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151자) · 한수겸 · 섣달 초사흘
스승의 상자
네 번째 이름을 부른 사람 · 유하람
만 19세 이상 이용가
섣달 초사흘, 방 목수가 오른팔을 걷고 앉았던 날로부터 꼭 한 달 되는 날 아침에 그가 왔다.
나는 그를 몰랐다. 쪽문을 열고 들어온 사내가 궤짝 하나를 안고 있었고, 나는 그 궤짝을 먼저 알아봤다. 스승의 상자였다. 모서리 쇠붙이가 녹슬어 붉었고 뚜껑 가운데에 스승이 칼로 새겨 둔 표식이 있었다. 사내는 상자를 평상에 내려놓더니 나보다 먼저 벽으로 가서 쪽지를 손바닥으로 탁 쳤다.
“읽어 보시오. 열사흘 만이오. 오늘도 처음 뵙겠소.”
나는 쪽지를 읽었다. 맨 끝줄은 내 글씨였다. 그가 오지 않는다. 정초에 떡이 오면 문을 연다.
“떡은 안 가져왔소.”
그가 말했다.
“정초가 아직 멀었소. 대신 부탁이 있소.”
그는 평상에 앉지 않고 선 채로 말했다. 열사흘 동안 떡을 쪘다고 했다. 시루에 김이 오를 때마다 어머니가 그 광에서 흥얼거렸다는 소리를 흉내 내 봤는데, 그 소리가 어떤 소리였는지 저는 기억이 안 나더라고 했다.
“어머니는 나를 아가라고 불렀소. 스물여섯 먹은 사내를 아가라고. 이름을 불러 주고 싶어도 어머니도 그걸 몰랐소. 표는 어머니 머리에서도 이름은 가져갔으니까.”
그가 상자 뚜껑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선생, 내 이름을 찾아 주시오. 어머니가 왜 떡을 쪘는지 알려면, 나를 아는 사람이 하나는 있어야겠소.”
*
상자를 여니 먹과 한지 냄새가 한꺼번에 올라왔다. 스승이 간 지 열여덟 해인데 냄새는 그대로였다. 소나무 그을음을 아교에 개어 굳힌 먹이 세 항아리, 마른 천에 꽂힌 바늘 열둘, 사람 몸의 앞과 뒤를 그리고 네 자리에 점을 찍어 둔 그림 한 장이 맨 위에 있었다. 그 밑에 스승의 장부가 있었다. 내 장부보다 얇았고 표지가 손때에 절어 가죽처럼 번들거렸다. 맨 밑에는 끈으로 묶은 종이 뭉치가 있었다.
스물여섯 해 전 봄의 줄을 찾았다. 스승은 날짜를 먼저 쓰고, 그다음 호적 이름을 쓰고, 자리를 쓰고, 두 자를 썼다. 그해 봄에 등을 받은 아이가 열하나였다.
나는 열한 줄을 하나씩 읽었다. 열 줄은 읽혔다. 남은 한 줄에서 눈이 자꾸 미끄러졌다. 글자는 분명히 보이는데 읽고 나면 머리에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고, 다시 읽으려 하면 눈이 저절로 다음 줄로 넘어가 있었다. 세 번째로 읽으려다가 나는 손가락으로 그 줄을 짚었다.
“이 줄이오.”
“어떻게 아시오?”
“안 읽히는 줄은 이것 하나뿐이오.”
그가 몸을 숙여 그 줄을 봤다. 그의 눈도 미끄러지는 것이 보였다. 제 이름인데 제 눈에도 안 붙었다.
“그럼 소용이 없구먼. 읽어도 안 붙으면.”
“끝장을 봅시다.”
호방이 한 말이 생각났다. 댁 스승이 거기 적어 둔 것이 있소. 나는 종이 뭉치의 끈을 풀었다. 열여덟 해 동안 한 번도 끝까지 풀어 본 적이 없는 매듭이었는데, 끈이 삭아서 손가락에 힘을 주자 그대로 끊어졌다.
*
끝장은 스승의 글씨였다. 획이 떨렸다. 죽기 한 해 전쯤의 글씨였다.
지워진 사람 앞에서 그 참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면, 들은 사람은 그 이름을 그 사람에게 붙여 안다. 제 것이 아닌 이름이라 들은 사람한테서는 지워지지 않는다. 불린 사람은 사흘이면 제 이름을 다시 잊는다.
그 이름을 소리로 아는 사람이 셋이 되면, 그 셋의 눈에 얼굴이 남는다. 아홉이 되면 모르는 사람도 그의 목소리를 듣고 한 말을 기억한다. 스물일곱이 되면 누구에게나 얼굴이 남고, 관가 붓으로 적으면 먹이 선다. 그때는 본인도 제 이름을 잊지 않는다.
부르는 사람은 부르기 전에 제 참이름을 먼저 소리로 댄다. 왼팔을 대는 것이 옳다. 제가 정한 이름이니 제가 내줄 수 있다. 이름을 주고 이름을 붙이는 일이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부른 사람의 참이름도 같이 듣는다.
불러 준 사람을 사흘 안에 다시 보면 목이 뜨겁다. 붙들고 있던 손은 잊지 않는다. 떡전의 어미가 그랬다.
그 아래 한 줄이 더 있었다. 나는 이것을 끝내 해 보지 못했다. 제 이름을 남 앞에 댈 낯이 없었다.
나는 종이를 내려놓았다. 스승은 떡전 광을 알고 있었다. 그 밤에 광을 나가 놓고, 스무 해 가까이 그 어미를 보고 있었다.
종이 뭉치 중간쯤에 한 장이 더 있었다. 날짜가 없고 글씨가 더 떨렸다. 떡전 어미가 정초에 떡을 들고 왔다. 아이도 데려왔다. 나는 아이 얼굴을 모른다. 그런데 어미는 나를 안다. 떡을 받았다. 아이한테 이름을 불러 주지 못한 것이 목에 걸린다.
나는 그 장을 떡전 아들에게 건넸다. 그는 그 글을 두 번 읽었다. 그리고 그 장을 무릎에 올려놓은 채 한참 창호지 쪽을 봤다. 어머니가 스승한테도 떡을 들고 갔다는 것을 그는 처음 알았다.
*
해가 지고 나서 나는 뒷방 등잔을 켰다. 그를 평상 맞은편에 앉혔다.
부르기 전에 제 왼팔 이름을 먼저 댄다. 이 고을에서 제 참이름을 남 앞에서 입에 올리는 것은 옷을 벗는 것만큼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스물둘 이후로 누구 앞에서도 내 왼팔을 소리 낸 적이 없다. 열다섯에 내 손으로 고른 두 자였다. 그 두 자를 고르던 봄에 나는 새김장이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입을 열었는데 소리가 안 나왔다. 목구멍 안쪽이 마른 한지처럼 서로 들러붙었다. 등잔불이 한 번 떨렸고, 나는 무릎 위에서 오른손으로 왼팔 소매를 꽉 쥐었다. 소매 속 두 자가 거기 있었다.
떡전 아들이 그 꼴을 보고 있다가 말했다.
“선생, 천천히 하시오. 선생 이름을 내가 듣는다고 무슨 일이 나겠소? 내일 아침이면 선생은 나를 모르고, 나는 누구한테 말할 사람도 없소. 이 고을에서 비밀 지키기로는 내가 제일이오.”
나는 웃음이 새려는 것을 참았다. 참느라 들러붙었던 목이 조금 풀렸다.
두 번째에 소리가 나왔다. 내 두 자가 방 안에 떨어졌다. 떡전 아들이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그가 내 이름을 들었다.
그리고 나는 스승의 장부에서 미끄러지던 그 줄을 소리로 읽었다. 눈으로는 안 붙던 두 자가 입으로 나오자 이상하게 무게가 있었다. 한 자에 숨 한 번씩이 들었다. 방 안이 조용해서 등잔 심지가 기름을 빨아올리는 소리까지 들렸고, 두 자를 다 읽고 나자 입 안에 쇠를 핥은 것 같은 맛이 남았다. 스무 해 전 광에서 한 획을 긋고 나서 입 안에 남았던 맛과 같았다.
그는 가만히 있었다. 등잔불 속에서 그의 얼굴이 조금씩 풀렸다. 그러고는 입술을 달싹여 그 두 자를 따라 했다. 한 번, 그리고 한 번 더.
“어머니가 이걸 몰랐구먼.”
그가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스무 해 동안 아가라고만 불렀소. 이 두 자를 알았으면 불러 줬을 텐데.”
그는 웃으려다 그만두고 제 무릎을 내려다봤다. 무릎 위에 떨어진 물방울 두 개가 무명 바지에 동그랗게 번졌다.
한참 뒤에 그가 소매로 얼굴을 한 번 문지르고 물었다.
“사흘이면 내가 이걸 또 잊는다고 했소?”
“스승 종이에는 그렇게 적혀 있소.”
“그럼 사흘마다 선생이 불러 주시오. 선생은 사흘마다 내 얼굴을 까먹고, 나는 사흘마다 내 이름을 까먹고. 둘이 번갈아 까먹으면 하나는 늘 남소.”
“셋이 되면 둘 다 안 까먹소.”
“셋이면 둘이 더 있어야 하오.”
그가 손가락을 셋 꼽았다가 하나를 접었다.
“선생 하나는 됐고. 이 고을에서 나를 위해 제 참이름을 남 앞에 까발릴 사람이 둘이나 있겠소? 나 같으면 안 하오. 떡 한 조각 얻어먹은 적 없는 사람을 위해서.”
그는 농으로 한 말이었다. 나는 그 농 속에 스무 해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따라 웃지 못했다. 등잔 기름이 거의 바닥이었다. 심지가 기름을 빨아올리지 못해 불꽃이 가늘어지더니 방 안 그림자가 벽 쪽으로 한꺼번에 물러났다.
*
그를 떡전까지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구 서리를 만났다. 인정 종이 친 지 한참 지난 밤이었다. 섣달 밤공기가 코 안쪽을 바늘처럼 찔렀고, 골목 흙길은 얼어서 발을 디딜 때마다 짚신 밑에서 딱딱한 소리가 났다. 골목 모퉁이에서 등롱 하나가 튀어나왔고, 그 뒤에 막쇠의 어깨가 있었다. 나는 스승의 상자를 안고 있었다. 광에 다시 두지 않고 그냥 들고 나온 참이었다.
“봉한 가게 주인이 밤중에 궤짝을 안고 다니시오?”
“내 스승 물건이오.”
“형방 어른이 그 궤짝 얘기를 하시더이다. 이리 내시오.”
막쇠가 손을 뻗었다. 나는 상자를 끌어안고 돌아섰는데, 막쇠의 손이 내 겉옷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솜 넣은 겉옷의 솔기가 뜯어지는 소리가 밤길에 크게 났다. 상자 모서리가 내 갈비뼈를 찍었다.
“거기 무슨 일이오?”
골목 저쪽에서 등불 하나가 다가왔다. 호방이었다. 작청에서 늦게 나오는 길이라 했다. 호방은 막쇠의 손과 내 품의 상자를 번갈아 봤다.
“그 상자는 스무 해 전에 내가 저 사람 스승한테 맡긴 호적 초본이 들어 있는 궤요. 작청 물건이오. 형방청이 밤중에 작청 물건에 손을 대면 내가 내일 현감께 여쭈어야겠구먼.”
구 서리가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막쇠가 손을 뗐다. 둘은 등롱을 흔들며 돌아갔다.
호방은 그들이 모퉁이를 돌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를 봤다. 그의 등불 종이에 구멍이 하나 나 있었고, 거기서 새어 나온 빛이 내 발등에 동전만 하게 떨어져 흔들렸다. 상자에 호적 초본 같은 것은 없다. 그도 알았고 나도 알았다.
“끝장까지 읽었소, 댁?”
“끝까지 읽었습니다.”
“그럼 조심하시오. 이름을 대면 들은 귀가 있소.”
호방은 그 말을 하고 등불을 들고 갔다.
나는 뜯어진 겉옷 솔기로 찬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집까지 걸었다. 상자를 뒷방 평상 밑에 밀어 넣고 나서도 한참 잠이 오지 않았다. 등잔을 다시 켜고 부엌 벽 앞에 섰다.
둘을 더 구해야 한다. 날마다 그를 처음 보면서도 세 해 동안 그에게서 떡을 산 사람이 하나 있다. 벽의 쪽지에 그 이름이 여러 번 나온다. 방앗간 옥분이. 그리고 이 고을에 나한테 빚이 있는 사내가 하나 있다. 열한 해 전 가슴을 새겨 주고 아직 한 푼도 못 받았다.
나는 쪽지 끝에 두 줄을 적었다. 옥분이, 떡값을 한 푼도 안 틀리는 사람. 황 대장, 가슴값 안 냄, 이번에 받는다. 적고 나서 보니 둘째 줄이 첫째 줄보다 글씨가 컸다.
*
이튿날 아침 부엌에 모르는 사내가 있었다.
나는 그를 몰랐다. 벽을 보기도 전이었다. 그런데 그가 부지깽이를 든 채 뒤를 돌아보는 순간, 얼굴은 처음 보는데 이름이 먼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두 자였다. 목이 뜨거웠다. 뜨거운 물을 삼킨 것처럼 목젖 아래가 화끈거렸고, 나는 저도 모르게 목을 손으로 감쌌다.
“오늘도 처음 뵙겠소, 선생.”
“아니오, 오늘은 처음이 아니오.”
나는 목을 감싼 채로 그 두 자를 불렀다. 그의 손에서 부지깽이가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