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05자)

플러그

국민 판사 추첨제 · 은해록

5월 15일 화요일 아침 아홉 시 사십 분⁠, 판사실 창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났다⁠. 소리는 멀리서 오다가 법원 정문 앞에서 멎었다⁠. 금분은 사건 기록을 넘기던 손을 멈추고 창으로 갔다⁠. 정문 앞에 구급차가 멈춰 있었고⁠, 구급대원 둘이 천막 입구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천막 종이에 「⁠23일⁠」이 적혀 있었다⁠.

들것이 천막에서 나왔다⁠. 들것 위의 몸이 너무 작았다⁠. 열두 해 동안 수선집 재봉틀 앞에 앉아 있던 등이 들것 위에서 둥글게 말려 있었다⁠. 들것 옆에서 떡집 사장이 미경의 슬리퍼 한 짝을 들고 따라갔다⁠. 경호도 있었다⁠. 아침마다 천막에 생수 상자를 날라 주던 경호가 구급차 문 앞에서 구급대원에게 무언가 말하고⁠, 구급차에 올라탔다⁠.

금분은 창틀을 쥐었다⁠. 내려가면 안 되는 자리였다⁠. 병찬이 판사실 문을 열고 들어와 금분 곁에 섰다⁠. 병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구급차가 정문을 빠져나가 광교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가장 가까운 응급실은 세온대학병원이었다⁠.

한 시간 뒤 경호에게서 전화가 왔다⁠. 금분은 판사실 복도 끝 계단참에서 받았다⁠.

“⁠여보⁠, 깼어⁠. 응급실이야⁠. 수액 맞고 있어⁠. 의사가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대⁠.⁠”

“⁠세온이야⁠?⁠”

“⁠응⁠. 미경 씨가 눈 뜨자마자 여기가 어디냐고 물어서⁠, 내가 거짓말할 줄 모르잖아⁠. 세온이라고 했더니 천장 보고 한참 웃었어⁠. 엄마 누웠던 병원에 자기도 누웠다고⁠.⁠”

금분은 계단 난간에 이마를 댔다⁠. 쇠 난간이 차가웠다⁠.

“⁠단식은⁠?⁠”

“⁠끝났대⁠. 의사가 끝내래⁠. 미경 씨가 그러래⁠. 근데 여보한테 전하래⁠. 판결 날 법정 간다고⁠. 걸어서 간다고⁠.⁠”

수요일 저녁⁠, 경호가 병실에서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응급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긴 미경의 침대 머리맡이었다⁠. 벽에 콘센트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하나는 흰색⁠, 하나는 빨간색이었다⁠. 수액 펌프의 플러그가 빨간 콘센트에 꽂혀 있었다⁠. 사진 아래 경호의 문자가 이어졌다⁠.

「⁠미경 씨가 간호사한테 빨간 데 꽂아 달라고 했어⁠. 간호사가 원래 빨간 데 꽂는 거라고 했더니 미경 씨가 그럼 됐다고 하고 잤어⁠」

금분은 사진을 손가락으로 키웠다⁠. 빨간 콘센트 구멍 둘레가 깨끗했다⁠. 긁힌 자국이 하나도 없었다⁠. 금분은 사진을 닫고 휴대전화를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 실밥이 손톱에 걸렸다⁠. 미경이 다시 꿰매 줄 날까지 버틸 실이었다⁠.

*

목요일 새벽 다섯 시⁠, 정육점 트럭이 오지 않았다⁠. 다섯 시 반에도 오지 않았다⁠. 여섯 시에 금분이 정육점 셔터를 두드리자 정육점 사장이 셔터를 반쯤 올리고 허리를 숙여 나왔다⁠. 앞치마를 두르지 않은 얼굴이 부어 있었다⁠.

“⁠금분 사장⁠. 미안해⁠.⁠”

“⁠닭 안 넣어요⁠?⁠”

“⁠재단에서 어제 연락 왔어⁠. 아무 말도 안 하더라⁠. 넣지 말라는 말도 안 해⁠. 그냥 우리 가게 계약 갱신 서류를 이번 주에 보내겠다고만 했어⁠. 금분 사장 얘기는 한마디도 안 했어⁠. 그래서 더 무서워⁠.⁠”

정육점 사장은 셔터 아래에 선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우리 아들 원무과야⁠. 내 가게도 재단 건물이야⁠. 알잖아⁠.⁠”

“⁠알아요⁠.⁠”

금분은 알았다⁠. 상철은 조건을 붙이지 않았다⁠. 조건을 붙이지 않아도 사람들이 알아서 조건을 읽었다⁠. 금분은 정육점 사장에게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가게로 돌아와 다른 닭 공급처 네 곳에 차례로 전화를 걸었다⁠. 두 곳은 받지 않았고⁠, 한 곳은 물량이 없다고 했고⁠, 마지막 한 곳은 사정을 듣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저희가 세온 병원 급식에도 들어가서요⁠, 하고⁠.

여덟 시⁠, 찬별이 태블릿을 들고 주방으로 들어왔다⁠. 얼굴이 하얬다⁠.

「⁠한입배달 · 가게 노출 일시 중지 안내 · 최근 신고가 기준을 넘어 고객 화면에서 가게가 보이지 않습니다 · 심사에는 영업일 기준 열흘이 걸립니다⁠」

“⁠사장님⁠. 신고가 이틀 사이에 이백 개 들어왔대요⁠. 닭 안 시킨 사람들이요⁠. 리뷰도 없이 신고만요⁠.⁠”

“⁠누가⁠?⁠”

“⁠몰라요⁠. 앱이 안 알려 줘요⁠.⁠”

찬별은 태블릿을 계산대에 내려놓고 엎어 놓지 않았다⁠. 화면의 빨간 글씨가 그대로 떠 있었다⁠. 계산대 위에는 노란 공과⁠, 떡집 사장의 보온병과⁠, 보온병 밑에 눌러 둔 상철의 지폐 석 장이 있었다⁠. 금분은 지폐를 보았다⁠. 시킨 건 시킨 거라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

목요일 오후 판사실에서 금분은 병찬에게 닭이 끊긴 이야기를 했다⁠. 길게 하지 않았다⁠. 정육점⁠, 공급처 네 곳⁠, 앱의 빨간 글씨⁠. 병찬은 끝까지 듣고 볼펜을 내려놓았다⁠.

“⁠판사님⁠. 하나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판사님이 가게 문을 닫으시면⁠, 사람들은 그 사실과 판결을 이어서 볼 겁니다⁠. 재단에 화가 나서 쓴 판결로 읽힐 수 있습니다⁠. 국회는 그렇게 읽을 겁니다⁠.⁠”

“⁠그래서 가게 얘기는 판결문에 한 줄도 안 써요⁠. 닭 얘기도 안 쓰고 앞치마 얘기도 안 써요⁠.⁠”

“⁠말씀은 쉽습니다⁠.⁠”

“⁠쉬운 거 아니에요⁠. 제 가게예요⁠. 열두 해예요⁠. 근데 판결문은 제 가게가 아니잖아요⁠.⁠”

병찬은 한참 금분을 보았다⁠. 이번에는 금분이 먼저 눈을 돌리지 않았다⁠. 병찬이 서랍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탁자에 올렸다⁠. 영통중앙상가 상인회 이름으로 들어온 의견서였다⁠. 국민 판사를 바꿔 달라는 상인 열한 명의 서명이 있었다⁠. 미경과 미용실 사장의 이름은 없었다⁠.

“⁠어제 들어왔습니다⁠. 기록에 붙여 두겠습니다⁠. 판단에는 쓰지 않습니다⁠.⁠”

“⁠네⁠. 그것도 동네 사람 재판이에요⁠.⁠”

*

금요일 오후에 마지막 닭이 떨어졌다⁠. 냉장고에 남은 열두 마리를 손질하면서 금분은 날마다 하던 대로 목을 따로 모았다⁠. 모은 목이 한 바구니였다⁠. 받아 갈 사람이 없는 목이었다⁠.

밤 열한 시⁠, 셔터를 반쯤 내린 가게 문 방울이 울렸다⁠. 감색 양복이 허리를 숙여 셔터 아래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문간에 서지 않았다⁠. 계산대 앞까지 걸어왔다⁠.

“⁠영업이 끝나신 걸로 압니다⁠.⁠”

“⁠닭이 안 들어와서요⁠. 상임이사님 덕분에요⁠.⁠”

“⁠재단은 정육점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알아요⁠. 아무 말도 안 하셨죠⁠. 그래서 다들 알아들었어요⁠.⁠”

상철은 웃지 않았다⁠. 웃음 없는 얼굴을 금분은 두 번째로 보았다⁠. 발전기실 이후 처음이었다⁠.

“⁠오늘은 손님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조건을 붙이러 왔습니다⁠. 판사님이 조건을 붙이라고 하셨으니까요⁠.⁠”

상철은 양복 안주머니에서 접은 종이를 꺼내 펴 놓았다⁠. 손으로 쓴 메모였다⁠. 반듯한 글씨가 네 줄 있었다⁠.

“⁠영통중앙상가 계약은 이번 주에 갱신해 드립니다⁠. 정육점 납품은 다음 주 월요일부터 다시 들어옵니다⁠. 앱 신고는 철회됩니다⁠. 신고한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네 번째 줄은요⁠?⁠”

“⁠판결문에서 재단 이름만 빼 주십시오⁠.⁠”

상철은 메모의 마지막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치사는 무죄로 쓰십시오⁠. 한 판사님도 그렇게 보십니다⁠. 기록을 고친 죄는 쓰십시오⁠. 조 교수가 고쳤다고 법정에서 말했으니 저도 막을 생각이 없습니다⁠. 재단만 빼 주십시오⁠. 발전기 이야기⁠, 연기 도장 이야기⁠, 두 시 십사 분 이야기를 판결문에 안 쓰시면 됩니다⁠.⁠”

“⁠두 시 십사 분은 전국이 봤어요⁠.⁠”

“⁠본 것과 판사가 쓴 것은 다릅니다⁠. 판사님이 한 판사님께 하신 말씀입니다⁠. 저도 중계 봅니다⁠.⁠”

금분은 메모를 보았다⁠. 상철의 글씨는 병찬의 글씨와 닮았다⁠. 반듯하고⁠, 끝까지 맺고⁠, 흔들림이 없었다⁠.

“⁠상임이사님⁠. 그 할머니 살았잖아요⁠. 3번이요⁠. 이사장님 어머니요⁠.⁠”

“⁠살아 계십니다⁠.⁠”

“⁠4번 할머니는 돌아가셨어요⁠. 콩나물을 사십육 년 팔았대요⁠. 딸이 저기 2층에서 바지 단을 줄여요⁠. 지금은 상임이사님네 병원에 누워 있어요⁠. 스무사흘 굶다가요⁠.⁠”

상철은 메모 위에 손을 얹었다⁠. 손이 메모를 누르지도 거두지도 않았다⁠.

“⁠판사님⁠. 재단이 흔들리면 본관 중환자실에 지금 누워 있는 서른 명이 흔들립니다⁠. 지방 병원 두 곳 간호사 백사십 명의 월급이 흔들립니다⁠. 저는 그 사람들을 먼저 골랐습니다⁠. 판사님 가게 하나보다 그 사람들을 먼저요⁠.⁠”

“⁠저도 골라요⁠.⁠”

금분은 메모를 집어 반으로 접었다⁠. 한 번 더 접었다⁠. 접은 메모를 상철의 양복 가슴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상철은 피하지 않았다⁠.

“⁠조건 붙여 주셔서 고마워요⁠. 이제 거절할 수 있네요⁠. 거절합니다⁠.⁠”

상철은 가슴 주머니를 내려다보았다⁠. 메모 끝이 주머니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상철은 메모를 밀어 넣지 않았다⁠. 고개를 숙였다⁠. 판사석에 하던 목례와 같은 각도였다⁠.

“⁠법정에서 뵙겠습니다⁠. 증인으로요⁠.⁠”

“⁠네⁠. 그때는 거짓말하면 죄예요⁠.⁠”

상철이 셔터 아래로 허리를 숙여 나갔다⁠. 금분은 보온병 밑의 지폐 석 장을 꺼내 셔터 밑으로 밀어 보냈다⁠. 지폐는 골목 바닥에 떨어졌다⁠. 발소리가 멈췄다가⁠, 지폐를 줍지 않고 멀어졌다⁠.

*

열한 시 반⁠, 금분은 셔터를 다시 끝까지 올렸다⁠. 계산대 앞 칠판에 분필로 썼다⁠. 「⁠오늘 영업 끝 · 남은 닭 열두 마리 · 단골만 · 공짜 아님⁠」⁠. 찬별이 상가 단톡방에 칠판 사진을 올렸다⁠.

자정 전에 다 왔다⁠. 경위가 등산 점퍼를 입고 와서 후라이드를 포장했다⁠. 계산을 마친 경위가 모자를 벗고 한마디를 보탰다⁠.

“⁠판사님⁠, 망치 받침 새로 왔어요⁠. 이번 건 나무가 두꺼워요⁠. 선고 날 세게 치셔도 돼요⁠.⁠”

“⁠세게 안 칠 거예요⁠.⁠”

“⁠그래도요⁠. 혹시 몰라서요⁠.⁠” 떡집 사장이 와서 양념 두 마리를 시키고⁠, 해방 떡 남은 것을 계산대에 놓고 갔다⁠. 미용실 사장은 유족과 함께합니다 종이를 떼지 않은 유리문을 잠그고 내려왔다⁠. 약사도 왔다⁠. 탄원서 이야기는 하지 않고 순살 한 마리를 시켰다⁠. 마지막으로 정육점 사장이 왔다⁠. 자기가 끊은 닭을 시켰다⁠. 아무도 계산을 빼먹지 않았다⁠.

열한 마리째를 튀기고 나서 금분은 마지막 한 마리를 들고 잠깐 섰다⁠. 찬별이 포장 상자를 접다 말고 물었다⁠.

“⁠사장님⁠, 그건 누구 거예요⁠?⁠”

“⁠목 따로⁠.⁠”

금분은 마지막 닭과 따로 모아 둔 목 한 바구니를 함께 튀겼다⁠. 기름이 마지막으로 크게 끓었다⁠. 튀겨 낸 목을 상자에 담고⁠, 무를 많이 넣고⁠, 상자 뚜껑에 매직으로 썼다⁠. 「⁠선고 날 찾아가세요⁠」⁠. 상자를 냉동고 맨 위 칸에 넣었다⁠. 찬별은 울었다⁠. 경호는 미경의 병실에서 돌아와 주방 문간에 서서 말없이 보았다⁠.

금분은 튀김기 전원 스위치를 내렸다⁠. 기름 끓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기름 표면에 마지막 거품 몇 개가 떠올랐다가 꺼졌다⁠. 금분은 튀김기 뒤로 손을 넣었다⁠. 벽 아래 흰 콘센트에 꽂힌 굵은 플러그가 손에 닿았다⁠. 열두 해 동안 한 번도 뽑지 않은 플러그였다⁠. 플러그 머리가 기름때로 끈적했다⁠.

금분은 플러그를 쥐었다⁠. 손바닥 안에서 플러그가 아직 따뜻했다⁠. 사건 밤 별관 3층에서 희윤이 4번 플러그를 쥐었을 손을 생각했다⁠. 정목이 3번이라고 부르던 목소리를 생각했다⁠.

금분은 플러그를 뽑았다⁠. 콘센트에서 쇠가 빠지는 소리가 작고 짧았다⁠. 튀김기 옆 작은 초록 불이 꺼졌다⁠. 주방에 냉장고 모터 소리만 남았다⁠. 금분은 플러그를 바닥에 내려놓지 않고 손에 쥔 채⁠, 식어 가는 기름 표면에 비친 형광등을 오래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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