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142자) · 한수겸 · 동짓달 열흘

새기는 집은 관가에 매인다

네 번째 이름을 부른 사람 · 유하람

만 19세 이상 이용가

닷새 뒤 아침, 형방청에 가기 전에 벽의 쪽지부터 읽었다. 부엌에 모르는 사내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눈이 먼저 벽으로 갔으니, 닷새 사이에 버릇이 하나 늘었다.

“오늘은 빠르시오. 부지깽이 쪽으로 손이 안 가셨소.”

사내가 솥뚜껑을 열며 웃었다. 김이 한꺼번에 올라와 그의 얼굴을 가렸다가 걷혔다.

“형방청에 같이 가겠소.”

“댁이 거기 왜 가오?”

“아무도 나를 못 알아보니 어디든 들어갈 수 있소. 관아 문지기도 나를 볼 때마다 처음 보는 떡장수라, 떡 하나 쥐여 주면 길을 비켜 주오. 스무 해 동안 그 떡값을 받은 적이 없소.”

그는 광주리에 인절미를 담았다. 나는 장부를 두고 나섰다. 궤는 평상 밑에 그대로 밀어 넣고, 스승의 상자는 뒷방 평상 밑 더 깊은 데로 밀었다.

*

형방청 대청은 마루가 얼어 있었다. 버선발로 올라서자 냉기가 발바닥을 지나 무릎까지 올라왔고, 대청 끝 화로에는 숯이 반쯤만 담겨 형방 앉은 자리 쪽으로만 열기를 보냈다. 기둥마다 오래된 칠이 벗겨져 나뭇결이 드러나 있었고, 처마 밑에 매단 고드름에서 물이 한 방울씩 떨어져 댓돌을 쳤다.

형방은 낮은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구 서리가 옆에서 붓을 적시고 있었고, 그 맞은편 방석에는 처음 보는 사내가 앉아 곶감을 먹고 있었다. 쉰 대여섯쯤, 솜을 두둑하게 넣은 비단 겉옷에 손가락이 굵었다. 저잣거리 객주 석만길이다. 얼굴은 처음 봤지만 이름은 이 고을에 사는 사람이면 다 안다.

형방이 종이 한 장을 책상 위에 펼쳤다.

“장 서방이 석 객주에게 쉰 냥을 꾸었다는 문서요. 여기 엄지 도장이 있소.”

나는 종이를 봤다. 붉은 인주 자국 하나가 문서 끝에 찍혀 있었다. 장 서방은 짐꾼이었고 글을 못 읽었다. 가슴 이름을 새기던 날 그는 제 짝이 정해 온 두 자를 나한테 세 번이나 읽어 달라고 했다. 그런 사람이 쉰 냥 빚 문서를 무엇을 믿고 눌렀는지는 모르겠다.

“장 서방은 쉰 냥을 만져 본 적도 없을 사람이오.”

“그건 댁이 알 바가 아니오. 문서가 있고 도장이 있소. 허 씨가 이 빚을 안 갚고 딸을 데리고 고개를 넘으려 한다는 말이 들어왔소.”

그때 대청 끝 화로 곁에 떡전 아들이 쪼그려 앉아 손을 쬐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문지기에게 떡 하나를 쥐여 주고 들어왔을 것이다. 구 서리가 그를 한 번 쳐다보고는 붓끝을 핥았고, 형방은 아예 눈길을 주지 않았다. 대청 한구석에 떡 광주리를 든 사내가 앉아 있어도 이 방에서는 그게 아무 일도 아니었다.

석 객주가 곶감 꼭지를 화로에 던졌다. 꼭지가 숯 위에서 지지직 소리를 내며 오그라들었다.

“쉰 냥이오.”

그가 말한 것은 그뿐이었다. 까닭도 사정도 붙이지 않았다. 나는 그 얼굴을 한참 봤는데, 거기서는 아무것도 읽히지 않았다.

“표는 자비요.”

형방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 번 두드렸다.

“허 씨를 옥에 넣으면 이 겨울을 못 넘기오. 법대로 곤장을 치면 과부 몸이 못 견디오. 표를 맞으면 석 객주 집에서 밥을 먹고 일을 하며 살아가오. 딸아이도 굶기지 않겠다고 석 객주가 다짐했소. 법전에 표형이 왜 있는 줄 아시오? 죽이지 말라고 있는 거요.”

“딸이 어미를 부를 때 어미가 못 알아듣소. 어미가 딸 이름을 불러도 딸은 모르는 여자가 자기를 부르는 줄 아오. 그걸 산다고 하시오?”

“숨을 쉬면 사는 거요.”

형방은 그 말을 흔들림 없이 했다. 스무 해 동안 몇 번이나 해 본 말 같았다.

“표형은 관가 곡식에 손댄 죄인 집에 쓰는 형벌이라고 들었소. 빚진 과부한테 쓰라는 법은 없소.”

“법전은 관가 곡식에 손댄 자, 그리고 관가 문서를 어긴 자라고 적었소. 이 빚 문서는 작청에 올라가 관인을 받았소. 그러니 관가 문서요.”

형방이 문서 귀퉁이의 붉은 도장을 손톱으로 짚었다. 장 서방의 엄지 자국 바로 위였다.

“장부를 내시오.”

“안 내겠소.”

형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구 서리에게 턱짓을 했고, 구 서리가 미리 적어 둔 종이를 읽었다. 새기는 집은 관아에서 허가 첩을 받아 여는 곳이니 관가에 매인다, 관가의 부름을 두 번 어긴 새김장이는 첩을 거두고 가게를 봉한다, 가게 안의 장부는 관가 물건으로 거둔다.

“스무 해 전 칠월에 댁 손이 한 번 관가 일을 했소. 그때는 첩이 잘 쓰였지.”

형방이 붓을 들어 종이 끝에 이름을 적었다.

“그 뒤로 댁이 이 고을 표를 다 마다하는 바람에 남쪽 골목에 길 서방 같은 놈이 생겼소. 깊이도 모르고 스무 냥에 바늘을 드는 놈이오. 허 씨를 그놈 손에 맡기는 것도 댁이오.”

석 객주가 새 곶감을 집으려고 손을 뻗었다. 접시가 비어 있었다. 그는 빈 접시를 한참 내려다보다가 구 서리를 봤고, 구 서리는 저는 모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화로 곁의 떡전 아들이 입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나는 웃음이 새지 않게 입안 살을 깨물었다.

“곶감을 누가 다 먹었소?”

“객주 어른이 드셨지요.”

구 서리가 대답했다. 석 객주는 제 배를 한 번 내려다보더니 더 묻지 않았다.

*

대청을 나서는데 복도 끝에서 기침 소리가 났다. 호방이었다. 예순여덟이라 들었는데 등이 곧았고, 두루마기 자락이 얼어서 걸음마다 버석거렸다. 작청에서 호적 궤를 지고 나오는 아전들이 그 뒤로 길게 늘어섰다.

호방은 나를 보지 않고 지나가면서 말했다.

“장부는 어차피 뺏기오, 댁.”

“압니다, 어른.”

“상자는 내주지 마시오. 댁 스승이 거기 적어 둔 것이 있소. 나는 그 사람이 죽기 전에 한 번 들었소.”

그리고 다시 기침을 하며 작청 쪽으로 갔다. 나는 스승의 상자를 열여덟 해 동안 열었지만, 거기서 형방이 탐낼 만한 것은 본 적이 없다. 바늘 열둘과 먹 항아리 셋, 몸 그림 한 장, 스승의 장부 한 권, 그리고 끝을 끈으로 묶어 둔 종이 뭉치. 끝장까지 풀어 본 적은 없었다.

*

돌아오는 길에 떡전 아들이 광주리를 옆구리에 끼고 내 옆에서 걸었다. 관아 담을 따라 쌓인 눈이 한낮 볕에 녹았다가 다시 얼어, 짚신 밑에서 설탕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선생이 나가고 나서 둘이 한 말이 있소.”

“무슨 말이오?”

“석 객주가 길 서방 몫으로 스무 냥을 내겠다고 했소. 형방은 장부만 오면 한 줄이면 된다고 했고. 그리고 곶감은 내가 먹었소, 미안하오. 스무 해 만에 먹어 본 곶감인데 객주 집 곶감이라 달긴 합디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가 두어 걸음 더 가다가 돌아섰다.

“그리고 선생, 형방이 선생 뒤통수를 보면서 그럽디다. 저 손이 스무 해 전에는 말을 잘 들었다고.”

*

구 서리와 막쇠는 해가 기울기 전에 왔다. 이번에는 문을 차지 않았다. 막쇠가 문을 두드리고, 구 서리가 문서를 펼쳐 한 번 더 읽고, 그다음에 들어왔다. 관가 일에는 순서가 있다.

막쇠가 평상 밑 궤를 통째로 들어 올렸다. 일곱 권이 궤 안에서 한쪽으로 쏠리며 둔하게 부딪쳤다. 구 서리가 궤 뚜껑을 열어 권수를 셌다.

“일곱 권. 이천삼백 하고 몇 줄이오?”

“열한 줄이오.”

“셈이 빠르시오.”

구 서리가 그것을 받아 적었다. 그사이 뒷방 문이 열리고 떡전 아들이 나왔다. 그는 스승의 상자를 두 팔로 안고 있었다. 뒷방에서 나오려면 막쇠 옆을 지나야 했는데, 막쇠가 궤를 든 채로 몸을 틀다가 그와 어깨를 부딪쳤다.

“비키시오, 거 누구요?”

“떡 배달 왔소.”

“떡을 궤짝에 담아 오오?”

“이 댁은 많이 드시오.”

막쇠가 고개를 끄덕이고 비켜섰다. 사내는 상자를 안고 문을 나섰다. 문지방을 넘는 그의 뒤통수를 보고 있던 막쇠가, 그가 골목으로 사라지자 궤를 고쳐 안으며 나를 봤다.

“방금 뭐라고 했소?”

“아무 말도 안 했소.”

“그렇구먼, 내가 잘못 들었나 보오.”

구 서리가 앞문에 풀을 바르고 봉인 종이를 붙였다. 붉은 관인이 한가운데 찍힌 한지였다. 풀이 마르면서 한지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소리가 문짝 너머로 들렸다. 나는 뒤꼍 쪽문으로 드나들어야 한다고 했다. 새기는 일은 할 수 없다. 첩이 없는 손이 바늘을 들면 곤장 스무 대다.

*

밤에 뒷방에 앉아 있었다. 앞칸은 봉해졌고, 봉한 방에 불을 켤 수는 없어서 뒷방에만 놋 등잔 하나를 켰다. 평상 밑이 비어 있었다. 스무 해 동안 그 자리에 궤가 있었으니 비어 있는 모양이 이상하게 컸다.

이천삼백열한 줄이다. 그 가운데 이천 줄쯤은 이 고을 사람들의 왼팔과 가슴이다. 떡전 옆 방앗간 주인 내외의 가슴이 있고, 대장간 황 대장의 가슴이 있다. 황 대장은 그 값을 아직도 안 냈다. 열아홉 해 전 봄의 허 씨도 있다. 이제 그 이름들이 전부 형방청 궤에 들어갔다.

그날 아궁이 앞에서 석 장을 뜯었으면 허 씨 한 사람은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스승의 한 줄을 지켰고, 그 값을 허 씨가 치르게 됐다.

저 손이 스무 해 전에는 말을 잘 들었다는 말이 등잔불 옆에서 자꾸 되살아났다. 스무 해 전 칠월 그믐 밤도 이렇게 불이 하나였다. 낮은 천장에 거미줄이 늘어져 있었고, 쌀가루와 곰팡이 냄새가 섞여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 안쪽이 텁텁했다. 문밖에 선 젊은 서리 하나가 등불을 들고 있었는데, 그 불이 흔들릴 때마다 광 안의 그림자가 한꺼번에 기울었다. 나는 그 서리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등불을 든 손목이 가늘었다는 것만 기억한다.

그 손목이 오늘 책상을 두 번 두드렸다. 그 생각이 들자 나는 등잔에서 눈을 뗐다. 그 밤 광 안에 있던 다른 얼굴들은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애쓰는 동안 엄지는 오른팔을 계속 문질렀고, 문지른 자리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손바닥이 차가워서 무릎 사이에 넣었다. 등잔 심지가 한 번 튀었고, 튄 불똥이 기름 위에 떨어져 잠깐 파랗게 탔다. 아교 냄새가 식은 방에서 먹 냄새만 났다.

그때 부엌 벽에 새 종이가 붙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내 쪽지 옆이었다. 내 글씨가 아니었다. 획이 굵고 둥글었고, 떡살 무늬를 오래 판 손이 쓴 것처럼 끝이 뭉툭했다.

상자는 내가 가지고 있소. 떡전 광에 두었소. 광은 스무 해 동안 아무도 안 여는 데라 거기가 제일 안전하오. 내일 아침 선생은 나를 모를 테니 이것부터 읽으시오. 오늘도 처음 뵙겠소, 가 아니라 오늘은 제가 먼저 인사를 적어 두오.

나는 그 종이를 한참 봤다. 떡전 광이라는 두 글자 위에서 눈이 여러 번 멎었다. 스무 해 동안 그 앞을 돌아서 다녔는데, 이제 스승의 상자가 거기 들어가 있었다.

등잔을 끄기 전에 나는 그 종이 아래에 내 글씨로 한 줄을 붙였다. 내일 광에 간다. 쓰고 나서 붓을 한참 들고 있다가, 먹이 마르기 전에 그 끝에 꼭이라는 말을 보탰다.

3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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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용한책상2026.05.17· 3화

    조용한데 계속 긴장돼요. 이런 톤 좋아합니다.

    • 겨울차2026.05.18

      이 댓글 보고 다시 읽으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