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194자) · 한수겸 · 동짓달 닷새
돌아서면 잊는 얼굴
네 번째 이름을 부른 사람 · 유하람
만 19세 이상 이용가
이틀 뒤 아침, 눈을 뜨니 부엌에 모르는 사내가 있었다.
스물 대여섯쯤 된 사내였다. 내 부뚜막에 쪼그려 앉아 내 솥에 보리를 안치고, 내 부지깽이로 아궁이 불을 뒤적이고 있었다. 무명 저고리 소매를 손등까지 내려 덮었고, 머리에 동인 수건 아래로 쌀가루가 허옇게 묻어 있었다. 방 안에 들어온 연기에 누룽지 눋는 냄새가 섞여 있었는데, 그 냄새가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누구시오?”
사내가 부지깽이를 든 채 뒤를 돌아봤다. 그러고는 대답 대신 부엌 벽을 턱으로 가리켰다.
벽에 한지가 한 장 붙어 있었다. 내 글씨였다. 획 끝을 흐리게 빼는 버릇까지 내 것이라, 쓴 기억이 없는데도 내가 쓴 줄은 알았다.
이 사내는 떡전 아들이다. 어미가 작년 섣달에 죽었다.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 너도 못 한다. 밥을 줘라. 네가 또 누구냐고 물으면 그는 웃는다. 웃게 두어라.
그 아래로 날짜가 줄줄이 적혀 있었고 날짜마다 짧은 말이 한 줄씩 붙어 있었다. 오늘 떡을 두 개 두고 갔다. 오늘 장작을 패 줬다. 오늘 내가 도둑인 줄 알고 부지깽이를 들었다, 미안하다. 오늘 그가 솥을 닦아 놓고 갔는데, 도둑이 솥만 닦고 갔다며 관아에 알리러 나섰다가 골목 어귀에서 이 쪽지가 생각나 돌아왔다. 오늘은 그가 쪽지를 먼저 가리켰다, 덕분에 부지깽이를 안 들었다. 맨 끝줄은 그저께 날짜였다. 형방이 다녀갔다, 그는 밖에서 다 들었다.
“오늘도 처음 뵙겠소, 선생.”
사내가 웃었다. 웃는 얼굴이 순했고, 순한 만큼 어딘가 오래 참은 얼굴이었다.
*
그와 겸상을 했다. 그는 수저질이 빨랐고 보리밥을 먹으면서 제 사정을 제 입으로 풀었다. 벽의 쪽지를 매일 읽히는 것보다 제가 말하는 편이 빠르다고 했다.
“사람들이 나를 보기는 보오. 떡을 사 가고 값도 치르고, 날이 차다는 말도 하오. 그런데 돌아서면 잊소. 이튿날이면 처음 보는 얼굴로 또 와서 처음 보는 얼굴로 떡을 사 가오.”
“어머님은 아셨소?”
“어머니만 아셨소. 스무 해 동안 어머니 하나만.”
그가 누룽지를 긁다가 숟가락을 멈췄다.
“좋은 것도 있소. 외상값을 아무도 기억 못 하오. 물론 나도 외상 준 사람들 얼굴을 기억할 도리가 없지만.”
나는 웃을 뻔했다가 그만두었다. 그가 누구인지 나는 알 것 같았다. 떡전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뒷목이 뻣뻣해졌기 때문이다. 스무 해 동안 나는 저잣거리 끝의 떡전 앞을 지나지 않으려고 길을 돌았다. 떡전 아주머니가 정초마다 떡 한 접시를 들고 이 집 문 앞에 서 있었는데도 한 번을 들어오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께 이 집 문밖에서 들은 것을 말해 주었다. 형방이 골목을 나서면서 구 서리한테 한 말이었다.
“새김쟁이가 끝까지 안 하면 남쪽 길 서방을 쓰라고 합디다. 그리고 그 과부 집에 사람을 붙이라고.”
*
그가 떡전으로 간다기에 따라나섰다. 스무 해 만이었다.
저잣거리 끝의 떡전은 처마가 낮고 문짝 하나가 기울어 있었다. 시루에서 김이 오르면 찹쌀 찌는 냄새가 골목 절반을 채웠고, 그 냄새 속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와서 떡을 사 갔다. 모두 그를 처음 보는 얼굴로 봤다. 값을 묻고, 깎고, 받아 들고, 돌아서는 순간 그를 머리에서 내려놓았다. 나는 그 순간을 여러 번 봤다. 사람들의 얼굴에서 무엇인가가 그냥 빠져나갔다.
해가 조금 오르자 방앗간 쪽에서 여자 하나가 치마 끝을 걷어 쥐고 성큼성큼 왔다. 서른쯤 되어 보였고 볼이 찬바람에 벌겋게 터 있었다.
“인절미 셋이오. 처음 보는 양반인데 떡은 어제 그 맛이 나네. 어제 그 양반은 셋에 두 푼 받았소.”
“어제도 나였소.”
“그럼 두 푼이구려.”
여자는 동전 둘을 시루 옆에 탁 놓고 떡을 받아 들었다. 두어 걸음 가다가 돌아서서 그를 한참 쳐다봤다.
“근데 댁은 누구요?”
“떡 판 사람이오.”
“아, 그렇지.”
여자는 고개를 갸웃하며 갔다. 그가 동전 둘을 주워 소매에 넣었다.
“옥분이오. 세 해째 날마다 오오. 날마다 어제는 두 푼이었다고 하는데, 세 해 동안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소.”
그 말을 하는 그의 얼굴이 조금 붉었다. 나는 떡전 뒤쪽 광 문을 안 보려고 시루만 보고 있었다.
*
허 씨가 온 것은 그날 오후였다. 딸아이 손을 잡고 뒷골목으로 돌아서 왔다. 문을 닫자마자 허 씨가 평상 앞에 무릎을 꿇었고, 간난이는 어미 치마 뒤에서 먹 항아리를 신기한 듯 들여다봤다.
“선생, 형방청에서 오라는 걸 안 갔소. 가면 안 돌아올 것 같아서.”
“잘하셨소.”
“선생이 내 이름을 다 아시니, 나를 없애려면 선생 손이 있어야 한답디다. 그러니 선생만 버텨 주시면 된다고 옆집 할멈이 그럽디다.”
나는 그 말이 반만 맞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버티면 형방은 장부를 가져갈 것이다. 장부에는 열아홉 해 전 봄의 한 줄이 있다. 허 씨가 한나절 걸려 고른 두 자가 거기 내 글씨로 적혀 있다.
간난이가 먹 항아리에 손가락을 넣었다가 새까매진 손끝을 제 볼에 문질렀다. 허 씨가 딸의 손목을 낚아채려 하자 아이가 웃으며 도망쳤고, 좁은 방 안을 한 바퀴 돌다가 평상 모서리에 정강이를 박고 울음을 터뜨렸다. 먹 묻은 볼에 눈물이 줄을 그었다. 그 얼굴을 보고 허 씨가 웃었고, 웃다가 입을 막았다.
그때 문짝이 발길에 차여 열렸다.
*
구 서리가 들어오고 뒤로 막쇠가 몸을 옆으로 틀어 문을 통과했다. 막쇠는 형방청 사령인데 어깨가 문틀보다 넓다. 허 씨가 딸을 끌어안고 뒷방 쪽으로 물러섰다. 나는 뒷방 문 앞에 섰다.
“비키시오, 한 가.”
“여기는 새기는 집이오. 관가 사람이 발로 차고 들어올 데가 아니오.”
“새기는 집은 관가에 매였소.”
구 서리가 붓통을 두드렸다.
“허 씨는 형방청 부름을 두 번 어겼소. 그리고 댁 장부도 가져오라는 말씀이오.”
“형방 어른이 직접 오시라 하시오.”
막쇠가 내 어깨를 밀었다. 밀었다기보다 치웠다. 나는 뒷방 문설주에 등을 부딪히며 옆으로 밀려났고, 문설주에서 오래 묵은 먼지가 떨어져 목덜미로 들어갔다. 막쇠가 뒷방 문고리를 잡았다.
뒷방은 비어 있었다. 뒤꼍으로 난 쪽문이 반쯤 열려 있고 찬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담장 너머에 떡 광주리를 인 사내 하나가 서 있다가, 우리 쪽을 한 번 보고 천천히 골목으로 걸어 나갔다. 그 사내의 등 뒤로 치맛자락 하나가 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것이 언뜻 보였다.
막쇠가 쪽문 밖을 내다봤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그리고 다시 쪽문 밖을 봤다.
“방금 저기 누가 있지 않았소?”
“누가 있었소?”
막쇠가 머리를 긁었다. 그 머릿속에서 무엇인가가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없었나 보오.”
구 서리는 뒷방 구석구석을 뒤지고 장독 뚜껑까지 열어 보고 나서야 붓통을 도로 찼다. 장부는 평상 밑 궤에 있었는데, 그는 거기에 손을 대기 전에 나를 봤다.
“오늘은 내가 들고 가면 도둑질이 되오. 닷새 뒤 형방청에서 부를 거요. 그때 댁 손으로 들고 오시오. 안 오면 문에 관가 종이가 붙소.”
*
그들이 가고 나서 나는 문설주에서 떨어진 먼지를 쓸었다. 쓸다가 빗자루를 세워 두고 평상 밑 궤를 끌어냈다.
장부는 모두 일곱 권이다. 스승이 가고 나서 내 손으로 새긴 것만 적었는데, 한 권에 삼백 줄 남짓씩 들어가 이천삼백 줄이 조금 넘는다. 표지는 소나무 그을음 먹이 손때에 번져 거무스름했고, 오래 접었다 편 자리마다 한지가 보풀처럼 일어나 손끝에 걸렸다. 궤 뚜껑을 여니 마른 종이 냄새와 오래된 아교 냄새가 한꺼번에 올라왔다. 이 방에서 스무 해 동안 끓인 것이 다 거기 배어 있었다.
셋째 권을 펴서 열아홉 해 전 봄을 찾았다. 허 씨의 왼팔 두 자가 거기 있었다. 그 옆에 내가 작게 적어 둔 말도 있었다. 한나절 고름, 획 많음, 울상, 안 바꿈. 일곱째 권에는 열두 해 전 가슴 두 줄이 나란히 있었고, 그 옆에는 둘이 웃음 터짐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궁이에는 아직 잉걸불이 남아 있었다. 석 장을 뜯어 넣으면 허 씨의 이름은 이 고을 어느 종이에도 없게 된다. 형방이 표를 넣으려면 그 이름을 아는 손이 있어야 하는데, 그 손은 내 손 하나만 남는다.
나는 장부를 들고 부뚜막 앞에 쪼그려 앉았다. 불기가 얼굴에 닿아 눈이 따가웠다.
스승은 종이 첫 장에 지우면 돌아오지 않는다고 적었다. 그 아래에는 조금 작은 글씨로 한 줄이 더 있다. 적은 것은 태우지 마라, 새긴 사람이 죽으면 남는 것은 종이뿐이다. 나는 스무 해 동안 그 줄을 지켰다. 지킨 까닭은 잘 몰랐다. 다만 이 장부에 적힌 이천삼백 줄 가운데 이미 죽은 사람이 삼백이 넘는다는 것은 알았다. 그 사람들의 참이름은 이제 이 종이와 내 손에만 있다.
엄지가 또 오른팔 바깥쪽을 문지르고 있었다. 나는 장부를 도로 궤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닫는 소리가 생각보다 컸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이 일을 오래 후회하겠다고 생각했다.
*
그는 해가 진 뒤에 돌아왔다. 벽의 쪽지를 내가 다시 읽고 나서야 그가 누구인지 알았고, 그는 그동안 부뚜막에 걸터앉아 기다렸다.
“허 씨는 옥분이 방앗간 뒷방에 두었소. 옥분이는 나를 모르지만 허 씨는 아니까, 허 씨가 부탁하니 들어줍디다. 딸아이 볼에 묻은 먹은 우물가에서 닦아 줬소.”
“댁은 왜 나를 돕소?”
“선생이 밥을 주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고 한참 아궁이의 잉걸불을 봤다. 불빛이 그의 턱 밑을 붉게 칠했다.
“선생, 하나 물읍시다. 새긴 사람은 제가 새긴 걸 안 잊는다면서요. 그런데 나는 왜 매일 잊으시오?”
“댁한테는 내가 새긴 게 없으니까.”
“있소.”
그가 오른팔 소매를 걷었다. 손등까지 내려 덮고 다니던 그 소매였다.
오른팔 바깥쪽에 가로로 그은 획이 하나 있었다. 이름이 아니었다. 먹빛이 스무 해 묵어 가장자리가 살짝 번졌고, 획의 시작은 굵고 끝은 가늘게 빠져 있었다. 바늘을 처음 세웠다가 손목을 눕히며 빼는 버릇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한 획을 나는 안다. 얼굴은 떠오르지 않는데 획은 안다. 내 엄지가 저절로 내 오른팔 바깥쪽을 찾아가 문지르고 있었다.
“어머니가 그랬소. 이걸 새긴 사람은 이 고을에서 제일 좋은 손을 가졌다고.”
그가 소매를 내렸다.
“내일도 밥 주시오. 내일도 처음 뵙겠지만.”
문간에서 그가 한 번 돌아봤다. 아궁이 불이 거의 사위어 그의 얼굴은 반쯤 어둠에 잠겨 있었고, 소매 끝에서는 찹쌀 찐 김 냄새가 아직 났다.
“선생 얼굴을 보니 알겠소. 그 획을 아시는구려. 그럼 됐소. 내일 아침엔 선생이 모르셔도 나는 아니까.”
그가 나간 뒤에 나는 벽의 쪽지 맨 끝에 한 줄을 더 적으려고 붓을 들었다. 먹을 찍고 한참 들고만 있다가 결국 아무것도 적지 않고 붓을 내려놓았다.