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110자) · 한수겸 · 섣달 열이틀
셋
네 번째 이름을 부른 사람 · 유하람
만 19세 이상 이용가
옥분이는 방앗간 디딜방아 옆에서 내 말을 끝까지 들었다. 방아 공이가 확 속으로 떨어질 때마다 쌀겨가 뽀얗게 일어 그녀의 눈썹에 내려앉았고, 그녀는 그것을 털지도 않고 나를 노려봤다.
“그러니까 선생 말은, 내 참이름을 떡장수 앞에서 소리 내어 대라는 거요?”
“떡장수 앞에서, 그리고 나하고 황 대장 앞에서.”
“시집도 안 간 여자한테?”
“그렇소.”
“그건 사내 셋 앞에서 치마를 걷으라는 소리요.”
그녀가 방아에서 발을 뗐다. 공이가 허공에서 멎었다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옆에서 쌀을 이던 방앗간 주인 영감이 못 들은 척 키를 더 세게 흔들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오?”
나는 그녀의 허리춤에 매달린 작은 치부책을 가리켰다. 떡값, 쌀값, 삯빨래값을 적는 책이다. 그녀는 글을 반쯤만 알아서 숫자 옆에 사람 대신 물건을 그려 두는데, 세 해 동안 그 책을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고 방앗간 사람들이 말했다.
옥분이는 열여섯에 강 건너 마을에서 이 고을 방앗간으로 삯일을 하러 왔다. 왼팔 이름도 제 마을 새김장이한테 받아 왔다. 그러니 그녀의 두 자는 내 장부에도 스승 장부에도 없고, 이 고을에서 그 두 자를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떡값 적은 데를 펴 보시오.”
그녀가 의심스러운 얼굴로 책을 폈다. 날마다 한 줄씩, 두 푼이 적혀 있었다. 다른 줄에는 다 그림이 있었다. 됫박, 빨래 방망이, 영감의 곰방대. 떡값 줄에만 그림이 없었다. 세 해 동안 날마다 빈칸이었다.
“누구한테 준 돈이오?”
옥분이가 빈칸을 들여다봤다. 손가락으로 그 자리를 한 번 짚었다가 떼었다. 그러고는 내가 처음 보는 얼굴을 했다. 셈이 안 맞을 때 짓는다는 그 얼굴이었다.
“천여 줄이 비었구먼.”
“세 해면 천하고도 아흔 줄쯤 되오.”
“그 떡장수가 나를 알긴 아오?”
“댁 떡값을 세 해 동안 한 번도 안 틀렸다고 나한테 말했소. 댁이 날마다 어제는 두 푼이었다고 한다고.”
옥분이가 치부책을 탁 덮었다.
“좋소, 하겠소. 대신 조건이 있소. 이불값 쳐 주고, 앞으로 떡값은 한 푼 반이오.”
*
황 대장은 더 어려웠다.
대장간은 저잣거리 북쪽 끝에 있다. 화덕 안에서 숯이 하얗게 달아 있었고, 풀무를 밟을 때마다 불길이 쉭 소리를 내며 치솟아 천장 서까래에 붉은빛을 던졌다. 쇠 달구는 냄새와 땀 냄새가 한데 엉겨 문간에만 서 있어도 겨울 옷 속으로 열이 파고들었다. 황 대장은 모루 앞에서 낫을 두드리고 있다가 나를 보자 망치를 내려놓았다.
“선생이 여기까지 웬일이오? 가슴값 받으러 오셨소?”
“그렇소.”
그의 얼굴이 굳었다. 열한 해 전, 그는 혼인 날짜를 받아 놓고 돈이 없어서 가슴을 못 새기고 있었다. 나는 그냥 새겨 줬다. 그는 해마다 쇠붙이로 갚겠다고 했는데 그동안 내 가게에 온 쇠붙이는 녹슨 부지깽이 하나였다.
“돈은 없소.”
“돈 말고 이름으로 받겠소.”
내 말을 다 듣고 나서 황 대장은 망치 자루를 두 손으로 쥐고 한참 모루만 봤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췄다.
“선생, 내 왼팔 이름 아시잖소.”
“아오. 스승 장부에 있소. 서른다섯 해 전 봄에 스승이 새겼고, 그 옆에 스승 글씨로 훈장 딸이라고 적혀 있소.”
“그걸 남 앞에서 대라고요? 쉰 먹은 대장장이가 그 이름을 입에 올리면 저잣거리가 사흘 웃소. 열다섯 때 내가 뭘 알았겠소? 이웃 서당 훈장 딸이 좋다고 한 글자를 골랐더니 그리 됐소.”
“떡장수하고 옥분이하고 나만 듣소.”
“옥분이? 방앗간 그 입?”
그는 망치를 모루에 내려놓고 뒤를 돌아봤다. 대장간 안쪽 살림방 문 너머에서 그의 안사람이 아들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황 대장이 한층 더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우리 안사람이 알면 안 되오. 내 참이름을 남한테 댔다는 걸 알면 나는 이 집에서 쫓겨나오.”
“가슴은 안사람하고 서로 정한 거니 괜찮소. 왼팔만 대면 되오.”
“왼팔이 더 문제요, 선생. 안사람은 내 왼팔 이름을 들을 때마다 웃다가 우오.”
그는 다시 망치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달군 낫이 모루 위에서 식어 가며 붉은빛이 가장자리부터 검게 죽어 갔다. 그 빛이 다 죽을 때까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떡전 아주머니 아들이라고 했소?”
“그렇소.”
“나는 그 아들 얼굴을 모르오. 아마 날마다 봤겠지. 그런데 그 아주머니는 아오. 우리 놈이 여섯 살에 홍역을 앓을 때 날마다 흰떡을 쪄서 문 앞에 두고 갔소. 값을 쳐 드리려 하니 손사래를 쳤소. 아이 앓는 집 떡값은 안 받는다고.”
그는 식은 낫을 집게로 들어 물통에 넣었다. 치익 소리와 함께 김이 올라와 그의 얼굴을 가렸다.
“그 양반 아들이면 하겠소. 대신 선생, 웃으면 가슴값 없던 일로 하는 거요.”
“가슴값은 원래 안 받았소.”
“그러니까 이번에도 안 받으시면 되오.”
*
섣달 열이틀 밤, 떡전 문을 닫아걸고 넷이 모였다.
시루는 식어 있었고 떡판 위에 쌀가루가 하얗게 남아 있었다. 등잔은 하나, 문짝 틈마다 헌 천을 끼워 바람을 막았다. 창호지에 등잔 그림자가 넷 비쳤다. 옥분이는 팔짱을 끼고 떡판 옆에 섰고, 황 대장은 문간 가까이에 쪼그려 앉아 자꾸 뒤통수를 긁었다. 떡전 아들은 시루 앞에 앉아 제 손만 내려다봤다.
떡전 아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안 해도 되오. 두 분이 나를 위해 참이름을 까야 할 까닭은 없소. 나는 이렇게 스무 해를 살았고, 더 살 수도 있소.”
“떡장수는 빠지시오.”
옥분이가 딱 잘랐다.
“이건 내 치부책 셈이오. 천 줄 넘게 빈칸인데 그걸 그냥 두고 어떻게 자오?”
황 대장은 그 말에 기운을 얻었는지 한마디 보탰다.
“그리고 나는 벽을 보고 하면 안 되겠소? 사람 얼굴 보고는 못 하겠소.”
“벽을 보고 부르면 벽이 이름을 아오.”
내 말에 옥분이가 먼저 웃었다. 황 대장은 벽을 한 번 쳐다보고 체념한 얼굴이 되었다.
옥분이가 먼저 했다. 그녀는 떡전 아들을 똑바로 보고 섰다. 입을 두 번 열었다 닫더니, 세 번째에 제 왼팔 이름을 댔다. 두 자가 빨리, 그리고 크게 나왔다. 말하자마자 그녀의 귀가 새빨개졌다. 그리고 내가 옆에서 불러 주는 대로 떡전 아들의 두 자를 따라 불렀다. 아까보다 작은 소리였다.
다음은 황 대장이었다. 그는 일어서서 떡전 아들 앞에 섰다가, 옥분이를 한 번 보고, 나를 한 번 보고, 천장을 봤다.
“웃지 마시오.”
그리고 제 왼팔 이름을 댔다.
그 두 자를 여기 적지는 않겠다. 다만 봄날 꽃잎이 물에 떠가는 모양을 두 자에 담은 이름이라, 쉰 먹은 대장장이 목에서 굵게 울려 나오니 방 안에서 무엇인가가 한 번 비틀거렸다. 옥분이가 입을 틀어막았고, 틀어막은 손가락 사이로 웃음이 샜다. 떡전 아들은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떨었다. 나는 등잔을 봤다. 등잔도 흔들렸다.
“웃지 말라고 했소.”
황 대장이 얼굴이 벌게져서 떡전 아들의 두 자를 불렀다. 부르는 소리만은 반듯했다. 대장간에서 쇠를 두드리는 박자로 한 자씩 끊어 불렀다.
그러고 나서 방 안이 조용해졌다. 식은 아궁이 안에서 재가 갈라지며 톡 하고 작은 소리를 냈고, 문짝 틈에 끼운 천이 바람에 한 번 부풀었다 가라앉았다. 넷 가운데 누구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떡판 위에 남은 쌀가루에 등잔 불빛이 비쳐, 누가 숨을 쉴 때마다 가루가 아주 조금씩 흔들렸다.
*
옥분이가 먼저 돌아섰다. 떡판 쪽을 보고 서서 한참 있었다. 그러다 다시 몸을 돌려 떡전 아들을 봤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떡전 아들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그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이마, 눈, 턱을 차례로 봤다. 떡을 고를 때 쌀이 어디 것인지 보는 눈이었다.
“돌아섰는데 아직 있소.”
그녀가 말했다.
“얼굴이 그대로 있소.”
떡전 아들이 숨을 멈추는 것이 보였다. 옥분이가 한 번 더 돌아섰다가 이번에는 빨리 돌아봤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삼 년 동안 나한테 떡 판 사람이 당신이오?”
“그렇소.”
“날마다 두 푼 받고?”
“날마다 두 푼 받고.”
“그 떡 맛을 내가 삼 년 동안 알았는데, 판 사람 얼굴을 오늘 처음 보는구먼.”
옥분이가 치부책을 꺼내 폈다. 빈칸 천여 줄이 등잔불에 드러났다. 그녀는 허리춤에서 몽당붓을 꺼내 오늘 날짜 옆 빈칸에 무엇인가를 그렸다. 떡전 아들이 그것을 들여다봤다. 동그란 얼굴 하나에 점 두 개와 입 하나였다.
“내일부터는 여기 이 얼굴을 그리겠소.”
떡전 아들이 그 그림을 한참 봤다. 무엇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는데 소리가 안 나왔고, 대신 턱이 떨렸다. 황 대장이 괜히 헛기침을 했다.
나도 그를 보고 있었다. 벽의 쪽지를 읽지 않아도 그 얼굴이 내 머릿속에 그대로 붙어 있었다. 셋이 찼다.
*
그때 창호지 문에 그림자 하나가 비쳤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문 밖에서 짚신이 언 흙을 차는 소리가 났다.
황 대장이 제일 먼저 일어섰다. 쉰 먹은 몸이 그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그가 문짝의 천을 뜯어내고 튀어 나갔고, 나와 떡전 아들이 뒤를 따랐다. 골목 끝에서 붓통을 찬 사내 하나가 도포 자락을 쥐고 달리고 있었다. 구 서리였다.
황 대장이 모퉁이에서 그 뒷덜미를 잡을 뻔했다. 구 서리가 붓통을 휘둘러 그 손을 쳤고, 대나무 붓통이 황 대장 손등에 맞아 딱 소리를 냈다. 구 서리는 그 틈에 관아 쪽 큰길로 빠져 순라꾼 등불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황 대장은 거기서 멈췄다. 순라꾼 앞에서 형방청 서리를 잡아 넘어뜨릴 수는 없었다.
황 대장이 손등을 문지르며 돌아왔다. 숨을 몰아쉬는 입에서 하얀 김이 쏟아졌다.
“놓쳐 버렸소. 저놈 귀가 문짝에 붙어 있었소.”
그러고는 뒤늦게 무엇인가 생각났는지 얼굴이 하얘졌다.
“선생, 저놈이 내 이름을 들었으면 내일 형방청 서리들이 다 알겠구먼. 관아 마당에서 내 이름을 부르면서 웃겠지. 안사람이 알면 나는 끝이오.”
“서리들이 웃는 걸로 끝나면 다행이오.”
내가 그렇게 말하자 황 대장이 나를 봤다. 그는 그 말의 뒤를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알았다. 형방청 궤에는 표첩이 있고, 표첩에 한 줄이 오르려면 참이름 하나가 있어야 한다.
옥분이가 떡전 문간에 서서 우리를 봤다. 그녀는 떡전 아들 얼굴을 한 번 봤고, 그 얼굴이 아직 그대로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듯 조금 오래 봤다. 그러고는 나를 봤다.
“선생, 방금 그놈이 뭘 들고 갔소?”
“이름 둘이오.”
“누구 이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옥분이는 셈이 빠른 사람이었다. 대답을 듣기 전에 제 왼팔 소매를 손으로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