⁠.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판사님도 고르셔야 합니다⁠.⁠”

방청석 오른편의 텅 빈 의자들이 형광등 아래 반짝였다⁠. 왼편의 유족들은 사진을 무릎에 올린 채 금분을 보았다⁠. 피고인석의 정목도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금분을 보았다⁠. 법정 안의 모든 눈이 판사석 가운데에 모였다⁠.

금분은 판사석 서랍을 열었다⁠. 노란 공을 꺼내 쥐었다⁠. 공 속의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국민 판사는 자신이 아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금분은 대답하지 않고 공을 쥔 채 상철을 보았다⁠. 상철도 금분을 보았다⁠. 둘 사이에 판사석 난간이 있었다⁠. 난간 나무에 두 해 동안 국민 판사 열두 명이 짚은 손자국이 반들반들했다⁠.

*

폐정하고 합의실로 들어서자 병찬이 정수기 앞에서 종이컵 두 개에 물을 받았다⁠. 하나를 금분 앞에 놓고⁠, 자기는 서서 마셨다⁠.

“⁠증인의 마지막 질문은 이 사건의 쟁점이 아닙니다⁠. 판결로 대답하실 의무도 없습니다⁠.⁠”

“⁠알아요⁠.⁠”

“⁠다만 진짜 질문입니다⁠. 저도 대답을 모릅니다⁠.⁠”

금분은 종이컵을 두 손으로 쥐었다⁠. 손바닥이 차가워졌다⁠.

“⁠판사님⁠. 판결문이 재단을 벌할 수 있어요⁠?⁠”

“⁠없습니다⁠. 재단을 벌하는 일은 검사가 합니다⁠. 판결은 이 법정이 무엇을 보았는지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본 걸 말하면⁠, 상임이사님 말대로 중환자실 짓는 게 멈춰요⁠?⁠”

“⁠멈출 수도 있습니다⁠. 멈추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판사님이 정하실 수 없는 일입니다⁠.⁠”

병찬은 빈 종이컵을 구겨 쓰레기통에 넣었다⁠. 들어가지 않고 테두리에 맞고 떨어졌다⁠. 병찬은 허리를 굽혀 종이컵을 주워 다시 넣었다⁠.

“⁠제가 정할 수 있는 건 뭐예요⁠?⁠”

“⁠무엇을 말할지입니다⁠. 무엇을 말하지 않을지도요⁠.⁠”

*

밤 열 시⁠, 불 꺼진 가게 셔터 앞에서 금분이 열쇠를 찾고 있을 때 2층 계단참에서 목소리가 내려왔다⁠.

“⁠올라와⁠.⁠”

미경이었다⁠. 수선집 문을 반쯤 열고 문턱에 서 있었다⁠. 퇴원하고 사흘⁠, 볼에 살이 조금 돌아왔다⁠. 입에 시침핀을 두 개 물고 있었다⁠. 금분은 계단을 올라가 문턱 앞에서 멈췄다⁠.

“⁠언니⁠, 재판 얘기는⁠—⁠”

“⁠안 해⁠. 주머니 얘기 해⁠. 앞치마 벗어⁠.⁠”

금분은 앞치마 끈을 풀었다⁠. 기름에 절어 매듭이 굳은 끈이었는데⁠, 미경이 손가락으로 매듭을 몇 번 비비자 스르르 풀렸다⁠. 미경은 앞치마를 재봉틀 위에 펴 놓고 오른쪽 주머니 귀퉁이를 뒤집었다⁠. 지난번에 꿰맨 하얀 실이 다시 반쯤 터져 있었다⁠.

“⁠주머니에 뭘 넣고 다니길래 맨날 터져⁠.⁠”

“⁠공이요⁠. 노란 공⁠.⁠”

미경은 대답하지 않고 실을 바늘귀에 꿰었다⁠. 이번에는 빨간 실이었다⁠. 앞치마와 같은 색이라 꿰매도 티가 나지 않을 실이었다⁠. 재봉틀을 쓰지 않고 손으로 한 땀씩 박았다⁠.

“⁠아까 콜라 얘기⁠. 웃겼어⁠.⁠”

“⁠재판 얘기 안 한다면서요⁠.⁠”

“⁠콜라 얘기야⁠.⁠”

미경은 마지막 땀에 매듭을 짓고 이로 실을 끊었다⁠. 앞치마를 접어 금분에게 내밀었다⁠. 금분이 받으려 하자 미경이 손을 거두지 않고 한 번 더 말했다⁠.

“⁠선고 날 이거 입고 와⁠.⁠”

“⁠네⁠.⁠”

“⁠주머니에 공 넣고⁠.⁠”

금분은 앞치마를 받았다⁠. 주머니 귀퉁이를 손가락으로 만져 보았다⁠. 빨간 실이 단단하게 박혀 있었다⁠. 열두 해 동안 몇 번이고 터지던 자리였다⁠.

12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안부 전화 · 국민 판사 추첨제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